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9. 생츄어리
“너! 물어 볼 게 있다! 당장 이리로 와!”
그를 본 비올레가 훌쩍 뛰어 다가갔다.
그녀에게 있어서 혼종. 즉, 아이에 관한 문제는 매우 민감한 일이다. 포기했던 일에 희망이 생겼다면 누구라도 그녀와 같이 움직였을 것이다.
“무슨 짓이지? 물러나라 어둠의 종자.”
“닥치고, 불어. 너, 하프가 맞는 거냐?”
“……누가 말했지? 페이 그 노망난 영감이 말 한 건가?”
남자의 눈매가 매섭게 빛났다.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고, 말하기나 해! 넌 정말로 하프인가?”
“내가 답해야 할 이유는 없을 텐데?”
“네놈이!!!”
콰르르릉.
비올레의 발치가 거대한 소리와 함께 무너졌다. 새카맣게 올라온 어둠이 몸을 칭칭 감은 뒤 망토처럼 휘날렸다.
“웃기는군. 내가 그런 것에 눈 하나 깜빡할 것 같나?”
“죽여……”
“잠깐만. 진정하라고.”
발끈하여 힘을 사역하려는 비올레를 운페이가 막아섰다.
씩씩 거리는 그녀의 어깨를 살짝 다독인 다음에, 남자와 그녀 사이를 가로막았다.
“이름이 뭐지?”
“흥. 그걸 내가 왜 말해야 하지?”
“그럼 내 마음대로 불러도 되는 건가? 트롤 배설물로 하지. 어때, 마음에 드나?”
“유치하군. 펜. 내 이름은 펜이다.”
“반갑군 펜. 나는 운페이, 이쪽은 내 아내인 비올레라고 한다.”
운페이가 손을 내밀었지만 펜은 무시했다.
‘까칠하군.’ 낮게 중얼거린 운페이가 손을 내리고는 그의 면면을 살폈다. 갈색 면 셔츠에 밤색 가죽 바지. 허리춤에는 녹색 끈으로 만든 벨트를 착용했고, 허리 뒤로는 검은 색 석궁을 달았다. 사냥꾼의 복장. 하지만 얼굴이 하얗고, 눈이 커서 외유를 나온 귀공자의 느낌이 더 강했다. 말투만 조금 더 나긋했다면 남부 귀족가의 인물이라 해도 믿을 정도.
“하프 엘프라고 들었다. 이 세계에서 하프는 불가능 한 것으로 아는데, 어떻게 그게 가능했던 거지? 그 이유를 알고 싶다.”
“흥. 다시 한 번 말 하지만 그 이유를 말 해 줄 이유는 없을 텐데?”
운페이가 슬쩍 뒤를 돌아봤다.
엉망으로 당한 레오파드 등이 끙끙 거리며 그가 있는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좋아. 그럼 내기 하나를 하지. 보아하니, 인간에 대해서 반감이 좀 있는 거 같은데 순수하게 힘으로 결정 내 보는 건 어때?”
“힘으로? 그건 꽤 구미가 당기는 말이군.”
“이렇게 하자고. 내가 이기면 너는 우리 질문에 답을 해 주는 것이고, 내가 진다면 원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한 가지 들어 주지.”
“호오. 무엇이 되도 말인가?”
“무엇이 된다 해도.”
펜이 입술을 비틀어 올렸다.
그도 운페이가 강한 건 알고 있다. 경매장에서 붙어 본 것으로 상대의 강함을 경험 한 바 있으니까. 하지만 이곳. 숲의 기운이 강한 이 장소에서라면 그 누가 됐든 이길 수 있는 자신감이 있었다.
“개처럼 짖게 해 주지.”
허리에서 단검을 뽑으며, 펜이 웃었다.
***
운페이는 현재 맨손이다.
설풍은 망가졌고, 딱히 다른 무기를 구할 시간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펜에게 단검 두 자루를 빌렸다. 투박하고, 그리 날카롭지 않은 무기이지만 상관없었다. 간만에 손에 쥔 단검의 감촉에 운페이가 가볍게 웃었다.
“흥. 네놈도 단병을 쓰는 거냐?”
“배워먹은 게 그래서 말이지. 그보다 말로만 할 텐가?”
“하! 어디까지 그 얼굴이 유지되나 보자고!”
파앙. 펜이 지면을 박차고 뛰었다.
굉장히 날래고 경쾌한 동작이었다. 탄력이 대단한 듯, 몸이 붕 뜨는가 싶었는데, 금세 운페이의 전면에 도착해 있었다.
쉬잇. 싯. 단검이 예리하게 운페이의 곁을 스쳐갔다.
찌르고 벤 뒤, 단검을 허공에 던졌다. 핑그르. 몸이 돌아 역수로 목을 노리고, 공격이 빗나가는 순간 떨어지는 단검을 손에 쥐어 앞으로 찔렀다. 곡예를 넘는 것 같은 동작. 빗발치는 공격에 운페이가 연신 뒤로 밀렸다.
“그게 다인가!? 역시 인간은 허풍뿐이군!”
“설마. 단검 쓰는 모양새가 제법 그럴듯해서 조금 지켜봤을 뿐이야.”
타앙. 펜의 단검을 운페이가 정면에서 막았다. 검극에 검극이 충돌했다. 균형, 힘, 속도. 모든 것이 딱 맞아 떨어졌다. 불꽃이 튀고, 두 사람의 팔이 양쪽으로 밀려났다. ‘큭!’ 펜이 이를 악물고 다시 단검을 뿌렸다. 위, 아래, 옆. 고속의 검격이 이어졌다.
타타탕. 하지만 이 역시 하나 하나 동일한 궤적의 검격으로 쳐냈다.
빙글빙글. 운페이가 물러나는 펜을 보며 단검을 손 위에서 돌렸다. 단검이 이루는 궤적은 무한해 보일 정도로 많지만, 움직임을 보면 자주 쓰는 방향을 읽을 수 있다. 그리고 운페이는 이 궤적이 이루는 최적의 동작을 숙지하고 있다. 느리게 출발하여 상대보다 먼저 그 위치를 점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어디 이것도 막을 수 있나 보자!”
펜의 몸이 아래쪽으로 쑥 꺼졌다.
입에 단검 한 자루를 물고는 낮은 자세로 돌진했다. ‘하하!’ 운페이가 경쾌하게 웃었다. 그의 모습을 보니, 한 사람이 떠올랐다.
“파이엔에게 무법을 배웠나 보군.”
“어떻게!?”
깜짝 놀란 펜이 자세를 흐트러뜨렸다.
운페이가 가볍게 웃으며 몸을 바짝 숙였다. 얼굴이 펜과 거의 맞닥뜨릴 정도. 우수로 지면을 훑으며 그의 어깨를 찔렀다. 타이밍을 빼앗긴 펜이 그대로 맞서지 않고, 단검을 쥐지 않은 손으로 바닥을 치며 몸을 띄웠다.
“너무 익숙한 수야.”
하지만 운페이는 그의 움직임을 예상하고 있었다.
펜이 몸을 채 돌리기 전에 바닥을 훑어가던 단검을 지면을 꼽고는 몸을 거꾸로 세웠다. 그리고 그 다리는 허공을 도는 펜의 얼굴에 딱 맞는 높이에 위치했다.
쩌억!! 우당탕!
얼굴을 얻어맞은 펜이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하얀 얼굴이 시퍼렇게 멍들었다. 바닥을 짚으며 황급히 일어나기는 했지만,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너, 너! 어떻게 네가 이걸 알고 있는 거지?”
“석궁을 쓸 때는 몰랐는데, 단검술을 보니 확실히 알겠어. 페이엔은 아직 살아있는 거냐?”
“말 해! 네가 그분의 이름을 어떻게 아는 거지?”
“그야, 나 역시 그에게 무법을 배웠으니까. 마수와 상대하면서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용케 도망친 모양이군. 하여튼 그 인간, 재주도 참 좋아.”
페이엔은 운페이가 붉은 숲을 벗어나기 전. 마지막으로 같이 생활하던 인물이다. 사냥꾼들에게서 독립한 그가 숲의 강자들을 상대 할 당시 경고를 하며 등장했었다. 스스로를 숲지기라 칭하며 함부로 가면 안 되는 알려주기도 했었다.
붉은 숲의 마수가 등장하기 전까지, 두 사람은 무에 대해서 토론하고 서로가 가진 것을 주고받았다. 운페이가 주로 받는 쪽이었지만, 적어도 사제지간 보다는 친구에 가까웠다. 그 생황이 깨진 건 붉은 숲의 마수가 사냥을 위해 아래쪽으로 내려왔을 때. 호기롭게 나선 운페이가 목숨에 경각에 처했고, 페이엔이 이를 도와 그를 도망치게 했었다.
당시, 처참한 상처를 입고, 페이엔의 뒷모습만을 보았던 운페이는 그가 꼼짝없이 죽었다고 생각했었다. 그 만큼 붉은 숲의 마수는 강했으니까. 지금 이 순간, 그의 무법을 계승한 펜을 만나기 전까지는.
“네가 그분에게 무법을 배웠다고? 말 도 안되는 소리! 그분이 인간에게 그런 걸 전수 할 리가 없어!”
“무슨 소리지? 페이엔도 인간으로 알고 있는데?”
“흥! 개소리. 그분은 고대 웅크라의 마지막 남은 혈족. 인간 따위와 비교 할 분이 아니다!”
웅크라는 통곡의 벽이 생기기 전부터 대륙에서 살아 왔다는 고대 종족으로 알려져 있다. 정확히 그들이 무엇이고, 어째서 지금은 혈통이 끊긴 건지는 자세하게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그들이 굉장히 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으며, 인간과 흡사한 외모를 가지고 있다고 전해 질 뿐이다.
“남편, 웅크라라면 그 인간하고 같은 거 아냐?”
“아아. 이거 참, 저렇게 용쓰는데, 설명하기도 뭐하네.”
운페이가 머리를 긁었다.
그는 웅크라의 혈족을 한 명 더 알고 있다. 그리고 그가 펜이 생각하는 것처럼 이 종족이 아님도 알고 있다.
바로 앙타라. 장벽 이북이서 만나, 그에게 무법을 전해준 인물이다. 그 역시 웅크라 일족이었다. 하지만 웅크라 일족은 과거 인류에서 갈라진 특정 집단 일 뿐, 고대 종족은 아니다. 신비를 탐구하여 초월적인 강함을 손에 넣었던 것이 그들의 존재에 대해 많은 소문을 낳았던 것이다.
“닥쳐라!”
펜이 다시 한 번 달려들었다.
몸을 좌우로 흔들면서 단검을 사선으로 휘둘렀다. 움직이던 동선 탓에 단검의 궤적이 마치 물결치듯 흔들렸다. 페이엔은 이것을 파형(波形) 베기라 했었다. 체력 소모가 많지만, 제대로 구사 할 수 있다면 어떤 방어라도 능히 깨뜨릴 수 있다고 자신했었다.
“하지만.”
퉁. 운페이가 목 언저리로 단검을 흘리며 접근했다.
어깨와 목덜미가 가볍게 베였다. 눈앞에 놀란 펜의 얼굴이 보였다. 파형 베기의 단점. 공격 궤도가 현란하다는 점을 무시 한 채 근접 할 수 있다면, 지금처럼 무방비로 노출되어 버린다.
쩌억. 운페이가 손잡이 부분으로 펜의 복부를 후려쳤다.
그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지고, 한 뼘 가량 공중으로 떠올랐다.
“커어억!! 컥……!”
주저앉은 펜이 거칠게 숨을 토해냈다.
숲의 힘이 활력을 불어넣어 주지만 쉽게 고통이 가시지 않았다. 마치 타격당한 지점에 검 날이 박혀서 계속 고통을 선사하는 느낌이었다.
“아직 이것까지는 배우지 못한 모양이군. 파문(波文)이라는 수법이다. 타격점에 진동의 힘을 불어넣어, 회복을 방해하는 거지. 보통은 재생력이 강한 몬스터에 쓴다. 아니면 너처럼 꾸준히 힘을 부여받는 적이라든지.”
“……크으.”
“알고 있었냐고? 당연하지. 내가 뱀파이어 마누라 밑에서 몇 년을 살아 왔다고 생각하는 거냐? 생명력의 유동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빠삭하다고.”
운페이가 자랑스럽게 말하자, 비올레가 괜히 옆구리를 찔렀다.
하지만 이건 과장이 아니다. 비올레와 만났던 초반에는 그녀 때문에 수차례 죽을 뻔 했던 운페이다. 공허와의 싸움으로 넝마가 된 몸을 회복하기 위해서 비올레가 과하게 흡혈을 했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 생명력의 유동을 깨우치게 된 것은 목숨 건 수련의 일환이라 봐도 크게 이상이 없었다.
“자, 이제 인정하시지. 넌 내게 패배했다.”
“나는 아직……”
“페이엔이 그렇게 가르쳤나? 구질구질하게 매달리라고?”
“크윽!!”
페이엔은 자유로운 생각에, 거칠 것 없는 행동을 즐겨했다.
하지만 단 한 가지. 결과에 승복하고, 일에 책임을 지는 것에는 매우 철저했다. 강한 힘에는 그 만큼의 책임이 따른다. 그가 입에 달고 다니던 말이다.
“자, 그럼 이야기를 들어 보실까?”
“……”
펜이 입술을 잘근 깨물고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운페이와 비올레를 번갈아 바라봤다.
“너희가 궁금한 것은 하프의 탄생에 관한 거겠지?”
“알고 있는 거냐?”
“그건 나도 모른다. 나 역시 이렇게 태어난 다음에 숲에 버려져 있던 몸이니까.”
“아……!”
비올레가 이마를 짚고는 휘청거렸다.
운페이가 황급히 허리를 잡으며 부축했다. 산이고 들이고 뒤집어 버릴 수 있는 힘의 비올레지만 이 문제에 관해서는 너무나 연약했다. 그것은 그녀가 운페이를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이다. 스스로의 욕심으로 그와 연을 맺은 거라면 이렇게 아쉬워 할 리 없다. 인간이 가진 종족 번식의 욕구를 알기 때문에, 더욱 더 아쉽고 슬픈 것이다.
“단, 그에 대해서 알 법한 사람은 한 명 있다.”
“누구지?”
“숲에 버리진 나를 주워서 지금까지 키워주신 분. 생츄어리의 왕.”
페이는 생츄어리에 왕이 없다고 했지만, 펜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왕 이어야 하는 존재. 아니, 왕 일수밖에 없는 자.
“아발론. 이 세계에 마지막 남은 정령왕이다.”
- 작가의말
웅크라 : 현생 인류의 아득한 선조 격. 특별히 지칭하는 단어가 있는 이유는 고대에 그들 자체를 새로운 종으로 정의했던 학자가 있기 때문이다. 시간이 흐르며, 명맥을 잇는 이들은 대륙 전역으로 흩어졌다.
정령 : 세계이면에 구성 된 스피릿 플레인에 사는 존재들. 생명에 담긴 에너지가 반대편으로 투영되어 존재한다. 과거에는 차원간의 교류가 활발하여 대륙에 종종 모습을 드러내곤 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는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
정령왕 : 정령계 지역구 대표. 이장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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