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3. 오래 된 것. 오래 될 것.
회색빛을 몸에 두른 세레인이 천천히 눈을 떴다.
사위가 잠식당해 무겁게 침잠해 있었다. 대기의 작은 떨림조차 그녀에게는 전해지지 못했다. 그녀가 있는 공간만이 따로 떨어져 격리 된 듯 다른 이치로 돌아가고 있었다.
“하하하! 멋집니다. 그것이야 말로 당신이 가져야 할 진면목.”
“세레인……?”
세세이가 걱정스레 이름을 불렀다.
느낌이 달라졌다. 평소 세레인이 가지던 분위기가 사라지고, 무언가 복잡한 기운이 그 위로 덧씌워졌다. 너무나 진하고, 복잡하여 제대로 볼 수 없는 그런 기운이었다.
“어떤가요? 그분의 힘이 몸 안을 가득 채운 기분은?”
“……”
“눈을 뜨고 보세요. 하찮은 인간 하나 둘에 연연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타이렌의 목소리는 짙은 염원을 담고 있었다.
세레인이 눈을 완전히 떠서는 그를 바라봤다. 눈동자는 회백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초점은 흐릿하고, 표정은 딱딱했다.
“타이렌. 나를 너무 쉽게 생각하지 않았나?”
“……뭐?”
세레인의 입이 열렸다.
하지만 나온 말은 타이렌의 생각과는 달랐다. 내부에 차 있는 혼돈의 힘이 그녀의 의식을 잠식하고, 잔재의 본능으로 유도 할 거라 여겼다. 지금과 같은 뚜렷한 이성이 아니라.
“너는 항상 그랬지. 오만한, 타이렌.”
“네년. 이르미아구나!”
“쿡. 이제야 알아보는 건가? 그 사이 늙어서 머리가 어떻게 되기라도 한 건가?”
딱딱하던 세레인의 표정이 풀어져갔다.
조금은 여유롭게. 비틀려 올라간 입매가 타이렌을 비웃었다.
“아르미아? 그건 대지모신의 이름 아닌가?”
“서, 설마.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생츄어리 주민 몇 명이 의문을 표했다.
갑자기 나타난 타이렌도 그렇고, 회색빛과 뜻 모를 대화 전부. 이해하지 못하는 것뿐이었다.
“이런. 주연배우가 모두 없는 곳에서 깨어나게 되다니. 조금은 아쉬운데?”
“네년이 어째서 그 몸에 머무르고 있는 거지!?”
“타이렌. 그 잘난 머리를 굴려보는 건 어떨까? 항상 입버릇처럼 말하지 않았나? 너희 같은 멍청이와 나는 다르다고.”
비죽이 웃는 세레인의 얼굴에 타이렌의 표정이 굳었다.
“설마 나를 염두에 뒀었다는 거냐?”
“네 행보를 이상하게 생각한 이들이 몇 명 있었지. 사실 혼돈을 봉인한 이후에 상황이 이렇게 풀려 갈 거라 예상하고 한 건 아니지만. 어쨌든 잘 되지 않았나? 너 따위에게 그를 넘겨주지 않을 수도 있고.”
“빌어먹을 놈들. 그 와중에도 나를 시기했다는 건가?”
“시기? 넌, 항상 그런 식이군. 우리는 네 오만한 성정을 우려했을 뿐이다. 네 잘난 자아가 세상을 망치지나 않을까 하고.”
“개소리!! 너희같이 답답한 놈들이 신이라니!”
콰르릉.
타이렌의 발치를 타고 거대한 힘이 번졌다. 공간이 짓눌려 마구 비명을 질렀다. 사방에 모여 있던 생츄어리 인물들은 머리를 바닥에 처박은 채 움직이지 못했다.
“쯧쯧. 욱해서 힘쓰는 것좀 보라고. 그러니까 우리가 너보고 미친놈이라고 하는 거야.”
“헛소리 집어치워. 당장 꺼지고, 그 안에 깃든 열쇠나 내 놓으시지.”
“흥. 내가 미쳤다고 그걸 너에게 줄까?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한 번 해보자는 건가?”
타이렌의 눈이 싸늘하게 식었다.
대기가 파랗게 타 올라 연기마냥 흔들렸다. 그것은 하나하나가 힘. 낱알처럼 뭉친 연기조차 어마어마한 에너지를 응축하고 있었다.
“집어치워. 애도 아니고 또 싸우자는 건가?”
“원하는 게 있나?”
“간단히 내기를 하나 해 보자는 거지.”
“내기?”
의외의 말.
타이렌이 힘을 거둔 후, 잠잠해진 눈으로 세레인을 응시했다. 그가 아는 바에 의하면 이르미아는 허튼 소리 하는 신은 아니다.
“네가 원하는 것은 이 몸에 깃든 열쇠. 즉, 봉인을 풀어 줄 혼돈의 힘이지.”
“네가 원하는 건?”
“초월한 무언가.”
“무슨 소리냐?”
“간단해. 나는 이 길로 너를 따라가겠어. 성국에 잡힌 공주님의 신세가 되는 거지. 그리고 그곳에서 선택지를 놓은 채 기다리는 거야.”
세레인이 짙은 미소를 두른 말을 늘였다.
그녀는 생각했다. 이것이야 말로 소망을 둘어 줄 유일한 방법이라고. 마음은 극적인 곳에서 터져 나오는 것. 타이렌이 와 주었으니, 기회라 여겼다.
“선택지? 누구에게 말이냐.”
“나를 쫒아올 아이들. 과연 어떤 선택을 할지 그것이 궁금해.”
“마왕과, 그 인간을 말 하는 건가? 아니지. 마왕이 아니야. 네가 바라는 것은 그 인간이군. 혼돈의 힘을 나눠준 것도 그 인간에게 국한되어 있고. 이유가 뭐지?”
“후후. 너처럼 삭막한 놈은 이해하지 못할 거야. 그래서 어때? 여기서 나와 죽을 때까지 싸워 볼 텐가? 아니면 조건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순순히 양도를 받을 텐가?”
“네가 성국으로 온다면, 열쇠를 넘기겠다는 건가?”
“선택이 끝난 후에.”
어떤 선택인지에 대해서는 설명을 하지 않았다.
타이렌의 눈이 슬쩍 굴러갔다. 굳이 상관은 없다. 어차피 세레인만 성국으로 데려 갈 수 있다면 기본적으로 성공. 받아 들여서 나쁠 건 없었다.
“좋아. 받아들이지.”
“잘 생각했어. 어떤 일이든 결말은 어울리는 곳에서 나야 하는 법. 이런 곳은 아니지.”
“아르미아. 그 헛소리는 여전하군.”
“후후. 그럴 수밖에. 지금은 대지모신, 빛의 신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내 진짜 이름은 다른 거니까.”
세레인. 아니, 아르미아가 가슴에 손을 얹은 채, 숲 너머를 바라봤다.
마치 그곳에 무언가 있는 듯. 조금은 애잔한 눈빛으로 응시했다.
“사랑의 신. 이름값은 해야지.”
담담한 목소리가 작게 흘렀다.
***
“……뭐?”
하그네스를 처리하고 돌아온 운페이는 충격적인 이야기를 접하게 된다. 타이렌의 등장과 코론의 죽음. 그리고 사라진 세레인에 대한 이야기였다.
“신? 스스로 그렇게 말 했어?”
“네. 타이렌은 아르미아라고 불렀어요.”
서기관인 타이렌이 와서 세레인을 찾았다.
그 과정에서 코론이 죽고 여럿이 다쳤다. 분노한 세레인이 갑자기 기묘한 힘을 내뿜더니, 아르미아라는 신이 되었다.
이게 대체 뭔가.
운페이가 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리고 이 말을 전하라고 했어요.”
“남긴 말이 있어?”
“네. 세레인 언니는 성국에 있을 테니까, 찾고 싶다면 그곳으로 찾아오라고 했어요. 늦으면 후회 할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납치범의 성명 발표인가?
운페이가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이해 할 수 없는 것 투성이다. 갑자기 폭발한 힘이야 혼돈의 것이라 생각하면 이해 할 수 있다. 하지만 갑자기 등장한 아르미아는 뭐고, 타이렌과의 대화는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가. 게다가 왜 성국을 따라갔을까. 복잡한 생각에 머리가 터질 듯 아파왔다.
“남편, 진정해. 어차피 간단 한 거 아니야?”
“응?”
“성국으로 가려고 했잖아. 가는 이유가 하나 더 생긴 것뿐이야. 겸사겸사 세레인도 구하면 되지.”
운페이가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비올레의 말이 맞다. 어차피 목적지는 성국. 가야 할 이유가 하나 더 생긴 것 뿐이다. 이해 못하는 것들은 추후에 확인 하면 될 터. 복잡한 생각에 심력을 갉아먹을 필요는 없었다.
“그보다 여기부터 정리를 해야겠군.”
죽은 코론은 생츄어리의 습성대로 오래된 나무와 함께 묶어서 지하로 옮겼다. 죽은 이는 자연으로 돌아간다는 뜻이었다. 친한 것은 아니지만, 성국을 뒤로 한 채 따라 와준 인물이다. 씁쓸하지 않을 리 없었다.
같이 온 병사들이 전부 눈물을 보였다.
생츄어리에서 함께 한 몇 달 동안, 그들은 마치 가족처럼 지냈다. 코론의 죽음은 그저 스쳐가는 병사 1의 흔적이 아니었다.
운페이와 비올레도 마음을 담아서 위로를 했다.
“한 사람은 떠나고, 한 사람은 죽고.”
“슬픈 거야?”
“응. 하지만 더 슬픈 건……”
운페이가 가슴을 부여잡았다.
세레인이 떠났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기는 했다. 하지만 그것이 마음을 찢어 놓을 만큼 복잡한 감정으로 다가오지는 않았다. 코론의 죽음 역시 마찬가지. 충격적인 일이기는 하지만 그저 일어난 사건 중 하나.
그 이상의 느낌을 받지 못했다.
“더 슬퍼해야 정상인데 그러지를 못하고 있어.”
“감정이 쥐어짠다고 나오는 것도 아니잖아.”
“알아. 하지만 이건 이상해. 하루 이틀 같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이런 삭막한 마음은 너무 생소해. 이게 정말로 내 마음이라는 말이야?”
비올레가 슬쩍 다가와 운페이를 감싸 안았다.
너무 갑작스럽게 슬프면 그럴 수 있다. 상실감이라는 것은 천천히 느껴지는 것이 보통. 갑작스러운 상황에 감정이 미처 반응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
하지만 이는 아니다.
운페이가 느끼는 감정은 갑작스러운 충격에 마비 된 신경과는 달랐다. 큰 바다에 던진 소금물 하나 정도라 해야 할까. 느끼는 것은 분명하나, 그 정도의 체감이 너무나 작은 것이었다.
‘부작용 같은 건가……?’
그제야, 운페이가 한 가지를 떠올렸다.
특정 한 순간에 느꼈던 고양감. 그것은 마치 세상을 발아래에 두는 아득히 높은 세계의 초월자와 같았다. 저 아래에서 움직이는 것들은 너무나 작아서 하찮게 보이는. 그런 걸 잠시나마 느꼈으니, 그 외의 것들이 우스워 보일 수밖에 없다.
“남편?”
“후우. 이제는 괜찮아. 걱정 끼쳤네.”
“흥. 나약한 모습을 보고 싶지 않을 뿐이야.”
팩 돌아서는 비올레의 어깨를 다독였다.
어찌 됐건 옆에 남아서 위로를 해 주는 건 역시 아내 밖에는 없다. 가슴 언저리가 간질거렸다. 사랑스럽게 느끼는 마음을 불꽃으로 표현하면 이러할까. 게다가 놀랍게도, 그 많은 것들을 낮게 보는 지금의 마음속에서도 그 불꽃만큼은 굉장히 거대했다.
‘이거 참……’
이만큼이나 비올레를 사랑하고 있구나.
묘한 감상이었다. 세레인이 사라지고, 알던 이가 하나 죽었는데 그 상황에서 사랑하는 이에 대한 마음을 확인하게 되다니.
‘또 미안해 지네.’
사라진 세레인.
자신의 발로 갔다고는 하지만, 스스로를 아르미아라고 불렀으니 의식이 없는 게 분명하다. 도중에 깨어난다면 얼마나 당황을 하고 있겠는가. 어쩌면 어딘가에 갇혀서 자신을 찾고 있을지도 모른다.
“……”
그럼에도 마음의 유동은 얼마 되지 않는다.
그것이 세레인을 너무 가볍게 여기는 것 같아 착잡하다.
운페이가 고개를 흔들어 생각을 털어냈다.
이것은 고심한다고 바꿀 수 있는 게 아니니까.
***
“나를 찾아올까요?”
“그럼. 내가 확실하게 해 두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후후. 마음은 부딪히는 사람만이 쟁취 할 수 있는 법이란다.”
하나가 묻고, 하나가 답을 했다.
“만약, 그럼에도 보답을 받지 못하면 어떻게 되는 걸까요?”
“마음은 꺾이고 부러지고 상처입어도 사라지지 않는단다.”
“하지만……”
“다 태우고 소진하고 나면 무언가 찾는 게 있겠지.”
과연 그럴까.
묻던 하나가 의문을 삼켰다.
- 작가의말
이 소설의 시작은 사랑얘기 였답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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