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4. 부서지는 흐름
빛과 어둠이 뒤엉킨다.
창세의 개벽을 나타내듯 지평이 열리고, 대지가 울었다. 공간이라 부르는 곳이 찢겨져 형상을 잃어버리고 사물을 존재케 하는 힘의 고리가 사정없이 끊어졌다.
그야말로 혼돈.
억겁의 시간이 짓눌렸다가 팽창하듯, 아득한 무언가가 점점이 이어지는 공간을 때리고 지나갔다. 부서진 공간의 표상들이 통통 튀어 물보라와 같은 걸 만들었다. 이어지고 이어지고. 끊어졌던 고리는 이내 회복되어, 다시금 공간과 시간을 만들었다.
눈 한 번 깜빡하는 것보다 짧은 시간.
아득하게 스쳐가는 이적의 향연에 운페이가 몸을 휘청거렸다.
“크윽-!”
간신히 몸을 부여잡고, 시선을 앞으로 던졌다.
눈으로 보았던 광경에 비해서 주변 경물은 그리 많이 부서져 있지 않았다. 천사와 비올레가 충돌한 곳 주변으로 희미한 파흔이 나 있을 뿐, 어디에도 혼돈과 같은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비올레!”
그가 지면을 박차고 뛰어나가 비올레를 살폈다.
그녀는 정신을 잃은 채 천사 옆에 쓰러져 있었다. 피부는 차지만 그녀의 존재 자체는 건재했다. 뱀파이어이기 때문에 그녀 자체가 완전히 무너지기 전까지는 불멸의 존재였다.
- ახლა თქვენ ქრება, O ბოროტი
후두둑. 먼지바람을 일으키며 천사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날개 한 쪽이 반쯤 찢어져 있었지만 그 이상의 상처는 없었다. 어떻게? 라는 질문이 나올 수밖에 없는 모습이었다.
‘마왕의 본신보다도 센 건가?’
일순간이지만, 비올레는 분명 마왕의 힘을 모두 사용하였다.
천사가 강한 건 맞지만 그 위력을 모두 감당 할 수 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즉, 느껴지는 것보다 아득하게 강하거나……
‘회복되는 거로군.’
성국은 혼돈을 봉인하기 위한 장소다.
눈앞의 존재들이 혼돈에 반발하고 있으니 일종의 문지기로 보는 것이 옳다. 즉, 이 힘 자체는 봉인을 유지하는 에너지가 소스라는 뜻이다.
- ახლა თქვენ ქრება, O ბოროტი
천사가 날개를 펼치며 광휘를 담은 검을 내밀었다.
망설임도, 거짓도 없다. 천사는 운페이와 비올레를 죽이려 하고 있다. ‘칫!’ 운페이가 혀를 찼다. 상황이 왜 이렇게 됐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건 매우 안 좋다. 천사의 원천이 봉인이라면 그 힘이 줄어들수록 봉인도 약해지는 것이다.
‘설마 이것을 노렸나?’
타이렌과 함께 사라진 세레인.
어쩌면 이 판 자체가 그러게 꾸면 진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스쳐갔다. 봉인을 소모시키기 위한 말.
휘익-!
생각을 이어갈 틈이 없다.
쏟아지는 섬광에 운페이가 비올레를 업은 채 뒤로 몸을 뺐다. 허리가 베어져서 핏물이 쏟아졌다. 앞선 경우에서는 분명 피했을 타이밍이었다.
‘빨라졌다.’
착각이라 우기고 싶지만 그렇지 않은 건 자신이 더 잘 안다.
천사는 비올레와의 격돌 이후로 조금 더 강해졌다. 아마도 격퇴해야 할 대상이 예상보다 세다고 판단을 한건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결과는 하나다.
아주 상황이 지랄같이 되었다는 것.
“도망간다고 내빼면 놔 줄 건가?”
천사의 검이 시선을 가운데 두고 따라온다.
아니라는 대답이겠지. 운페이가 입술을 잘근 씹었다. 상의를 찢어 낸 뒤 비올레를 들어서 등에 묶었다. 움직이기 번거롭지만 방법이 없다.
“별 수 없지. 부부는 일심동체. 함께 베어주마.”
봉인은?
모르겠다. 일단 살고 봐야 할 거 아닌가. 쌍검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
카카캉!
올멜의 검격이 제롬과 뒤섞였다.
산이라도 베어낼 것 같은 검격이 어마어마한 속도로 교차했다. 불꽃이 튀고 달궈진 대기가 엇갈리며 용권풍을 만들어냈다. 먼지가 회오리쳐서 둘을 중심으로 솟구쳤다. 부서진 돌덩이와 철 조각 따위도 그 주변을 같이 맴돌았다. 일반 병사는 다가가는 것만으로도 목숨이 위태로울 지경이었다.
“빌어먹을 놈들이-!”
“죽어라 위선자여!”
“같이 좀 낍시다!”
용권풍 사이로 녹색 바람이 끼어들었다.
한. 춤추듯 뛰어 든 그의 검세가 제롬이 검격을 교란했다. 힘이 부족한 곳에서 힘을 더하고 속도가 딸리는 곳에는 미리 가 방비를 두텁게 했다.
검과 검이 부서 질 듯 충돌했다.
들썩이는 돌덩이가 허공에서 베어졌다. 가루가 되고 용권풍에 말렸다. 옷자락은 넝마가 되고 미친년 마냥 풀려버리고, 머리카락은 검격에 휘말려 뭉텅이로 잘려나간지 오래였다. 초월적인 자들의 싸움은 그리 멋진 모습이 아니었다.
“보아라, 그리고 느껴라! 초월이라 외치나 저들은 초월하지 못하였다!”
“네, 네!”
“나를 앞에 두고 교제로 삼을 셈이오!?”
슈레인과 왁슨은 파란을 상대했다.
파란의 검세는 교묘하고 은밀했다. 동쪽에서 지른다 싶으면 어느새 서쪽에 와 있고, 힘을 주는가 싶으면 뺐다. 지극한 기교의 검세. 성력으로 몸을 개환시킨 왁슨이라 해도 이를 버틸 수는 없었다. 하지만 슈레인이 중심을 잡고 이를 막아낸다면 상황이 달랐다. 비록 상처로 전력을 낼 수 없는 그이지만 성력을 바탕으로 힘을 보조하기에는 충분했다.
“힘의 부족은 염두에 두지 말거라! 속도가 따르지 못함을 안타까워하지 마라! 중요한 것은 힘의 요체. 검을 보고 흐름을 느껴라. 그 가운데에 네가 베야 할 것이 존재한다.”
“무법의 설파라니! 나, 파란이 이리도 무시 받을 줄을 몰랐소이다!”
위윙-!
파란의 몸이 긴 선으로 덮이며 흩어졌다.
아득할 정도의 속도로 검과 검 사이를 교한하며 움직인 것이다. 왁슨은 순간적으로 그의 움직임을 놓쳤다.
‘중요한 것은 힘의 요체.’
하지만 부족한 속도를 탓하며 움직임을 쫒지 않았다.
베어야 하는 것은 검과 검을 든 자. 존재가 사라지지 않는 한 그 흐름은 항상 있어야 함이 진실이다. 결국 가르는 것은 하나.
‘오의라 정한 것이 우스운 일 이었구나……’
베어야 할 것이 보이는 눈.
그것조차 결국은 베기 위해 상대를 쫒은 것에 불과하다. 자신과 상대를 양 극단에 두면, 베어내야 할 것은 오직 하나. 바람, 먼지, 열기, 호흡, 소리. 모든 것이 그 선 가운데에 서서 흐름을 토해내고 있다.
만물이 일통하여 세계가 관(觀)한다.
서걱-!!
왁슨의 검이 한 줄기 검광을 새기며 뽑혀나갔다.
흐르는 바람도, 사방을 수놓던 파란의 검세와도 모두 상관이 없는 위치였다. 마치 허공 위 아무도 없는 곳에 자신만의 검로를 새기는 것처럼 보였다.
“……”
흔들. 하지만 그 검세가 녹듯이 세계로 사라진 직후. 침잠하는 먼지 위로 파란이 나타났다. 가슴이 길게 베어져 피를 토해내고 있었다. 믿을 수 없다는 듯 가슴을 부여잡은 채 왁슨을 노려봤다. 그의 검은 조각이 나 손잡이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현혹의 검은 한 하나의 선에 모든 것이 파훼되고 말았다.
“어떻게……?”
“모든 것……을 느끼고 나니까 그곳만 어지러웠어요.”
“모든 것. 모든 것이라니. 하……하하. 아직 한계조차 열리지 않았거늘 너는 어찌도 그곳에 발을 들였단 말인가……”
비틀비틀. 파란의 몸이 흔들렸다.
공허로 받은 아득할 정도의 재생력도 가슴의 상처를 치유하지 못했다. 그것은 마치 치유 할 곳 자체가 베어진 것과 같았다. 없는 것을 창조 할 수는 없는 법이다. 꾸역꾸역 쏟아지는 핏물에 따라 그의 생기가 빠르게 빠져나갔다.
“파란-!”
“어딜 보느냐!!”
“우리도 승부를 내자고!”
제롬과 옴멜. 한의 결투 역시 점차 치열해져갔다.
피와 살점이 튀고 검이 삭아, 날이 빠져갔다. 굉음이 몰아치고 가쁜 호흡이 변주를 놓았다. 죽음을 향해 달리는 저항 없는 잠수와 같다. 누구 하나 빼지 않고 얼굴이 하얗게 질려갔다.
“왁슨아.”
“네, 네?”
“지금도 보이고 있는게냐?”
“……네. 어두운 골방 안에 햇빛이 들어오는 것처럼 보여요.”
왁슨의 눈이 유리알처럼 빛났다.
슈레인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도 아주 먼 예전에 한 번 본 적이 있는 광경이다. 다만 그는 손에 넣지 못했었다. 마치 갈 수 없는 벽이라도 처진 듯 나아감을 막아섰었다. 어쩐지 조금은 부럽기도 했다. 아직 채 20이 안 된 나이에도 그 아득한 것에 발을 들였으니. 순수하게 검사로서의 감정이었다.
“베어라. 결투를 신성시하기에는 상황이 급하니.”
“네-”
저벅. 왁슨이 한 걸음을 걸었다.
사방의 모든 것들이 그에게 속삭였다. 저곳. 저곳. 저곳. 베어야 할 곳을 향해 합창이라도 하듯이 떠들었다. 작게 뚫린 구멍을 통해서 떨어지는 햇살처럼 뚜렷이 보였다. 이치로 아는 것도 아니고, 기교로 판단한 것도 아니다.
그냥 그곳이 옳다.
눈을 한 번 감았다 뜨며 검을 휘둘렀다.
파삭!
“뭐……?”
제롬의 검이 중간부터 잘려나갔다.
가슴부터 어깨까지. 긴 상처가 낙인처럼 새겨졌다. 피가 흐르고 넘치던 생기를 밖으로 뽑아냈다. 휘청. 한 차례 흔들린 그의 몸이 그대로 고꾸라졌다.
용권풍은 멈췄다.
하늘을 날던 부유물들이 잠잠해졌다. 한과 옴멜이 검을 늘였다. 승부를 내지 못함이 아쉬우나 슈레인의 말에는 동의했다.
지금 이곳은 승부를 가리는 장소가 아니다.
“교황 성하를.”
무리의 싸움은 결착이 나고 있었다.
***
“흐음. 다들 열심히 싸우고 있지 않아?”
“후후후. 걱정이라도 되는 건가?”
“뭐, 몸의 주인이 걱정하는 남자라면. 솔직히 괜찮기는 하거든.”
세레인. 아니, 그녀를 차지하고 있는 아르미아가 태평하게 말했다.
그녀를 둘러싼 사도들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쓸데없이 힘 싸움 하기 귀찮다. 열쇠를 내 놔.”
“내가 분명 말 했을 텐데? 그가 나를 찾아온다면 그때 주겠다고. 인연을 결착지어 아름다운 대미가 나오지 않는다면 손수 움직이고 싶은 생각이 없어.”
“결국 힘을 쓰게 하겠다는 건가?”
“타이렌. 혼돈의 힘을 조금 사용 할 줄 안다고 신 앞에서 그렇게 고개를 빳빳하게 드는 게 아니란다.”
웅.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허공에서 충돌했다.
실금 같은 것이 둥그런 형태를 취하며 퍼져갔다. 하지만 지면이나 떠다니는 바람 한조각 조차 흔들림이 없었다.
“혼돈을 취함은 닫힌 세계의 장벽을 열었다는 것과 같다. 과거, 이미 신과 대등한 반열에 들었던 내가 그따위 소리에 겁이라도 먹을 줄 알았나?”
“흠. 여덟 번째 마왕이라 이건가.”
“아니, 내가 바로 유일한 마왕이다. 멍청하게 제 잘난 맛에 날뛴 이들과는 구분을 해 주었으면 하는군.”
알려진 것과는 달리 과거 신에 근접했던 인간은 전부 여덟이었다.
북쪽에 갇힌 것이 여섯. 운페이의 곁에 있는 것이 하나. 그리고 최초이자 알려지지 않은 남은 하나가 바로 타이렌이었다.
“그럼 뭐 하지? 그렇게 강하면 나를 제압해서 혼돈의 봉인을 열어 보라고. 뭘 망설이는 거야?”
“네년이……”
“후후. 두렵지? 무서운 거지? 어쩔 수 없는 거야. 다른 마왕을 멍청이라 했지만 사실은 네가 겁쟁이에 불과하니까. 신과 대적 할 용기가 없어서 몸을 숙여버린 겁쟁이. 내 말이 틀린가?”
“닥쳐-!!”
타이렌이 분을 참지 못하고 일갈했다.
검은 빛이 한 순간 퍼져서 세레인의 전면을 뒤덮었다. 회색빛 경계가 새겨지고 힘의 여파가 그 사이를 맴돌았다. 이번에도 사방 공간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겁쟁이 타이렌아. 그냥 그곳에서 지켜보기나 하렴. 모든 일의 결말이 어떻게 나는지.”
“……”
“아름답거나 추악하거나. 혹은 슬프거나.”
세레인이 고개를 들어 저편을 바라봤다.
성국의 초입. 하얀 빛을 토해내는 천사가 그곳에 있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결말을 지어 줄 한 쌍의 남녀역시.
- 작가의말
왁슨 뻥튀기.
아, 참고로 하나를 더 연재하고 있습니다.
심심할때 보러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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