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 다큐멘터리 4: 꿈의 세계의 서큐버스
자각몽이란 꿈을 꾸고 있다는 걸 알고서 꿈을 체험하는 현상이죠.
여러분들 중에서도 한 번쯤 자각몽을 경험하신 분도 계실 겁니다.
어딘가에서 한없이 추락하는 꿈.
한평생 분의 인생을 경험하는 꿈.
온 우주의 의식이 연결된 가운데 마왕과 검을 겨루는 꿈.
피자 배달부가 되어 29분 59초 만에 피자를 배달하는 꿈.
수많은 꿈이 있지만, 사실 이건 꿈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이 아닙니다.
정확히는 여러분들이 자는 동안 뇌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죠.
극장의 연극이 세상의 전부가 아니듯이 말입니다.
하지만 가끔 연극을 보다 말고 자리에서 일어나, 극장 밖으로 나오는 관객도 있습니다.
그들은 지금은 저와 레코더맨이 이곳, 꿈의 세계로 나오게 되지요.
잘 잤나요, 레코더맨?
사실 잘 자고 있냐는 물음이 더 정확합니다.
이곳은 꿈의 세계니까요.
여기서 실제로 깨어있는 사람은 꿈의 세계 주민들 뿐입니다.
샌드맨, 인큐버스, 나이트메어, 부기맨.
하늘을 나는 무지갯빛 고양이.
그리고 서큐버스.
많은 사람이 서큐버스와 인큐버스가 음욕을 탐한다고 말하지만, 진실은 반만 사실입니다.
먹고 살기 위해 출근과 퇴근을 영원히 반복해야 한다면 그건 설령 섹스라 해도 생각만큼 기쁜 일이 아니게 되어버리기 때문이죠.
게다가 모든 지적 존재가 지닌 성욕과 색욕이 세분화되고 다양화됨에 따라 서큐버스가 모든 꿈의 니즈를 만족한 데는 한계가 생겼습니다.
섹스에도 지능이 필요하게 된 거죠.
일부 서큐버스는 청춘을 대학원에 다 내다 버렸는데 연애는 무슨 놈의 연애냐며 완전한 금욕주의자로 돌아서기까지 합니다.
오늘은 그런 서큐버스 중에서도 몽마의 사회와 단절을 선언하고 원시에 가까운 삶으로 회귀한 서큐버스 촌락의 하루를 들여다보도록 하겠습니다.
다행이네요. 레코더맨.
꿈속에서는 죽는다고 해도 정말 특수한 경우가 아닌 다음에야 현실에서 깨어나는 걸로 그치니까요.
뭐, 트라우마가 조금 남을 수는 있다던데.
···레코더맨?
왜 이 시점에 밤개구리 입속에 들어가 있는 건가요?
녹화 이제 시작했다고요?
레코더맨?
***
※ 서큐버스 촌락의 협조로 제작되었음을 밝힙니다.
※ 본 다큐멘터리는 인류왕국 엑셀리온 국영 언론사 튜버 타임즈에 의해 기획 및 제작되었습니다.
※ 촬영에서 사망하는 것처럼 보이는 건 잠의 모래로 만들어진 의체입니다. 촬영 중 사망자는 일절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
아무리 그래도 촬영 시작부터 죽을 위기라는 건 신기록이군요.
서큐버스 촌락에서 가이드 겸 호위로 나오지 않았으면 바로 꿈 밖으로 사출될 뻔했어요.
방금 전처럼 뇌내 극장에서 벗어나 도달하게 되는 꿈의 세계는 위험한 요소로 가득합니다.
사람을 집어삼켜 잠의 모래로 만드는 밤개구리 정도면 귀여운 편이죠.
야생으로 회귀한 서큐버스들은 이런 꿈속 마물을 수렵하는 걸로 살아갑니다.
서큐버스란 원초적 욕구인 성욕과 색욕이란 개념이 탄생한 이래 가장 오래된 전투종족.
현대 성욕과 색욕이라는 복잡하고 답 없는 방정식에서 해방된 그녀들에게 꿈의 자연은 많은 것을 제공합니다.
밤개구리의 가죽은 좋은 우비, 드림캐처에 걸리는 몽유어는 식량이자 기름. 야생 맥은 맛이 좋을뿐더러 살아있는 제독기 역할을 합니다.
특히 꿈의 세계 주민들에게 대부분 독인 악몽을 먹어서 체내에서 분해하는 맥은 서큐버스 촌락에서 필수적입니다.
야생 맥의 가축화나 촌락 내 텃밭의 관리, 사냥 도구 등에는 비교적 최신화 된 기술과 장비가 사용됩니다.
그녀들은 지식만 강요하는 사회에 환멸한 거지, 지식을 올바르게 활용하기 위한 지혜 자체를 버린 게 아니니까요.
어떤 의미에서 보면 인류왕국의 현자들과 완전히 정반대의 삶이라고 해도 되겠군요.
드라코 대륙의 사회는 현자의 시대부터 상류층에 대한 동경이 강해 촌락 생활이 천하다는 인식이 강하지만, 여기서는 그저 라이프스타일이 다를 뿐입니다.
꿈속에서는 길몽도 흉몽도 개꿈도 다 같은 꿈이니 당연하죠.
게다가 촌락에서는 촌락 나름대로 중요한 역할이 있습니다.
마침 저기 서큐버스들이 소방장비를 들고 나가는군요.
화재입니다.
인체 자연발화 사건으로도 취급되는 감정의 불에 대해 들어보신 분도, 들어보지 못하신 분도 계실 겁니다.
드라코 대륙에서는 마왕군 사천왕이었던 얼음 장군의 불꽃 부관이 대표적인 감정의 불 소유자로 꼽혔죠.
판타지 세계에서 감정의 불은 원인 불명의 특이 체질 정도로 취급되고, 감정의 불 소유자가 보통 단명하기 때문에 피해의 규모는 작은 편입니다.
하지만 꿈의 세계에서는 조기 진압에 실패하면 반드시 대화재가 되는 무서운 재앙입니다.
이곳에서 감정의 불은 돌이나 나무. 심지어 구름과 물까지 연료로 삼아 타오르기 때문이죠.
현재까지의 연구에 따르면 꿈의 세계에서 발생한 감정의 불을 꺼트릴 수 있는 건 샌드맨이나 밤개구리 등이 만드는 잠의 모래뿐인 걸로 알려져 있습니다.
만약 사회와 멀리 떨어진 이런 곳에 잠의 모래를 사용하는 방법을 아는 사람이 없다면 꿈의 세계 전체가 불에 휩싸일지도 모를 일이죠.
그들이 없다면 꿈의 세계는 잿더미가 되고, 이곳과 연결된 우리의 뇌까지 위험에 처할지도 모릅니다.
물론 꿈을 꾸지 않게 된 사람에게는 아무래도 좋을 이야기겠지만······.
아무리 삶이 힘들어도 낭만이라는 건 포기할 수 없는 매력이 있지 않나 싶습니다.
삶이 잿빛이라도 색이 있다고 믿으면, 그 세상은 온갖 색으로 빛나고 있을 테니까요.
어쩌면 이 또한 색욕일지도 모르겠군요.
자, 가도록 하죠 레코더맨.
지금 우리 몸은 잠의 모래로 된 의체니까, 저기에 뛰어들면 불을 끄는데 조금이라도 일조할 수 있을 겁니다.
어차피 여기서 죽는다 해도 꿈의 세계 밖으로 나갈 뿐이고······.
···한 번이라면 당신과 함께 죽는 것도 나쁘지 않은 꿈일지도 모르겠네요.
- 작가의말
그러나 레코더맨에게 보낸 나레이션의 호의가 연애로 발전되는 일은 없었다.
러브코미디와 로맨스에 잼병인 녹챠에게는 플래그에서 연애로 이어지는 빌드업을 성사시킬 재능이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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