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4. 부서지는 흐름
세세이를 비롯한 코론을 따라온 사람들은 모두 생츄어리에 남겼다. 커다란 싸움이 예견되는 일이다. 이미 많은 사람이 죽었는데, 더 이상의 희생을 감수 할 필요는 없다. 죽은 이들을 위해 묵념하고 쓴 마음을 다스리며 떠났다.
붉은 숲에서 성국까지는 운페이와 비올레의 걸음으로 3일 정도면 가능하다. 혹한의 기후도, 어슬렁거리는 몬스터도 둘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조금은 무겁게 걷기를 3일. 금세 성국의 성벽을 눈앞에 둘 수 있었다.
“얼마만에 돌아오는 거지?”
“반년? 넘었나?”
“그 정도인가. 몇 년은 더 지난 거 같은데.”
성국에 처음 도착했을 때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지금과는 너무나 많은 것이 달라져 있다. 어쩌면 공허는 이런 사건 속으로 집어 던지기 위해 본능을 갈구 했는지도 모르겠다.
“여기까지 오니까 느껴지네.”
“마굴?”
“응. 권속들도 전부 잠들어 있어. 아무래도 내가 없으면 성력에 버티기 힘드니까.”
성국으로 들어가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가 있을 수 있다.
여기 왔다! 라면서 정문으로 쳐들어가는 것. 다만 이는 대외적인 신분이 반역자인 이상 어렵다. 아마도 성국 전체에게 공격을 받을 것이다.
두 번째는 몰래 잠입하는 것.
사도 경계를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성국의 경비로는 어차피 둘을 감지 할 수 없다. 내무로 잠입하여, 마굴에 키워 둔 몬스터들로 한 바탕 후려치는 것도 나쁜 선택지는 아닐 듯 보였다.
“교황청만 치면 되잖아.”
“하지만 상황이 혼란스러워 지면 적과 아군을 구분하기 어려워져.”
“신경 쓸지 않고 밀면 안 돼?”
처음, 성국으로 돌아왔을 때의 운페이라면 수락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식의 선택을 하기가 힘들다. 세상 아래 가장 소중한 것이 비올레임은 변하지 않았지만, 보다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 차게 식은 마음과는 다른 이야기다. 옳은 것에 대해서 생각하게 됐다고 해야 할까. 적어도 무분별한 혼돈으로 몰고 가는 것 좋아 보이지 않았다.
“적어도 현재의 상황을 반전시키고 난 뒤 돌입을 하는 것이 중요해.”
“반전? 어차피 교황이 저쪽의 손으로 넘어갔잖아. 방법이 있을까?”
“그게 중요하지. 교황이 예초부터 저들 편이었다면 긴 시간 동안 상황을 은폐 할 이유가 없었어. 교황을 손에 넣기 위해서 긴 시간이 필요했다는 말이지. 즉, 이를 반대로 생각하면 우리가 교황를 탈취하면 상황을 반전시킬 수도 있다는 거야.”
“구출?”
난전으로 들어가면 얼마나 많은 사람이 뒤엉켜 싸울지 가늠하기 어렵다.
게다가 그 가운데서 적아를 가리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성국의 주도권을 탈환해서, 처리해야 할 영역을 분리해 내는 것이 필요했다.
“하지만 어떻게? 교황이라면 교황청에 있을 텐데. 어차피 그 위치면 사도가 대기하는 곳 아니야? 전면전과 다를 바가 없을 텐데.”
“누군가 안쪽에서 상황을 반전시켜 준다면 가능 할 지 모르겠는데……”
“누가 있겠어. 그 멍청한 제 1 성기사도 남편을 적으로 여기고 공격했잖아.”
마땅히 소통 할 만 한 사람이 없다.
어중간한 사람으로는 안 된다. 적어도 교황청에 관여하거나, 그에 근접한 인물과 대담 할 수 있는 자. 급이 되는 인물과 내통을 해야 무언가 계획이라도 세월 볼 수 있다.
“마누라. 권속은 어때? 당장 움직일 수 있나?”
“움직이는 건 가능하지만 걸리면 위험 할 거 같은데.”
“일단 상황만 먼저 확인하자고. 최면을 걸어서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지 파악 좀 해 줘.”
“그런 일이라면 젤락이 제격이지. 기다려 봐.”
비올레의 망토 끝자락이 바닥으로 무너졌다.
어둠을 통한 이동. 성국 주변으로 퍼져있는 성법도 이를 제지하지는 못했다. 예초에 지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혼돈을 가두기 위한 용도였으니까.
“음. 음음. 그렇게 해.”
잠시 입을 오물거리던 비올레가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떴다.
권속과의 대화는 거리 안에만 있다면 제약 없이 가능하다. 힘을 나눠 주어 성법 안에서 움직이게 한 뒤 명령을 하달했다.
“됐어?”
“응. 걸리지 않는 선에서 정보를 물어오라고 했어.”
“좋아, 그럼 일단 정보를 기다려 보자고. 상세 계획은 그 뒤에 짜고.”
“오늘도 밖에서 자는 거야?”
“가슴 빌려줄게.”
“흐응. 뭐, 그렇다면 좋아.”
떨어지는 석양을 배경으로 두 사람이 누웠다.
설원 위로 뜨거운 바람이 불었다.
***
“뭐? 반란?”
“응. 물어온 정보에 의하면 그렇데. 그것도 아주 따끈따끈한거야. 바로 어제 일어난 일이래.”
“정확하게 말 해 봐.”
젤락을 통해서 물어온 정보는 운페이의 생각을 넘어서고 있었다.
감옥에 갇혀있던 슈레인이 풀려나며 현직 교황에 반발하는 성기사를 규합. 항쟁에 들어갔다. 병력은 현재 교황청 중앙에 응집하여 있으며 교황 측은 이를 제압하기 위해서 병력을 소집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하. 교황청에? 어떻게 거기에 모여 있는 거지?”
“나야 알 수 없지. 하여튼 꽤 거하게 싸웠나봐. 교황청 사방 건물 중 한 쪽이 완파되어서 잔해밖에는 안 남았다고 해.”
“병력차는?”
“교황 쪽이 숫자는 월등한데, 무슨 이유인지 안으로 진입을 못 하고 있는 거 같아.”
교황청 안에는 혼돈이 봉인되어 있다.
교황을 사도가 세뇌시킨 것이라면 분명 가까이에 있을 터. 이를 내주었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하기 어렵다.
대체 무슨 수를 써서 이 상황을 만들었단 말인가.
“어떻게 할까? 이 상황이면 우리도 들어가기 편할 거 같은데.”
“음.”
운페이가 생각했다.
상황이 생각보다 복잡하다. 교황을 잡아서 적과 아군을 나누려 했던 것이 어떤 이유로 어그러졌다. 슈레인을 필두로 한 반란무리와 교황쪽이 대치하고 있는 상황. 사실 상 둘 중 사도를 따르는 림의 무리가 어떤 비중으로 가담해 있는지 알 도리가 없다.
“별 수 없나.”
운페이가 엉덩이를 털고 일어났다.
눈이 한참이나 쌓여 있어서, 후두둑 떨어졌다. 비올레가 깡총 뛰어 일어나서는 머리와 어깨를 털어 주었다. 손길이 꽤 부드럽다. 역시 전날에 힘 쓴 것이 정답이었던 거 같다.
“우리도 진입한다. 보다 정확하게 상황을 판단 한 다음에 선택을 하자.”
“사도의 반대쪽을 돕는 거야?”
“일단은 그렇지만 반란군대, 진압군의 싸움으로 돼 버리면 피해가 너무 심해. 여차하면 극단적인 선택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어.”
“극단적인 선택?”
“교황을 베어버린다.”
성국에서 교황의 직위는 절대적인 것.
하지만 제 1 성기사인 슈레인의 권한 역시 만만치 않다. 악역을 자처하여 교황을 벤다면, 성국은 슈레인을 중심으로 뭉치게 될 터. 이에 정면으로 반대하는 무리는 림 밖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과격하지만 솎아 낼 방법으로는 훌륭하다.
‘물론, 이렇게 안 되는 것이 좋겠지만.’
옷을 여미고 허리춤에 찬 검을 점검했다.
선택은 결국 안의 상황에 달린 것. 성벽 너머를 쏘아보며 걸음을 내딛었다.
***
교황청 심처.
벽면이 군데군데 부서지고, 내부를 지탱하는 기둥에 균열이 가 있다. 불탄 흔적과 무언가 커다란 힘이 훑고 간 듯 한 파괴의 잔흔이 널려있다.
사방에는 다친 병사와 기사들이 끙끙 거리며 몸을 기대고 있고, 그렇지 않은 이들은 연신 오고가며 부상자를 치료하기 위해서 애를 썼다. 이곳은 전시의 신전인가? 교황청도 하나의 신전이니 의미상은 맞다. 다만, 보통의 경우는 이런 일에 개방 되는 장소가 아닐 뿐.
“일단은 버틴 건가.”
지친 표정의 슈레인이 검을 바닥에 기댄 채 힘겨운 숨을 내쉬었다.
전신이 상처투성이. 얼굴에 기다란 상처가 나서 한쪽 눈이 완전히 못쓰게 되어 버렸다. 대충 감은 헝겊 사이로 핏물이 베어 나와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죄송합니다. 제 불찰이……”
그 앞에 젠킨이 무거운 얼굴로 서 있다.
멀쩡한 몸은 아니었지만, 심각한 상처는 없었다.
“자네 잘못이 아니네. 설마하니 그런 괴물이 있으리라 누가 생각이나 했겠는가.”
“하지만……”
“됐네. 그나마 자네가 이곳을 인질로 잡는 덕분에 시간을 벌 수 있었지. 그마저도 아니었다면 아마 그 자리에서 모두 죽었을 거야.”
“맞는 말이다. 너무 고개 숙이고 있지 말게.”
“한 경.”
흑발의 한이 다가왔다.
통곡의 벽 반란사건 이후 감옥에 갇혀 있다가 슈레인이 교황 탈환 작전을 펼치는 통에 빠져나왔다. 그 역시 가슴 한쪽이 쩍 벌어진 상처를 입고 있었다.
“유그니아는?”
슈레인의 질문에 한이 고개를 저었다.
제 7 성기사 단장이자 열 둘의 성기사 중 유일하게 여성인 인물의 이름이다. 한과 함께 슈레인에게 몸을 의탁했다가 사도, 사르힌이게 당해서 큰 상처를 입고 말았다. 다급히 상처를 봉합하고 교황청 안으로 후송을 하기는 했으나 출혈이 너무 심했다.
한이 눈을 감기고 돌아오는 길이다.
“남은 숫자는 어떤가?”
“제대로 검을 쥘 수 있는 인물은 오십 정도. 그마저도 대부분 사기가 꺾여 있습니다.”
“어쩔 수 없나. 그런 걸 보았으니까.”
사르힌의 힘은 대단했다.
양 어깨를 뚫고 나온 검붉은 날개와 입에서 쏟아지는 불길. 성력으로 만든 벽조차 단번에 파훼되어 몸을 녹였다. 수백의 사람이 한 번에 녹아 없어졌으니 그것에 공포를 느끼지 않는다면 정상이 아닐 것이다.
“사도. 사도라. 그것들은 정말로 증오스럽게 강하더군.”
“그 정도의 힘이 있었다면 진즉에 모습을 드러냈어도 될 거 같은데. 지금까지 참아 온 것이 이상할 정도였습니다.”
“아마도 조건이 있었던 걸로 생각됩니다.”
젠킨이 무서운 얼굴을 들어 이야기에 끼어들었다.
“조건?”
“그들이 발족을 한 것은 결국 교황 성하께서 마음을 돌리신 이후. 즉, 교황 성하를 이용하여 무언가 제약을 풀어낸 시점일 겁니다. 그것은 아마도 이 벽과 관련이 되어 있을 터.”
젠킨이 뒤쪽에 솟아난 벽을 손으로 가리켰다.
사실상 사르힌과의 싸움에서 일행은 모두 죽었어야 한다. 그것을 뒤엎은 것은 이 석벽의 존재 때문이었다. 불식간에 올라온 석벽을 보며 사르힌이 주춤거렸다. 힘의 방출 역시 다급히 줄였고. 즉, 사도인 그가 지켜야 하는 물건이라는 뜻. 젠킨이 슈레인에게 벽을 검으로 치라고 했었다.
“석벽에서 빛이 터져 나왔고, 사르힌을 밖으로 밀어냈습니다. 그 과정에서 교황 성하께서 딸려가 버린 건 너무나 아쉽지만……일단은 시간을 벌 수 있었죠.”
“그들의 힘과 관련이 있을 거라는 말인가?”
“네. 교황청 심처에 이런 물건이 숨겨져 있다는 건 처음 듣습니다. 슈레인 경은 아는 바가 있습니까?”
“흐음. 보는 건 처음이지만 비슷한 내용이라면 들은 기억이 있네. 교황청 내부에 성국의 비보가 숨겨져 있다고. 아마 성기사들은 비슷하게 기억들 하고 있을 거네.”
“아, 저도 기억이 납니다. 하지만 그냥 동화와 같은 거라 생각을 했지, 사실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사실, 운페이가 찾고자 했던 성국의 비보 역시 이 이야기에서 나온다. 어릴 적 그의 아버지가 들려주었던 성국의 이야기. 라울은 아이에게 해 주는 동화 정도로 생각했었지만, 십 수 년이 흐른 뒤 운페이의 기억에는 그것이 진실로 뚜렷이 박혀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그 비보가 무슨 도움이 되겠나?”
“……어쩌면 가장 간단한 걸로 해답이 나오지 않을까요?”
젠킨이 턱을 쓰다듬으며 말을 던졌다.
그 자신도 확신이 있는 건 아니었다. 다만, 상황이 어려운 만큼 지푸라기라도 잡자는 생각이 컸다.
“간단한 방법?”
“비보를 치니 사도가 물러갔습니다. 이를 부순다면 그들에게 타격을 줄 수 있지 않겠습니까?”
“부순다? 이, 벽을?”
슈레인이 고개를 바짝 들어 올렸다.
- 작가의말
젠킨 : 후후 회심의 수다.
운페이 : 하지마 XX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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