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4. 부서지는 흐름
힘없이 박투를 해 보는 것도 오랜만이다.
운페이가 전신을 부드럽게 이완시키며 성스러운 의지의 공격을 피했다. 그녀의 손아귀에는 예리한 검이 쥐어져서 있었다. 허공을 베고 지나가는 검세가 꽤나 날카로웠다.
머리, 허리, 허벅지.
연이어 떨어지는 검격을 차근차근 피해갔다. 검세 자체는 날카롭지만 그녀가 사용하는 육체 자체는 인간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였다. 이런 면에서 벨런스를 맞춰 주는 것일까.
“흥!”
그녀의 검은 성기사들의 것과 닮아 있었다.
슈레인의 강격, 파란의 화려한 유격. 다른 성기사들의 검 역시 유사한 상태로 빚어 나왔다. 세레인의 안에서 보아 온 것이 그런 것들이기 때문일지 모르겠다.
흘리고, 검면을 때리며 벌렸다.
공세는 상대가 가능 한 수준이지만 결정적으로 불리한 것이 하나 있었다. 검과 상대 할 무기가 없다는 것이다.
“남편, 위험해!”
비올레가 발을 동동 굴렀다.
그녀는 본디 뱀파이어 이전에, 마법사. 육체적 싸움은 전공이 아니다. 초월을 하고 난 뒤야 권능이라는 이름으로 힘을 사역했지만, 지금은 그것조차 없다. 싸움에 끼어 들어봐야 피해만 줄 거 같으니 영락없는 응원군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죽어! 그냥 여기서 죽어버려! 그 아이에게 해가 될 뿐이야!”
“죽을 수 없다. 마누라랑 평생 동안 알콩달콩 살 생각이다.”
“이이익!! 못된 놈!”
분개한 것인지 검에 힘이 더 들어갔다.
몸을 빙글 돌리며 강격을 회피했다. 어깨가 살짝 베어졌지만 그 사이로 틈이 생겨났다. 성스러운 의지가 당혹 한 표정을 지었다.
‘여자 아이를 때리는 거 같아서 마뜩치는 않지만……’
크게 한 걸음 내딛으며 몸을 아래에서 위로 들어 올렸다.
어깨가 성스러운 의지의 가슴 부근에 닿았다. 체중과 돌진하는 속도가 맞물려 강력한 파괴력을 낳았다. 둔중한 소리와 함께, 그녀가 뒤로 한참을 튕겨나갔다.
운페이가 기세를 놓치지 않고, 몸을 다시 날렸다.
거의 키 만큼 뛰어 오른 자세로 주먹을 아래로 질렀다. 바닥을 구른 성스러운 의지가 인상을 쓰며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게 복부를 후려쳤다.
고통으로 물들어 가는 얼굴이 괜히 가슴 아프다. 운페이가 낮게 혀를 차고는 손을 떼었다. 적어도 이 정도면 승부가 났다고 생각 한 것이다.
“남편-!”
하지만 그것은 오판.
찢어지는 비올레의 비명에 운페이가 다급히 몸을 틀었다. 서걱. 예리한 무언가에 목 언저리가 깊게 베였다. 피가 분수마냥 솟아올랐다.
바닥을 한 바퀴 구른 뒤 즉시 옷을 찢어서 목을 감쌌다.
압박을 세게 해 출혈을 멈추려는 시도지만, 마땅치 않았다. 천은 금세 흥건히 젖고, 바닥으로 피를 뚝뚝 흘렸다.
“남편! 괜찮아? 응?”
“크으……”
비올레가 냉큼 다가와서 옷을 잘라 상처 부위에 덧대었다.
피가 과하게 흘러나왔다. 운페이의 안색이 금세 창백해졌다. 이 공간은 특수한 몇 가지를 제외하고는 현실과 같은 방식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
쓰러져 있던 성스러운 의지가 스르르 일어났다.
눈동자에 초점이 없고, 주위로 검 한 자루가 떠다녔다. 운페이를 벤 것이 바로 그 검이다. 상태가 이상한 것은 둘째 치고 자유롭게 움직이는 검은 두 사람에게는 큰 위협이었다. 부상으로 운페이가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것을 포함해서.
‘뭐지, 이 반응은?’
운페이가 이 상황에 이상함을 느꼈다.
성스러운 의지의 출현은 그럴 수 있다. 무언가 다른 기제가 존재함을 느끼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 의지가 정신을 잃고 폭주하는 것처럼 움직인다? 이건 납득하기 어렵다. 봉인과 힘의 제어를 위해서 마련 한 것이 성스러운 의지다. 그것이 이 공간에서 몇 대 맞은 것으로 폭주한다? 신들이 이리도 엉성하게 만들었을 거라고는 생각이 안 된다.
‘고의라는 뜻이군……’
즉, 이 상황을 만든 존재가 이야기의 흐름에 개입을 한 것이다.
아마도 운페이가 성스러운 의지를 이기지 못하고 당할 것이라 예상했을 터. 그가 박투로 이를 이겨내 버리자 다급하게 끼어 든 것이다.
‘왜지? 지금와서?’
굳이 운페이를 처리하고자 하였다면 이런 방법은 너무 허술하다.
혼돈의 힘을 깨우치기 전에 세레인을 조정해서 쓸면 장땡이었다. 혼돈에 대한 계획 등을 고려해 보면 이런 식의 일처리는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다.
“마누라……”
“으, 응? 괜찮은 거야?”
운페이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눈앞에 있는 폭주한 성스러운 의지. 그것을 무력으로 제압하는 것이 능사가 아닐 거 같다. 그런 생각이 머리를 맴돌았다.
“마누라가 얻은 어둠. 어떤 거야?”
“어둠? 그건 갑자기 왜……?”
“중요한 거야.”
“으, 응. 파괴나 죽음 같은 부정적인 힘의 집약 같은 거야. 빛과는 완전히 반대에 있지.”
운페이가 어지러운 몸을 간신히 제어하며 성스러운 의지를 바라봤다.
그녀는 검을 둥둥 띄워놨을 뿐 추가적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마누라는 그런 모습이 아냐. 어떻게 그럴 수 있지?”
“그야, 남편에 대한 사랑 때문에?”
“……그것 뿐?”
“그거 말고 뭐가 필요한데!?”
조금 생뚱맞지만 정답이다.
비올레를 가득 채운 것은 어둠. 파괴적이고 극악한 힘이다. 하지만 이것에 잠식당하지 않도록 닻이 되어 주는 것은 운페이에 대한 사랑이다. 어둠속에 한 줄기 빛이 있으니, 이것이 중심을 잡고 있다.
‘어둠 속의 빛. 빛 속의 어둠.’
이제야 상황이 이해가 간다.
운페이가 후들거리는 몸을 부여잡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비올레가 냉큼 와서 부축했다. 바닥은 피로 흥건하고, 옷의 태반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아마 그곳에서 듣고 있을 거야, 세레인.”
“……”
성스러운 의지는 움직임이 없다.
운페이가 낮게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그들. 신들은 네게 빛의 한 축을 맡기려 해. 그것은 순수한 빛이나, 한 줄기 어둠을 품어야 가능한 일이야. 어둠 속에 빛이 있고, 빛 속에 어둠이 있어야 온전하게 혼돈을 제어 할 수 있다고 믿는 거지.”
“……”
“나로 하여금 너를 부정하게 한 것도 그 일환이었을 거야. 하지만 모자랐겠지. 왜인지는 알겠어. 네가 너무 착해서야. 욕심을 낸다 해도 너는 그것보다 나를 먼저 생각했을 테니까. 빛 안에 품어야 할 어둠 치고는 너무 작아. 아니, 네 빛이 너무 큰 거지.”
눈앞이 다 흐릿하다.
운페이가 머리를 흔들어 정신을 부여잡았다.
“지금은 아마 네가 붙잡고 있는 거겠지? 그들은 나를 죽여 네 안에 분노를 심으려 했을 테니까. 보다 큰 어둠. 하지만 너는 용납 할 수 없었을 테고.”
“……그만 해.”
“알아. 넌 본래 그랬으니까. 남을 먼저 생각하고, 작은 죽음에도 눈물 흘리던 아이였어. 아무리 시간이 지났다 해도 그 사실은 변하지 않아.”
“그만 하라고……”
성스러운 의지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것은 아마도 세레인의 마음일 것이다. 운페이가 힘겹게 고개를 흔들었다. 결국 자신이 나쁜 놈인 것이다.
“미안. 전부 다 사과할게. 모두 내 잘못이야. 이런 상황에 오도록 너에게 확실한 태도를 보이지 않은 것. 그 마음을 느끼면서도 혹시나 멀어질까 두려워 진지하지 못했던 것까지.”
“……두려워?”
“응. 너는 내 가장 빛나는 추억의 한 부분인걸. 항상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었어.”
거짓이 아니다.
혼돈에 휩싸이며 감정이 죽어가는 순간에도 세레인에 대한 마음이 메말라 감을 염려했을 정도다. 그녀는 어린 시절의 가장 빛나는 기억이고, 소중한 추억의 한 페이지다. 사랑하는 이가 있어 마음의 한 부분을 내어주지 못하나, 그 애틋함까지 지워지는 것은 아니다.
스으으……
성스러운 의지가 연기가 되어 흩어졌다.
그리고 그 위로 세레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눈물이 한 가득이다. 앙다문 입술을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못됐어. 정말로……”
“미안. 내가 못나서 그런 걸……”
“못났으면. 차라리 못나기라도 하지. 널 보고 이런 마음조차 먹지 않도록.”
그녀가 비적비적 걸어와 운페이의 목에 손을 대었다.
하얀 빛이 새어나와 상처를 치료했다. 공허를 통한 반발 같은 건 없었다. 익숙한 힘. 그녀의 힘에는 혼돈의 향기가 진하게 났다.
“세레인……”
“더 이상 말 하지 마. 그럴수록 아쉬움만 커져 가니까.”
세레인이 눈물을 크게 한 번 떨어뜨리고는 고개를 흔들었다.
“네가 말 한 것들이 모두 맞아. 신들은 내 안에 어둠을 품게 하려고 했어. 그리고 그곳으로 혼돈을 제어하는 양 날개로 만들려 한 것이지. 하지만 이 일은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아.”
눈물을 손으로 훔치고 세레인이 말을 이었다.
파리한 입술과 붉어진 눈동자. 운페이는 먹먹한 가슴으로 이를 마주봤다.
“……단순하지 않다면?”
그런 운페이를 대신해서 비올레가 말을 받았다.
그녀도 속이 편치는 않다. 눈앞에서 남편이 다른 여자와 미묘한 분위기를 연출했으니까. 하지만 다 지나가는 일이라면서 스스로를 다독이고 있었다.
“비올레, 너를 키운 어둠은 순전히 네 것이야?”
“응? 그야 당연……하지는 않네. 본디 초월에 있던 나를 인도 해 준 건 아르미아. 그 계집년이니까.”
“그래. 나도 마찬가지야. 내 빛은 결국 신들의 영혼과 같아. 너나 나. 둘 다 신의 힘이 깃들어 있는 거지.”
“그 말은?”
“혼돈의 두 날개는 단순한 제어가 아니야. 운페이를 가두기 위한 족쇄지. 손아귀에 혼돈을 쥐고, 모든 것을 다스리기 위한……”
그녀는 이를 성스러운 의지를 통해서 알았다.
의지의 폭주는 숨겨 두었던 정보를 풀어 놓았고, 슬픔에 배회하던 그녀의 정신을 일깨웠다. 그렇지 않았다면 계획대로 성스러운 의지가 운페이를 베어냈을 것이다.
“그 말은……이곳이 봉인이라 이건가?”
“역시 예상하고 있었구나.”
“나는 혼돈의 씨앗을 품었어. 이를 압도 할 수 있는 힘이라고는 그 본류밖에는 없겠지.”
의아했던 바다.
혼돈은 신들보다 상위에 있는 힘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씨앗을 품은 운페이는 천사조차 우습게 다루었다. 그런 존재의 힘을 모두 앗아가고 제어 할 수 있는 거라면 그 본류 밖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가진 열쇠는 닫힌 자물쇠를 여는 용도가 아니야. 그건 혼돈이 있는 세계로의 길을 여는 것이지. 물론, 이것을 위해서는 몇 단계의 봉인을 열어야 하는 거지만 그건 이미 전부 열렸잖아.”
“교황청 안에 있는 비석은?”
“상징적인 거야. 그 안에 물론 성국의 비보가 묻혀 있기는 해. 봉인의 주체인 셈이지. 하지만 그곳에 혼돈이 갇혀 있거나 한 건 아니야. 힘이며 법칙인 그를 어떤 공간에 가둘 수 있다고 생각 한 건 아니지?”
혼돈은 현상에 가까운 존재다.
중력을 가두고, 시간을 멈출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럼 이곳은 다른 세계라는 거냐?”
“아웃 플레인 중 하나로 혼돈을 날려 보낸 거지. 정령이 다른 차원에 존재하는 것과 비슷해. 다만, 그들과는 다르게 혼돈은 완전히 보낼 수 없었어. 절대로 끊어지지 않는 고리가 존재하지. 그 탓에 봉인이니 뭐니 하면서 많은 것들이 필요했던 거야.”
“공허는?”
“혼돈의 껍질이라 이해했지만, 그건 사실 조금 달라. 공허는 혼돈의 흔적이라 보면 돼. 돌을 물에 던지면 파문이 일듯이 혼돈을 아웃플레인으로 날리면서 그 흔적이 강하게 남은 거야. 알맹이가 아웃플레인으로 사라진 후에는 껍질만 남아서 세상으로 떨어 진 거고.”
흔적에 그 죽을 고생을 했던 거라니.
운페이가 약간의 허탈함을 느꼈다.
“잠깐! 그래서 어떻게 하면 돼? 어떻게 하면 밖으로 나갈 수 있다는 거야?”
“방법은 두 가지가 있어……”
비올레의 물음에 세레인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운을 떼었다.
목소리에 작은 떨림이 묻어났다. 슬픈 듯, 두려운 듯 눈썹도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녀가 입술을 잘근 씹었다. 무언가를 고심하는 증거다. 그렇게 한참을 망설이던 그녀가 힘겹게 다음 말을 이었다.
“그 방법은……”
- 작가의말
운페이 너란 남자 차가운 남자.
* Great Father 많이 보러 와주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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