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글쇠의 서재입니다.

천마에 빙의하다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퓨전

완결

글쇠
작품등록일 :
2019.11.01 10:16
최근연재일 :
2020.01.06 18:00
연재수 :
89 회
조회수 :
41,887
추천수 :
885
글자수 :
363,122

작성
19.12.31 18:00
조회
128
추천
6
글자
9쪽

세상이 너무 쉬워

DUMMY

나는 늘 하교를 남들보다 조금 늦게 한다.


사실 내가 늦는 게 아니다. 난 정상이고 학원 안 늦으려고 뛰는 애들이나 피시방 좋은 자리 차지하려고 뛰는 애들이 빠른 거지.


"형님, 드릴 말씀 있는데 자리 옮기시죠."


패싸움으로 보름 정도 갇혔던 불야성 패거리다. 풀려난 지 며칠 됐을 텐데 왜 하필 오늘 찾아왔을까.


"무슨 일인데?"

"형님 분부대로 그간 받은 상납금 다 돌려주려고 했는데 말입니다."

"했는데?"

"그니까 우리가 돈을 불리려고 4층에 맡겼는데, 이놈들이 당장 현금이 없다고 뻗대더란 말입니다. 그래서 조금 시간을 더 달라고 부탁하러 이렇게 왔습지요."


내가 그간 삥 뜯은 거 다 돌려주라고 했지. 난 이래저래 심란해서 잊고 있었는데, 이놈들은 용케 기억했구나.


때린 놈은 쉽게 잊어도 맞은 놈은 절대 안 잊는다더니. 옛말 틀린 거 없네.


"얼만데?"

"8천입니다."

"내가 알아서 처리한다. 며칠 기다려."


유능한 사채업자라면 당연히 돈을 손에 남기지 않고 계속 굴린다. 영화나 드라마 보면 금고에 돈이나 금괴 쌓아두는 사채업자가 있는데, 그놈들은 다 무능한 거다. 사채업자의 돈은 빌려줬을 때 비로소 그 가치가 있다.


하지만. 이 허름한 동네의 사채업자가 그렇게 유능할 것 같진 않단 말이지.


###


평소보다 한 시간 먼저 잠들었다. 덕분에 새벽 3시에 눈이 떠졌다. 정확히 6시간 자고 일어난 내 몸은 활력이 넘친다. 조금 흐리멍덩하던 머리도 차가운 새벽 공기를 쐬자 시험 볼 때처럼 영활하게 돌아간다.


큰길 말고 CCTV가 전혀 없는 골목으로만 이동했다. 그리고 불야성 건물 뒤편으로 가서 배관을 타고 옥상으로 올라갔다. 옥상 문을 열고 내려가니 사채업자 사무실이 있었다.


술과 담배 냄새가 섞인 말로 묘사하기 힘든 고약한 악취. 아무렇게나 뻗친 덩치들이 내는 요란한 코골이 소리. 대충 빨아서 펴지도 않고 걸어 놓은 양말과 팬티.

유일하게 사장 것으로 보이는 검고 큰 책상만 깨끗하다.


나는 약수터에서 주운 부러진 놋쇠 젓가락을 손에 꽉 쥐었다.


셋, 둘, 하나.


셈이 끝나자 문을 벌컥 열고 달려갔다. 문에 단 종이 딸랑 맑은 소리를 낸다. 그러나 표범처럼 날래게 뛰어 들어간 내 노력이 무색하게, 잠에서 깬 놈은 물론 뒤척이는 놈조차 없었다.


푹, 푹, 푹.


놋쇠 젓가락의 굵은 부분으로 마혈과 수혈을 연신 짚었다. 수혈을 먼저 짚으면 통증에 깰 수도 있기에 마혈부터 짚었다.

힘 조절이 미숙해서 깨어난 다음 며칠 손발이 저릴지도 모르겠다.


이미 술로 기절한 놈들을 혈도까지 짚었으니 천둥이 귓가에 울려도 못 깨어날 거다.


놈들을 제대로 재운 다음, 사장 책상부터 뒤졌다. 멋으로 둔 건지 나오는 게 전혀 없었다. 어차피 크게 기대한 것도 아니어서 빠르게 단념하고 금고를 살폈다.


전자식이 아닌 기계식 금고다. 미리 준비한 청진기를 꺼내 문에 대고 다이얼을 돌렸다. 다른 이빨이 맞물릴 때와 다른 소리가 3개 들린다.


이걸 조합해서 6번만 하면 금고를 열 수 있다는 말씀. 수십 미터 밖에서 니 남친이라고 놀리는 소리를 들을 만큼 밝은 청력 덕분에 금고를 쉽게 해결했다.


운 좋게도 세 번 만에 금고가 열렸다. 총 6번의 기회이기에 3번째와 4번째의 느낌은 크게 다르다. 4번째에 열렸으면 기분이 조금 가라앉았을 거다.


'역시. 유능한 놈들이 아니었어.'


2억이 조금 안 될 정도의 현금이 있고 장부가 있고 계약서들이 있었다. 그리고 큼직한 금괴 세 개도. 손가락 두 개만큼 두꺼운 작은 금괴 말고, 손바닥 절반보다 더 넓고 길이는 20센티 정도 되어 보이는 금괴.


사무실에 보이는 가방 중에서 깨끗해 보이는 놈 하나 찾아 금괴와 장부 그리고 계약서를 챙겼다. 현금은 정확히 8천 갈라서 검은 비닐봉지에 넣고 남은 건 역시 가방에 담았다.


일을 마치고 주머니에서 하얀 가루가 담긴 병 하나 꺼내서 금고 안에 넣었다. 마약까지는 아니고, 술에 타서 마시면 정신줄 놓게 만들어주는 약이다. 의존성이 약해서 지금은 마약으로 분류하지 않았고, 몇 년 뒤에 폐해가 커지면서 마약으로 분류됐다.


그러나 처방전 없으면 구할 수 없는 약이어서 들키면 며칠 고생해야 할 거다. 놈들은 이게 뭔지도 모르니 해명이 더욱더 어려울 거고. 아마 마약인 줄 알고 겁에 질려 횡설수설하다가 다른 범죄를 불어버릴지도 모른다.


세팅을 끝내고 사무실 전화기를 들고 번호를 눌렀다.

1 다음에 1, 그리고 2.


"불야성 4층인데요. 도둑이 들어 금고가 털렸습니다. 빨리 와주세요. 저요? 지나가던 사람인데요."


수화기 구멍을 막았던 새 지폐를 가방에 넣은 후 전화를 끊었다. 몇 년 뒤에 나올 드라마에서 본 장면인데, 새 돈으로 구멍을 막으면 음성 분석을 방해할 수 있다.


사무실을 나온 나는 계단을 걸어 지하로 갔다. 주점 문을 살며시 열고 8천만 원이 든 비닐봉지를 휙 던진 다음 빠르게 떠났다.


바로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조금 떨어진 곳에서 경찰이 오나 살폈다. 한참 뒤 사이렌을 울리며 도착한 경찰은 10분 정도 미적대더니 지원을 요청했다.

지원을 온 경찰들까지 합세해서 세상모르고 자는 덩치들을 경찰차에 싣고 돌아갔다. 무전기로 사채업자들의 사장을 수배하라고 명령을 내리는 것까지 듣고 집으로 걸음을 옮겼다.


###


사채 계약서는 퀵으로 각자 집에 배달했다. 정 없게 계약서만 넣지는 않고 20만 원씩 돈도 함께 넣어서 보냈다. 그리고 왼손으로 사채 안 갚아도 된다는 글도 적었고.


'이게 무조건 옳은 일은 아니겠지.'


어쩌면 도박 때문에 빚을 진 사람도 있을 거다. 주제 안 맞게 명품만 사려고 빚을 진 사람도 있을 거다. 어쩌면 또 다른 사채를 지고 인생의 나락으로 떨어질 사람도 있을 거다.


'내 알 바 아니다. 난 내 마음이 가는 대로 하면 되는 거고. 그 과정에 최대한 착한 사람에게 피해 안 가도록 조심하고.'


집유의 경지여서 어쩔 수 없다. 하고 싶은 일을 꾹 참으면 병이 된다. 운이 나쁘면 내상 입을지도 모르고. 크게 양심에 걸리는 일만 아니면 참지 않을 생각이다.


계약서를 다 보낸 다음 장부를 들고 경찰서로 갔다. 김청탁 형사를 찾으니 바로 안내받았다.


"오, 이게 누구야. 엄석고 전교 1등 천동출이, 내 자랑스러운 후배."


김청탁이 나를 뜨겁게 맞이한다. 아버지의 만행으로 서울 법대가 목표고 판검사를 희망한다는 사실을 동네 강아지까지 알게 됐다. 그래서 사람들이 나한테 유별나게 친절하다.


"선배님, 지나가는데 어떤 사람이 이걸 선배님한테 전해달라고 하더군요. 급한 일이 있다면서요."

"그래, 수고했어. 누군지 아는 사람이고?"

"아니요. 마스크에 모자까지, 그리고 선글라스도 썼어요."


장부를 펼쳐 종이를 대충 넘기던 김청탁 얼굴이 점점 굳는다.


"뭔데요?"

"너 알 건 없고. 혹시 그 사람 다시 보면 알아낼 수 있어?"

"아니요. 여기만 해도 모자와 마스크 쓰면 그 사람이랑 비슷해 보이는 분이 여럿 있는데요."


"정말 수고했다. 이게 뭔지는 너한테 말할 수 없고. 참고인 진술서 써야 하니까 잠깐 기다려. 차 형사, 우리 미래의 판검사 후배님께 음료 좀 부탁해. 난 서장님 만나고 올게."


사채업자들이 뿌린 뇌물 장부. 국회의원과 같은 거물은 없다. 그저 지역 공무원과 경찰 중에서도 말단 급만 있고, 액수도 소소하다.


혹여나 덮을까 봐, 제대로 수사하지 않으면 사진 찍어둔 거 언론사에 뿌린다고 적었다. 높은 분이 없어 언론사들이 똥 본 강아지처럼 덤벼들 것이니 공정하게 수사하겠지.


앉아서 음료를 마시며 귀를 쫑긋 세웠다. 수많은 대화 중에서 사채업자들에 관한 것만 수집했다.


내가 금고 안의 돈을 사무실 가방에 담아간 것으로 경찰들은 우발적 범죄라고 확신했다. 그리고 사채업자들은 서로를 의심하는 중이고. 마혈을 짚은 탓에 깨어난 후에도 몸이 찌뿌둥한 걸 술에 약 탔다고 의심하고, 금고 비밀번호를 알고 열었다는 점에서도 서로를 의심했다.


이런 일은 처음이어서 청진기와 놋쇠 젓가락만 준비한 게 오히려 내겐 호재로 작용했다.


"동출아, 왜 갑자기 울어?"

"네? 제가요?"


손으로 훔치니 눈물이 얼굴을 적시고 있었다.


"안구 건조증이라고 눈약을 자주 넣었더니 가끔 이래요."


세상은 이렇게 쉽다. 일진도 쉽고 건달도 쉽고 사채업자도 쉽다. 시험도 쉬워서 모든 과목이 만점이다.

그뿐이 아니다. 실전을 겪은 후부터 당랑수 성취가 빠르게 올라 팔다리 모두 바위처럼 단단하다. 그래서 지금은 금종조(金鐘罩)로 머리와 몸통을 단련하고 있다.


세상은 이렇게 쉬운데, 막 실수해도 전혀 문제가 없는데.


안 생긴다.


작가의말

다른 방면에서 승승장구하는 거로 안 생기는 슬픔을 대조하여 표현하려고 했습니다. 드라마의 한 장면이라고 상상할 때는 재밌었는데, 제 연출력이 많이 부족한 거 같습니다. 빨리 군더더기를 쳐내는 법과 요점만 잡아서 잘 연결하는 법을 깨우쳤으면 참 좋겠습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천마에 빙의하다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89 나는 모를 이야기 +9 20.01.06 742 12 11쪽
88 사필귀정 20.01.06 268 6 9쪽
87 저승사자의 손짓 20.01.06 182 5 10쪽
86 경지 상승 20.01.05 163 5 9쪽
85 견제 20.01.05 172 5 9쪽
84 생방송 20.01.05 172 5 9쪽
83 자충수 20.01.04 153 6 9쪽
82 민중의 칼 20.01.04 156 4 9쪽
81 지뢰밭길 20.01.04 140 4 9쪽
80 가시밭길 20.01.03 142 8 9쪽
79 천동출 20.01.03 151 4 9쪽
78 진상 20.01.03 139 5 9쪽
77 성화신의 정체 +2 20.01.02 161 7 9쪽
76 합체와 분리 20.01.02 139 5 9쪽
75 전쟁 20.01.02 153 5 9쪽
74 저지르고 보자 20.01.01 174 4 9쪽
73 정조를 지켜라 20.01.01 198 4 9쪽
72 검사 천동출 20.01.01 154 4 9쪽
71 청천벽력 +2 19.12.31 163 7 9쪽
70 전학생 19.12.31 189 4 9쪽
» 세상이 너무 쉬워 19.12.31 129 6 9쪽
68 생김에 관한 고찰 19.12.30 151 7 9쪽
67 나는 강하다 19.12.30 127 6 9쪽
66 처형식 19.12.30 124 6 9쪽
65 양아치 19.12.29 122 6 9쪽
64 간타자 +1 19.12.29 137 6 9쪽
63 내가 내게? 19.12.29 137 5 9쪽
62 의욕 잃은 망나니 19.12.28 151 8 9쪽
61 말종의 반격 19.12.28 125 6 9쪽
60 동맹주 19.12.28 124 5 9쪽
59 무마동맹 19.12.27 141 4 9쪽
58 천마신공 19.12.27 143 4 9쪽
57 아비수의 마왕들 19.12.27 149 6 9쪽
56 망나니 강림 +3 19.12.26 144 8 9쪽
55 어마어마한 지원군 +1 19.12.25 154 6 9쪽
54 마교와 전쟁 19.12.24 142 7 9쪽
53 애송이들아 +2 19.12.23 156 8 9쪽
52 대기업 회유 +2 19.12.22 181 7 9쪽
51 독점금지법 +2 19.12.21 179 5 9쪽
50 후원금 +5 19.12.20 171 6 9쪽
49 난 진실만 말한다 +2 19.12.19 174 6 9쪽
48 청문회 +2 19.12.18 172 5 9쪽
47 무림맹의 저력 +2 19.12.17 165 7 9쪽
46 비무 대회 +2 19.12.16 187 7 9쪽
45 천마의 대응 +4 19.12.15 187 7 9쪽
44 후보자 토론회 +2 19.12.14 176 7 9쪽
43 영혼 분리 +2 19.12.13 181 7 9쪽
42 공약 +3 19.12.12 219 6 9쪽
41 출마 선언 +2 19.12.11 187 6 9쪽
40 차별에 관하여 +2 19.12.10 219 7 9쪽
39 빙의가 준 계시 +2 19.12.09 268 7 9쪽
38 세 번째 빙의 +2 19.12.08 215 7 9쪽
37 탄핵 +2 19.12.07 202 10 9쪽
36 프리즌 브레이크 +4 19.12.06 218 8 9쪽
35 공청석유 +4 19.12.05 259 5 9쪽
34 십색기 +2 19.12.04 232 9 9쪽
33 문신 법술 +3 19.12.03 226 5 9쪽
32 천마 감옥에 갇히다 +2 19.12.02 240 5 9쪽
31 범인 검거 +2 19.12.01 213 7 9쪽
30 두 번째 빙의 +3 19.11.30 250 6 9쪽
29 대호법의 활약 +3 19.11.29 252 5 9쪽
28 상거지 만수로 +2 19.11.28 286 8 9쪽
27 첩자 이야기 +2 19.11.27 282 8 9쪽
26 유치원 삼법 +2 19.11.26 339 7 9쪽
25 민폐 천마 +2 19.11.25 282 6 9쪽
24 망나니 천마 +2 19.11.24 308 9 9쪽
23 최악의 16팀 +3 19.11.23 300 9 9쪽
22 노력하는 천마 +2 19.11.22 384 7 9쪽
21 무림맹의 재도발 +5 19.11.21 360 8 9쪽
20 배움은 끝이 없다 +2 19.11.20 374 8 9쪽
19 영혼과 육신 +1 19.11.19 412 9 9쪽
18 첫 경험 +6 19.11.18 522 13 9쪽
17 세상에 이런 일이? +2 19.11.17 417 13 9쪽
16 뒷수습 +4 19.11.16 421 12 9쪽
15 말종의 사신 +2 19.11.15 443 14 9쪽
14 엄친아 할아비 +3 19.11.14 467 13 9쪽
13 이호법 +4 19.11.13 484 12 9쪽
12 인재 영입 +3 19.11.12 544 18 9쪽
11 삼호법 +5 19.11.11 573 14 9쪽
10 간 보기 +2 19.11.10 611 13 9쪽
9 내가 천마라니 +3 19.11.09 717 18 9쪽
8 무림맹 +6 19.11.08 807 20 9쪽
7 정치란 말이야 +4 19.11.07 846 25 9쪽
6 보름달이 뜨다 +3 19.11.06 1,050 22 9쪽
5 스카이 캐슬 +3 19.11.05 1,450 27 9쪽
4 제자 돌보기 +2 19.11.04 1,809 32 9쪽
3 별호 짓기 대회 +6 19.11.03 3,098 40 9쪽
2 천마의 신분 +3 19.11.02 5,089 56 9쪽
1 그린 라이트 +10 19.11.01 7,973 74 9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