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지 상승
평소와 달리 꿈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잠에서 깼다. 기분이 좀 그렇다.
'왜지? 평소엔 꿈이 끝났구나 느낌이 오고 깼는데. 이번엔 왜 중도에 깼을까?'
대충 씻고 아침도 대충 먹고 자전거로 출근했다. 차는 고장 났고 달려서 출근하기엔 거리가 꽤 멀다.
"형, 혹시 청탁받은 거 있어?"
출근하자마자 김치국 검사가 이상한 소릴 한다.
"아니. 형사부랑 엮일 만한 사람은 내 주변에 없어."
"어제 접수한 안건인데, 원고가 형이랑 잘 아는 사이라던데? 제대로 처리 안 하면 큰일 난다고 큰소리 땅땅 치더라."
미제사건까지 대부분 처리했기에 요즘 시간이 넉넉하다. 감시역인 박 검사도 물렁물렁하게 구워삶았기에 열심히 일하지 않아도 된다.
그래서 먼저 김 검사 방으로 가서 수사 기록을 확인했다.
"내가 다니던 회사 후배야. 그만둘 땐 내 상사기도 했고."
"그럼 악연이잖아. 큰소리칠 형편은 아닌데?"
"영화나 TV에서 본 거 그대로 따라 한 거야. 우리나라 사람들 경찰서나 검찰청 드나든 경험이 몇 명이나 있겠어. 처음 오니 조금 무섭기도 하니까 큰소리쳐본 거지."
수사 기록을 빠르게 살폈다. 이것도 자주 보면 요령이 생긴다. 게다가 내 사건도 아니니 핵심 서술만 살피면 된다.
"얘가 왜 원고야? 여자도 많이 다쳤는데."
"서로 싸운 건 쌍방 폭행이어서 경찰관이 합의 끌어냈어. 사기 혐의 원고야."
사기 혐의자는 놀랍게도 박 사원 이모였다.
"그 얼굴이 성형이라고? 전혀 티 안 났는데."
"형은 여자도 알아? 설마?"
"설마가 사람 죽여. 너 죽고 싶니?"
서른이 되었는데도 김치국은 여전히 까분다.
"직장 후배 이모야. 몇 년 전에 최 과장이랑 같이 다니는 걸 본 적이 있어."
"어떻게 처리할까?"
"법대로 해. 둘 다 호감도 유감도 없으니까."
그렇게 끝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점심시간에 박 사원이 날 찾아왔다.
"선배님, 아니 검사님. 제발 이번 일 법정 안 가게 막아주세요."
예전엔 꽤 괜찮다고 여겼는데, 그간 눈이 높아져선지 너무 평범하게 보인다.
"난 경제 관련이고, 사건은 형사부로 갔습니다. 손 써서도 안 되고 그럴 힘도 없습니다."
"다 들었어요. 담당 검사랑 선배님이 친하다고요."
"그래요. 수사 기록도 제가 읽어봤어요. 법정 가도 무죄 나올 겁니다. 어차피 민사로도 꼭 법정 갈 일이니까 나보단 최 과장 설득하는 게 빨라요."
"제가 다 말할게요. 듣고 판단해 주세요."
매정하게 뿌리치기도 그렇다. 업무 시간도 아닌 쉬는 시간에 찾아왔기에 내칠 핑계도 궁하고.
"그래요. 시간 오래 못 내드려요. 요점만 간단히 말씀해 주세요."
검찰청 근처의 조용한 식당으로 갔다. 국밥 두 개 시켜 놓고 식사부터 했다. 박 사원은 몇 술 뜨다 말고 내가 식사 마치기를 기다렸다.
"죄송해요."
"괜찮습니다. 이야기 들어준다고 손해 보는 것도 없고."
"그거 말고요. 이모 소개하려고 했던 거 말이에요."
사정은 이랬다.
박 사원의 이모는 추녀다. 어릴 때 무슨 신경 손상이 왔다는데,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피부도 다른 신체 부위보다 얼굴만 훨씬 까맸고.
"랫미인이라는 TV 예능에 나갔어요. 거기에서 성형도 받고 치료도 받고. 얼굴이 이뻐지고 자신감이 생기면서 자질구레한 병도 다 사라졌어요. 그리고 이름도 바꿨어요. 예능에서 가명을 썼지만, 그래도 소문이 야금야금 퍼지니깐요."
그래서 이쁜 이모를 나한테 소개하려 했던 거였군.
"정말 죄송해요. 이모는 무조건 착한 사람이어야 한다고 했어요. 성형 사실을 알려도 변심하지 않을 사람으로요. 그때 천 대리님만 생각났어요."
나는 여자 얼굴 따질 형편이 아니라고 판단했다는 말씀. 박 사원 그렇게 안 봤는데 참 실망이야. 하긴, 자판기 커피 말고 별다방 커피까지 주면서 부탁할 때 눈치 못 챈 내가 병신이었지.
"근데 이모가 반대했어요. 눈이 너무 착하고 진실하다면서요. 상처 주는 거 싫다고 했어요. 그전에 선으로 만난 남자들 모두 성형했다는 말에 큰 충격을 받았거든요."
"그럼 최 과장이랑은 어떻게?"
"밤에 대리님이 문자 보내셨잖아요. 그걸 이튿날 아침 봤어요.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혹시 인터넷에서 성형 사실을 알아낸 게 아닌가 걱정되어 답장 못 드렸어요. '랫미인 4대 기적'으로 검색하면 이모 사진 나오거든요."
박 사원이 눈물을 훔친다. 정작 울어야 할 사람은 나 아닌가?
"저도 그렇고 이모도 기분이 울적했어요. 그래서 둘이 쇼핑하러 나갔는데 우연히 최 과장님 만났어요. 이모가 성형한 거라고 말했는데도 괜찮다며 계속 들이댔어요."
"성형 사실을 미리 알렸다는 건가요? 박 사원 말고 들은 사람 있어요?"
"김 사원이요. 최 과장이 김 사원을 주말에 불러내 데리고 다녔거든요."
최 과장 이놈은 못된 것만 배웠구나. 뭐, 자기도 주말마다 부장이랑 함께 산 타면서 수발 자주 들었다 이거지?
"3년 정도 쫓아다녔어요. 그리고 결국 결혼했죠."
"그랬군요."
"여자는 남자가 그 정도로 좋다고 들러붙으면 넘어가게 돼 있어요. 최 과장이 부족한 점이 많은 사람이긴 하지만, 이모한테 들인 정성은 정말 대단했어요."
"법정까지 가면 이모 일이 널리 알려질까 봐 걱정인 거죠?"
"네. 어떻게든 법정 안 가고 해결됐으면 좋겠어요."
박 사원을 배웅하고 검찰청으로 돌아갔다. 검색창에 랫미인 4대 기적을 치고 검색하니 성형 전후 대비 사진이 가득하다.
클릭하니 박 사원 이모 사진이 보인다. 스크롤을 밑으로 쭉 내리다가, 최신 댓글을 봤다.
- 여자 천동출.
"검사님, 일찍 출근하셨네요?"
늦게 출근한 조사관이 졸린 눈으로 인사한다. 미행을 걱정해 빙빙 돌아 집으로 갔으니 4시간도 못 잤을 거다.
"잘 왔어요. 이 아이디 누군지 확인해 주세요."
내 책상으로 다가와서 악플을 확인한 조사관이 고개를 갸웃한다.
"이건 악플로 고소하기 힘들 텐데요."
"이거 김치국 아이디 같아서 그래요. 부탁할 일이 있는데, 이거면 부탁 말고 지시로 해도 될 거 같네요."
과연. 어젯밤에 새로 단 댓글의 주인은 김치국이었다. 사건 때문에 검색하다가 근질근질한 손가락을 못 참고 댓글 단 거겠지.
"치국아. 여자 천동출 사건으로 얘기 좀 나누자."
내부 선로로 건 전화에 김치국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바로 달려왔다. 엘리베이터 말고 계단으로 왔는지 숨소리도 벅차다.
"이번 사건 조용히 묻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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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 얼굴이 좋아. 설마 오늘 사건 잘 해결돼서 그런 거야?"
최 과장과 박 사원 이모는 이혼하기로 했다. 재산은 공평하게 반반.
마마보이인 최 과장 명의로 된 재산이 얼마 없어서 최 과장도 큰 손해는 없었다. 굳이 반반으로 한 건 재산이 탐나서가 아니라, 이혼의 귀책 사유가 여자 측에 없다는 일종의 증명이나 마찬가지다.
"검사가 뭐라고 생각해?"
"진실을 밝히고 죄인에게 벌 주는 사람?"
"진실을 밝히는 사람. 참 좋은 표현이야."
속에 진 큰 응어리가 풀어졌다. 나도 문자를 보내서 만남을 거부하긴 했지만, 박 사원 이모 얼굴을 직접 본 뒤로 줄곧 배가 아팠다.
힘든 상하차 알바로 기진맥진하기도 했고, 새벽이고 조명이 흐릿하기도 했고, 나한테 사과하는 박 사원 이모의 눈빛이 하도 진실하기도 했고.
하여튼, 눈썰미가 발동하지 않아 성형 사실을 전혀 눈치 못 챘다.
그게 줄곧 가슴에 맺혀 날 멍들이며 괴롭혔는데, 진실을 알게 되니 속이 후련하다.
'진실. 많이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진실을 아는 것도 중요하다.'
그렇다면 무엇이 진실인가?
'내가 갖춘 지식과 상식의 범위에서 100% 믿을 수 있는 사실. 그게 진짜 진실인지가 중요한 게 아니다. 내가 의심 안 하고 믿는다는 게 중요하다.'
한잔하자는 김 검사를 겨우 떨치고 집으로 향했다.
'난 천마다. 그러나 신은 아니다. 내 수준에서의 진실이 필요하다. 진리는 더 높은 경지에서 찾아봐도 된다.'
머리를 간질이던 생각이 천천히 가라앉아 마음으로 갔다. 마음에서 갈팡질팡하던 생각은 소용돌이가 되어 내 의식과 무의식에 새겨진 기억과 지식을 마구 흔들었다.
결국 태풍이 된 생각이 가슴에서 단전으로 움직였고, 단전에 도착한 폭풍은 스펀지처럼 주변의 기를 탐스럽게 빨아들였다.
'염동기동(念動氣動).'
생각에 따라 기운이 움직이는 경지. 끝내 집유의 경지를 벗어났다. 그렇다고 실형의 경지에 이른 건 아니다.
게임처럼 레벨업 하면 다음 레벨이 자동으로 되는 게 아니다. 지금 난 집유와 실형의 경계에 있다. 자칫 다시 집유로 떨어질 수도 있고, 냉수 마시다가 실형의 경지에 발을 내디딜 수도 있다.
'경지를 높이려면 진실에 당당히 맞서야 한다. 그럼 모범생 천마랑 망나니 천마는 어떤 진실을 외면하고 있었을까?'
- 작가의말
천동출이 집유를 못 벗어난 건 배가 아파섭니다. 질투는 경지 상승의 큰 방해꾼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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