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째 빙의
"지성아, 학교 늦겠다. 얼른 일어나."
다행히 병원 침대가 아니었다. 박순녀 때처럼 침대에서 시작했고 감각이 흐릿해서 걱정했는데 단순한 꿀잠이었다.
세수를 꼼꼼하게 마치고 나오니 푸짐한 식탁이 차려졌다. 부모님은 이미 식사를 시작하셨다.
"지성아. 넌 운동선수 되겠다는 놈이 왜 그리 게을러? 경기할 때 좀 많이 뛰어."
"아버지. 많이 뛰는 건 수준 낮은 애들이나 그러는 거예요. 저 같은 지능 플레이어는 효율 있게 움직여요. 한 발 움직이면 남들 세 발 뛰는 것보다 낫다니깐요."
- 천마야, 대사가 좀 이상한데?
- 원주인이야.
이번에도 바로 빙의되지 않고 구경만 하는 입장이구나.
"지성 선배. 어서 내려와요."
밑에서 누군가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옜다. 후배들 맛난 거 좀 사줘라."
"감사합니다. 아버지."
돈을 받아 지갑에 넣은 지성은 여유롭게 운동복을 찾아 입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학생. 2층에서 뭔 엘리베이터야. 그냥 계단으로 걷지."
"이용료 꼬박꼬박 내거든요. 그리고 계단에서 헛디뎌 다치기라도 하면 할머니가 책임질 거예요? 저 소년 국가대표예요. 다치면 범 국가적 손해인 거 알아요 몰라요."
이 예의도 범절도 모르는 놈 소원은 뭘까?
"선배. 언제 불렀는데 이제 내려와."
할머니의 잔소리를 물리치고 밖으로 나가니 후배들이 바통을 이어받았다.
"평소보다 조금 빨랐는데?"
"평소에 느린 게 자랑이야?"
"어허. 선배한테 버릇없게. 떡볶이 사주려 했는데 그만둬야겠다."
"형, 난 아무 말도 안 했어."
"흥민이 이 얍삽한 새끼."
- 아직이야?
- 응. 아직 때가 아닌가 봐.
"형, 우리 몸도 풀 겸 학교까지 달릴까?"
"흥민아. 너도 떡볶이 싫어하나 보구나."
"형은 왜 뛰는 거 그렇게 싫어해?"
"많이 뛰면 다들 부지런해서 잘하는 거라고 해. 내 두뇌 플레이가 빛이 바랜단 말이지. 적게 뛰고 잘해야 사람들이 쟨 진짜 천재구나 감탄할 거야."
흥민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성용이 너 삐졌어?"
"아니, 저기 혜진 선배 보여서. 너무 이쁘지 않아?"
"이쁘긴 하지."
지성이 심드렁한 말투로 대답했다.
"선배는 어떤 여자가 이상형이야?"
성용의 질문에 지성은 고민도 없이 대답했다.
"내 롤모델이 MC 메뚜긴 걸 너희도 알지?"
대한민국 최강 래퍼 MC 메뚜기. 본업보다 예능으로 훨씬 떴다.
"응. 선배도 래퍼 되려고?"
"그 형 아나운서랑 결혼했잖아. 그래서 내 롤모델인 거야."
"선배 얼굴에 아나운서 만나긴 힘들 텐데?"
"흥민아, 떡볶이 말고 돈가스 사줄까?"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라도 간다더니. 대화에 안 낀 흥민이가 성용의 막말 덕분에 횡재했다.
- 애들이 풋풋하네.
- 너보다 형이야. 얘네 고등학생이거든.
"야, 너희 뭐해. 빨리 뛰어."
그때 손에 핸드폰을 든 학생이 헐떡이며 셋에게 말을 걸었다.
"우린 운동부야. 수업 안 들어가니까 늦은 게 아니라고."
"방금 톡방에 뉴스 떴다. 야구부랑 축구부 한판 뜬단다. 늦게 가면 너희들 3학년 선배한테 야단맞을걸?"
- 됐다. 몸이 넘어왔어.
흥민과 성용은 물론, 몸을 차지한 천마 역시 빠른 속도로 학교 운동장을 향해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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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인도 제대로 안 해주는 놈들이 무슨 프로가 되겠다고."
운동장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서로 비하하는 단계까지 발전했다. 분위기를 살피니 손찌검으로 넘어가기 직전이다.
"승엽아. 사인을 너무 해주면 희소성이 떨어져. 그럼 팬한테도 안 좋은 거야."
정환의 대답에 승엽이가 길길이 뛴다.
"그런 개소리가 어딨어. 사인엔 팬을 위한 마음이 담겼어. 그런 마음은 많을수록 값진 거야. 현진아 안 그래?"
"저기 지성 선배가 왔네요. 경기할 땐 걸어 다니다가도 사인을 요청하는 팬이 나타나면 볼트처럼 달리는 분."
지성 본인이라면 뭐라고 반발했을 테지만, 지금은 천마다. 아무 정보도 없는 상황이어서 뭐라고 대꾸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았다. 자기 진영을 찾은 것도 성용과 흥민이 덕분이다.
지성이 가만있자 상대편 기세가 부쩍 올랐다.
"그리고 흥민이 넌 경기할 때 좀 웃어. 맨날 죽상이야. 경기 보는 팬들 생각해서라도 인상 좀 펴자."
"승엽아, 우리 후배는 우리가 알아서 챙길 테니까 넌 빠져라."
"야. 나 1년 꿇어서 너보다 형이야. 반말은 좀 아니다. 새끼야."
"승엽 형. 옳은 말이긴 한데 욕은 아니라고 본다."
"법규야. 왜 저쪽 편 들고 난리야? 네가 뭐 고운 말 홍보대사야?"
"응. 나 고운 말 홍보대사가 꿈이야."
법규의 참견으로 저쪽 기세가 사그라든다. 애들 싸움은 운3기7. 기세가 7을 차지한다.
"찬호 선배. 선배가 좀 뭐라 해봐."
승엽이가 3학년 선배한테 도움을 청했다.
"언다필실(言多必失)."
말이 많으면 실수하기 마련. 참 좋은 말이다. 자고로 남자는 과묵해야지.
저쪽 진영 내부에서 정리될 기미가 보인다. 아무래도 싸움까진 번지지 않을 거 같다.
"야, 우리 경기해. 야구 한 게임 축구 한 게임. 지는 놈들이 주둥이 닥치고 지내는 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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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근 선배, 어떻게 할까요?"
"나랑 흥민이가 윙 서고, 성용이랑 지성이 미드필더 봐. 정환이 공격수하고. 근데 골키퍼는 누가 하지?"
"선배님, 제게 맡겨 주십시요."
"그래. 동문이가 골키퍼 해라."
"자씨 가문의 명예를 걸고 골문을 사수하겠습니다."
"그런데 명보 선배는?"
"땅 보러 갔단다. 중앙 수비수는 수근이랑 병만이가 맡아."
경기가 시작했다. 상대편이 공을 잡았다.
"지성이 저렇게 열심히 뛰는 모습은 처음이야. 마치 사람이 바뀐 거 같단 말이지."
이놈 촉이 장난 아닌데? 사람 바뀐 건 어떻게 알았지?
공을 빼앗아 성용에게 넘겼다. 성용이 길게 왼쪽에 찔러준다. 흥민이는 아까 지적당한 게 생각났는지 억지로 웃으며 드리블했다.
차라리 우는 게 보기 좋겠어.
준혁의 수비를 제친 흥민이 왼발로 크로스를 올렸다. 정환이 높이 점프하더니 그림 같은 헤딩슛으로 득점했다.
골을 넣은 정환이가 오른쪽으로 달리다가 급히 왼쪽으로 선회했다. 그 짧은 순간에 왼쪽 여학생들이 더 이쁜 건 어떻게 판단했지?
흥민이 두 골, 정환이 세 골, 범근 선배가 한 골, 자책골 네 골. 경기가 끝났을 때 우린 10득점을 올렸다.
"제길. 동문이 너 뭐야?"
"죄송합니다. 너무 무서웠어요."
헤딩슛 11개 먹어 10 대 11로 졌다. 수근과 병만이가 최선을 다했으나, 동문이가 슈팅을 하나도 못 막았다.
우린 슈팅 50회에 유효슈팅 39회에 10득점. 상대는 슈팅 11회에 유효슈팅 11회에 11득점. 천마는 어떤지 모르겠는데, 난 분해 못 살겠다.
"야구는 꼭 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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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 경기에는 특별한 규칙이 있었다. 투수는 3이닝 이상 던지지 못한다는 것이다. 찬호 선배와 현진이가 3이닝씩 던지고 법규가 2이닝 던졌다. 그리고 우린 홈런 10개 먹고 10 대 0으로 진 상황에서 9라운드를 맞이했다.
"쟤 처음 보는데. 너희 용병 데려온 거야?"
경기장 안팎에서 점잖기로 유명한 천수가 트집을 걸 정도다.
"아침 댓바람에 사람이 부족해서 그랬다. 그리고 쟨 선수도 아니야."
마지막 공격이다. 여기서 10점 못 내면 우리 패배다.
"볼, 볼, 볼, 볼."
투수가 볼만 계속 던져서 방망이 한 번 휘두르지 않고 11점을 냈다.
경기는 승리로 끝났다. 그러나 기뻐할 수도 없는 게, 우린 경기 내내 몰리다가 상대 실수로 이겼다.
"야, 쟤 정체 뭐야?"
"볼보이."
승엽이가 나라 잃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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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 경기를 쭉 지켜봤다."
야구부 호우 감독과 축구부 사이영 감독이 야구부와 축구부를 강당으로 불렀다.
"이제부터 호명하는 사람은 앞으로 나서라."
"범근, 정환, 지성, 천수, 흥민, 성용."
영문도 모르고 앞으로 나갔다.
"너희 여섯은 이제부터 야구부 아니고 축구부 소속이다. 유니폼 반납하고 라커 정리해라."
"찬호, 승엽, 법규, 현진, 준혁, 대호. 너흰 축구부에서 빠지고 야구부로 간다."
제길. 그럼 축구 경기에서 이긴 게 축구부 맞고 야구 경기에서 이긴 게 야구부 맞는 거였어? 그럼 야구부가 축구부보다 축구 더 잘했고 축구부가 야구부보다 야구 더 잘한 거네?
"그리고 볼보이. 너 이름이 뭐지?"
"종오입니다."
"아까 네 공은 모두 볼이지만, 늘 같은 궤적을 그렸어. 사격 잘할 거 같은데 도전해 볼 생각 있어?"
"글쎄요. 전 축구가 훨씬 좋은데요."
"나이가 들면 볼 보이도 못 해. 늦기 전에 진로를 바꾸는 게 좋을 거야. 축구야 은퇴한 후에 예능에서 해도 되고."
그때, 강당 문을 열고 누군가가 들어왔다. 껌을 신경질적으로 씹던 영감은 지성과 눈을 마주치고 씩 웃었다.
- 작가의말
웬만하면 다 알만한 사건으로만 구성했습니다.
공교롭게도 손흥민이 12초 드리블로 73미터 골을 넣었네요. 축구 역사에 길이 남을 골이 나온 날에 공교롭게 이번 편 순서가 돼서 참 신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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