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경험
컴컴한 세상. 소리도 냄새도 감각도 없는 세상.
- 또 야?
천마가 투덜거린다. 나 역시 답답하기는 마찬가지다.
- 천마. 이거 아무래도 내가 틀림없어. 트럭에 치여 혼수상태에 빠진 거 같아. 내공으로 치료해줄 수 있지?
- 이 세상의 기는 내게 반응하지 않아. 단전에 쌓은 가공된 기는 몰라도 자연의 기를 움직이는 건 어림도 없어.
이대로 빙의가 끝나 무림에 돌아갈 때까지 손 빨고 기다려야 한단 말인가? 그런데 돌아 못 가면? 정상 상황이라면 빙의가 끝날 때까지 무림으로 못 돌아간다고 했다.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문제다. 다음 빙의에도 손가락만 빨아야 할 것 같으니 말이다.
- 이게 너라면 넌 기를 모을 수 있을 거야. 네가 개세로 기 모으면 내가 치료해 볼게.
그래. 밑져야 본전이다.
나는 물이요 불이요 바람이며 빛이고 어둠이다. 삼라만상에 내가 있다.
개세를 수련할 때 물과 소통했던 것처럼, 난 세상과 대화했다. 세상은 내게 많은 이야기를 들려줬지만, 반 마디도 못 알아들었다.
나 토익 점수 괜찮았는데.
의미 모를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내 이야기를 진실하게 들려줬다.
총각으로 죽고 싶지 않다고. 부상에서 회복하여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오순도순 행복하게 살고 싶다고.
어서 일어나 하드를 포맷하고 싶다고.
- 성공이다. 기가 조금씩 모여. 성질이 변할 때까지 단전에 꼭 잡아둬야 해.
난 아무 느낌도 없는데 천마는 성공이라고 한다. 그간 얻어들은 대로 정신을 단전으로 추정하는 위치에 집중했다.
시간이 흐르며 단전에 기가 뭉치는 게 흐릿하게 느껴진다.
배워서 남 주냐는 말이 있다. 내공 역시 쌓아서 남 주지 않는다. 내 몸이라는 생각에 열심히 기를 모았다. 눈밭에서 눈덩이 굴리듯 내공이 빠르게 는다.
- 진짜 자질 최악이다. 굼벵이도 너보단 빠르겠어.
나도 비단 천씨로 태어났으면 이러지 않았을 거야. 너나 인마 같은 핵수저는 나 같은 흙수저한테 빙의해서 고생 좀 해봐야 해.
내가 어렵게 모은 기로 천마가 치료하면서 소리가 조금씩 들린다.
"의사 선생님. 환자가 빠르게 호전하고 있습니다."
"어서 보호자 불러. 이러다 갑자기 악화하여 수술해야 할지도 모르니까."
말이 씨가 돼요. 의사 선생님, 제발 고운 말만 합시다.
3일 후.
천마는 얼빠진 목소리로 질문했다.
"제가 누구라고요?"
"박순녀 씨. 본인 나이가 몇 살인지는 기억납니까?"
- 제길. 여자는 처음인데.
- 이럴 때가 아닌 건 아는데, 이뻐?
천마에게 빙의했을 때와 달리 난 청각만 공유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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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해. 이번 빙의는 너무 이상해. 시작 전에 이뤄야 할 목표를 알려줘야 하는데 말이야.
무림으로 돌아온 천마는 목욕탕에 들어박혔다. 너무 느리게 모이는 내공 때문에 육체 통제권을 통째로 나한테 넘겼다.
난 정신을 모아 개세를 수련했다. 그래야 박순녀의 부러진 다리뼈를 빨리 아물게 할 수 있다.
- 잠깐 쉬어. 너 정신력 거의 바닥났어.
내가 나를 모르는데, 넌 어찌 날 이렇게 잘 아느냐?
- 그런데 괜찮을까?
깨어난 것만으로도 기적이라고 호들갑이다. 다음 빙의에 완치까지 해버리면 으슥한 곳으로 끌려가서 해부당할지도 모른다.
- 너도 들었잖아. 오디션 녹화까지 나아야 한다고.
박순녀 양은 가수 지망생이다. TV에 방송되는 공개 오디션 기회를 어렵게 잡았는데 그만 교통사고로 입원했다.
고아에 친척도 없어 보호자가 소속사 사장이다. 사장이 의사한테 시시콜콜 사정을 얘기하는 걸 다 들었기에 상황 파악은 대충 끝났다.
"난순. 월경 때는 어떻게 해야지?"
펑 소리와 함께 욕조의 물이 천장을 적셨다. 놀란 나머지 내가 개세로 물을 천장까지 쏘아 올렸다.
스고이. 이성과 월경에 관해 스스럼없이 대화하다니. 나 따위는 감히 상상도 못 해본 일. 오늘부터 형님으로 모시겠습니다.
"전 빙공을 익혀서 월경을 하지 않습니다."
"아는 게 없어?"
"알아봐 드릴까요?"
"그래. 음식 뭘 조심해야 하는지도 알아 오고."
약 2시간 지난 후 난순이 돌아왔다.
"미혼 여성 3백 명을 상대로 조사한 결과, 단 음식을 먹는 게 도움 된다고 합니다. 2백 명 기혼 여성을 상대로 한 조사에선 남편을 개패는 게 최고라고 나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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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녀야. 이건 주님이 내린 은총이다. 의식불명이던 네가 깨어난 것만 해도 기적인데 부러진 뼈가 벌써 아물었어."
"앞 보고 운전이나 똑바로 해."
박순녀의 매니저와 코디와 메이크업 담당을 겸한 소속사 사장 오칠은 핸들을 꽉 잡고 앞만 보며 운전했다.
"다시 말하지만, 원래 트로트 행사 가수로 널 키울 생각이었다. 운 좋게 결원이 생긴 바람에 네가 들어가게 된 거야. 큰 기획사들이 서로 훼방 놓지 않았으면 네겐 콩고물도 안 떨어졌어. 그러니까 열심히 해서 꼭 아이돌 돼라."
이번 빙의엔 청각뿐 아니라 시각도 공유받았다. 눈에 들어오는 익숙한 풍경을 보니 눈물이 날려고 한다.
"아자아자. 박순녀 화이팅!"
촬영은 밀폐된 건물에서 비공개로 진행된다. 촬영 장소까지 차로 태워준 오칠은 열심히 하라는 당부를 여러 번 반복하고 우렁하게 구호를 외친 후 돌아갔다.
FD로 보이는 젊은 남자를 따라가니 깐깐하게 생긴 여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박순녀 양?"
"네, 맞습니다."
"여기 사인하세요."
천마는 빠르게 면책 조항을 확인했다. 교통사고로 의식불명이었던 박순녀기에 촬영 도중 문제가 생겨도 제작진 책임이 아니라고 똑똑히 적혀있었다. 천마는 박순녀 세 글자를 또박또박 적었다.
사인을 끝내고 FD를 따라 촬영 현장으로 갔다. 참가자에 제작진까지 2백 명이 넘은 사람이 북적거린다.
"자. 어제 촬영분 이어갈게요. 촬영을 마친 출연자는 자기 자리에 앉아서 열심히 리액션해 주세요."
아, 이거.
'프로토스 101'이라는 오디션이다. 나도 마음에 드는 아이돌한테 세 번 투표했다. 결국 마지막 데뷔 조로 가진 못했지만.
70명이 넘은 여자애들이 자리를 찾아 앉은 후 카메라와 음향 등을 일일이 체크하고 촬영이 시작됐다.
"박순녀 양은 여기 와서 메이크업부터 받아요."
바르고 지우고 바르고 지우고를 반복하며 박순녀가 변신했다. 화장 안 했을 때도 꽤 괜찮았는데 피부 하얗게 만들고 눈썹 조금 다듬고 아이라인까지 그리니 매우 매력적인 얼굴이 되었다.
"키 몇이고 발 몇이에요?"
"키 170이고 발은 250이요."
탈의실에 가서 옷과 신발도 갈아입었다. 머리까지 조금 만지니 어느새 99명이 자리를 차지했다.
"한연희는 아직이야? 외출 어렵게 허락했더니 이런 식으로 뒤통수쳐?"
두꺼운 뿔테 안경을 쓴 중년 남자가 부하 직원으로 보이는 청년에게 화냈다. 기불소욕 물시어인. 상급자한테 욕먹기 싫으면 본인부터 부하들에게 좀 잘하자.
"박순녀 투입해."
앗싸. 자리 두 개만 남았기에 반드시 방송에 나간다. 의도치 않게 분량 확보했네.
"PD님. 마지막 출연자는 자리를 고를 여지가 없습니다. 100번째 출연자에게 포커스를 맞추기로 미리 정했고요. 조금만 더 기다리는 게 어떨까요?"
"너 한연희 소속사에서 뭐 받아먹었어? 대형 기획사들이 호응해주지 않아 가뜩이나 예정보다 늦게 시작했는데. 이러다 방송 날짜까지 분량 안 나오면 네가 나 대신 국장실에 갈 거야?"
당연하게도 PD가 이겼다.
"박순녀 양. 저리로 들어가서 저 위치에 5초 정도 머문 다음 남은 두 자리 중 하나 고르면 돼요. 어서 움직여."
천마는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걸음으로 들어갔다. 조연출이 말한 대로 5초 정도 머물며 자리에 앉은 아이들을 바라봤다.
상큼한 교복 차림의 풋풋한 십 대 소녀 99명이 내 앞에 있다. 예전엔 TV로나 볼 수 있었던 아이들이다. 데뷔 조에 든 12명은 물론 들지 못한 몇몇도 상상 이상으로 떴다.
'이젠 타도해야 할 대상일 뿐이지만.'
- 여기서 뭔가 해야 해. 검색어에 오를 정도는 아니어도 시청자 기억에 남게 말이야. 그래야 제작진이 알아서 분량도 챙겨줄 거야.
천마가 고개를 작게 끄덕이더니 계단을 성큼성큼 올랐다.
"야. 쟤 교통사고 당했다더니 머리 안 돌아온 거 아니야? 빈자리 놔두고 어딜 가는 거야?"
한연희라는 애한테 뭔가 준비시켰는데 무산된 건가? PD 양반이 화가 많다.
"비켜. 여긴 내 자리야."
천마는 1등 자리로 가서 시비를 걸었다. 그간 봐온 천마의 이미지가 와장창 깨진다.
역정을 내던 PD 눈이 반짝 빛난다. 근데 이 능력 참 좋다. 거의 80미터 떨어졌는데도 표정도 보이고 작은 소리도 다 들린다.
"먼저 앉은 사람이 임자야."
"틀렸어. 마지막까지 앉은 사람이 임자야. 끝까지 앉을 자신 없으면 지금 내놔."
천마는 야망 넘치는 소녀였다.
- 작가의말
예전에 어떤 분이 천마가 여자 아이돌 되는 거 보고 싶다고 댓글로 남겨주셨습니다. 대략 2년 전 일인데, 그 댓글이 기억에 깊숙이 박혀 결국 이 글까지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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