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2. 아발론
“멍청한 남편.”
“으. 실수라고 했잖아. 거, 마누라님 너무 구박이 심한 거 아냐?”
“흥. 그래도 남편 바보.”
비올레의 구박에 운페이가 뒷머리를 긁었다.
이런 소리를 들어도 어쩔 수 없다. 본래 계획은 잉그하트를 사로잡아서 정보를 얻어내는 것. 그 때문에 비올레에게 힘 조절하라고 경고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정작 자신이 힘 조절을 못해서 잉그하트를 가루로 만들고 말았다.
“둘 다 그만 해. 일단 잡았으면 된 거잖아.”
세레인이 둘 사이로 들어와 상황을 정리했다.
그 사이 호수로 들어가 있던 아발론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세세이가 곁으로 가서는 그의 모습을 살폈다. 일렁이는 윤곽이 정상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아발론, 괜찮은 겁니까?”
[……한계에 봉착했다. 이 상태를 유지 할 수 있는 것은 잘 해 봐야 몇 시간. 아니 그도 못할지 모르겠군.]
“미안하게 됐군요. 저희 때문에 괜히……”
[아니. 그건 아니다. 어쩌면 이도 운명. 흐름에 저항하여 이렇게 남아 있던 것이 잘못 되었는지도 모르겠군.]
아발론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자신의 마지막을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혼돈의 부활. 닫힌 세계에 대한 희망을 토로 한 바 있으나, 내면에서는 그것조차 부정하고 있던 것이다.
“그렇다면 한 가지만 대답해 주실 수 있습니까?”
[무엇이라도. 다만, 그 전에 한 가지 청이 있다.]
“펜을 부탁한다는 말인가요?”
그가 남아있는 유일한 이유이니 물어 볼 필요도 없다.
끄덕이는 아발론을 보며 운페이가 확답을 해 주었다. 펜이 지켜 봐 주겠다고. 희미하게 이어지는 정령의 마지막 조각을 잘 보살피겠다고.
[그 정도면 됐다. 그럼, 묻거라. 내가 답 할 수 있는 거라면 무엇이든 말해주겠다.]
“혼돈. 그러니까 예전에 존재했던 초월적인 신이 봉인 당할 때, 일부가 세상으로 떨어 진 적이 있습니까?”
[파편을 말 하는 거라면……]
“아뇨. 파편 말고. 뭐라고 해야 할까. 껍질? 아, 그렇게 말 하는 것이 적당하겠군요. 혼돈을 이루는 일부이며 그 바탕이 되는 것. 이런 종류의 것이 세상에 떨어 진 일이 있습니까?”
아발론이 고개를 숙인 채 생각에 잠겼다.
운페이가 입술을 잘근 깨문 채 기다렸다. 만약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다면 머릿속을 맴돌던 것을 정리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조금은 길게 느껴지는 시간이 흐르고 아발론이 고개를 들었다.
[비슷한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직접 본 것은 아니나, 혼돈이 봉인 당할 때 그 거대한 몸을 감당하지 못하고 힘의 정수만을 뽑아서 구속했다는 이야기가 있지. 초월적인 신에게 육체라니. 당시에는 믿지 못할 이야기라 생각했는데, 네 이야기를 들으니 그것이 가장 먼저 떠오르는군.]
“거대한 몸. 그렇군요. 그것이라면 답이 됩니다.”
혼돈. 공허. 초월적인 힘. 닫힌 세계. 모든 내용이 하나로 맞아 떨어지고 있다. 과거부터 생각하던 의문 역시 한 번에 풀렸다.
“남편,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야?”
“공허. 그 존재에 대해서 실마리를 잡았어. 아니, 이 정도면 확정적이네.”
“……설마.”
“아아. 거의 확실해. 공허는 혼돈의 육체. 즉, 봉인 당할 때 떨어져 나온 껍질이라고 할 수 있지.”
운페이가 확언하듯 답했다.
비올레가 놀라고, 세레인이 경악했다. 신이라는 것은 보통 무형의 존재로 생각된다. 하물며 혼돈은 초월적인 신이라 여겨지는 것. 신체를 이루었다는 말이 꽤 놀랍기도 하다. 공허가 봉인 당시 떨어져 나온 껍질이라는 사실을 제쳐 두고라도 말이다.
“하지만 그걸 어떻게 확신하는 건데?”
“혼돈이라는 것은 만상이 뒤섞인 존재. 모든 가능성을 품고 있는 초월적인 무언가지. 무언가가 이를 품고 있었다면 공허 밖에는 가능 한 것이 없어.”
“그렇다고는 하지만……”
“게다가 잘 생각 해 봐. 지금 혼돈을 봉인 한 곳으로 생각 되는 곳은 어디지?”
“그야 교황청 이잖아. 믿기지는 않지만.”
세레인이 힘없이 답했다.
“이번에 온 잉그하트는 교황청의 대주교. 그가 잡으려고 한 사람은?”
“나……잖아?”
“아아. 그렇다면 그 이유가 무엇일까?”
아무도 답을 하지 못했다.
복잡한 표정의 세레인이 운페이의 얼굴만을 바라봤다. 가슴 한 구석이 쿵쾅거리고, 속이 울렁였다. 듣기 싫은 말. 어쩌면 피하고 싶은 현실을 맞닥뜨리는 것 같았다.
“나는 얼마 전에 세레인의 치료 덕분에 한 단계를 초월 할 수 있었어. 그건 닫혀있던 세계가 열리고, 인간의 한계를 뛰어 넘는 경험이었지.”
“그, 그게 나 때문이라고?”
“분명해. 네 성력을 타고 들어온 무언가가 내 안에 있는 공허를 잠재웠어. 그리고 그것은 무언가의 싹을 틔웠고, 내가 가진 한계를 넘을 수 있게 해 주었지. 지금까지의 말을 모두 종합해 봤을 때 그것이 가능한 존재는 단 하나 밖에 없어.”
“……혼돈.”
돌고 돌아 다시 혼돈이니.
세레인의 얼굴이 하얗게 물들어갔다.
“남편, 그게 무슨 말이야? 세레인 저것이 혼돈이라는 거야?”
“아니야. 그건 무리. 초월적으로 지칭 되는 신이잖아. 인간의 몸에 봉인 하는 건 절대적으로 불가능해. 아마 세레인의 어느 부분이 혼돈과 연계되어 있는 거 같아. 그 힘이 성력을 타고 발현되었고, 내 안에 깃든 공허를 잠재운 것이지. 그 덕에 나 역시 혼돈의 씨앗이 피어났고 한계를 초월 할 수 있게 된 거지.”
“어? 잠깐만. 그럼 우리도 이제 아이를 낳을 수 있는 거야?”
혼돈은 닫힌 세계를 열어 주는 열쇠.
그 힘이 있다면 혼종을 낳는 것도 가능하다. 비올레가 희망을 품은 채 물었다. 하지만 운페이는 느리게 고개를 흔들었다.
“아마 그것은 무리 일 거야. 아이를 배는 것은 너니까, 나 혼자 힘을 품었다고 해결 될 문제가 아닌 거 같아. 아발론, 그렇지 않나요?”
[맞다. 당시 펜이 태어 날 때도 조각의 힘은 두 사람 모두에게 작용했다. 한 사람만이 힘을 가지고 있다 해서 허용 되는 기적은 아닐 것이다.]
베올레의 얼굴이 축 늘어졌다.
그러다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고개를 번쩍 들어니 세레인을 바라봤다. 그녀 몸 안에 혼돈과 관련 된 무언가가 있다면 그것을 나눠 받기만 하면 되는 일. 생으로 씹어 먹을 듯 한 눈빛을 했다.
“너. 지금 당장 그거 나한테 넘겨.”
“뭐, 뭘 말이야?”
“혼돈. 아니면 그 찌꺼기라도. 당장 나한테 넘기라고.”
“너, 넘기라고 해도 뭘 어떻게 하라는 건지 모르겠어. 나는 그런 힘이 있는지도 몰랐다고. 나한테 다그친다고 나올 게 아니야.”
당황과 억울함.
복잡한 표정으로 세레인이 부정했다. 혼돈이라니. 생각도 해 본 적이 없다. 그런 게 몸 안에 깃들어 있다니. 믿기도 싫었고 이해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마누라, 그만 해 둬. 세레인은 하는 말은 사실일 거야. 그녀가 혼돈에 대해서 알았다면 이렇게 우리를 따라 다닐 이유가 없어. 게다가 아마 그것은 교황청에 있는 림. 그리고 그것을 주도하는 사도라는 자들도 마찬가지였을 거야.”
“무슨 소리야. 지금 찾으러 왔……아아. 그렇구나.”
“그래. 사도가 하려는 짓은 혼돈과 분명 관련이 있어. 그들의 위치, 사용하는 공허. 권능은 잘 모르겠지만 하여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거지. 하지만 그런 그들이 세레인을 데리고 벗어 날 때 아무런 움직임을 가지지 않았어. 직접 찾으러 온 것은 지금이지. 그 당시 세레인에 대해서 알았다면 이렇게 움직임이 느릴 리 없어.”
혼돈으로 무엇을 하려는 건지는 모른다.
다만, 지금 세레인을 찾으러 왔다는 것은 계획에 무언가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말. 그녀의 힘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면 과거부터 힘을 행사했어야 옳다. 일행만큼이나 그들도 이 사실을 늦게 깨달은 것이다.
“운페이. 잠깐만. 내 몸에 그 힘이 있다는 거……정말로. 정말로 확실 한 거야?”
그때, 세레인이 잘게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표정이 참담했다. 하얗게 질린 얼굴은 당장이라도 쓰러 질 것처럼 힘겨워 보였다.
“진정해. 힘이 있다고 해서 네가 달라지는 건 없어.”
“하, 하지만 그냥 힘이 아니잖아. 막 세상을 뒤흔드는 그런……무지막지한 힘이잖아. 공허라는 괴물 같은 것하고도 연결이 돼 있고……”
“그 괴물은 나 역시 품고 있어. 그리고 잘 생각 해 봐. 네가 성녀로 낙점 되었을 때. 그 당시에도 많이 힘들었을 거야. 남과 다른 입장이 되는 것. 안 그래?”
“아, 응. 사람들과도 고립되고……많이 힘들었어.”
“하지만 지금은 어때? 당시와는 같지 않지? 힘이 있다고 해서 사람들이 배척하는 것도 아니잖아.”
세레인이 무심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운페이의 말에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았다.
“무언가 남과 다른 것이 있다고 해서, 그것이 흠이 되는 건 아니야. 힘은 힘일 뿐. 설사 그 힘이 셈하기 어려울 정도로 아득한 존재라 해도 그것은 달라지지 않아. 너는 너야. 세레인이라는 사람. 어릴 적 나에게 손을 내밀어 줬던 소중한 친구이며 지금까지 함께 고생을 나눠 한 든든한 동료이지.”
“친구이며 동료……?”
조금은 흔들리는 말투로 세레인이 되물었다.
입술을 잘근 씹었다. 마음이 헝클어졌다. 하지만 고개를 숙여서 표정을 숨겼다. 복잡했던 머리는 개운해졌다. 힘. 그까짓 것은 사실 문제가 아니었다. 다만 한 가지. 그보다 더욱 마음을 어지럽히는 것이 있었다.
말 하지 못할 뿐.
“조금 괜찮아 졌어?”
“으, 응. 조금은. 네 말대로 변하는 것은 없으니까. 아직 잘 믿기지는 않지만 받아들일 수는 있을 거 같아.”
“언니, 괜찮아요. 시간이 흐르면 다 해결 될 거예요.”
“세세이……고마워.”
작은 세세이의 손을 마주 잡으며 세레인이 웃었다.
그리 환하지는 않았지만, 그럭저럭 안정 된 미소였다.
“잠깐만. 남편, 그럼 일이 어떻게 되는 거야?”
“일단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지. 첫째는 혼돈의 씨앗. 아발론은 혼돈이 부활해야 가능하다 했지만 내 경우를 볼 때 꼭 그렇지는 않은 거 같아. 만약, 세레인이 힘을 자유롭게 다룰 수 있게 된다면 그 일부를 네게 넘길 수도 있을 거니까.”
“그렇게 되면 우리 아이도 가능해 지는 거겠네?”
“아아. 가능성의 문제지만 혼돈의 부활이라는 거창한 목표에 비해서는 조금 더 가깝겠지.”
“그럼 두 번째는?”
운페이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이것부터가 복잡해지는 문제다.
“사도의 목표지. 그들은 지금까지 꾸준히 무언가를 계획 해 왔어. 페어리나 드루이드의 납치, 남부 왕국에서의 암약 등. 사용하는 힘이나 세레인을 노리는 점 등을 봤을 때 그 끝에는 혼돈이 결부되어 있음이 분명 해.”
“역시……봉인을 풀려고 하는 걸까?”
“위치를 보자면 그것이 타당한 결론이지. 하지만 그럼에도 쉽게 납득 하기는 힘들어.”
“어째서? 광신에 물든 인간은 언제나 등장하는 거잖아.”
광신.
가장 간단한 단어 하나로 림과 사도의 움직임을 평가 할 수 있다. 하지만 운페이는 못내 무언가 석연치가 않았다. 믿음에 국한 되어 움직였다고 보기에는 걸리는 것이 많았다. 직접 무어라 말 하기는 힘들었지만 초월적인 수준에 달한 감각이 그렇게 얘기하고 있었다.
“만약. 혼돈이 봉인에서 풀리게 되면 무슨 일이 일어나?”
흐릿한 얼굴로 세레인이 물었다.
세세이의 손을 꼭 잡은 채로 있었다. 조금은 위태로운 모습에 운페이가 안쓰러운 마음을 가졌다. 비올레가 없었다면 가서 꼭 안아 주기라도 했을 정도로.
“그것도 확신 할 수는 없어. 옛 일이 전부 사실이라면 혼돈은 억지로 봉인 당한 존재. 가장 안 좋은 결론은 신들의 싸움이 되겠지. 세상이 쪼개지는 건 덤이라고 해야 할까.”
“……나는?”
“그것도 솔직히 잘 모르겠어. 봉인을 풀기 위한 수단으로 네가 힘을 품은 거라면 그것을 양도하는 것에서 끝날 수 있겠지.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내가 위험 할 수도 있겠네?”
운페이가 굳이 답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는지 세레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히 가능 한 일. 인간이 혼돈을 모두 담을 수는 없을 테니, 세레인은 아마도 부수적인 장치. 봉인이 풀릴 때의 여파에서 무사 한다고 장담 할 수가 없었다.
“흥. 멍청한 년. 아무리 그래도 억지로 봉인을 풀게 하지는 않을 테니 걱정은 마라.”
“……비올레?”
“이미 남편에게 힘을 준 경험이 있잖아. 다시 한 번 하면 그만이다. 봉인을 풀어서 네년이 죽네 사네 하는 꼴은 없게 할 테니, 그 죽을상은 펴.”
“아, 응……”
의외의 격려였을까?
세레인이 살짝 풀어진 얼굴로 답을 했다. 생각은 복잡했지만, 비올레의 단순한 말을 들으니 가슴 한 쪽이 조금은 시원해지는 기분이었다.
[인간들이 다가오고 있다. 상당히 많은 숫자의 마력 유동도 느껴지는군.]
그때, 아발론이 입을 열었다.
허공의 한 부분을 바라보고 있었다. 몸은 이미 뒤쪽이 완벽하게 보일 정도로 투명해져 있었다. 그의 생명력이 얼마 안 남았다는 증거.
“아마도 이것이 마지막. 펜에게 남길 말은 없습니까?”
운페이가 쌍검을 손에 쥐며 물었다.
신전 밖에 있는 인간들은 잉그하트를 따라온 병력 일 터. 딱히 위협적인 건 없었다.
[남길 말이라. 그래, 이 말 정도는 남기고 싶군.]
아발론의 몸이 연기처럼 흔들렸다.
이제는 정말로 마지막. 쥐어짜듯 힘을 모아 한 마디를 흘렸다.
[펜. 그 아이의 부모는 서로 사랑하여 아이를 가진 것이다. 그러니, 펜에게 전해 다오. 너는 사랑받는 존재라고. 그것도 아주 많은 사랑을……]
우르르릉. 시전이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신전은 아발론 그 자체. 그의 죽음은 신전의 붕괴와 직결된다.
[……지 말고. 사랑……존재임을. 부디 훌륭하게 …… 기를. 부탁한다.]
콰르르르릉.
그 말을 끝으로 신전이 무너져 내렸다.
- 작가의말
혼돈 : 봉인된 혼 + 공허.
공허 : 껍데기.
림 : 사도 + 전승지기(기본적으로 사도가 더 높은 위치)
거의 대부분의 사정이 나왔군요.
재밌게 보고 가세용.
Comment '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