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0. 구르단
정적을 가장 먼저 깬 것은 오돈 왕국군을 이끌던 한 남자였다.
공격에 들어간 군을 뒤로 한 채 몸을 돌려서 밖으로 나왔다. 새카만 장포로 몸을 두르고, 손에는 크게 휜 환도를 들고 있었다.
“이건 성력이군.”
“당장 그만두세요! 아무리 전쟁이라해도 민간인을 학살하다니! 하늘 보기가 두렵지도 않은 건가요!?”
“이 정도 규모라면 주교는 불가능. 아니, 대주교도 어렵겠군. 그렇다면 교황이나 성녀 둘 중 하나. 아무리 봐도 교황은 아닌 거 같으니, 성녀. 성국을 탈출한 성녀가 이곳에 있다니 의외로군.”
둘의 거리는 가깝지 않았지만, 마치 옆에 있는 것처럼 대화를 나누었다.
그만큼 사방이 고요했던 것이다. 진군해 나가던 오돈 왕국군은 마비라도 걸린 듯 멈춰 섰고, 방어하던 코쿤 왕국군은 갑작스러운 기적에 어지 할 바를 몰라 했다.
“하아. 귀찮게 됐군.”
“운페이……”
운페이가 세레인이게 다가갔다.
상황 추이를 봐서 움직이려 했는데, 세레인이 나서버렸다. 그것도 아주 화려하게. 상대의 관심이 집중 된 마당에 그냥 손 흔들며 도망가기는 힘들어 보였다.
“뭐, 저들이 하는 짓은 나도 마음에 들지 않았어. 너무 그렇게 신경 쓸 필요는 없어.”
“아……응. 고마워.”
“흥! 먹기 위한 것도, 투쟁을 위한 것도 아닌 살육은 그저 삐뚤어진 광기일 뿐이다. 뱀파이어인 나조차 의미 없는 죽음에 찬미를 보내지는 않는다.”
비올레가 두둔하고 나섰다.
세레인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흥! 네년 좋으라고 하는 말이 아니다.’ 비올레는 냉담하게 반응했지만.
“그쪽이 성녀와 함께 했다는 인물이군.”
“전쟁중에 너무 한눈을 파는 거 같은데?”
“전쟁? 우스운 이야기군. 이것이 전쟁으로 보이나? 나는 벌레를 밟아 죽이기 위해 이 자리에 왔을 뿐이다. 거창하게 포장하지 말았으면 좋겠군.”
“……마음에 안 두는 말투군.”
남자는 그 사이에 일행에게 더 접근해 있었다.
무겁게 가라앉은 분위기 속에서 그와 일행만이 살아 움직이는 생명 같았다. 하지만 이 모든 상황이 영원토록 이어 질 건 아니었다. 특히, 조금 전까지 밀리고 있던 코쿤 왕국에서는 더욱 그러했다.
“서, 성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 모두 힘을 내라!!”
“우오오! 적을 밀어내라!!”
영악한 이가 세레인을 팔았다.
성국과 성녀의 이야기는 전 대륙에서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 전후사정은 몰라도, 신의 대행자라 불리는 성녀가 같은 편에 서 있다는 것은 분명 도움이 되는 일이다. 큰 외침에 짓눌려 있던 코쿤 왕국군의 기세가 살아났다. 찬란한 보호막을 두른 채, 오돈 왕국군을 밀어 붙이기 시작했다.
막이 공격을 차단하고, 마병이 이를 다시 막았다.
물고 물리는 공방. 요새 건축물은 부서지고, 벽과 나무는 쪼개져서 파편으로 휘날렸다. 비명과 파괴음. 일대는 금세 다시 혼란으로 휩싸였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일행에게 걸어온 남자는 뒤 한 번 돌아보지 않았다.
“전진 거점을 얻기 위해 온 것인데, 의외로 좋은 소득을 얻어가게 됐어.”
“당장 그만두고 물러나세요! 오돈 왕국의 파렴치한 행위는 반드시 그 대가를 물게 될 겁니다!”
“파렴치한 행위라. 그것 참 고상한 표……음? 그쪽에 숨어 있는 남자. 혹시 테일러 왕세자가 아닌가?”
“헉!”
고개를 돌린 채 숨어있던 테일러가 헛바람을 삼켰다.
“하하하. 성녀에 도망친 왕세자라니. 내가 이렇게 운이 좋았었나?”
“어이 시꺼먼 놈.”
“……날 부른 것이냐?”
비올레의 부름에 남자가 시선을 돌렸다.
검은 장포 아래로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여기 시커먼 게 너 밖에 더 있냐?”
“흐음. 얼굴은 제법 반반하군. 수확물을 잡아가는 길에 내 전용 노예로 삼는 것도 괜찮아 보여.”
“노예?”
“요전에 쓰던 것들은 하나같이 몸이 허약해서 말이야. 며칠을 못 넘기던데, 네년이라면 한 동안은 즐길 수 있겠어.”
퍼엉-!!
남자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폭음과 함께 운페이가 뛰어나갔다.
긴 잔영이 그려지고, 남자를 향해 주먹이 뻗어나갔다. 소리를 듣고 그의 움직임을 판단한 상황에는 이미 도달한 직후였다.
텅. 하지만 남자의 반응도 만만치는 않았다.
검을 들어 운페이의 주먹을 막아 낸 뒤, 밀려나가는 힘을 회전력으로 상쇄하며 반격을 날렸다. 검을 타고 새파란 전격이 튀었다.
“합-!”
운페이가 기합으로 전격을 파쇄 했다.
남자의 눈빛이 처음으로 살짝 바뀌었다. 마병에 실린 힘은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니다. 기합 한 번으로 이를 처리한다는 것은 보통의 기예가 아니라는 뜻.
“이제보니 보통 놈이 아니군.”
“닥쳐라. 내 아내에게 입을 함부로 놀린 죄. 그것은 죽음으로도 갚기 힘들다.”
“하하하하! 아내였다는 건가? 이거 참 더 기쁜 일이 되었군! 나는 임자 있는 물건 빼앗는 것을 더 좋아 하거든!”
콰쾅! 쾅!
주먹과 검이 연달아 충돌했다.
운페이는 손을 유연하게 놀리며 검면을 연달아 때렸다. 진동을 중첩하여, 물건 자체를 파괴하는 기법. 하지만 남자 역시 검을 잡은 손을 흔들며 이를 반사적으로 상쇄했다. 연이은 충돌에서 어느 쪽도 이득을 취하지 못했다.
“우, 운페이! 위험한 거 아니야?”
“흥! 남편이 나선 이상 새카만 놈은 뒈진 목숨이다.”
“아니 운페이가 강한 건 알지만, 저 남자는 마병도 들고 있잖아. 맨손으로는 위험해 보이는데……”
세레인의 걱정스러운 말에 비올레가 콧방귀를 뀌었다.
운페이의 주 무기가 단병임은 분명한 사실. 하지만 그 이전에 수련하던 건 맨손 투법이다. 붉은 숲에서도 그러했고, 앙타라에게 비전을 배울 때도 그랬다.
“상당하군. 상당해. 대체 누가 있어서 이 정도의 무력을 지닌 거지? 혹시 성기사인가? 아니. 아니지. 성기사에서도 이 정도의 실력자는 없어.”
“말이 많군!”
운페이의 우수가 남자의 어깨부근을 스쳐갔다. 날카로운 파공성과 함께, 입고 있던 장포의 일부가 찢어졌다.
“하하하하! 오늘은 좋은 날이 맞아! 의외의 수확이 이렇게나 많다니!”
“너……”
광소하는 남자의 모습에 운페이가 일순간 주춤했다.
장포 아래로 그의 맨살이 보였다. 하지만 일반적인 사람의 피부가 아니었다. 새카맣게 변색 되어서는 마구 일어나 있었다. 파충류의 피부와 비슷하지만 그것보다 더 흉측했다. 화상 상흔을 딱딱하게 굳힌 거라고 표현해야 할까. 정상적인 모습은 분명 아니었다.
“이렇게 된 거 제대로 소개를 하는 게 맞겠지. 이 몸은 오돈 왕국 혈사대(血死隊) 대주 구른단이라고 한다.”
“혈사대?”
“후후. 새롭게 만들어진 무력 부대지. 원대한 계획의 초석이 되어 줄 부대라고 볼 수 있다. 죽음을 마시고 그 위로 창생의 업을 쌓는. 아름답지 않나?”
“입에 개소리를 달고 다니는군. 더 짓거릴 것이 있다면 이 기회에 하는 것이 좋을 거다.”
“대화에 취미가 없는 건가?”
“아니. 곧 죽을 놈의 말은 들을 필요가 없거든.”
콰르릉.
운페이가 다시 한 번 동작에 박차를 가했다. 상체가 좌우로 흔들리며 구르단을 압박했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그가 좌우로 주먹을 내밀었다. 쾌속한 일격. 바람이 갈라져 날카라온 소리를 토해냈다.
캉. 왼손을 빗나가고, 오른손을 적중했다. 하지만 원하는 소리와 타격감이 아니었다. 구르단이 왼쪽 어깨를 내어 준 채 크게 웃었다. 검은 장포 아래로 음영이 그려졌다. 그리고 동시에 그의 검이 번개같이 솟구쳐 운페이의 가슴을 훑고 지나갔다.
“운페이!!!”
세레인의 비명.
하지만 나란히 선 비올레는 코웃음을 쳤다. 상반되게 갈린 반응. 물론, 정답은 비올레였다. 솟구치는 검을 운페이가 한 뼘 차이로 피해낸 것이다.
“제법이군!!”
올라간 검이 다시 사선으로 떨어졌다.
운페이가 몸을 옆으로 기울이며 검날을 쳐냈다. 콱 하는 소리와 함께, 환도가 바닥에 틀어박혔다.
이때가 한 걸음 차이.
끼릭. 박아 넣은 검에 구르단이 힘을 주었다.
단단한 지면이 한 번에 일어나고, 환도의 궤적에 길을 터 주었다. 목표는 운페이의 머리. 마치 검이 그렇게 움직일 거라 예상 한 것처럼 반응했다.
‘앙타라.’
하지만 운페이는 이를 신경 쓰지 않았다.
대인 전 필살의 기술. 앙타라의 비전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힘이 흘러 들어가 구르단의 감각을 희롱했다.
꾸욱. 이때가 반걸음 차이.
조금 더 다가온 운페이의 주먹이 가슴 아래로 정렬했다. 내딛는 발, 돌아간 허리, 완벽하게 이동하는 무게 중심까지. 일격을 위한 완벽한 토대가 만들어졌다.
어깨 위로 구르단의 검이 스쳐 가면 그 틈에 일격을 내지르면 되는 일이다.
타이밍, 기세, 흐름. 모든 것이 완벽했다. 실패 할 리 없는 일격. 운페이는 확신이 있었다. 하지만 그 순간.
치잉. 미묘한 감각의 그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이는 너무나 익숙해서 잊을 수 없는 것. 지금 느껴진 이 감각을 조금 전까지는 느끼지 못했다는 것이 이상할 뿐이었다.
그것은 바로 공허.
그리고 날 선 외침이 그의 귀를 때렸다.
“숙여—!!”
비올레.
운페이가 망설임 없이 공격을 포기하고 몸을 숙였다. 앞으로 기울어진 무게중심 탓에 그의 머리는 구르단의 가슴팍에 충돌했다.
콰콰콰콰쾅—!!
터져 나오는 폭발.
운페이는 등 뒤로 아찔한 충격을 받았다. 등판 전체가 타들어 가는 듯한 감각. 이를 악물고는 구르단의 몸을 밀치며 한 걸음을 더 내밀었다.
쾅. 몸이 바닥에 닿았다. 약간의 충격. 하지만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전신에서 위험한 경고를 보내고 있었다. 이대로 더 있으면 목숨이 위험 할 거라는 경고. 그는 이를 무시하지 않았다. 시선 아래로 보이는 구르단의 가슴팍을 밀치며 몸을 뒤집었다.
콰콰콱! 콱!
그가 몸을 날리는 것과 거의 동시에 새카만 창이 그 위로 떨어졌다. 완벽하게 피하지 못해 팔과 허벅지 등에 깊은 상처가 생겼다.
“남편, 왼쪽!!”
비올레가 이리 다급하게 불러 본 게 과연 얼마만일까.
운페이가 성한 오른발로 지면을 짚으며 몸을 급격히 틀었다. 억지스러운 동작에 허리가 우드득하며 섬뜩한 소리를 뱉었다. 하지만 이렇게 하지 않았다면 그는 가슴이 관통 당했을 것이다. 돌아가는 그의 가슴을 검은 창이 스쳐갔다.
“멍청한 계집, 멍하니 있지 말고 저놈을 묶어서 밀어내!”
“아, 알았어!”
웅. 짧은 공명음과 함께, 구르단의 몸이 뿌연 막에 쌓여서는 뒤로 밀려나갔다. 그 사이 비올레가 그림자를 타고 이동해서 운페이를 구해냈다. 상처는 여러 군데 있었지만, 치명적인 것은 없었다.
“크윽. 방금 그건……”
“공허. 어떻게 숨겼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그 기척이다.”
“고, 공허? 너희들이 싸웠다는 그거? 그게 지금 와 있다는 거야?”
운페이가 답을 하지 않은 채 시선을 앞으로 돌렸다.
그곳에는 뿌연 막에 막힌 구르단이 서 있었다. 하지만 조금 전까지 싸우던 그의 모습이 아니었다. 온몸은 화상 상처와 비슷한 각질로 뒤덮여 있고, 등 뒤에서부터는 검은 촉수가 다발로 솟아나 있었다. 대략 5쌍 정도. 운페이가 창이라 생각했던 것이 바로 그 촉수였다.
“가지고 놀기 쉬운 계집이 아니었군. 게다가 그분에 대해서 알고 있다니. 확실히 잡아가야 할 이유가 생겼어.”
“……그 모습으로 이성까지 유지되는 것인가?”
“음? 아아. 그렇군. 네놈도 몸 안에 그분을 모시고 있었어. 그렇다면 강한 이유를 납득 할 수 있겠군.”
“모시는 게 아니다. 이 빌어먹을 놈을 가두고 있는 거지. 몸뚱이가 괴물이 되어도 그 개소리는 멈출 줄 모르나 보네?”
“큭큭큭……”
쾅-!
구르단이 촉수를 뻗어 막을 두드렸다.
세레인의 성력은 누차 나왔듯이 초월적인 것. 거대한 울림이 있기는 했으나 한 번에 깨어지지는 않았다.
쾅쾅!! 쾅!!
하지만 한 번이 두 번이 되고, 두 번이 세 번이 되어가는 마당에 세레인이 모든 충격을 감당하기는 어려웠다. 성법을 통해 전해지는 충격에 그녀의 안색이 점점 하얗게 질려갔다.
“세레인, 풀어.”
“하, 하지만……”
“걱정 말고 풀어. 솔직히 자존심이 조금 상하기는 하지만……”
운페이가 슬쩍 옆을 돌아봤다.
성난 불꽃과 같은 비올레가 그곳에 서 있었다.
“마누라께서 복수를 해 주실 거 같거든.”
“……”
픽. 하며 보호막이 해제되었다.
- 작가의말
세리인의 성력이 어마무시한 것은 맞지만, 그걸 유지하는 건 육체입니다.
무한정 유지하기는 힘들죠.
* 본격 셔터맨 판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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