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란 말이야
밤이 깊었다.
종일 뛰어다니던 아이들은 전과 고기로 배가 차자 졸음과 전쟁을 벌였다. 또래들과 어울려 노는 소중한 시간이 아까워 무거운 눈꺼풀과 사력을 다해 투쟁했으나, 하나둘 장렬히 패배하여 잠의 포로가 되었다.
아낙들이 잠든 아이를 업고 양손에 반찬을 바리바리 싸 들고 떠났다. 아이가 여럿인 아낙은 여러 번 왕복하며 쉽게 안 상하는 음식 위주로 가져갔다.
아이와 아낙들이 다 빠진 자리엔 남자들만 남았다.
"취준아. 너도 나이가 나이인 만큼 반듯한 직장을 갖춰야지 않겠느냐?"
"열심히 준비하고 있어요."
"작년에도 그렇게 말한 거 같은데. 몇 년째 준비만 하는 거냐? 옆집 하산이는 내년에 승진 예정이라던데."
낙 장로의 손주는 이미 승진을 두 번이나 했고, 세 번째 승진을 앞두고 있다.
- 제길, 또 시작이군.
천마가 나한테 투덜거린다. 넌 마교 교주라는 직업이 있는데 왜? 글로벌 대기업 총수랑 맞먹은 자리잖아.
- 보면 알아.
과연. 애꿎은 취준으로 입을 푼 장로들이 포 구멍을 천마에게 돌렸다.
"교주. 가뜩이나 혼인을 꺼리는 삿된 풍기가 도는 요즘에 교주께서 솔선수범해야 하지 않겠소? 매 장로의 손녀 매순이 정도면 교주 짝으로 그리 기울진 않을 것 같소만."
"어허. 교주가 매 장로 손녀사위가 되면 마교의 배분이 꼬이잖소. 우리 국 장로 막내딸 국순이랑 맺어지면 촌수가 꼬일 걱정도 없소."
"천마신공 수련이 중요한 고비에 있다. 그러니 혼인 얘기는 잠시 미뤄두겠다."
- 왜? 자기들끼리 다투게 놔두면 되잖아.
무림은 일부일처제가 법으로 규정되었다. 예외는 황제뿐이다. 그러니 신경 끄고 저들끼리 다투다가 제풀에 지치게 놔둬도 된다.
- 내가 확실히 하지 않으면 저들끼리 교주 부인 자리를 놓고 흥정하고 타협할 거야. 타협이 끝나서 함께 밀어붙이면 나도 막을 수 없어.
난 명절마다 언제 결혼하냐는 질문에 시달리는데. 이놈은 복에 겨운 줄도 모르고. 마교 사대미녀에 속하는 국순과 매순이 어때서. 난순이만 봐도 둘이 얼마나 이쁠지 훤하구먼.
- 너 난순이 좋아해?
- 난 자웅동체가 목표야. 여자에 관심 없다.
동자공을 익히고 자웅동체가 목표라고 여자를 멀리해야 하는 건 아니다. 그러나 타인의 음기를 받아들이면 자웅동체로 가는 길이 험해진다.
"합방하고 후손을 보라는 의미가 아니잖소. 혼인만 하라는 거요."
"천마신공을 대성하기 전엔 혼인할 생각이 없다. 그리들 알고 다들 그만하라."
"교주. 장로들의 품위 유지비 인상 건 발의는 언제 할 생각이시오?"
- 봤지? 혼인 문제를 볼모로 자기들 뒷주머니 챙기려는 거야. 안 들어주면 또 혼인 문제를 들먹여. 여기서 심력을 소모하면 며칠 수련을 쉬어야 해. 난 너무 빨리 강해져서 정신적으론 미숙하단 말이야.
제길. 네가 정신적으로 미숙하면 난 뭐 신생아야?
"세력권 백성의 삶도 어렵고 교도들도 끼니 걱정하며 사는데 장로의 품위 유지비를 높이는 건 반발이 심할 거로 예상한다."
"그래서 여론 조사를 자체로 진행했소. 교도와 세력권 백성 천 명에게 질문한 결과, 무림맹이나 황궁에 꿀리지 않도록 장로들의 품위 유지비를 올리는 게 맞는다고 999명이 찬성했소."
천 장의 종이가 줄을 쭉 지어 날아서 천마한테 온다. 종이마다 내공이 듬뿍 담겨 잘 갈린 칼보다도 더 예리하다.
"하암."
천마가 하품을 쩍 하자 종이들이 얌전하게 천마 앞에 쌓인다. 자를 대고 줄을 맞춘 것처럼 반듯하게 쌓인 종이에 장로들 낯빛이 하나같이 변한다.
- 뭐야. 아마존도 쉽게 이겼는데 더 놀랄 건덕지가 있었어?
- 난 예전에 힘만 강하고 조절이 미숙했거든. 이제까진 쉬지 못하게 차륜전을 하면 지친 날 죽일 수 있을 거로 여겼을 거야. 사실 재작년에 이미 내공이 마르지 않는 경지에 이르렀는데 저들은 몰랐지.
천마 이 음흉한 놈. 힘 숨기는 게 유행인 건 또 어떻게 알고.
- 그럼 계속 숨기지 왜 드러냈어?
- 인마를 건드릴 엄두조차 못 내게 해야지.
스트레스가 심한가 보다. 이제까지 본 천마는 친절하게 설명하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장로들이 주는 스트레스를 나랑 대화하면서 푸는 것 같다.
"통 장로. 이거 좀 이상한데?"
장로 통계청이 씩씩거리며 일어났다.
"조작이 아니오. 조사에 응한 사람 천 명 모두 불러올 수 있소."
"그게 아니라 여기 번호 말이야. 왜 중간에 번호가 많이 비지? 가장 큰 번호가 만이 넘은 걸 보면 만 명 이상 조사한 거 같은데. 남은 통계 자료는 왜 안 내놓는 거야?"
"오탈자가 있는 조사표가 있어서 소각했소. 그러다 보니 제대로 된 조사표가 천 장밖에 없어서 천 명만 조사한 거요."
"보자. 만 개가 넘은 조사표를 작성했는데 그중 만 개 이상이 오탈자가 있고 고작 천 개만 정상이란 말이지?"
"그렇소."
"형벌대 대주 있느냐?"
"형벌대 대주 사이고 대령하였습니다."
덩치가 중학생 정도로 보이는 사내가 부복했다. 목소리도 나긋나긋하여 듣는 사람조차 힘 빠지게 한다.
"통 장로 수하들이 업무 미숙으로 교의 중요 자산인 종이를 만 장 넘게 낭비했다고 한다. 교의 율법에 따라 어떻게 처벌해야 하느냐?"
"당연히 가죽을 벗기고 힘줄을 뽑아야 합니다."
통 장로가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벌떡 일어섰다.
"너무 심한 거 아니야?"
"통 장로 체면을 생각해서 소금은 안 뿌리기로 했습니다."
척박한 땅에 사는 마교에서 낭비는 중범죄다. 종이 한 장도 세필로 작은 글씨를 쓰고, 이면지로 활용하고, 굵은 붓으로 큰 글씨를 써서 한 번 더 활용하고, 푸른 글씨로 한 번 더 활용하고, 마지막에 붉은 인주로 그림을 그려 부적을 만들어 태우는 거로 그 쓸모를 다한다.
"교주께 아뢸 말씀이 있습니다."
윤활유가 나섰다.
"발언을 허락한다."
"교의 법에 따르면 장로회는 교주전에서 발의한 안건에 대한 심사만 허락되었습니다. 여론 조사를 직접 할 권한이 없습니다. 교칙 위반으로 통 장로를 장로직에서 해임해야 마땅하고 관련자들을 엄벌해야 합니다."
"윤 동주의 의견을 겸허히 받아들여 소금은 물론 간장과 고춧가루도 뿌리도록 하겠습니다."
사이고 이 양반 일 참 잘하네.
"교주. 통 장로가 장로 된 지 얼마 안 되어 실수한 것 같소. 너그러운 아량으로 용서를 바라오."
"장로회의 기강이 엉망이구나. 신임 장로 따위가 허락도 없이 단독으로 일을 벌이다니. 사이고, 어떻게 처리하는 게 좋으냐?"
"지시를 받은 거라면 단순 가담으로 여겨 태형 백 대로 끝낼 수 있지만, 주동자라면 사지를 절단하고 혀를 반 잘라야 함이 마땅합니다."
통 장로가 부들부들 떨며 연신 눈치를 본다.
"교주께 감히 청을 드리오. 이번 일을 눈감아 주시면 종이 십만 장을 교주전에 기부하겠소."
"난 붓 백 필을 기부하겠소."
"먹과 물감 서른 통 기부하겠소."
통 장로 파벌의 장로들이 하나같이 일어나 봐 달라고 요청했다.
"없던 일로 하기엔 사안이 너무 중대한데."
천마가 손가락으로 탁자를 톡톡 두드렸다. 모두 숨죽이고 천마의 이어지는 말을 기다렸다.
"며칠 전에 발의한 황무지에 저수지 파는 안건을 동의해주면 생각 좀 해보지."
장로 열댓 명이 모인다. 각 파벌 수장 혹은 지낭들이다. 통 장로 파벌에서 이것저것 양보해서 다른 파벌들 동의를 얻어냈다.
"그리 알고 교주 권한으로 없었던 일로 하겠다."
천마 앞에 쌓인 종이가 불타 사라졌다. 말 그대로 재도 안 남기고 깡그리 사라졌다.
- 그래도 말과 달리 널 편들어주는 사람도 있네.
- 윤활유야 내 사람이고 원래 뻣뻣하고 원칙적이기로 유명해. 사이고는 혈마 파벌이야. 전음을 받고 통 장로가 속한 파벌을 한 대 후려치기로 한 거야. 허 장로 파벌도 힘 안 들이고 이권을 얻어냈으니 밑지는 장사는 아니고.
미안. 난 너무 빨리 나이를 먹어서 정신적으로 좀 미숙하거든.
- 해가 바뀔 때가 걱정이다. 그땐 훨씬 세게 나올 텐데.
- 왜?
- 정치라는 건 '적당히'가 중요하거든. 상대를 완전히 쓰러뜨릴 무기를 손에 쥐어도 안 쓰는 게 정치야. 필요하면 일부러 당해주고 손해 보기도 하는 게 정치지. 그런데 오늘 내가 인마를 건드리지 말라고 좀 세게 나갔어.
- 장로들은 네가 교주인 게 싫은가 보구나.
- 젊은 층이 날 중심으로 뭉칠까 봐 걱정인 거야. 기득권은 언제나 새로운 세력의 부상이 두려운 법이니까.
통 장로는 핼쑥한 얼굴로 술만 연신 들이켰다. 다른 장로들도 천마의 서슬에 놀랐는지 조용히 자기들끼리 대화했다.
분위기가 완전히 죽은 잔치지만, 천마도 장로들도 새벽까지 버티고 끝냈다.
'교주와 장로들 새벽까지 술잔을 기울이며 환담.'
언론사가 있다면 뭐 이런 제목 뽑았겠지?
- 작가의말
이 글은 베이스가 무협입니다. 몸풀기 끝났으니 슬슬 전투를 벌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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