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신 법술
"저는 바빠서 이만. 즐거운 식사 되십시오."
방목형이 굽신거리며 물러났다. 혹시라도 음식이 입맛에 안 맞으면 자신한테까지 불똥이 튈까 봐 미리 피하는 것이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이몽롱으로 위장한 석호필이 책상다리를 하고 법술을 펼쳤다.
"문신(問訊)."
물을 문에 소식 신.
석호필 몸에 그려진 의미 모를 문신(紋身)들이 실타래인 양 올올이 풀려났다. 검은색과 회색이 주를 이뤘고 푸른색 실타래가 조금 섞였다.
검은색은 바닥을 흘렀고 회색은 벽과 천장을 훑었으며 푸른색 실타래는 허공을 더듬었다.
전에 갇혔을 때는 같은 방을 쓰던 용답답 때문에 문신 법술을 펼치지 못했기에 여기 구조를 제대로 모른다고 한다.
- 푸른색은 뭐야?
- 진법 감지. 진법은 정기적으로 바뀌니까 아는 진법도 다시 확인해야 해.
그러니까 검은색으론 2D를 그리고 회색이 합세하면 3D가 된다. 그리고 푸른색은 적외선 탐지기처럼 눈에 안 보이는 트랩을 밝히는 용도고.
"사흘 뒤에 다시 불러주십시오. 진법의 방해로 지하를 읽는 데 어려움이 있습니다."
"아무 성과도 없어?"
"방 하나 발견했습니다. 안에 누군지는 진법으로 가려져서 알아낼 수 없었습니다."
"진법 정보 넘겨."
진법 정보를 넘긴 석호필은 피로했는지 침대에 누웠고 천마가 주방으로 들어갔다.
- 오랜만에 하는 거니까 서투르다고 비웃지 마.
도마와 식칼이 허공에 둥실 떠서 채소를 썬다. 고르게 썬 채소를 적당히 달군 가마에 넣자 주걱이 날아와 열심히 섞는다. 한쪽에서 춘장을 볶고 한쪽에선 면을 삶는다. 혼자서 여럿의 몫을 함에도 한 치 흐트러짐이 없다.
개세 열심히 익히면 나도 되는 거겠지? 근데 여배우랑 사귈지 아이돌이랑 사귈지 여전히 고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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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뭐 할 거야?
간짜장을 맛나게 먹은 석호필이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떠났다.
- 지하에 갇힌 놈 확인하러 가야지.
천마는 문밖에 '휴식중' 팻말을 걸어놓고 옷을 다 벗었다. 그러곤 축골공으로 몸을 아주 작게 줄였다.
- 무슨 짓이야? 느낌이 이상해.
- 지하 감옥을 간수들이 계속 드나들진 않을 거야. 그럼 비밀을 지킬 수 없으니까. 지하 감옥은 별도로 독립된 공간이라고 여겨야 한다. 그럼 당연히 주방이 있을 거야.
- 그게 네가 몸 줄인 거랑 뭔 상관인데?
- 주방끼리 연결되었을 가능성이 커. 엉뚱한 곳에 굴뚝을 세우면 의심받으니까 당연히 같은 굴뚝을 통해 연기가 나가겠지.
천마는 아궁이로 들어가서 열심히 움직였다.
- 뭐 알고 뛰는 거야?
- 당연하지. 아까 석호필이 지도 보여줬잖아.
그 3D 지도? 너무 복잡해서 뭐가 뭔지 전혀 모르겠던데.
한참 뛰니 동그란 하늘이 보였다. 비밀 감옥의 연기를 모아 뱉어내는 유일한 굴뚝. 이렇게 올려다보니 내가 우물 안 개구리가 된 느낌이다.
- 이 구멍이 아까 석호필이 탐지한 지하 감옥의 방으로 통해.
천마가 굴뚝과 연결된 수백 개 구멍 중 하나를 가리켰다.
- 이럴 거면 석호필은 왜 불렀어.
그냥 천마가 굴뚝이나 배수로나 환기구로 다니면서 찾으면 되는 일이다.
- 진법이 있잖아. 석호필이 생문을 찾아내서 안전하게 출입할 수 있어.
- 넌 못 해?
- 파괴하는 거야 쉽지. 그런데 흔적 안 남기고 진법을 출입하는 건 내게도 어려운 일이야.
진법을 파괴하면 전문가들이 흔적을 읽는다. 그리고 천마 소행이라는 게 밝혀진다. 천마가 광명정을 떠났다는 소식이 널리 알려지면 사회적 불안 및 위화감을 조성한다.
그러면 출세에 눈먼 자들과 마교는 무조건 나쁘다고 어려서부터 세뇌당한 무뇌아들이 전쟁을 외칠 가능성이 크다.
지금 전쟁이 벌어지면 황궁과 무림맹이 손잡는다. 둘이 손잡을 빌미를 최대한 안 주려면 천마가 조심해야 한다. 유치원 삼법 때엔 배후와 배임 및 흑도 인물 수백 명만 죽이고 점잖게 물러났기에 황궁과 무림맹이 손잡을 명분으론 부족했다.
그러나 천마가 비밀 감옥인 금고에 침입한 사실이 들키면 황궁은 커다란 위기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 그냥 나쁜 우두머리를 다 쓸어버리면 안 돼?
- 이건 사회 구조랑 생산력과 생산물 분배의 불균형으로 생긴 문제야. 사람 좀 죽인다고 해결될 일이 절대 아니지.
무슨 말인지 모르겠으니 가만히 있어야겠다.
- 황궁에서 만든 대포진은 확실히 다르구나. 석호필이 아니었으면 들어갈 방법을 못 찾았을 거야.
난 아무것도 모르겠는데 천마는 앞구르기도 하고 공중제비도 돌고 가끔 포복 전진도 했다.
- 대포진?
- 정보의 단절로 정체를 감추는 고급 진법이다. 외부에서 읽은 정보로 유추해 봐야 전혀 연관 없는 사람이 나와.
전력 질주하던 천마가 멈추자 공간이 달라졌다. 몸을 떨지 않았으니 부동성왕은 아니다.
드디어 신분을 숨겨주는 대포진을 통과한 것이다.
"누구시오?"
안에 갇힌 죄수가 기척을 감지하고 고개를 들었다. 조금 멍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내 신분은 밝힐 수 없다. 혹시 다른 방에 누가 갇혔는지 알아?"
"모르는 일이오. 여기 갇히고 나선 정해진 시간에 음식만 들어오고 외부와는 완전히 단절되었소."
알몸인 데다가 재가 묻어 새까만 천마를 보고도 죄수는 놀라지 않았다. 어쩌면 혼자 너무 오래 지내서 외부 자극에 무감각해진 것일지도 모른다.
"넌 누구야?"
"내 이름은 태식이오."
죄수는 자기 이야기를 담담하게 풀어놓았다.
"철없을 때 술에 취해서 싸움을 걸어온 상대를 죽였소. 감옥에 10년 있으며 죗값을 치렀소. 출옥하고 내가 죽인 사내 집에 가서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었소. 다행히도 날 용서해주고 아들이라고 불러줬소. 고아나 다름없던 내게 어머니와 여동생이 생겼소."
태식은 과거 급제를 목표로 공부에 몰두했다. 어머니와 여동생은 주막을 운영해 번 돈으로 태식의 서당비를 댔다.
"그렇게 세상 모든 게 감사하고 행복했소. 그런데 나쁜 놈들이 내 어머니를 죽이고 여동생을 중태에 빠뜨렸소. 다신 안 싸우겠다고 했던 약속을 깨고 그놈들을 다 죽여버렸소. 아, 병진이 형은 빼고. 그 형은 나가 있었소."
"후회하는가?"
"복수는 후회하지 않소. 사내로서 당연히 할 일을 한 것이오. 내 후회라면 미리 알아내서 막지 못한 것뿐이오."
"그런데 왜 여기 갇힌 것이지? 살인이 중죄라지만, 복수라는 명분도 있고 상대 역시 범죄자이기에 처벌을 약하게 받아야 하는데."
황궁 법만 적용하면 살인은 최소 10년을 받아야 할 중죄지만, 피의자가 배심원 제도를 신청하면 판결에 관습법까지 적용할 수 있다.
피해자가 살인을 저지른 범죄자라는 점을 들먹이면 기껏해야 3년 정도 살고 나오는 경범죄로 변한다. 죽은 자들의 범죄 사실이 많이 밝혀지면 오히려 표창장을 받을지도.
결정적으로 태식은 비밀 감옥에 들어올 자격조차 없는 흙수저.
"나보고 규화보전을 내놓으라고 했소."
규화는 해바라기다. 보전은 귀중한 책이라는 뜻이고.
"불패가 익히다가 실패한 절세무공?"
정보가 떠오른다.
이름은 동방삭. 호가 불패다.
동자공을 통해 자웅을 비슷하게 키운 다음 동웅공까지 익혀 자웅동체로 간 무림 역사상 유일한 남자.
자웅동체에 이른 동방삭은 급한 마음에 규화보전을 익혔다. 규화보전이 수련 기간을 짧게 단축해 준다는 말 때문이었다.
규화보전 덕분에 성공의 문턱까지 갔지만, 반대로 너무 급하게 간 바람에 기초가 부실하여 하늘에 닿기 전에 계단이 무너졌다.
"난 규화보전이 뭔지도 모르오."
"혹시 어머니나 여동생 성이 동방인가?"
"어머니 성이 동방이오. 이름은 신기. 그리고 주막 이름이 해바라기였소."
"놈들은 규화보전을 노렸을 가능성이 크다. 네 어머니는 아무래도 동방불패의 후손인 것 같구나."
"그놈들이 노린 게 일기장이 아니라 규화보전이었단 말이오?"
"가능성이 있다는 말이다."
"내가 그놈들을 장원에 가둬놓고 불 질렀소. 규화보전을 그놈들이 빼앗은 거라면 아마 불타 사라졌을 것이오."
"규화보전은 수화불침이다. 물에 젖지 않고 불에 타지 않으며 천하장사가 나서도 찢을 수 없다. 먹으로 아무리 칠해도 글자가 가려지지 않는 대단한 책이지."
"그것 때문에 날 지금까지 여기 가둬둔 것이란 말이오? 난 분명히 규화보전이 뭔지도 모른다고 똑똑히 말했는데."
- 작은 일이 아니다. 규화보전은 자웅동체를 이루지 못하면 익힐 수 없는 무공이다. 그런데 황궁에서 이리도 애타게 찾는 걸 보면 익혀 낼 편법이 있는 것 같다.
- 편법이라니까 생각났는데. 환관들한테 익히게 하려는 게 아닐까? 자와 웅 모두 있는 거나 자와 웅 모두 없는 거나 비슷하다고 생각해.
천마가 갑자기 눈을 감고 명상에 들어갔다.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숨마저 멈춘 채 가만히 서 있었다.
제길, 또 실수로 진리의 편린을 보여줬군.
- 작가의말
태식의 성은 숫자입니다. 정답을 선택하세요.
A. 2
B. 4
C. 6
D. 9
E. (B+C)/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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