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4. 부서지는 흐름
마음이 뜨겁다.
연모의 정은 타오르는 불꽃과 같아, 이루지 못함은 제 살을 태우는 흑염이 되고 만다. 달콤한 말들은 귀를 후비는 송곳이 되며, 따뜻하게 안던 체온은 매몰찬 거리감이 된다.
하나의 선이다.
넘고 안 넘고의 차이. 사랑이라 인정하여 구애를 함은 지난 시간의 관계 역시 부수는 것. 두렵디 두려운 일이다. 한 걸음에 용기를 구하지만, 결과가 참혹함에 눈앞이 깜깜하고 가슴이 답답해진다.
하지만 언제까지 참을 수 있을까.
마음은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정직한 것이다. 가린다고 가려지지 않으며, 무시하려 해도 쉬이 되지 않는다. 올곧게 타오르는 마음. 욕심이 될 수도, 집착이 될 수도, 불변의 애정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가 답을 줄 거란다. 조금 더 기다리렴.”
“누구에게 말을 하는 거냐?”
가슴을 쓸어내리는 세레인을 보며 타이렌이 사납게 물었다.
사도와 그녀의 대치는 길게 이어지고 있었다. 그녀가 열쇠이니, 쓰러뜨려 취함이 옳지만 쉽게 그리 할 수가 없었다. 생각보다 그녀를 차지한 신의 힘은 강력했다. 사도 중 하나도 천사에 의해서 쓰러졌으니 그들로서도 난감한 상황이었다.
“사랑에 빠진 소녀에게.”
“농을 해서 시간을 끌려 함인가?”
“시간은 내 편이 아닐 텐데? 이미 천사 하나가 죽었다. 혼돈은 퍼지고 성국 내부는 혼탁한 기운으로 물들고 있다. 봉인은 약해 질 것이고, 내가 품은 열쇠만 손에 넣는다면 쉽게 그를 불러 낼 수 있을 텐데?”
“……”
그렇기에 더 수상하다.
아르미아는 빛의 신은 아니나, 봉인의 주축을 맡은 신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천사의 편을 들어서 자신. 즉, 사도와 맞서는 것이 옳다. 하지만 그녀는 느긋하게 싸움을 지켜 볼 뿐 끼어들지 않고 있다. 무언가 따로 노리는 것이 있음이 분명하다. 다만, 그것이 뭔지를 알아내지 못했을 뿐.
“타이렌. 너는 누군가를 사랑 한 적이 있나?”
“헛소리 하는 시간은 아닐 텐데?”
“진지한 질문이야. 이 세계의 모든 위대한 것들은 사랑에 기반하고 있어. 신도, 인간도, 저편으로 잊혀지는 드래곤 조차도.”
사랑에는 여러 가지 형태가 있다.
힘을 탐하는 것도, 홀로 남기 두려워 바동거리는 것도, 짝을 찾아 구애의 몸부림을 치는 것도. 모두 사랑의 종류이다. 세상이 태어나 번성하는 것에는 모두 사랑이 기반하고 있다.
“흥! 어리석은 질문이다. 내가 그따위 하찮은 감정에 휘말릴 거라고 생각하는 거냐?”
“그래, 그렇지. 너도 그러하고 장벽 너머에 갇힌 멍청이들도 그렇지. 열린 가능성에 매몰된 우매한 인간들.”
“나를 모욕하는 것이냐!?”
“진실을 말 하고 있을 뿐이야. 만약 네가 한 가지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다면 선택은 다르게 흘러갔을 수도 있으니까.”
“선택? 무슨 소리지?”
세레인이 종탑 너머를 바라봤다.
비올레와 천사가 허공에서 격돌을 하고 있다. 빛과 어둠이 휘몰아쳐 세상을 쪼갤 듯 충동을 했다. 천지가 개벽을 하는 것 같았다.
“너는 네가 찾고자 하는 신의 모습도차 알지 못해. 혼돈은 어떤 존재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어? 무슨 옷을 입고, 어떤 표정을 지으며,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는 거지? 하나라도 아는 것이 있나?”
“인간을 신이 될 수 있게 만들어준 분이다. 너희 같은 너절한 신보다 위대하고 강력하신 분이지. 경배하는 마음만 있으면 충분하다.”
“그러니까, 네가 겁쟁이라는 거다, 타이렌. 너는 예초에 그를 정면으로 볼 각오조차 되어 있지 않았어. 사실은 두려운 거지. 왜냐고? 혼돈의 눈에는 이 세상 누구조차 들어오지 않으니까.”
빠드득.
타이렌의 이가 거칠게 갈렸다.
노구가 푸들푸들 떨렸다. 꽉 쥔 손에는 핏줄이 도드라져 당장이라도 터질 듯 위태롭게 보였다.
“혼돈은 말 그대로 혼돈. 단지 그것뿐이다. 너희가 말 하는 신위를 지닌 존재가 아니다. 세상이 만들어진 뒤 태어난 혼탁함. 텅 빈 껍질로 몸을 만들고, 뒤섞인 힘의 잔재로 속을 채웠지. 그것이 커지고 커져서 태어난 것이 혼돈이다. 가능성? 물론, 그의 힘 때문에 열린 것이지. 하지만 그렇게 열린 세계가 정말로 모든 면에서 긍정적이었다고 보는가?”
“집어치워라, 아르미아! 너희가 위대한 혼돈을 봉인한 것은 두려움 때문이었지 않나!? 왕위에서 내려올 것이 두려워 힘을 모은 주제에 이제 와서 다른 말로 우리를 현혹하려 함인가!?”
“오, 가여운 타이렌. 그렇게나마 스스로의 부족함을 채워보고 싶은 거구나. 이해한다. 이해해.”
쿠르르릉.
둘 사이의 공간이 거칠게 울렸다.
오가는 감정 따라 힘이 출렁였다. 다른 사도들이 힘을 보태서 타이렌을 보조했다. 공간이 부서지고 이어지기를 반복했다.
“그에게 신위를 부여 한 것은 결국 너희였지. 이야기를 만들고 신화를 창조했어. 왜? 이유는 간단해. 신을 무너뜨리고 너희 스스로가 신이 되기 위함이었지.”
“……거짓된 신을 물리고 진정한 신을 세우려 했다.”
“신위를 지니지 못한 힘 덩어리를 말인가? 아직 자격도 지니지 못한 인간에게 가능성을 열어, 온갖 파괴와 무질서를 불러온 그 혼돈이? 엘프가, 드워프가, 오크가! 수많은 종족들이 대체 왜 없어졌지? 너희 인간의 무질서한 파괴 때문 아니었나?”
“집어치워라, 아르미아. 세상 위 군림의 주인은 인간이다. 나에게 생명의 아름다움이라도 설교 할 생각인가?”
타이렌이 싸늘하게 웃었다.
“하긴. 인간이라는 종족은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지. 성국이라는 곳 역시, 결국에는 인간 본위의 장소로 변질되고 말았으니까. 길지도 않은 시간에. 오만하고, 자기밖에 모르는 종족. 인간은 이 세계 전체로 본다면 결국 해충밖에는 되지 않아.”
“신이 그리 말해도 되는 건가?”
“사실이니까. 하지만 아이러니 하게도 이 모든 혼탁함을 씻어 낼 수 있는 것도 결국은 인간밖에 없더군. 더러움 속에 간직하는 사랑이라니. 세상의 흐름이라는 것은 정말로 알기 힘든 면이 있지.”
아르미아가 자신의 손을 들어 보았다.
깊은 곳에서 잠자고 세레인의 마음이 느껴졌다. 너무나 뜨거워 속이 타버릴 것 같았다. 이 상황까지 참았다는 것이 안쓰럽기까지 하다.
“그러니 너희는 잠시 기다리도록 해라.”
“……!”
퉁. 작은 흔들림과 동시에 기둥 뒤에 숨어있던 젠킨과 왁슨이 밀려났다. 교황의 세레인의 암살 지시 이후, 짝을 재편성해서 움직인 것이다. 세레인을 발견하고 몸을 숨겼던 것은 좋지만 상대가 나빴다.
“나를 보고 망설이는 모습을 보자니 구하기 위해서 온 것은 아니구나. 그렇다면 봉인과 열쇠에 대해서 알고 있는 자. 교황이 정신을 차렸다는 것이구나.”
“당신은……누구십니까?”
“너는 네가 모시는 신도 알아보지 못하는 게냐?”
“당신의 빛의 신?”
“후후. 그리 알려진 이름은 어울리지 않는단다. 나는 아르미아. 본디, 대지모신이라 불리던 자란다.”
스르륵. 두 사람이 보이지 않는 힘에 이끌려 일어났다.
“너희같이 열심히 움직여준 아이들에게는 참 미안한 감정이 많단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지. 지금의 혼란스러움은 결국 새로운 시작을 위한 거름이 될 터이니.”
“무슨 소리입니까? 당신께서 신이라면 왜 지금의 상황을 보고만 있는 겁니까?”
“구하고자 하는 바가 너희와는 다르단다. 열쇠를 제거하여, 다음세대로의 전승을 노리는 것은 나쁜 방법이 아니나, 지금 상황에서는 어울리지 않는구나. 너희는 그곳에서 가만히 지켜보려무나.”
“잠깐, 그게 대체……!”
젠킨이 무어라 외치려는 순간 그의 몸 주변으로 희미한 반구가 생겨났다.
나갈 수 없는 벽. 손으로 두드려 보지만 통하지 않았다.
“젠장 여기까지 와서!”
쾅! 젠킨이 힘껏 벽을 때렸다.
무력감이 밀려왔다. 아르미아와 타이렌. 모든 일의 중심에 도착하고도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져 버렸다.
“한 번. 한 번 정도는 벨 수 있을 거 같아요.”
“이 벽을? 신이 만든 벽을 벨 수 있다는 말이냐?
“굉장한 힘이 느껴지지만……한 번 정도는 가능해요. 하지만 그 뒤로는 절대 무리. 어떻게 하실 거죠?”
왁슨의 단단한 말에 젠킨이 일그러진 얼굴을 가다듬었다.
시선을 떼고 타이렌과 다시 대화에 들어간 아르미아가 보였다. 그녀가 신이라 하지만, 세레인의 몸이 열쇠라는 건 분명했다. 스스로 인정하기도 하였고.
“준비 해 둬. 어쩌면 그 한 번에 우리의 운명이 달렸을 수도 있으니.”
열쇠인 세레인을 베어내는 것이 최선인가.
풀리지 않은 의문을 가슴에 묻은 채, 젠킨이 무겁게 답을 했다.
***
비올레가 힘을 쏟아 부으면 천사가 빛으로 이를 막아냈다.
서로가 사용하는 힘은 권능. 혹은 그의 준하는 것들이었다. 거대한 에너지가 맞닿아 터지고, 소멸하고, 복합적인 효과를 토해냈다. 공간이 일그러져 여러 갈래로 분할되고, 복합하게 얽힌 에너지가 있을 수 없는 변화를 만들어냈다.
한쪽에서는 눈이 내리고 다른 한쪽에는 대기가 불타올랐다.
인세지옥. 그나마 둘이 싸우는 곳이 지상이 아닌 공중이었기 때문에 피해가 적었다. 만약, 지상에서 그대로 격돌했다면 성국 자체가 남아있지 않았을 것이다.
“빌어먹을……죽은 천사의 힘도 저쪽으로 넘어갔군.”
잘린 팔이 쑤욱 솟아났다.
넝마가 됐던 옷도 다시 멀끔해져서는 바람에 펄럭였다. 그녀의 힘은 어둠 그 자체. 수천년의 시간동안 농축 된 어둠은 끝도 없는 재생력을 선사하였다. 하지만 상대인 천사 역시 마찬가지. 혼돈을 봉인하기 위해서 응축 된 힘은 당시 남아있던 신들의 거의 대부분. 측량 할 수 조차 없는 힘이었다.
‘결국 이건 내가 그때의 조건을 만족해야 멈춘다 이거군.’
입안에 썼다.
그 때. 아주 오래전. 마왕이 되어 북쪽으로 유폐되어 신과 대립하였을 당시, 그것이 길이라 여기고 했던 한 가지 약속에 대한 이야기다.
[어둠이 되어 주시지 않겠어요?]
아직도 그 날의 물음이 떠오른다.
세계를 받치는 두 힘의 하나가 되어 달라는 신의 부탁. 그리고 그것이 유일하게 유폐를 벗어나 자유를 얻을 수 있는 조건이었다. 너무나 달콤하지 않은가? 당시는 그것이 현명한 판단이라 여겼다.
‘하지만……’
재생을 통해서 단절 된 자아는 어둠을 키우기 위한 방편에 불과했다. 가장 순수한 어둠으로 힘을 농축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감당 해 줄 자아가 반드시 필요했으니까. 마치 철을 정련하듯 두드리고, 두드린 것이다. 자아가 단절된다 하여도, 당시 경험했던 어둠에 대한 지배력은 유지되는 거니까.
‘남편에 대한 마음이 있는 한 그것은 불가능해.’
그녀는 눈앞에 있는 천사가 당시 자신을 찾아왔던 신의 대행자임을 느끼고 있었다. 마치 시험을 하는 것과 같다. 정녕, 순수한 어둠이 되었는가? 약속을 지킬 자세가 되었는가? 터지는 빛은 그 물음이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조각난 마음이 모여들어서 하나의 어둠을 만들고 있다.
이는 끝없이 몰아치는 격랑과 같다. 손을 놓아 버리면 그대로 휩쓸려 버리는. 아마도 그리 한다면, 당시 약속했던 완전한 어둠은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한다면 운페이의 대한 마음 역시 놓게 된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다만, 문제는 이 지지부진한 싸움.
과연 그가 버틸 수 있을까.
이 싸움의 결말에 그가 휘말리지는 않을까.
선택의 문제에 선 그녀는 표류하는 부표처럼 정처 없이 흔들렸다.
사랑하는 이를 잊어야만 끝낼 수 있는 문제임을 직감하나, 그것을 선택 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사아아-!
눈앞으로 하얀 빛이 또다시 쏟아진다.
그녀가 어둠을 둘러쌓으며 속으로 물었다.
‘남편, 어떻게 해야 해?’
하지만 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 작가의말
젠킨아 하지 말라고!
* 아래쪽에 새글을 연재하고 있사옵니다. 놀러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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