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5. 변화
세상일은 대단한 듯 하면서 우습다.
세계의 운명을 좌지우지하는 싸움을 가까이서 들여다보면, 결국 가족 간의 다툼과 다르지 않다.
어머니인 혼돈은 아이들을 세상에 놓고 사라졌다.
홀로 남은 이들은 방탕하게 성장했고, 후에 돌아온 어머니를 부정했다. 그러면서도 어머니의 사랑을 받는 또 다른 자식을 질투하였다.
싸움 끝에 어머니는 봉인되었지만, 어미없는 자식이 있을 수 없듯 그들 역시 세상에서 존재를 잃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어머니를 자신들 손으로 다루어 세상에 다시금 존재를 내리려 했다. 총애를 받았던 다른 자식을 모두 없애면서.
이 얼마나 폐륜적인 이야기인가.
하지만 그럼에도 어머니는 여전히 그 자식을 사랑한다. 자신을 유폐하고, 마음대로 다루려 하였음을 알면서도 다치지 않을까 마음 쓰고 있는 것이다.
“시오나, 너는 우리가 어찌하기를 원하는 거야?”
“……싸우지 않았으면 해.”
“하지만 그 말은 통하지 않을 거 같은데.”
기세등등한 신들이 운페이를 포위하고 있다.
죽었던 신들마저 모두 부활해서 가세했다. 힘이 떨어진 운페이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혼돈에 대한 얘기로 혼란스러워 하던 모습도 더 이상 없다. 아니, 이제는 상관없다는 표정들이다.
[이제 끝을 낼 시간이다, 인간. 너절한 네 종족의 운명을 결정지어주마.]
[볼탄 잠시 만요!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닌 거 같아요.]
이르미아가 끼어들었다.
그녀를 따르던 신들도 모두 볼탄에게 가 있었다. 가장 오랫동안 계획을 주도했던 그녀가 유일하게 이 일에 반대하는 상황이었다.
[물러나라, 이르미아. 너는 너무 오랫동안 인간의 곁에서 지냈어. 신으로의 품격을 잃어버렸다.]
[품격. 품격이라 했나요? 창조주에 등 돌리고, 한 종족의 멸망을 부르는 당신이 신의 품격을 말 하는 겁니까?]
[우리는 절대자다. 모든 걸 좌지우지하는 건 당연한 일이야. 혼돈? 웃기는 소리 하지 마라. 세상의 시작과 끝은 오로지 우리에 의해서 결정된다.]
볼탄의 주위로 기세가 팽창했다.
그의 의지를 따라서 다른 신들도 동조하기 시작한 것이다. 수많은 신. 다양한 의미를 담고 있던 신들이 하나같이 입을 모았다. 그것은 조화라기보다는 탁류에 가까웠다. 뒤 돌아보지 않은 폭주로 모두를 이끌 뿐이었다.
“스스로를 부정하면서도 말인가?”
[부정? 뭐가 부정이라는 거지?]
“네 스스로도 알고 있지 않나? 혼돈에서 네가 나왔음을. 뿌리를 거부하는 건 스스로를 부정하는 행위와 같다.”
[그런 너절한 말 따위로 시간을 끌려는 건가? 그래봐야 소용없다. 이미 네게 남은 힘이 얼마 없음을 알고 있으니까. 그대로 사멸하여, 신의 위업을 빛내도록 해라.]
힘이 끝없이 늘어났다.
수백, 수천의 신들이 힘을 집중하여 공명하고 있다. 아득할 정도의 에너지다. 운페이가 혼돈의 힘을 빌려 쓰고 있다지만, 이것을 상대해서는 그다지 가망이 없어 보였다.
“시오나. 생각 해 봐. 두 아이가 다투고 있어. 너는 어느 쪽도 다치기를 원하지 않아. 하지만 큰 아이가 큰 힘으로 작은 아이를 핍박하는 상황이야. 네가 보호를 해 준다지만, 그것이 영원 할 수가 없다고.”
“나는……”
“미움 받기 싫은 건 알아. 하지만 정신없이 날뛰는 큰 아이를 그냥 두면 결국 그 원한이 너한테 갈 뿐이야. 아이가 잘못 된 길로 간다면 그걸 바로잡는 것도 어머니의 역할이야. 미움 받기 싫어서 손을 놓아 버린다면, 그건 어머니라 할 수 없어.”
시오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떨굴 거 같았다. 비올레가 한 쪽 무릎을 꿇은 채 그녀를 품에 안았다. 신이고 혼돈이고, 그녀는 시오나를 자신의 딸처럼 투영시키고 있었다. 온기 때문일까, 시오나의 표정이 조금은 편안해졌다.
“생각 해 봐. 처음에 신들을 만들 당시. 어떤 마음으로 만든 거야.”
“기억이 잘 안 나……”
“기억이 사라졌다해도 그 당시의 감정은 남아있을 거야. 네가 느낀 것들. 어떤 마음으로 신을 창조했는지 떠올려 봐.”
시오나가 고개를 들어서 자신을 안은 비올레를 바라봤다.
검은 눈에 검은 머리카락. 살랑이며 볼을 간질이는 것이 왠지 기분이 좋았다. 스스로 존재하는 혼돈이기 때문일까. 따뜻한 품이 너무나 좋았다.
“……외로웠던 거 같아.”
“그래서 신을?”
“응. 많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풀잎에서도 하나, 하늘에서도 하나, 바람에서도 하나. 계속 계속 만들었어. 세상이 가득 찰 정도로.”
신들의 기세가 살짝 흔들렸다.
시오나의 목소리는 폭음 사이를 뚫고 허공을 배회했다. 뚜렷히 들리는 그 가녀린 음성에 몇 몇 신들이 안색을 흐렸다.
“그러다 지쳐서 누웠어. 아이들은 세상 가득 찼어. 근데, 그 중 몇 몇 아이들은 힘을 버리고 세상에 내려섰어.”
“기억이 나는 거야?”
“……응. 희미하게. 당시 땅에 내려선 아이들 얼굴이 떠올라. 너무 지쳐서 아무것도 묻지 않았지만, 그 아이들이 왜 힘을 버렸는지는 알 거 같았어. 그 아이들은 내 외로움에서 태어났거든.”
그녀의 시선이 운페이와 비올레.
그리고 지상에 놓인 인간들에게 향했다.
“너를 닮은 모습으로 세상을 채우고자 했구나. 신은 세상의 의미. 가득 채운 마당에 더 이상 늘어 날 수는 없으니까.”
“……응. 세계의 모든 의미에 힘을 투영했기 때문에 더 이상 채울 수 있는 건 없었어. 오로지 힘을 버린 내 외로움만이 숫자를 늘리며 채워갔지. 그게 인간이야. 끝없이 늘어나고, 성장했지.”
외로움의 동물이라.
어쩌면 너무나 정확한 설명일지도 모르겠다. 인간은 항상 사회를 구성해서 산다. 살을 부딪기고, 대화를 나누며 감정을 공유한다. 이것은 모두 외로움에서 기인한다.
혼돈에서 태어난 외로움.
[……집어치워라. 이 세상을 조율해온 것이 누구라고 생각하지? 숲을 사랑하는 엘프를 만들고, 땅 속 깊이 흐르는 용암에 거인을 두고, 대지에 몸 뉘인 드워프를 그렸다. 세계는 평화로웠고, 어긋남은 존재하지 않았어. 그 모든 걸 우리가 했다고!]
볼탄의 음성은 어쩐지 처연했다.
“……기억 나. 열심히 했던 거 같아. 다양한 것으로, 많은 이름으로. 인간과 함께 어울릴 존재들을 세상에 많이 내어 주었어. 함께 만나고, 이야기 하고, 삶을 공유했지. 아마, 그때만큼은 인간도 외롭지 않았던 거 같아.”
[그래! 우리가 그렇게 노력을 했다고! 이 세계가! 우리의 터전이 평화로울 수 있도록!]
“응. 잘 했어. 정말로 잘 해 주었어.”
[그……]
볼탄이 말을 잇지 못했다.
부드럽게 흘러나오는 시오나의 목소리에 입이 그만 닫혀버렸다. 그 조차 알지 못하는 감정이 마구 흘러나왔다.
“나는 왜 다시 깨어났을까? 그냥 두었으면 모두가 평화롭게 살았을 텐데. 너희도 지금과 같은 일을 겪지 않았을 거고. 역시, 힘을 모두 사용했을 때 그냥 사라지는 것이 좋았던 걸까?”
“그런 소리 하지 마! 사라져도 좋은 건 어디에도 없다고!”
“세레인?”
세레인이 하늘을 날아 시오나의 옆에 내려왔다.
그녀는 모든 힘을 잃었었다. 성력도 없는 그녀가 이런 움직임을 보일 수 없었다. ‘이르미아?’ 조금은 황망한 운페이의 물음에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 몸 주변으로 하얀 빛이 어리고 있었다.
“열쇠를 품고 있던 나는 알 수 있다고. 사라지고 싶은 생각 따위는 없잖아.”
“하지만 나는 민폐인걸. 있지 않은 게 오히려 더 도움이 될 거 같아.”
“그렇지 않아. 신이 아집을 부렸다고? 인간이 가능성을 열어서 그 권위에 도전했다고? 그게 뭐 어때서? 애들은 원래 싸우면서 크는 거라고. 이것도 하나의 과정일 뿐이야. 성장통이 두려워서 고개를 돌려 버린다면 그거야 말로 책임을 회피하는 일이라고.”
시오나가 입술을 깨물었다.
몸이 부들부들 떨리는 게 겨우 눈물을 참는 거 같다. 세레인이 무릎을 꿇고 그녀와 눈을 마주 친 다음에 살며시 껴안아 주었다. 마주 한 쪽에 비올레가 있다. 두 여인이 시오나를 마주 안은 모습이었다.
“볼탄! 이제 그만하세요.”
[……너는 대체 누구냐? 아르미아? 아니면 그 몸뚱이의 주인인가?]
“둘 다 라고 할 수 있어요. 아르미아는 스스로의 존재를 포기하여 제게 힘을 넘겼어요. 그녀의 의지는 지금 이 안에 살아 있어요.”
[포기했다고? 신의 위치를?]
“그녀는 이 어리석은 싸움을 멈추고 싶어 했어요. 신들이 본래의 모습을 찾기를 원하였지만, 과거의 모습에 목메는 건 부정했어요. 신은 되살아났고 혼돈은 의지를 가진 채 돌아왔어요. 이대로 인간은 인간의 삶을 살면 되는 거예요. 대체 싸워야 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는 거죠?”
모두가 혼돈을 이용하려 했지만, 그녀는 이성을 가진 채 돌아왔다.
의미 없는 싸움을 종식하고, 각자의 갈 길로 흩어지는 것이 좋아 보였다.
[……이제 와서 그런 게 가능 할 거 같나? 우리는 본디 세상의 주인이었어. 모든 걸 조율하는 절대적인 입장이었지. 하지만, 지금 물러나면 어떻게 될 거 같나? 신은 더 이상 신이 아니게 되는 거야.]
“하지만 이대로는……”
[그래서! 그렇게 해서 대체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다는 말이냐?]
울음을 삼키는 목소리였다.
볼탄이 손을 들어 하늘을 봤다. 아주 오래 전, 그는 태어났고 살았다. 오직 한 가지 목표만을 가지고. 세상을 바로하자. 아름답고, 평화롭게 꾸미자. 왜인지는 몰랐지만, 그것만이 해야 할 목적 같았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서 그것을 빼앗겼다.
인간은 초월을 경험하며 그와 그의 동료들의 지위를 위협했다. 세상은 조율되지 않고 평화는 깨어졌다.
이를 바로잡지 않으면 삶에는 의미가 없다.
얼마나 많은 희생이 따르던, 이는 반드시 이루어야 한다.
[그걸 뺏어가게 둘 줄 아느냐……!]
공격을 위해 집중되던 힘이 기묘한 방향으로 뒤틀리기 시작했다.
이는 볼탄을 중심으로 회오리쳤다. 그를 위시하던 신들이 이에 휩쓸렸다. 힘은 거대한 폭풍이 되었고, 공간을 찢어발기며 위세를 넓혀갔다.
“무슨 짓을 하려는 거지?”
“위험해. 운페이 일단은 뒤로 물러나자.”
“뭔지 아는 거야?”
“힘을 합치는 거야. 신들의 힘은 각기 상성을 달리하는 부분도 있잖아. 그걸 모두 뭉뚱그려서 합쳐버리면, 전체의 힘 보다 강력한 위력을 발휘 할 수 있어. 힘 상태로 존재 할 때 혼돈을 제압하고자 몇 번이고 생각했던 방법이야.”
“잠깐, 그래서야……”
혼돈과 같다.
모든 힘의 뒤섞는다는 것은 신들을 낳은 혼돈에 귀결된다. 이게 대체 무슨 막장인가. 싸움 좀 뜯어 말리나 했더니, 큰 아들놈이 방망이 들고 대든다. 이제는 정말로 누구 하나 죽을 때 까지 싸우는 수밖에 없다.
“안 돼……하지 마.”
“시오나?”
“그러면 안 돼. 모두 사라진다고.”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위험 한 건가?”
“모두 사라져 버릴 거야. 모두 사라져 버리고 말 거라고.”
“……”
운페이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면 사실 좋은 일이다. 신이라고는 죄다 꼴통에 힘자랑만 하는 머저리들이니까. 싹 다 사라지는 게 세계 평화를 위해서도 좋다. 하지만 눈물을 뚝뚝 흘리며 말 하는 시오나를 보니, 그렇게 답 할 수는 없었다.
“어떻게 하면 구할 수 있어?”
“남편?”
“생각 해 봐. 시오나 입장에서는 자식이 미쳐 날뛰는 꼴이라고. 그냥 넘어 갈 수는 없잖아.”
낮게 한숨을 쉰 뒤, 운페이가 시오나와 눈을 마주했다.
그녀는 기억이 돌아오고 있는 중이다. 이 상황을 타개하려면 분명 그 기억 안에 답이 있을 것이다.
“힘을. 힘을 끊어 줘. 이대로 있으면 모든 자아가 무너져서 내 일부가 되어버릴 거야.”
“어떻게?”
“힘은……결국 내 자신에게 쏠리는 거니까. 모든 것이 붕괴되기 전에 네 안으로 유도하면 될 거야.”
“유도하라고?”
“응. 네 안에 있는 씨앗. 나와 거의 비슷해. 완전히 무너지기 전이라면 그 안으로 유도해서 결합을 끊을 수 있을 거야.”
저 안에서?
운페이가 찢겨지는 공간을 바라봤다.
발만 담가도 몸이 부서져 버릴 거 같은 광경이었다.
“일단 전부 뒤로 물러나 있어.”
“남편!”
“운페이!”
아예 합창단을 구성하라고.
운페이가 다급히 외치는 두 여성을 한 번씩 번갈아 본 뒤 살짝 몸을 띄웠다.
‘힘이 완전히 합쳐지기 전에 몸으로 유도하라 이거지.’
가능할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냥 둘 수는 없다.
집안싸움에 끼어드는 꼴이라니. 꽤 손해 보는 일이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무너지는 공간으로 몸을 날렸다.
이것이 빌어먹을 싸움의 마지막임을 기대하며.
- 작가의말
뭔가 느낌이 쎄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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