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5. 변화
이 세상에 사는 존재들은 저마다의 이유를 가지고 있다.
먼 옛날 신들은 세상에 군림하여 스스로를 완벽하게 여겼었다.
다양한 종족이 그들의 발아래에 머리를 조아렸고, 세상은 그들이 만드는 조화 속에서 굴러갔다. 이치는 합당하고, 불협화음은 존재하지 않았다. 정적인 세계. 변화 없이 멈춰있는 그곳은 평화롭지만 고인 물 같이 조금씩 썩어갔다.
작용에는 반작용이 있고, 위에는 아래가 있다.
음과 양, 빛과 어둠은 어린아이 동화 속 선과 악의 대립된 개념으로 털어놓는 단어의 열거가 아니다. 이것은 균형에 대한 이야기. 정적인 세계 속 물밑부터 썩어가는 균형추에 관한 내용이다.
그렇기에 혼돈이 태어났다.
반듯하게 만들어진 세상에서 탈피하기 위해서. 온갖 사상이 뒤섞여서 비틀림을 만들었고, 이는 가장 강대한 욕망에 의해서 힘을 꽃피웠다.
그 중심에 있던 것이 인간.
그들은 욕망했다. 세상 속 어떤 존재보다 강렬하게 욕망했다. 보다 높은 곳으로. 보나 강한 힘으로. 보다 많은 숫자로. 균형으로 묶여 있던 세상을 파괴하고, 한계의 벽을 뛰어 넘었다.
신은 더 이상 위대하지 않았다.
신은 더 이상 완벽하지 않았다.
절대는 무너지고, 정적은 깨어졌다.
굴러가는 톱니바퀴 속, 부서지는 단말처럼 세상의 곳곳은 부서졌다.
이는 당연한 결과.
출산에 고통이 따르는 것처럼, 닫혀있던 것이 열림에 그 만한 희생은 불가피한 일이었다. 수많은 종족이 인간에게 몰살당하고, 더 없이 아름답던 초원이 눈으로 뒤덮였다. 아득한 세월 동안 멈춰 있던 이상향이 굴러가는 톱니바퀴에 짓이겨졌다.
신은 그렇기에 욕망했다.
우리의 세상. 우리의 것. 우리가 다스려야 마땅한 대지. 그들은 몰랐으나, 이 또한 욕망이었다. 신들이 드래곤을 가축처럼 부리며, 인간과 더 없이 끔찍한 전쟁을 벌이게 됨은 결국 혼돈이 남긴 욕망의 잔재에 이끌렸음이다.
끝내 그들은 성공을 했다.
혼돈을 봉인하고 세상의 모든 가능성을 닫았다. 하지만 그들 역시 이미 욕망에 눈을 떴고, 더 없이 높은 곳을 갈망하게 된 후였다.
열려라, 세상이여.
만물을 발아래에 두고, 창생의 빛을 쬐어 아득한 권좌에서 끝자락의 영광을 누리겠다.
빛과 어둠의 양 날개가 혼돈을 지상으로 끌어내리는 닻이 될 지어니, 이를 손으로 잡아 다스림이다. 무엇보다 강하고, 무엇보다 위대하다. 혼돈이 오기 전. 세상의 주인으로 만물이 경배하던 바로 그 신의 모습처럼.
허나, 구른 태엽은 멈추지 않았다.
그들이 혼돈을 봉인하였다 외치던 그 날 조차. 변화에 맞물린 옛 것의 잔재는 덧없는 욕망을 부르짖으며 그저 뒤안길로 사라질 뿐이다.
옛 영광의 재림은 타다 남긴 욕망의 재와 같으니.
***
운페이는 천천히 눈을 떴다.
그의 앞으로 안개와 비슷한 형상이 맴돌고 있었다. 주위를 돌아봤지만 세레인과 비올레는 보이지 않았다.
마지막 순간이 떠올랐다.
그는 봉인을 벗어나기 위해서 혼돈과 직접 충돌 하는 것을 선택했다. 세레인을 헤치지 않고 통로를 벗어나는 것은 그 길이 유일했다. 게다가 혼돈은 단절 될 수 없는 존재. 그 흐름을 타고 간다면 결국 본래의 차원으로 돌아 갈 수 있으리라 여긴 것이다. 다만, 그것이 봉인의 해체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 그렇기에 두 여인을 떼어놓고 혼자서 혼돈에 뛰어 든 것이다.
적어도 이리하면 양 날개가 없으니, 신들의 속셈대로는 흘러가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지금의 상황은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이 공간과, 눈앞의 존재. 이해하기 어려웠다.
츠츠츠……
안개가 둥글게 말려서는 운페이 주변을 돌았다.
마치 알아보는 거 같다. 그가 천천히 손을 뻗어 보았다. 닿을 듯 말 듯. 거리를 둔 채 그 이상은 허용하지 않았다. 살짝 약이 오를 정도로 미묘하게 도망 다녔다.
“넌 뭐지? 여기는 어디고?”
답답함에 그리 물었다.
구체가 ‘츠츠츠……’울며 눈앞에 올라섰다. 말에 반응하는 것으로 보아 이성이 조금은 있어 보였다. 설마 이게 혼돈일까. 운페이가 고개를 갸웃하며 고개를 밀어서 이를 자세히 살폈다.
그러자 구체가 조금씩 흔들리더니 하나의 형태를 만들어갔다.
한 쪽은 들어가고 한 쪽은 튀어나왔다. 중앙에 콧선이 그려지고, 양 옆으로 광대가 올라왔다. 이내, 입술과 이마. 윤곽이 만들어지면 하나의 얼굴이 탄생했다.
그리고 그 모습은 운페이와 꼭 닮아 있었다.
“이게 무슨 짓이지?”
“이게……무슨 짓이지?”
입이 열리더니 말까지 따라한다.
흠칫한 운페이가 입을 닫았다. 구체도 따라 입을 닫고는 빤히 그의 눈을 바라봤다.
“넌, 누구야?”
“넌, 누구야?”
“따라하는 거 밖에는 못 하는 건가?”
“따라하는 거 밖에는 못 하는 건가?”
몇 번을 물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같은 수준이었다.
마치 말을 배우기 위해서 반복하는 어린아이와 같았다.
대처하기가 어렵다.
운페이가 몇 번이고 말을 반복하다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고 보니 몸이 상당히 피곤했다. 몸이 욱신거리는 게 얼마 만에 느껴보는 탈력감이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갸웃. 검은 구체가 옆으로 기울어졌다.
운페이의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거 같다. 주위를 몇 번 빙빙 돌더니, 머리 위에 안착해서는 예의 소리를 흘렸다.
“……뭐하는 거냐?”
이번에는 답이 없었다.
대신 묘한 진동과 함께 그의 몸으로 힘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공허로 단련 되었던 육체와 씨앗으로 말미암은 혼돈의 힘이 그대로 위치했다. 게다가 봉인으로 넘어 오면서 막혔던 사상력도 다시금 감지가 되었다.
“네가 도와 준 거냐?”
구체가 위 아래로 움직였다.
고개를 끄덕이는 걸까. 얼굴만 덩그러니 떠서 흔들리는 걸 보자니 조금은 섬뜩하다.
갸웃. 이번에는 또 무슨 이유인지 옆으로 기울었다.
그러더니 허공을 빙빙 돌면서 연기를 아래로 뿜어냈다. 이건 또 뭔가 싶지만, 더 물을 여력이 없다.
“아……”
무슨 짓인지 알게 되는 건 금방이었다.
구체가 뿜어낸 연기로 몸을 만든 것이다. 조금 전 운페이가 섬뜩하다 생각 한 걸 읽은 모양이다. 그와 똑같은 복장에 똑같은 체형으로 마주 보며 섰다.
“내가 둘인 건 조금 그런데.”
“왜?”
“……!”
처음으로 구체가 따라하는 말이 아닌 다른 것을 뱉었다.
운페이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구체의 모습을 다시금 찬찬히 살폈다. 거울이 있어 자신을 볼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아마도 완벽하게 똑같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같은 모습을 취했을까? 생각 해 볼 수 있는 건 하나 뿐이다. 이런 모습을 취해서 대응 할 존재를 처음 만났다는 것.
‘혼돈이라면……’
아르미아는 혼돈을 현상과 같이 치부했다.
이성이 존재하지 않는 현상. 힘과 사념의 집합체. 하지만 눈앞에 있는 것이 혼돈이라면 그 말을 틀렸다. 미약하지만 분명 이성이 존재하고 있다.
‘아니, 잠깐. 본래부터 그런 게 아니라면……’
운페이가 가슴 언저리를 더듬었다.
이유야 분명하지 않은가. 혼돈에게 어떤 이상이 생겼다면 그 이유는 씨앗을 품었던 운페이 밖에는 원인이 없다. 혼돈과 비교하기에는 너무나 미약한 부분이지만, 어떤 영향을 미칠 지는 누구도 알 수 없던 거였으니까.
“혼돈. 나를 그렇게 부르는 거야?”
“내 마음을 읽고 있구나?”
“응. 아직 다 알지는 못하겠지만.”
자신의 얼굴이 눈앞에서 대꾸를 하고 있다 생각 해 보라.
그리 편한 심정은 아니다. 스물스물 올라오는 거부감에 운페이가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그는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지금 눈앞의 존재와의 대화가 상당히 중요하다는 것을.
“내가 싫은 거야?”
“그건 아니야. 다만, 얼굴이 나와 같잖아. 그게 어색해서 그래.”
“아. 얼굴이 같으면 안 되는 구나. 그럼 다른 걸로 해야지.”
구체. 아니, 혼돈.
혼돈의 모습이 천천히 바뀌기 시작했다. 얼굴과 몸. 입고 있던 복장까지 전부 한 번에 변화했다. 키고 좀 줄어들고, 굴곡 없던 몸에 선이 생겨났다. 머리카락도 길어져서 허리 아래에서 흔들렸다.
“네가 좋아하는 얼굴.”
“하. 그건 또 어떻게 안 거냐?”
비올레와 운페이를 반씩 닮은 외모였다.
큼직한 붉은 눈망울에, 새카만 머리카락. 하얀 얼굴에 입과 코가 오밀조밀 자리 잡아 있다.
아주 오래전, 비올레와 자신 사이에 자식이 나온다면 어떤 모습일까. 이런 생각으로 그려 보았던 모습이다. 성국으로 돌아 온 이후에는 단 한 번도 입 밖으로 꺼내 본 적이 없는 일인데. 그걸 찾아내어 모습으로 복사를 했다.
불쾌하기도 하고, 기쁘기도 하고.
묘한 느낌에 운페이가 표정을 어색하게 했다.
“이것도 싫은 거야?”
“아니. 아니야. 단지 좀 놀랐을 뿐이야. 그 모습을 실제로 볼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거든.”
“아이를 가지지 못해서?”
“……그래. 그녀만큼이나 나도 아이에 대한 욕심은 크거든. 하지만 간절히 바라는 그 앞에서 내색 할 수는 없었지. 가끔 이렇게 아이의 모습이 어떨까 하고 그려보는 것 정도가 전부였어.”
혼돈이 고개를 주억거리더니, 운페이 앞에 나란히 앉았다.
가까이서 보니 체구가 더 작았다. 잘 해 봐야 10세 전후. 상상했던 모습 그대로라, 운페이는 왠지 모르게 가슴 한 구석이 울컥하는 걸 느꼈다.
“아이……가지게 할 수 있는데.”
“네가?”
“응. 나는. 응……아마도 가능 한 거 같아. 근데, 내가 왜 가능 한 거지? 내가 뭘까? 혼돈이라고 하는데, 잘 모르겠어.”
혼돈이 고개를 연신 흔들었다.
스스로에 대한 정체성이 아직 확실하게 자리 잡지 않은 거 같았다. 마치 갓 태어난 새끼라고 해야 할까. 말을 배우고, 스스로에 대한 물음을 던지고 있었다.
“내가 알고 있는 것들을 읽지 않았어?”
“읽었어. 그래서 더 헷갈려. 나는 대체 뭐야? 나는 너와 같지 않은데?”
“너는……”
운페이가 쉬이 답을 하지 못했다.
혼돈은 무엇인가. 그. 혹은 그녀에게 어떤 답을 해 주어야 할까. 혼돈은 현상이고 세상의 한 부분일 뿐이다. 그것에 이성이 생겼다 하여, 이를 무어라 지칭하기는 어려웠다.
“너도 모르는구나.”
“모르지. 하지만 그것에 목메어야 할 필요가 있는가 싶어.”
“응? 어째서? 자신이 누군지 아는 건 가장 중요한 물음 아니야?”
혼돈의 눈이 똑바로 응시해왔다.
붉은 빛에 반짝이는 눈매는 자신과 비올레를 반씩 섞어놓은 듯 보였다. 귀엽기도 하고, 사랑스럽기도 하다. 하지만 그것은 실제로 이룰 수 없는 일이기에 가슴이 아프기도 하다. 복잡한 마음에 입술이 살짝 떨려왔다.
“이 얼굴……불편해?”
“아니야. 괜찮아. 후. 대답 해 줄게.”
간신히 숨을 내쉬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이 아이. 혼돈은 지금이 중요한 시점이다. 이곳이 봉인 되었던 차원인지, 아니면 다른 곳으로 튕긴 건지는 모르나 밖에는 신과 사도. 난리 난 성국의 인물들로 득실거린다. 지금 이 순간 혼돈에게 재대로 설명하지 못한다면 무슨 일이 벌어 질 지 장담하기 어렵다.
“너는 이 세상에서 유일한 존재야. 인간도, 신도, 하물며 땅 위에 사는 동물과도 같지 않아. 누군가에게 물어서 내가 뭐냐는 답을 얻을 수는 없어.”
“……결국 모른다는 거잖아.”
“모르지. 알 수 없는 거야. 하지만 너는 그걸 남에게 구해서는 안 돼. 스스로를 보고 남과 비교 할 수 있는 이성이 생겼잖아. 그냥 그렇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보고 듣고 생각하며 무엇을 할지 정해야 하는 책임이 생긴 거야.”
“책임?”
고개를 갸웃하는 모습이 사랑스럽다.
비올레를 닮은 딸이라면 이렇겠지. 운페이가 저도 모르게 옅은 웃음을 베어 물었다.
“너 자신을 정의해야 하는 책임이지. 그렇기에 남에게 묻는 질문이 중요하지 않은 거야. 너는 유일하니까. 보고 들으며, 어떤 존재일지를 스스로 정의 내려야 해.”
“스스로. 하지만 그건 너무 어려운 걸?”
“알아. 어렵지. 하지만 그렇기에 행복 한 일이야. 너는 내 기억을 읽었으니, 그 전의 네 모습이 어떤지를 알고 있지?”
혼돈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 모습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어?”
“아니. 싫어. 그건 너무……무의미해 보여.”
“무의미. 그래. 어떤 면으로는 그렇다고 볼 수 있겠네.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 네게 어떤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
힘과 사상의 집합체인 혼돈은 그저 현상일 뿐이다.
현상은 외부에서 보는 자들만이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중력이 스스로에게 의미를 부여하겠는가? 시간이 자신에게 의미를 묻겠는가? 보고 듣고 판단 할 수 있는 이성이 생긴 이상, 혼돈에게는 지금 부터가 의미의 시작이었다.
“그럼 나는 살아도 되는 거야?”
그때, 혼돈이 큰 눈을 깜빡이며 물어왔다.
그건 너무 갑작스러운 질문이었다.
“그건……”
- 작가의말
혼돈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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