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악의 16팀
새벽 일찍 눈이 떠졌다. 살아있을 때라면 잠이 적다고 투덜댔겠지만, 지금은 오히려 반갑다. 육체가 잠들면 감각이 흐릿해지며 기분이 되게 이상하다.
"태령아. 오늘 경쟁곡 고르는 녹화지?"
"언니 화났구나."
강태령이 생글생글 웃으며 말한다. 20위에서 40위 사이 연습생은 팀전에서 가장 환영받는 존재들이다. 데뷔 조를 위협하지 못하면서도 적당히 인기 있어 팀 승리에 도움이 되니까.
"넌?"
"디딤돌 될 생각 1도 없어. 우리 팀은 화력 좋은 기획사 둘이나 있으니 내 욕심 좀 부릴 거야."
이 여우 같은 계집. 기특하면서도 불쌍하다. 고작 중3인 애가 이토록 애써야 할 정도로 대단하고 더러운 연예계.
비누로 대충 씻은 천마는 편한 옷을 입고 연습실로 갔다. 단독 연습실은 2개밖에 없다. 촬영이 필요할 때에만 단독 연습실로 들어가서 녹화하고 평소엔 커다란 대청에서 연습한다.
"리더는 내가 맡겠다."
꽤 일찍 이라고 여겼는데 벌써 연습하는 팀이 둘이나 있었다. 목 풀고 간단한 춤으로 합을 맞추는 모습을 구경하다 보니 남은 넷도 약속 시각에 맞춰 나왔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 목표는 1등이다. 2시간 뒤에 노래를 골라야 하니까 각자 뭘 잘하는지 말해보자."
"안녕하세요. 기획사 노엔 연습생 유아이입니다. 댄스에 자신 있어요."
얘는 가수 실패하고 배우로 전향한 다음 크게 성공했다. '최고다 원균','나의 아줌마','모텔 벨루다' 등 작품으로 연이어 히트하면서 섹시 여배우 계보에 이름을 올렸다.
"기획사 입방체 연습생 아현입니다. 노랜 괜찮은데 춤은 자신 없어요."
청순 여신 아현. 화장 지운 얼굴이 인터넷에 올라오며 화제가 됐었지. 여름에도 긴소매에 긴 바지 입을 정도로 노출을 꺼리는 보수적인 성격.
'문제아'라는 듀엣곡으로 한때 대한민국을 들썩이게 했다. 1년 뒤, 춤을 너무 못 춰서 데뷔 하루 전에 잘릴 슬픈 사연을 지닌 아이다. 그 아픔을 딛고 절치부심해서 자작 포크송 문제아로 스타가 됐다.
"안녕하세요. 개인 연습생 동문탁. 포지션은 보컬입니다. 록 윌 네버 다이."
"안녕하세요. 연습생 3년 차 유일입니다. 춤 노래 모두 서브는 자신 있어요."
둘 다 기억에 없다. 이름도 못 알리고 사라지는 아이돌 그룹이 한둘이 아니고, 어찌어찌 행사로 버티는 아이돌 팀엔 대중에게 알려지지 않은 멤버가 수두룩하다.
"무슨 노래 고를까?"
"록이요."
동문탁이 적극적으로 발언한다. 노래에 자신 없는 유아이와 서브를 자처한 유일은 조용히 있었다.
"발라드 좋지 않아요? 전 리듬이 강하거나 비트 빠른 노랜 자신 없어요."
아현의 말에 동문탁이 고개를 저었다.
"아이돌 뽑는 오디션이야. 발라드를 골라도 댄스로 편곡해야 해. 차라리 록을 골라서 댄스록으로 바꾸면 나아. 칼군무가 필요 없으니까."
"무슨 곡인지는 알아?"
"거기까진 몰라요."
"좋아. 일단 록 고르는 거로 하고 합부터 맞춰보자."
프로토스 101의 주제곡 '천지스톰'으로 합을 맞췄다. 이게 팀이야?
"리더는 너희한테 실망했다."
천마가 탄식한다.
"유아이. 노래가 왜 그 모양이야? 내가 뭐 너한테 삼단고음 바랐어? 자신 있게 질러. 그렇게 기어들어 가는 소리로 부르면 듣는 사람 기분이 어떻겠어."
"죄송해요."
"아현. 춤 못 춰도 괜찮은데 최소한 박자는 맞추자."
"미안해요. 타고난 몸치라."
"동문탁. 손가락은 왜 그렇게 이상하게 하는 거야? 혼자 튀고 싶어?"
"로커의 자존심이에요. 건드리지 마세요."
"나까지 넷이나 문제네."
천마도 사돈 남 말 할 처지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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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 쟤 보소."
경연곡 고르는 순서 역시 달리기로 했다. 이 순간을 위해 애교 삼종세트 수련을 멈추고 마음의 휴식을 얻은 천마가 내공까지 써가며 기를 쓰고 달렸다.
"저럴 거면 어제 조 나눌 때 열심히 하지."
PD 양반. 나 귀 밝아. 다 들린다고. 흉보고 싶으면 200미터 밖에 가서 작은 소리로 해.
"근데 박순녀 쟤는 왜 마지막 5인이 된 거예요?"
올해 취직한 막내 작가. 나 천동출 대학 후배다. 그러나 무슨 소용이랴.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오빠라 불러야 하는 내 신세.
"애매하잖아."
앗싸 일등.
가장 먼저 돌아온 박순녀가 숫자 1이 적힌 구멍에 깃발을 꽂았다. 이로써 곡 선택 우선권은 16팀이 차지했다.
"노래 잘해. 그런데 화음을 절대 못 맞춰. 춤 잘 춰. 그런데 자기 색이 강해 섞이지 못해. 사이드에 세우자니 자꾸 눈이 가. 메인에 세우자니 표정이 밋밋해서 분위기가 팍 죽어."
"솔로로 데뷔하면 딱이네요."
"아니야. 노래에 감정이 안 실려서 길게 들으면 질려. 잘 부르니까 짧은 소절은 그나마 괜찮은데 완곡은 아니야."
제길. 한 마디 한 마디가 심장에 팍팍 꽂힌다.
"둘 중 어느 거 고를까?"
"언니. 굳이 록 고를 필요 있어요? 1등이니까 마음껏 고를 수 있잖아요."
여자의 마음은 갈대라고 했던가. 아현이 그새 마음이 바뀌었다.
"록 고르기로 했잖아."
"그땐 언니가 1등 할 줄 몰랐죠. 어젠 꼴찌였잖아요."
"이거 편곡만 허용돼? 가사는 못 바꿔?"
"제가 물어보고 올게요."
유일이 쪼르르 달려가서 막내 작가 팔을 잡고 애교 부린다. 그냥 물어보면 되지 꼭 저렇게 몸 배배 꼬면서 말해야 하나? 같은 여자끼리.
"가사 고쳐도 돼요. 그런데 곡이랑 매치가 안 되면 점수 깎일 거래요."
"좋아. 록이든 아니든 상관없어. 제일 센 곡이 어느 거야?"
천마의 강력한 주장으로 결국 헤비메탈 곡 '제주도 푸른 밤'을 골랐다. 제작진이 PPL 용도로 준 어른패드로 곡을 들어본 천마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면 난 최선을 다할 수 있어. 이젠 너희 넷이 문젠데."
"언니. 40인에만 들어도 내년에 데뷔시켜준다고 실장님이 그랬어요. 그러니까 난 뭐든지 할게요."
유일 눈이 활활 타오른다.
팀에서 가장 억울한 사람을 뽑으라면 유일이다. 댄스든 보컬이든 랩이든 서브를 맡을 실력이 되고 필요에 따라선 메인에 서도 된다. 당연히 뽑힐 줄 알았는데 최후의 5인으로 남았다.
고음 안 올라가는 유아이나 춤 순서도 못 외우는 아현. 고집이 너무 세서 아무도 데려가지 않을 거라고 예상했던 동문탁과 달리 유일은 웃으며 마른하늘 쳐다보다가 날벼락 맞은 셈이다.
"이기지장 격피지단."
천마 이놈이 또 문장 쓴다. 아 피곤해.
以己之長 擊彼之短. 자신의 장점으로 적의 단점을 공격한다.
"언니. 이건 싸움 아니에요."
천마의 해석을 들은 아현이 말했다.
"간접적으로 싸우는 것도 싸움이야. 방송 순서는 다를 수 있지만, 녹화할 땐 우리가 가장 먼저 무대 올라가는 거 알지?"
"네."
"우리가 잘하면 어찌 될까?"
"이 악물고 더 열심히 할 수도 있잖아요."
"이 악물 엄두도 안 나게 어마어마한 걸 해야지."
"언니. 그럼 편곡은 어떻게 해요?"
"자기 파트 가사는 본인이 알아서 바꾸는 거로 하자."
"각자 역할은 어떻게 해요?"
"메인은 나야. 보컬은 동문탁."
"맡겨만 주십시오. 다 씹어먹겠습니다."
이것아. 금이빨은 빼야지.
"메인 댄서 유아이."
"열심히 할게요."
"아현은 서브 보컬. 유일은 춤 노래 랩 다 해야 해."
"언니는요?"
"난 지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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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 몸이 부르르 떨리더니 장소가 바뀌었다.
- 여긴 뭐 하는 곳이야?
- 천마비고.
- 천고마비?
- 천마비고(天魔秘庫). 내가 책 모아둔 곳이야.
- 여기 지하야?
빛 한 점 안 들어오는 곳이다. 천마니 망정이지, 이 천동출이었으면 손발로 더듬으며 바닥을 기어야 했을 것이다.
- 지하라기보단 산속이라고 해야지. 들어오는 길이 없어. 내가 부동성왕으로 드나들면서 만든 공간이거든.
천마는 책 몇 권을 뽑아 들고 자세히 탐독했다.
건곤대나이(乾坤大挪移). 이화접목(移花接木). 두전성이(斗轉星移). 사량발천근(四兩拔千斤). 십자오행(十字五行).
- 십자오행은 뭐야?
- 보통 오행은 오각형으로 배치한다. 오행 중 하나를 중심에 놓고 남은 넷을 십자로 배치하는 걸 십자오행이라고 한다. 보통은 토를 중심에 두는데 꼭 그래야만 하는 건 아니야.
천마의 속셈이 느껴졌다.
- 네가 중심에 서고 남은 넷을 주변에 두려고?
- 응. 나 아니면 안 되는 무대를 할 거야.
책을 다 읽은 천마는 목욕탕으로 갔다.
- 개세 수련해. 정식 경연 전에 필요한 내공을 반드시 모아야 해.
- 그럼 연습은?
- 넷만 연습시키고 우린 내공 쌓는 데 몰두해야지.
나는 물줄기를 두 개 뽑아 꽈배기처럼 꼬았다. 만에 하나 돌아갈 수 있다면 이걸로 남은 인생 편하게 보낼 작정이다.
'여배우랑 사귈까 아이돌이랑 사귈까?'
신중하게 고민하며 개세 수련에 박차를 가했다.
- 작가의말
연예물 써볼까 싶기도 한데, 그쪽 세상에 아는 게 너무 적어서 쉽게 도전하지 못하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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