Chapter 10. 구르단
올튼숲은 사막을 벗어나 코쿤 왕국으로 들어가는 초입에 위치해 있다. 하나같이 크고 두꺼운 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있어서, 세간에서는 자연 성벽이라 불리기도 한다. 숲 중간 중간에 간이 초소가 있고, 잘 건조 된 요새들도 자리하고 있다. 과거 오돈 왕국의 침공이 있었을 적에는 이 숲에서 대군을 무찌른 적도 있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그 역할이 조금 달라졌다.
생티넘이 번창하고, 왕국간 무역이 늘어나면서 일종의 통행로처럼 역할이 변한 것이다. 특히, 사막에서 들어오는 입구 부근은 나무를 상당 수 잘라내고 긴 관문을 만들기까지 했다.
올튼 숲 요새 도시 - 기안.
“많군……”
운페이가 기안을 앞에 둔 채 중얼거렸다.
숲 전방을 막고 있는 요새도시 위에는 수많은 병사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대충 훑어봐도 족히 500은 넘어 보였다.
“전쟁 때문일까?”
“아무래도 그렇지. 무역 통로처럼 사용하던 장소이지만, 이렇게 병사가 주둔하니 바로 요새가 되는군. 아니, 어쩌면 처음부터 그것을 염두에 두었는지도 모르겠어.”
“곤란하네. 이 정도 분위기라면 검문도 철저 할 거 같은데.”
테일러가 인상을 구겼다.
경비를 하는 이들이 오돈 왕국의 왕세자인 그를 알아보지 못할 리는 없을 터. 일단 왕국까지 들어가 접선을 해야 하는 그의 입장에서는 꽤 곤란한 일이었다.
“남편, 어떻게 할 거야? 우리야 그냥 피해가도 되지 않겠어?”
“그렇지. 요새라고 해 봐야 숲을 전부 뒤덮은 건 아니니까.”
“어윽! 이봐, 야속한 말 하지 말라고. 우리가 어디 남이야? 그냥 가면 안 되지.”
울상 진 테일러를 보며 운페이가 픽 웃었다.
꽤나 태세변환이 빠른 남자다. 사막을 벗어나 이 장소까지 오면서 몇 번이고 봤던 모습. 비올레나 세레인에게 치근대다가도 한 소리 들으면 싹 표정을 바꾸곤 했었다.
“일단은 들어 갈 방법을 모색해 보자고. 어차피 우리도 보급을 해야 하고,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장시간 탐색을 해야 할지도 모르니까.”
“흥. 이 귀찮은 인간을 떨쳐 낼 수 있을 거 같았는데.”
“하하하. 말은 그렇게 해도 나를 좋아하는 걸 잘 알고 있어.”
“남편, 정말로 죽이면 안 되는 거야?”
“일단은 참으라고.”
운페이가 가볍게 웃고는 시선을 돌렸다.
요새 앞쪽으로 긴 행렬이 이어져 있다. 대부분이 생티넘을 통해서 온 무역상이나 여행객. 전쟁중이라 하나, 타국과의 수교가 끊긴 것은 아니니, 제한적인 통행은 이어지고 있었다.
“테일러는 변장을 좀 시키고, 적당한 무리에 섞여 들어가는 게 좋아 보이네.”
“동행해 주는 사람이 있을까?”
“돈이면 다 되는 법이지. 문제는 변장인데. 머리를 염색 할 방법이 있다면 좋을 거 같은데……”
“피로 물들이면 간단 할 거 같은데?”
“아하하. 비올레 양. 농담 같이 안 들려서 무서워.”
비올레가 ‘진담인데? 보여줘?’ 라고 툭 늘어놓자, 테일러가 고개를 획 돌렸다. 가끔 보면 비올레도 그를 놀리는 것을 즐기는 것 같다. 기죽지 않고 계속 달라붙는 그가 신기해서 그런 걸지도.
“일단은 뒤쪽으로 가 보자. 행상 무리 중에 필요한 물건을 가진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휴우. 무사히 통과하면 좋겠는데. 솔직히 사막을 계속 걸었더니, 몸이 피곤해. 세세이도 지쳐 보이고.”
“으응. 괜찮아요.”
세세이가 고개를 휘휘 젓자, 세레인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드루이드라는 종족 특성으로 인간보다 잘 지치지 않기는 하지만, 아직 어린 나이의 그녀가 도보 여행을 이어가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세레인은 군말 없이 따라오는 그녀가 기특했다.
“도시로 들어가면 언니가 맛있는 거 사줄게.”
“정말요? 사탕?”
“있을지 모르겠네. 후후.”
“저기……돈은 제가 내는데요?”
테일러의 말은 아무도 듣지 않았다.
세레인이나 세세이도 꽤나 이 분위기에 물들어 있었다. 몇 달을 함께 걸어온 셈이니 안 그런 것이 이상하기도 했다.
“그럼 뒤로……”
운페이가 선두에 서서 행렬 후미 부분으로 걸음을 옮기려 했다.
헌데, 그 순간 묘한 감각이 그의 신경을 건드렸다. 테일러를 두고 ‘피 봐? 말아?’라며 놀리던 비올레도 갑자가 고개를 들었다.
둘의 시선이 같은 방향으로 향했다.
“남편, 이거……”
“아아. 밀집 된 기세. 전진은 빠르지만, 발굽 소리는 없어.”
“운페이? 무슨 소리야?”
“누가 다가오고 있다는 말이냐?”
운페이가 한쪽 무릎을 꿇고는 바닥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그리고는 진중한 얼굴로 요새 북쪽 방면을 바라봤다. 손끝을 타고 오는 가벼운 진동과 점차 강해지는 기세.
저 멀리서 흐릿한 그림자가 보이기 시작했다.
“저건……”
“군대? 군대잖아!”
테일러가 펄쩍 뛰었다.
육안에 들어 온 무리는 검은 천으로 몸을 감싼 채 속보를 이어가는 군대였다. 선두에 검은 가면을 쓴 남자가 서 있고, 그 뒤로 삼각형으로 병력이 포진해 있었다. 척 봐도 수백은 넘어 보이는 인원이었다.
“빨간 화살에 갈색 화살 통.”
“우리나라의 문양이야. 설마 코쿤 왕국을 침공하기 위해서 왔다고?”
일전에 말했듯이, 오돈 왕국과 코쿤 왕국은 상당히 멀다. 중간에 사막을 관통해야 하는 어려움도 있고. 그래서 테일러나 운페이 역시 오돈 왕국의 다음 목표가 코쿤 왕국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나타난 군대는 분명 오돈 왕국의 문양을 달고 있었다.
“오돈 왕국의 병사!!”
“적이다! 경보를 울려라! 사수 위치로!!”
“화살을 재! 멍하니 있지 마라!”
곧이어, 도시에 있던 병사들도 오돈 왕국군의 모습을 확인했다.
대장급의 지시에 따라서 사수들이 위치를 잡고, 요란한 경보가 울렸다. 활짝 열려있는 문은 단번에 닫혔다. 쿵쿵 거리는 소리와 함께 요새의 벽 인근으로 대형 무기가 이동되고, 분위기가 대번에 전환되었다.
“흐응. 전쟁이라 이건가? 좋군.”
“무슨 소리야! 많은 사람들이 죽어간다고!”
“흥. 산 것들은 당연히 죽는 게 법칙이야. 생을 다해 부딪쳐, 아름답게 산화한다면 그것으로 멋진 일 아닌가?”
“너 정말……”
“둘 다 그만. 일단은 조금 물러나자. 상황을 본 뒤 움직여도 늦지 않아.”
때 아닌 논쟁을 종식시킨 뒤 운페이가 일행을 이끌었다.
다행히 입구에서 먼 위치에 있어서 군대와 멀어지는 건 어렵지 않았다. 갑작스러운 사태에 놀라 도망치는 사람들을 따라 거리를 벌렸다.
“쏴라!! 쏟아 부어!!”
“건방진 오돈의 머저리들에게 우리의 힘을 보여주자!”
“와아아아!!”
코쿤 왕국 군이 기세를 올리며 공격을 시작했다.
요새 상부에 달려있던 발리스타에서 거대한 쇠뇌가 발사됐다. 바람이 찢어지고 달려오던 오돈 왕국 군의 머리에 적중했다. 요새에 달린 발리스타라면 어지간한 대형 몬스터도 일격에 쓰러뜨릴 위력이 있다. 비명과 죽음. 누구도 그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순간.
번쩍-번쩍-번쩍-!!
오돈 왕국 군에서 터져 나오는 다발의 광망. 순식간에 일대를 뒤덮었다. 이는 머리 위 공간을 차단하고, 떨어지는 쇠뇌를 방어했다. 거대 몬스터도 일격에 쓰러뜨리는 쇠뇌가 단번에 부러져서는 튕겨나갔다.
“마병……”
“아. 아아! 그들이다! 그들이라고!”
“그들?”
“내가 말 했잖아. 마병으로 무장한 군대. 그들이라고!”
운페이가 그 말에 오돈군을 다시 한 번 살폈다.
검은 장포 사이로, 검이나 방패. 도끼 등이 보였다. 그리고 그 위로 흐르는 희미한 기운을 감지 할 수 있었다. 설풍에서 느꼈던 것과 유사했다.
“정말이군. 하나같이 마병이야. 저 많은 인간이 모두 마병을 들고 있다?”
“마병은 그렇게 흔한 게 아니잖아?”
“아니지. 성국에서도 마병을 가진 사람은 채 스물이 안 될 거야.”
마병에 사용되는 가장 중요 자원은 바로 코어 메탈이다. 다양한 방식으로 힘을 전달 할 수 있는 이 물질이 없다면, 마병은 상당히 제한적인 무기가 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 코어메탈이라는 것은 굉장히 고가의 물건. 수백의 군대를 무장시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마병을 만들 장인에 대한 문제는 제쳐놓고도 말이다.
“돌을 날려라! 접근하지 못하게 해!!”
“계속 쏴! 지속적으로 막을 수는 없다!!”
코쿤 왕국 군의 반응은 상당히 좋은 편이었다.
쇠뇌가 막혀 당황스러울 텐데, 내색을 안 하고 계속 공격을 독려했다. 마법이나 마병으로 공격을 상쇄한다 해도 그것은 한두 번. 지속적으로 공격이 이어지면 결국은 뚫리게 될 거라 예상했다.
보통의 전쟁이라면 이 대응이 적절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쉽게, 오돈 왕국 군의 무장은 상식적인 수준을 벗어나 있었다.
화아악-!!!
“……”
“뭐야 이게……”
수십 번 중첩되어 발동하는 거대한 막. 쏟아지는 화살, 돌 따위를 완벽하게 차단했다. 하나 둘이면 독려를 하겠지만 하늘을 뒤덮어 버릴 정도로 숫자가 너무 많았다. 능숙하게 대처하던 코쿤 왕국 병사들도 순간 그 모습에 넋을 놓고 말았다.
콰콰쾅!!!
당황스러운 모습은 그것으로 멈추지 않았다.
요새 성문 근처로 도달한 오돈 왕국의 병사들이 각자의 무기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충차나, 파쇄병기가 없는 이상 단단한 문을 뚫기란 힘든 법. 하지만 그들의 손에 들린 마병은 이를 극복 할 수 있게 해 주었다.
불이 타고, 파란 전격이 휘몰아쳤다.
티르 나무를 몇 겹으로 덧대고, 특수 유액으로 강화 한 성문이 삽시간에 누더기가 되어 버렸다.
“마, 막아야……”
“늦었다. 머저리들.”
선두에 서 있던 남성.
가면을 손으로 고쳐 쓰더니, 허리춤에 찬 검을 쾌속하게 뽑았다. 위와 아래. 순식간에 성문이 갈라졌다. 성인 남성 팔뚝 길이만큼의 두께를 가진 성문이지만 일격을 견디지 못했다.
“가라. 가서 죽이고 약탈해라. 우리의 힘을 보여라.”
검은 물결이 몰아쳤다.
부서진 성문 사이로 파고 든 오돈 왕국의 병사들은 방어를 위해 남아있던 코쿤 왕국 군을 유린했다. 검을 맞대면 불꽃이 터지고, 날아오는 화살에서는 차딘 찬 냉기가 서려 있었다. 제아무리 실력이 뛰어나도 일반 병사로는 이를 극복 할 수단이 없었다.
“꺄악! 사, 살려 주세요!”
“……”
요새 안으로 진군한 오돈 군은 바로 주민들과 마주하게 됐다. 여행객이나 상인의 왕래가 많은 지역이지만, 상주하는 이들은 대부분 코쿤 왕국 사람이었다. 갑작스러운 전쟁에 각자의 집으로 도망치기는 했으나, 거리에는 그렇지 못한 사람도 상당히 많았다.
서걱.
“커억……”
“자, 잠깐만. 우리는 민간인이라고!”
“……”
“기, 기다……크아악!”
서걱. 서걱.
도시 안으로 들어선 오돈 왕국 군은 군인과 민간인을 가리지 않고 학살을 시작했다. 보통, 전쟁이라 하여도 민간인은 잘 죽이지 않는다. 약탈을 위한 공격이 아닌 경우에야 지배를 위해서는 최소한의 인정을 베풀어야 하는 거니까. 하지만 지금은 전혀 아니었다. 오돈 왕국 군은 자비가 없었다. 여자, 노인, 어린아이. 누가 하나 남기지 않고 학살을 자행했다.
“어, 어떻게 저런!!”
“세레인!”
세레인인 벌떡 일어나서는 한쪽으로 달려갔다.
군인과 군인. 나라와 나라의 전쟁. 이해 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대항 할 힘도 없는 민간인에게 폭력을 자행하다니. 그것은 참을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멈춰!!!”
그녀의 몸에서 폭발적으로 빛이 터져 나왔다.
하늘위로 솟구쳐 구름을 밀쳐냈다. 극도로 뭉친 신성력이 물질에 가까운 상태로 구현 된 것이다. 따라가던 운페이와 비올레는 힘에 밀려서 나동그라졌다.
“어……?”
“살았다?”
그리고 이는 코쿤 왕국 사람들의 몸 주변을 감싸는 신성력의 벽을 만들어 주었다. 응축 된 신성력의 벽은 오돈 왕국군의 마병을 막아냈다. 불꽃이나 번개도 이 벽을 침범하지는 못했다. 게다가 부상을 입어 쓰러지고, 큰 상처에 고통 받던 이들이 단번에 회복되었다. 거의 죽음에서 멱살 잡고 끌어 올리는 수준.
이 압도적인 기적에 한 순간 정적이 내렸다.
- 작가의말
세레인 등장! 방어력 짱짱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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