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0. 가는 날이 장날
비올레는 눈앞에 떠오른 검은 창을 보며 한 가지를 떠올렸다.
공허와 싸우기 위해서 깨어나기도 전. 아주 오래 된 기억이다. 흔히 인간들이 신화시대라 부르는 시절. 문서로 남아 있지 않은 오래 된 과거의 잔향이었다.
‘고대의 마법이 어째서……?’
인간들의 시간이 시작되면서 모두 사라진 마법이다.
비올레 조차도 얼마 알지 못하는 수법. 지금 이런 장소에서 다시 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었다.
“운페이-!”
찢어지는 세레인의 비명에 그녀가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정신을 차렸다. 쑤욱. 송곳니가 길게 자라났다. 바닥 그림자가 길게 늘어나고, 그녀의 신형이 오비돈의 앞으로 이동되었다.
“뱀파이어!?”
“알면 죽어라.”
오비돈은 그녀의 정체를 대번에 알아봤다.
번쩍. 비올레의 손끝에서 거대한 불꽃이 터져 나왔다. 그녀가 애용하는 불꽃 마법이다. 시동어 따위는 없었다. 손이 닿는 위치로부터 뜨거운 열기가 쏟아졌다.
“하하하! 페어리에 용의 불꽃. 거기다 뱀파이어라고? 하늘이 나를 돕는구나!”
오비돈의 몸 주변으로 검은 장막이 둘러졌다.
얼핏 그림자와도 비슷했지만, 성격은 전혀 달랐다. 뜨겁게 타오르던 불꽃이 장막에 닿는 것과 동시에 증발했다.
“전 대, 공격!!”
동시에 위기에서 벗어 난 라이오넬이 명령을 내렸다.
엉거주춤 서 있던 여단이 일행에게 달려들었다. 운페이는 구석에 박혀있고, 비올레는 오비돈과 싸우는 상황. 세세이를 막아 줄 사람이 없었다.
“다, 다가오지 마세요!”
아니, 한 사람 있었다.
세레인이 다급히 성법을 사용했다. 공격력은 없고, 물리, 마법적 피해를 막아주는 벽이다. 새하얀 벽이 여단과 그녀 사이를 가로막았다.
“부숴버려!!”
“성법은 물리력에 약하다!”
경험이 많은 전투 집단인 만큼, 여단은 바로 성법의 약점을 파악했다. 성법은 저주나 사악한 힘에는 강한 위력을 발휘하지만 단순 물리력에는 취약점을 보였다. 여단 병사들이 검을 뽑아 들고는 벽을 마구 두드렸다. 벽이 위태롭게 흔들리고, 안에 있던 세세이는 세레인의 팔을 움켜 쥐었다.
“뭐야……”
“멀쩡하다고?”
하지만 그들이 모르는 게 있다.
흙으로 담을 쌓아도, 그 양이 산 만 하다면 그냥 산이다. 세레인의 성력은 총량으로는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 단 번에 파훼 할 능력이 없다면 그들이 부수는 속도보다 회복하는 속도가 월등히 빨랐다.
“흥. 저년도 한 가닥 하는 재주가 있네.”
“저 성력……네놈들은 대체 누구냐?”
오비돈이 낯빛을 굳혔다.
다른 건 그냥 넘어가도 성력은 아니다. 얼핏 느껴지는 양만해도 대주교 이상. 성국과 전혀 관계없는 이 위치에 왜 저런 인물이 나타났을까, 그의 머리가 바쁘게 돌아갔다.
“킥. 대가리 굴리지 말고 이리 와. 어떻게 고대 마법을 사용 할 수 있는지 좀 알아보자고.”
“흥. 역시 뱀파이어라 이건가? 잘도 알아보는군.”
“알아보는 것뿐만이 아니지.”
비올레가 손을 양쪽으로 흔들었다.
어둠이 둥글게 뭉쳐서 날카로운 창이 되었다. 오비돈이 사용했던 것과 같은 수법이었다. 하지만 보다 빠르고, 컸다. 숫자 역시 배는 돼 보였다.
오비돈의 안색이 대번에 굳었다.
“네년이 어떻게 혼돈의 창을 사용하는 것이지?”
“혼돈의 창. 아아. 그런 이름이었지. 이렇게 들으니까 생각이 나네. 그러고 보니, 과거에 이쪽으로 유명한 놈들이 있었어. 내가 이쪽 놈들을 잘 아는 건 아니지만……이름이 전승지기. 맞나?”
“……!!”
표정을 보니 확실했다.
전승지기는 말 그대로 전승을 수호하는 자들. 잊히는 이야기를 모으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결속한 집단을 의미했다. 그들이 주로 사용하는 능력은 잊힌 신의 힘. 편리하게 혼돈지력이라 불렀다. 거창하지만, 사실 세월에 먹힌 잔재일 뿐이다.
비올레가 고개를 갸웃했다.
정체를 알고 나니 그들이 나타난 이유를 더 알기 힘들었다. 게다가 페어리나 용의 불꽃을 보고 탐을 낸다? 전승지기의 역할과는 상이한 행동이었다. 그들이 지금까지 명맥을 이어오는 것 자체가 특이한 일이기도 했지만.
“네년…… 살려 둘 수가 없구나.”
“감히, 누구 마누라한테 그런 말을 하는 거지?”
“……! 멀쩡하다고!?”
운페이가 허공을 밟으며 떨어졌다.
한 순간의 충격으로 의식이 날아가기는 했으나 금세 회복되었다. 몸 안에 든 공허는 소유주인 운페이를 그냥 두지 않았다. 움직이고, 보고, 먹을 수 있게 만들었다. 존재 자체가 난감한 공허이지만, 이럴 때는 꽤 도움이 되었다.
“크윽! 흩어져라!”
운페이의 발이 오비돈의 머리를 쪼갤 듯 떨어졌다.
그 순간, 오비돈이 짧은 문장을 완성하고, 손으로 허공을 짚었다. 화르륵. 불이 나는 소리와 함께, 그의 몸이 연기처럼 흩어졌다. 운페이의 발이 그 위로 가르고 지나갔다.
“연기!?”
타격 한 느낌은 아니었다.
운페이가 황급히 주변을 살폈다. 흩어진 연기는 이미 바닥으로 전부 가라앉고 없었다.
“남편, 숙여.”
“읏-!”
반사적으로 숙인 운페이의 머리 위로 검은 궤적이 그어졌다. 커다란 단두대가 수평으로 누운 것 같았다. 그의 날카로운 감각에도 사전 기미가 전혀 잡히지 않았다. 몸을 한 번 더 뒤집고 운페이가 자세를 잡았다.
“감히 내 앞에서 마법으로 재롱을 부려?”
비올레가 거칠게 웃고는 발을 세게 굴렀다.
퍼엉. 폭음과 동시에 새카만 어둠에 허공으로 솟아올랐다. 이는 즉시, 장내를 뒤덮었다. 해가 지고 밤이 왔다. 싸움을 이어가던 여단 병사들도 움직임을 멈췄다.
“이런……”
비올레의 권능이다.
운페이가 혀를 차며 몸을 뒤로 뺐다. 뒤늦게 전투에 합류했던 라이오넬이 그 뒤를 쫒아서 몸을 날렸다.
“도망가지 마라!!”
“안 가게 생겼냐?”
타앙. 라이오넬의 검을 튕겨 낸 뒤, 복부를 걷어찼다.
다시 한 번 말 하지만 앙타라의 비전은 일대 일. 대비 가능한 수법이 없는 한에서는 무적에 가까운 능력이다. 라이오넬이 엄 한 곳에 검을 휘두르다, 그대로 복부를 얻어맞고 말았다.
콰당탕. 바닥에 고꾸라진 라이오넬이 이를 악물며 일어났다.
벌써 두 번. 여단을 이끄는 대장으로서 꼴이 말이 아니었다. 이를 바득바득 갈면서 운페이가 있는 곳을 노려봤다.
“……뭐야?”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의 시선이 닿는 곳은 모두 어둠. 하늘도 땅도 모두 어둠뿐이었다. 달조차 뜨지 않은 밤. 그는 이해를 할 수 없었다.
“숨어도 소용없다.”
“젠장! 그냥 뱀파이어가 아니었단 말이냐!?”
“전승을 지킨다는 이름이 아깝군. 격 없는 눈깔을 지닌 죄로, 너는 사형이다.”
“젠장! 내가 그냥 당할 것 같으냐!? 옛 신의 위엄을 허투루 보는 자는 결말이 참담 할 뿐이다!”
그런 라이오넬을 무시 한 채, 비올레는 오비돈과 힘겨루기에 들어갔다.
사방을 감싼 어둠은 그녀의 권능. 어둠에 속성을 부여 할 수 있으며, 그 어둠 자체를 가지고 놀 수 있는 존재. 그것이 바로 암야의 여왕. 비올레의 능력이었다.
하지만 그런 비올레의 권능도, 옛 신의 잔재를 사용하는 오비돈에게는 직접 통용되지 않았다. 그들이 사용하는 검은 창은, 비올레의 권능을 벗어나 있었다. 현재의 것과 옛 것의 차이라고 할까. 힘의 고하는 둘째 치고, 비올레에게는 상대하기 꽤 까다로운 존재였다.
“옛 신? 누구를 말함이냐? 이름도 사라진 갈대밭의 신? 푸른 물결의 신? 아니면 황혼 끝자락에 선 신을 말 하는 거냐!? 세월에 먹힌 존재를 모시는 주제에 감히 내 앞에서 알량한 입을 털어!?”
콰르르릉!!
어둠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무엇도 범접 할 수 없는 힘이 그 안에서 피어올랐다. 생명이 살 수 있는 기운은 모두 사그라지고, 죽음만이 자리 잡았다. 범위에 말려들었던 라이오넬은 얼굴이 새카맣게 돼서는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여단의 대장으로 갈고 닦았던 힘은 이 재해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너, 넌 대체 누구냐!? 이 힘은……이 힘은 일개 뱀파이어가 지닐 수 있는 게 아니야!!”
“너희가 지키는 옛 신조차 내 앞에서 그리 함부로 말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무지한 네 눈을 원망하며 죽어라.”
“옛 신 조차……? 설마!!”
퍼석. 하지만 그의 말을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권능 벗어나는 오비돈의 힘조차 세계의 일부를 떼어서 어둠으로 만들어버린 비올레의 능력 앞에서는 소용이 없었다. 상성 문제가 아니었다. 그저 순수하게 힘의 고하.
암야의 여왕 이라는 이름은 단순한 호칭이 아니었다.
그것은 일곱 마왕 중 하나의 이름.
신과 동격에 놓이는 존재였다.
***
‘이건……이건 너무 사악한 힘이야.’
비올레가 오비돈을 산산조각 낼 무렵, 세레인은 그 힘에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그녀가 뱀파이어임은 안다. 공허라는 괴상한 존재를 잡았음도 안다. 하지만 지금 느낀 힘은 그 규격을 넘어서 있었다. 두렵고, 두렵다. 세상을 밝게 물드는 신의 힘 조차, 이 어둠 앞에서는 빛을 바랠 것 같았다.
‘신이시여. 나는 어찌해야 하는 겁니까?’
그녀가 운페이의 반려임은 안다.
두 사람이 숱한 전장을 헤치며 깊은 유대를 만들었음도. 하지만 과연 이런 존재 앞에 그를 그냥 두는 것이 현명한 일일까. 사악한 힘의 존재. 신조차 빛을 내지 못하는 어둠 앞에 말이다.
“세레인. 이제 해제해도 돼.”
“아……!”
운페이의 목소리에 그녀가 정신을 차렸다.
라이오넬과 오비돈이 죽고, 남은 여단 병들은 어둠의 힘에 휩쓸려 전부 정신을 잃은 상태였다. 성법으로 만든 벽 밖에 있던 존재 중 무사했던 건 운페이가 유일했다.
“놀랐지? 미안. 일이 좀 과격하게 돼 버렸네.”
벽이 해체되고 운페이가 그녀에게 다가왔다.
상태를 살피고, 두려움에 오들오들 떠는 세세이를 진정시켰다. 린이 힘을 내 그녀를 막아주고 있었지만, 두려움 자체는 어쩔 수 없는 거니까.
“이제 괜찮아요.”
“운페이. 그것보다 저 어둠. 저건 괜찮은 거야?”
“권능은 일종의 본능과 같아. 이 정도까지 힘을 풀어놨으면 쉽게 진정시킬 수 없어.”
“……위험 한 거 아니야? 아무리 그녀가 이성을 지니고 있다 해도, 언제 또 저런 일을 벌일 지 모르잖아.”
“응? 아, 그건 걱정 할 필요 없어. 그녀는 내게 해 될 일을 하지는 않으니까.”
“그걸 어떻게 장담하는데? 피와 어둠은 이성으로 제어하는 게 아니잖아. 만에 하나라도……”
세레엔이 입술을 깨문 채, 운페이의 가슴 언저리를 부여잡았다.
손끝이 살짝 떨리고 있었다.
“이거 참. 충격이 심했나 보네. 걱정 할 거 없어. 그녀가 이성을 잃어서 폭주한다 해도 내게 해를 끼치지는 않아.”
“그걸! 그걸 어떻게 장담하는 건데!?”
세레인이 고개를 들며 외치듯 물었다.
왜 이렇게 태연한 걸까. 자신은 가슴이 타들어 가는 거 같은데. 왠지 모를 억울함에 눈가에 눈물까지 맺혔다.
“그거야……그녀는 나를 사랑하니까.”
“그게……답?”
“아, 뭐. 믿음이라고 해 둬.”
운페이가 해맑게 웃었다.
정말로 걱정 없는 표정이었다. 그 모습이 너무 맑고 시려서 세레인은 계속 바라 볼 수가 없었다.
- 작가의말
짧아서 죄송합니당.
몸이 안 좋아서 쿨럭 ㅜㅜ...
컨디션 찾으면 좀 더 많은 분량으로 찾아올게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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