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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쇠의 서재입니다.

천마에 빙의하다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퓨전

완결

글쇠
작품등록일 :
2019.11.01 10:16
최근연재일 :
2020.01.06 18:00
연재수 :
89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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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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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5
글자수 :
363,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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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01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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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쪽

그린 라이트

DUMMY

칙 소리와 함께 고기가 탐스럽게 익어간다. 입사 2년 차인 호영이가 잽싸게 고기를 잘라 내 앞접시에 놔주며 비굴하게 웃는다.

다른 직원들도 애원이 듬뿍 담긴 눈으로 내게 사정한다. 구국의 결단을 바라는 눈빛을 난 거절하지 못했다.


"박 사원. 나랑 자리 바꿔요. 여기 좀 춥네요."


나는 평범하다.


유치원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이후, 그 기세를 이어가지 못하고 초중고등학교 모두 평범했다.

대학은 운 좋게 인서울 했고 군 생활도 특별한 게 없었다. 남들 다 한 번씩 잡아보는 간첩을 구경도 못 하고 제대했다.


기숙사를 같이 쓰던 선배 덕분에 입사는 쉬웠다. 그러나 선배 따라 줄을 잘못 잡은 탓에 회사 생활도 평범하다. 입사 8년 차에 여전히 대리다.


"과장님, 제가 한 잔 올리겠습니다."

박 사원과 자리를 바꾼 나는 공손한 얼굴과 자세로 최 과장 잔에 소주를 듬뿍 부었다.


나이는 나랑 동갑, 재수 때문에 나보다 일 년 후배. 이놈도 평범하다. 평범한 놈답게 선배인 내가 과장이라고 부르며 대접해주는 걸 무지 좋아한다.

"하하, 천 대리. 술자리에선 편하게 해. 우리 동갑이잖아."

"무슨 말씀입니까. 회식도 업무의 연장인데. 엄연히 여긴 직장이고 과장님은 제 상사죠."


박 사원이 내게 고마움을 듬뿍 담아 감사의 눈길을 보내온다. 최 과장 이놈은 입사 2년 차인 박 사원을 마음에 들어 했다. 이혼남 주제에 여덟 살 차이 나는 풋풋한 아가씨를 노리는 게 꼴 보기 싫어서라도 열심히 아부하고 술 먹여야지.


참고로 난 솔로다. 모태로.


장 부장은 점잖은 사람이다. 술은 입에도 안 대고 고기만 배불리 먹은 후 마누라와 아이한테 먹일 음식을 포장해 바로 떠났다. 최 과장이 내 8년 내공의 아부 신공에 해롱해롱해지자 회식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9시도 안 되어 끝났다.


대리 불러서 최 과장부터 보낸 후 남은 직원들이 내게 고생했다고 인사하며 하나둘 떠났다.


"천 대리님, 매번 고마워요."

"고맙긴요. 최고참이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에요."

박 사원이 수줍게 웃으면서 내게 따뜻한 커피를 건넨다. 자판기에서 뽑은 커피 말고 별다방 커피다.


"주말에 혹시 시간 되세요?"

때마침 신호등이 초록으로 변한다. 그린 라이트를 본 차들이 맹수처럼 질주한다. 나도 달리고 싶다.

"특별한 일 없어요. 뭐, 업무 막히는 거 있나요?"

담담한 대응. 술을 꽤 마셨으니 얼굴 달아오른 거 티 안 나겠지?

"혹시 야구 좋아하세요?"

"야구 축구 다 좋아합니다."


대답이 너무 빨랐나? 말투에 간절함이 과하게 배어있지 않았을까?


"이모가 늦둥인데요. 제 어머니랑 나이 차이 크게 나요."

"네?"

"진짜예요. 올해 서른이거든요. 동안이어서 스무 살로 보이기도 해요. 이제껏 남자에 관심 없었는데 집안 압박이 심한지 저보고 괜찮은 남자 있으면 소개 좀 해달라고. 제 주변에 괜찮은 남자는 천 대리님밖에 없거든요."


신호등이 빨강으로 바뀌었다. 차 한 대가 뒤늦게 급정거했지만, 정지선을 넘었다. 벌금 7만 원에 벌점 15점.


난 저러지 말아야지.


"이런 감사할 데가. 박 사원 이모면 분명히 미인이겠죠?"

"그럼요. 사진 보여드릴게요."

사진을 보여주려고 내게 몸 붙이는 박 사원의 풋풋한 냄새가 마음을 간질인다. 최 과장 욕할 게 아니다. 나도 속물이다.


뽀샵 어플을 썼는지 엄청 미인으로 나왔다. 나는 급격히 치솟는 기대감을 억지로 눌렀다. 사진과 별 차이 없는 미인이라면 솔로일 리가. 만약 솔로라면 하자가 있는 게 틀림없다.


그래도 내겐 감지덕지다.


"이모한테 미리 말 안 할게요. 간장 치킨에 환장하니까 혹시 마음에 드시면 야구 끝나고 치킨 드시러 가세요."


라임 좋았어. 박 사원.


박 사원까지 떠나고 난 버스 정류장을 찾았다. 대리비 아까워서.

'내가 대린데 대리 부르면 안 되지.'

개그 센스만큼은 부장도 내 밑이다.


그린 라이트가 켜졌다. 나는 인도를 건넜다. 내일 뭐 입고 나갈지 고민하는데 쾅 소리가 고막을 찢는다. 어디에 사고 났나 살피려는데 목이 안 돌아간다. 내 몸이 허공을 날고 있다.


어떤 미친 새끼가 레드 라이트를 그린 라이트로 알았는지 인도를 지나는 나를 덮쳤구나.


이 개새끼야. 난 그린 라이트 아닌 걸 알고 멈췄다고. 정지선 안 넘고 나나 박 사원이 어색해지는 일 없도록 안전 주행했다고.

그런데 넌 뭐냐? 왜 레드 라이트 무시하는데? 왜 헌법을 유린하는데?


###


"교주. 대장로가 부름을 받고 왔습니다."

"들이라."


꿈인가? 난 지금 커다란 의자에 앉아있다. 마치 영화에서 보던 황제의 용상 같다. 그리고 아래로 99개 계단이 시원하게 뻗었다.

계단 아래, 그러니까 대충 눈짐작으로 50미터가 넘은 곳에 있는 자가 하는 말이 귀에 대고 속삭이는 것처럼 똑똑히 들린다.


대청엔 대신이라고 하기에 너무 건장한 사내들이 보인다. 하나같이 쇠도 씹어먹게 생긴 우락부락한 외모다.


기척도 없이 중년 사내가 대청으로 들어왔다. 먼저 있던 뻣뻣한 사내들과 달리 긴장이라곤 볼 수 없는 편안한 얼굴과 걸음걸이다.


짙은 눈썹에 부리부리한 눈매, 미끈한 마늘코에 아랫입술이 두툼하다. 비단옷으로 몸을 겹겹이 감싸고 발엔 주름 하나 없는 최고급 가죽 신발.

아쉬운 거 하나 굳이 뽑으라면, 대머리다.


"아마존이 마중지존 천마를 뵙습니다."

대머리가 무릎을 꿇고 정중하게 절을 올렸다.


갑자기 정보가 떠오른다.


아마존(亞魔尊).

처음엔 책 장수였다. 어느 날 우연히 고서를 얻어 마공을 익혀냈다.

어마어마한 위력 덕분에 마존으로 불리며 마교 최고수로 추앙받았다. 차기 교주 자리에 가장 가까운 자로 불렸다.

그런데 갑자기 천마가 나타났고 세 초식 만에 제압당했다. 마존은 천마에게 굴복하여 자신의 별호를 아마존으로 바꿨다. 아(亞)는 두 번째라는 뜻으로 천마 버금가는 마존이라는 의미다.


"대장로는 무림 어디든 하루 만에 물건을 보낼 수 있다고 들었다."

"하나의 물건에만 집중하면 충분히 가능합니다."

"이 정도 크기면 문제없겠지?"


사과 박스 크기의 함이 시야에 들어온다. 손에서 느껴지는 감각에 따르면 여섯 근 정도 무게다. 안에 뭐가 들었는지 갑자기 궁금해진다.


"문제없습니다. 어디에 보낼까요?"

"말종."


말종(茉宗).

당금 황제다. 연호는 인간(仁澗). 지금 시점은 인간 18년이고 말종은 황제가 된 지 2년이다.

연호랑 연차가 안 맞는 건 이유가 있었다. 인간이라는 연호는 말종의 아버지가 사용하던 것이었다. 말종은 아버지와 네 형님 그리고 여섯 아우를 죽이고 황위를 찬탈했다. 대신과 백성의 반발이 심해 연호를 새로 시작하지 못하고 아버지 연호를 그대로 쓰는 중이다.


쉽게 말하면 자리엔 앉았으나 황제로 인정받지 못했다.


"들어 있는 게 뭔지 알려지면 안 됩니까?"

아마존은 프로였다. 포장을 대충 할 건지 쉽게 못 뜯게 제대로 할 건지 천마에게 질문했다.

"검선 머리다. 널리 알려졌으면 한다."


천마가 대답했다.


"어느 검선입니까?"


새로운 정보가 떠오른다. 무림맹에는 검선이 수십 명 있다. 화산 검선, 종남 검선, 공동 검선, 무당 검선, 소림 검선, 점창 검선, 청성 검선, 아미 검선, 태산 검선, 형산 검선 등.


"점창 검선. 말종한테 황금 30관 받고 날 암살하러 왔다."

"다른 분부는 없습니까?"

"그만 가봐도 좋다."


아마존은 허리를 숙여 공손히 인사한 후 대청에서 사라졌다.


"다들 나가라."

대청에 오십 명만 있는 줄 알았는데 벽과 천장 심지어 바닥에서까지 사람이 나타나서 밖으로 나갔다. 어림짐작으로 백 명은 되었다.


- 너는 누구냐?

- 나?

- 혹시 심마냐?

- 너 몇 살인데 반말이야?


말하고 나니 아차 싶었다. 겨우 삼십 대 중반인데 벌써 꼰대 짓이라니.


- 먹을 만큼 먹었다.


그러나 반성도 잠시. 천마의 대응에 오기가 치밀었다. 보통 이런 대답은 어린놈들이 주로 하지.


- 난 서른넷. 넌?

- 열여섯이다.


열여덟이면 욕하려고 했는데. 열여섯이니까 봐준다. 절대 갑자기 천마 몸이 떠오르는 바람에 겁먹은 거 아니다.


맹세코.


- 난 천동출이다. 마차에 부딪혔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이 모양이다.

- 손가락 움직여봐.

손가락은 미동도 없었다. 팔이나 다리는 물론 발가락도 해봤다. 그러나 내가 움직일 수 있는 부위는 없었다.


- 성화신께 아뢰고 네 처분을 결정하겠다. 그때까지 얌전하게 지내라.


말을 마친 천마의 몸이 허공에서 부르르 떨렸다. 오줌 마려운 줄 알았는데 갑자기 장소가 바뀌었다.


- 여기가 네 방이야?

- 자야 하니까 너도 조용히 해.


졸린 느낌이 들며 정신이 멍해진다. 감각이 사라지고 세상이 까매지며 난 기절한 것처럼 잠들었다.


그렇게, 이상한 동거가 시작됐다.


작가의말

배꼽 찾을 정돈 아니지만, 피식 웃을 수 있는 글.

냉장고에서 갓 꺼낸 사이다처럼 시원하진 않지만, 맑고 청량한 샘물 같은 글.

무림이라는 세상에 우리 삶을 조금 투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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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 나는 모를 이야기 +9 20.01.06 742 12 11쪽
88 사필귀정 20.01.06 268 6 9쪽
87 저승사자의 손짓 20.01.06 182 5 10쪽
86 경지 상승 20.01.05 163 5 9쪽
85 견제 20.01.05 173 5 9쪽
84 생방송 20.01.05 172 5 9쪽
83 자충수 20.01.04 154 6 9쪽
82 민중의 칼 20.01.04 156 4 9쪽
81 지뢰밭길 20.01.04 140 4 9쪽
80 가시밭길 20.01.03 142 8 9쪽
79 천동출 20.01.03 152 4 9쪽
78 진상 20.01.03 139 5 9쪽
77 성화신의 정체 +2 20.01.02 162 7 9쪽
76 합체와 분리 20.01.02 139 5 9쪽
75 전쟁 20.01.02 153 5 9쪽
74 저지르고 보자 20.01.01 176 4 9쪽
73 정조를 지켜라 20.01.01 198 4 9쪽
72 검사 천동출 20.01.01 154 4 9쪽
71 청천벽력 +2 19.12.31 163 7 9쪽
70 전학생 19.12.31 189 4 9쪽
69 세상이 너무 쉬워 19.12.31 129 6 9쪽
68 생김에 관한 고찰 19.12.30 152 7 9쪽
67 나는 강하다 19.12.30 127 6 9쪽
66 처형식 19.12.30 124 6 9쪽
65 양아치 19.12.29 122 6 9쪽
64 간타자 +1 19.12.29 138 6 9쪽
63 내가 내게? 19.12.29 137 5 9쪽
62 의욕 잃은 망나니 19.12.28 152 8 9쪽
61 말종의 반격 19.12.28 125 6 9쪽
60 동맹주 19.12.28 124 5 9쪽
59 무마동맹 19.12.27 141 4 9쪽
58 천마신공 19.12.27 143 4 9쪽
57 아비수의 마왕들 19.12.27 149 6 9쪽
56 망나니 강림 +3 19.12.26 144 8 9쪽
55 어마어마한 지원군 +1 19.12.25 154 6 9쪽
54 마교와 전쟁 19.12.24 142 7 9쪽
53 애송이들아 +2 19.12.23 156 8 9쪽
52 대기업 회유 +2 19.12.22 181 7 9쪽
51 독점금지법 +2 19.12.21 179 5 9쪽
50 후원금 +5 19.12.20 171 6 9쪽
49 난 진실만 말한다 +2 19.12.19 174 6 9쪽
48 청문회 +2 19.12.18 172 5 9쪽
47 무림맹의 저력 +2 19.12.17 165 7 9쪽
46 비무 대회 +2 19.12.16 187 7 9쪽
45 천마의 대응 +4 19.12.15 187 7 9쪽
44 후보자 토론회 +2 19.12.14 176 7 9쪽
43 영혼 분리 +2 19.12.13 181 7 9쪽
42 공약 +3 19.12.12 219 6 9쪽
41 출마 선언 +2 19.12.11 187 6 9쪽
40 차별에 관하여 +2 19.12.10 219 7 9쪽
39 빙의가 준 계시 +2 19.12.09 268 7 9쪽
38 세 번째 빙의 +2 19.12.08 215 7 9쪽
37 탄핵 +2 19.12.07 202 10 9쪽
36 프리즌 브레이크 +4 19.12.06 218 8 9쪽
35 공청석유 +4 19.12.05 259 5 9쪽
34 십색기 +2 19.12.04 232 9 9쪽
33 문신 법술 +3 19.12.03 226 5 9쪽
32 천마 감옥에 갇히다 +2 19.12.02 240 5 9쪽
31 범인 검거 +2 19.12.01 213 7 9쪽
30 두 번째 빙의 +3 19.11.30 250 6 9쪽
29 대호법의 활약 +3 19.11.29 252 5 9쪽
28 상거지 만수로 +2 19.11.28 286 8 9쪽
27 첩자 이야기 +2 19.11.27 282 8 9쪽
26 유치원 삼법 +2 19.11.26 339 7 9쪽
25 민폐 천마 +2 19.11.25 282 6 9쪽
24 망나니 천마 +2 19.11.24 308 9 9쪽
23 최악의 16팀 +3 19.11.23 300 9 9쪽
22 노력하는 천마 +2 19.11.22 384 7 9쪽
21 무림맹의 재도발 +5 19.11.21 361 8 9쪽
20 배움은 끝이 없다 +2 19.11.20 375 8 9쪽
19 영혼과 육신 +1 19.11.19 412 9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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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뒷수습 +4 19.11.16 421 12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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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내가 천마라니 +3 19.11.09 718 18 9쪽
8 무림맹 +6 19.11.08 808 20 9쪽
7 정치란 말이야 +4 19.11.07 847 25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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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별호 짓기 대회 +6 19.11.03 3,099 40 9쪽
2 천마의 신분 +3 19.11.02 5,090 56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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