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5. 변화
“운……페이.”
울먹이는 목소리에 운페이가 손에 쥔 구슬을 휙 집어 던졌다.
시오나가 얼떨결에 이를 받아 들었다. 안개를 엮어서 넣은 듯 뿌옇게 물들어 있었다.
“네 말대로 힘을 끊어내고 남은 잔재가 그 모습이야.”
“아이들의……?”
“아아. 부서지는 의지들이 서로 엉켜 든 거지. 네가 품에 쥔다면 시간이 걸리더라도 원래대로 복구 할 수 있을 거야.”
시오나가 구슬을 품 안에 꼬옥 안았다.
자신을 배반하고, 세상을 어지럽게 만든 신들이지만 가장 처음 낳은 아이들이다. 그 소중함은 이루 말 할 수 없었다.
“시, 신들이 모두 사라졌다는 거야?”
“아, 세레인. 그러고 보니 네 안에 남은 아르미아는 아직 남아 있군.”
“그럼 그녀도 저렇게 만들어야 하는 거야?”
“뭐 상관없지 않겠어? 하나 정도는.”
대수롭지 않게 답하는 운페이를 보며 시오나가 냉큼 고개를 흔들었다.
하늘을 총총이 걸어 그의 앞에 섰다.
“나도, 신도. 이제는 모두 사라져야 해. 인간과 이종족들. 이 세계에 남은 다른 생명들이 스스로 살아가야 하는 시대가 열린 거야.”
“아르미아도 사라지자?”
“응. 이건 당연한 시대의 바람이야. 새로운 것들을 위해서 오래된 것들은 사라져 줘야 해.”
시오나는 진심으로 그리 생각했다.
너무나 강력한 것들은 그 자체로 세상은 어지럽힌다. 인간과 이종족. 다른 수많은 생명만 이 세계에 있었다면 다툼은 있었을 지언즉 그 이상은 없었을 것이다.
신과 혼돈. 초월한 것들은 이제 더 이상 이 세상에 있어서는 안 된다.
몇 번이고 생각 한 끝에 내린 결론이었다.
“오래된 것에는 너나 혼돈만 있는 게 아니야. 나도, 비올레도 아르미아도 모두 포함이 돼. 이들도 전부 사라져야 한다는 말이야?”
“……하지만 어쩔 수 없잖아. 이 지독한 고리를 끊기 위해서는 큰 결단이 필요한 거라고.”
“고민 끝에 한 생각이 그거였어?”
놀린다는 생각에 시오나가 발끈해서 운페이를 봤다.
하지만 그는 부드럽게 웃고 있을 뿐이다. 놀리는 표정은 어디에도 없다.
“하지만 말이야. 신들도 그렇고 너도 그렇고. 사실은 사라지고 싶은 생각은 어디에도 없는 거 아니야?”
“……”
“실수투성이지. 배운 게 없어서. 어찌 할 바 몰라서 머리를 맞대고 가진 꾀 잔뜩 짜내서 세상을 꾸몄어. 그런데 일이 꼬이고, 생각이 어지러워지고, 상황이 복잡해졌어. 솔직히 어찌 할 바 모르는 거잖아. 안 그래?”
시오나가 가슴 언저리를 손으로 눌렀다.
어째서. 기억이 돌아오고 이 의문을 계속 품었다. 어째서 자신은 이렇게 태어났는가. 아무것도 모른 채. 외로움에 신들을 낳고, 뒤를 챙기지 못하는 어리석은 존재로. 현명하여 세상을 보살 필 수 있는 위대한 존재가 왜 되지 못한 것일까 하고.
“하지만 그건 너희만 그런 게 아니야. 인간도 이종족도. 하물며 이성이 거의 없는 몬스터들 조차 같아. 배우지 않고 현명한 존재는 어디에도 없어. 실수하고, 엉망이 된 걸 스스로 체험하면서 천천히 고쳐가는 거야. 그게 삶이야. 신이나 혼돈이라고 해서 다를 바 없어.”
“하지만 실수라는 말로 끝날 일이 아니잖아!”
“미안하면 만회하려고 해야지. 그대로 도망가서야 되겠어?”
“……!”
가슴이 쿡 찔린 거 같아, 시오나가 질겁한 표정을 지었다.
안다. 그녀 자신도. 뒤안길로 사라지자는 선택은 벌여놓은 혼란에서 도망치고자 하는 것 뿐임을. 하지만 어찌 해야 할 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무섭고 두려워 그냥 도망치고 싶었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어야 하는 게 맞아. 하지만 그 끝을 네가 정해서야 옳지 않아.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어떤 세상이 생겨났는지 직접 보고 경험한 다음에 선택을 내리라고. 그때가 되어서도 늦지는 않으니까.”
웅. 운페이의 몸 주변으로 희미한 기운이 서렸다.
거대한 힘의 집약이다. 하지만 주변에는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않았다. 미는 듯 당기는 듯. 뒤엉킨 채 위세를 자랑했다.
“남편, 무슨 짓을 하려고 그래?”
“시오나. 딸 이름으로 정해 놨다고 했지?”
“그렇기는 한데……”
“음음. 좋은 이름인 거 같아.”
이 양반이 대체 무슨 소리인가.
비올레가 이해 안 가는 얼굴로 운페이를 바라봤다.
“혼돈이 아닌 모습으로……”
“세상에 발을 들이지 않고서는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 없어. 정말로 미안하고 죄를 갚고 싶은 거라면 그 안에 들어와서 경험해.”
“하지만 어떻게……?”
“그 동안 네 위치는 내가 맡아 둘 테니까.”
화아악-!
운페이의 등 뒤로 회색 날개가 펼쳐졌다.
얼마나 거대한지 지평선 너머까지 그 빛이 닿았다. 마치 세상을 품에 안은 거대한 새와 같았다. 사위가 눌리고, 만물이 지배되어 고개를 숙였다.
“내, 힘……”
“맞아. 신들의 고리를 끊으며 받아 들였지. 본래 네 힘에 비하면 어림도 없겠지만 아직 회복되지 않은 너라면 얼추 비슷할 거야.”
“안 돼. 그건 인간이 감당 할 수 있는 게 아니야. 모든 걸 받아서 어떻게 버티려고!?”
“인간을. 나를 우습게보지 말라고. 네가 말 한 것처럼 우리는 너를 가장 많이 닮았어. 잠시나마 이를 담아 둘 수 있는 게 있다면 우리밖에는 없을 거야.”
펄럭이는 날개가 세상을 뒤덮는 듯 했다.
시오나가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봤다.
“하지만……하지만……그건.”
“망설일 시간에 부딪혀 보는 건 어때?”
화악-!
운페이의 거대한 파동이 쏟아져 나왔다.
시오나의 몸 주변을 두드리고, 공간을 일부 잘라서 튕겨냈다. 경물이 번진 물감마냥 늘어졌다.
“남편!”
“운페이, 무슨 짓이야!?”
그는 답하지 않았다.
대신 날개를 크게 움직여 회색의 구체를 만들어냈다. 아득할 정도로 거대한 에너지가 담겨 있다. 허공에 잠시 머무르다, 시오나가 튕겨나간 공간으로 쏘아져 나갔다. 압축 된 에너지에 공간이 순차적으로 부서졌다.
터텅! 텅!
연달아 충돌이 일어났다.
회색 빛 잔영이 사방으로 번졌다. 공간이 무너지고 회복하기를 반복했다. 테두리를 부여잡은 힘이 없다면 힘의 파편을 이기지 못하고 일대가 붕괴할 것이다.
“운페이, 그만 둬! 더 이상 하면 위험하다고!”
“그건 해 봐야 아는 일이야. 더 힘껏 부딪혀 보라고.”
이번에는 거대한 낫이었다.
허공에 회색빛이 길고 얇게 맺히더니 공간을 쪼개며 시오나에게 떨어졌다. 잘려진 단면으로 알 수 없는 색들이 묻어났다. 비올레와 세레인이 흠칫 몸을 떨었다. 저 단면은 봉인지를 갔을 때 경험한 것과 비슷했다.
차원의 단면.
시오나의 말 대로 위험했다.
“이익! 너도 설마 신들처럼 힘에 취한 거야!?”
“그럴 수도. 힘을 내 부딪혀 보지 않는다면, 알 수 없는 거라고.”
“그렇다면 용서 할 수 없어!”
시오나도 힘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회색빛이 장막처럼 번져서 운페이를 감쌌다. 찢겨진 공간이 수복되고 외부의 생명들과는 단절 된 장소를 만들었다.
“다치지 않았으면 하는 거냐?”
“그만하면 됐잖아. 더 이상 누군가 아파하는 건 보고 싶지 않아!”
“나나, 비올레를 닮은 건 같지는 않은데?”
하하. 잘게 웃으며 운페이가 힘을 쏟아냈다.
한 겹, 두 겹, 세 겹. 무한한 파동이 주변의 장벽을 후려쳤다. 반복 된 힘의 결집은 시오나가 만들어 둔 장벽을 파쇄하고 단절 된 공간을 무너뜨렸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비올레 등이 있는 세상으로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어째서!?”
“관중이 없으면 이야기는 끝나지 않아. 눈 아래에서 네가 가진 걸 모두 써 보라고.”
“대체 무슨 의미가 있다는 거야!?”
“아이는 울지 않으면 안 돼.”
파앙!
공간을 가르며 운페이가 시오나 앞에 섰다.
뻗는 손에 거대한 기운이 서렸다. ‘익-!’ 시오나가 이를 악물며 손 위로 벽을 둘렀다. 힘과 힘이 충돌하여 강력한 충격파를 토해냈다. 공간이 죽 밀려나 파도마냥 출렁였다.
“더 힘을 써 보라고. 어긋난 신을 보면서, 엉망이 된 세계를 보면서 너도 느꼈을 거 아니야. 슬픔 이전에, 먼저 든 감정. 화가 나고, 속에서 분노가 치밀었을 거잖아. 그걸 그대로 안은 채 고개를 돌려버릴 셈이야?”
“나는 그럴 수 없다고! 내가 그렇게 해 버리면 세상이 무너져……”
“정말로? 그냥 그렇게 지래짐작하여 두려워 한 건 아니고?”
혼돈은 아이와 같다.
덩그러니 태어나, 외로움을 이기지 못하고 신들을 만들었다. 힘이 얼마나 강한지 가늠하지 못하고,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지 방향을 정하지도 못했다. 웅크린 채 자신을 다독이며 이것이 최선이라 자위하고 있을 뿐이다.
아이는 넘어지고, 장난치고, 혼나면서 성장한다.
웅크린 채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그 아이는 자랄 수 없다. 누군가 매를 들더라도 그 아이가 움직 일 수 있도록 해 주어야 한다.
“아니야!! 나는 최선을 다했다고!!”
콰르르르-!!
거대한 에너지가 시오나를 중심으로 터져 나왔다.
공간이 무자비하게 찢어졌다. 차원의 단면이 생겨나고 무너진 법칙에 의해서 알 수 없는 현상이 복잡하게 생겨났다. 대기가 빨려 들어가고, 단면 사이로 얼음이 맺혀졌다.
비올레 등은 감히 부딪힐 생각을 하지 않고, 뒤로 멀찍이 도망쳤다.
“아이들이! 신들이 만들어 둔 세계가 망가질까봐 조심했다고! 숨도 쉬지 않고! 인간이……또 다른 아이들이 힘을 얻어서 싸우게 된 건 내 잘못이 아니라고……나는 그냥 있었을 뿐이라고. 숨도 쉬지 않은 채……”
“누구도 네 잘못이라고 하지 않았어.”
“거짓말 하지 마!! 전부 내 잘못이라고 생각했으면서!”
우뢰와 같은 소리가 터졌다.
번개와 화염. 찢어지는 파형이 폭풍우처럼 몰아쳤다. 운페이의 옷이 찢겨지고 머리카락이 잘려나갔다. 갈라진 피부에서는 피가 솟구치고 위태로운 모습으로 몸이 흔들렸다.
폭풍 속에서 흔들리는 갈대와 같다.
하지만 그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은 채 시오나를 응시했다. 손과 발이 찢겨지고 있었지만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어쩔 줄 모르는 아이의 투정이 가슴에 온전히 닿았다.
힘들었을 것이다. 초월적 거대한 힘에 비해서 그것을 지탱해야 하는 지혜는 갖추지 못했으니까. 채 자리지 못한 아이에게 거대한 무기를 쥐어준 것과 같아. 얼마나 두려웠을까. 자신이 잘못하면 세계가 상처 입을 것을 알고 있었을 테니.
“너를 탓하지 않아.”
운페이가 조금 더 다가갔다.
쏟아지는 에너지의 폭풍에 몸 곳곳에 상처가 늘어났다. 흘러나온 핏물에 붉은 안개가 번졌다.
“거짓말……거짓말……”
“거짓말이 아니야. 누구도 너를 탓하지 않아.”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작고 작은 시오나의 앞에 그가 도달했다. 폭풍에 찢겨진 몸은 넝마가 되어 있었다. 흐르는 피가 하늘에 맺혀서 혈우를 내리게 하였다.
“나를 봐, 시오나.”
무릎을 꿇으며 운페이가 시오나와 시선을 마주했다.
흐느끼는 아이의 눈망울이 가득 들어왔다. 손으로 얼굴을 다독이며 흘러나온 눈물을 훔쳐 주었다.
“누구나 실수는 해. 넘어지기도 하고, 어머니가 만들어 둔 장식을 깨뜨리기도 하지. 하지만 그걸로 너를 탓하지는 않아. 실수에서 배우는 법이거든. 자신이 한 일에서 눈을 돌리지 않고 직시하는 게 중요해. 그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거야.”
“하지만……”
“아무도 너에게 이런 걸 가르쳐 주지 않았잖아. 그 동안 많이 힘들었을 거야.”
“……”
“괜찮아. 괜찮아. 다 그런 거니까.”
다독이며 품에 안자, 시오나가 왈칵 눈물을 쏟아냈다.
서러운 듯 크게 울었다. 쏟아지는 눈물이 운페이의 등을 적셨다. 신을 낳은 초월적인 존재. 세계의 혼돈이 한 인간의 품에 안아서 꺼이꺼이 울고 있는 것이다.
“이제부터는 내가. 그리고 저기 있는 표정이 무서운 아가씨가 네 부모가 되어 줄게.”
“부모……?”
“응. 그러니 마음껏 해도 돼. 실수도 저지르는 거야. 혼내 주고 바로잡아 줄 사람이 있는 거니까.”
“마음껏……”
달콤한 사탕이라도 되듯, 시오나가 그 단어를 입안에서 계속 굴렸다.
부드러운 웃음을 매단 채 운페이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넘치는 힘이 조금씩 흘러 들어와 그의 몸 안을 채워갔다.
어느 새 날이 밝았다.
터오는 동에 따스함이 모두의 몸으로 스며들었다.
기나긴 싸움이 그렇게 끝나가고 있었다.
- 작가의말
퓨어한 가족 판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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