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뢰밭길
무림으로 다녀온 뒤 걸었던 고난의 길이 빠르게 떠오른다.
회사 쉬면서 자격증 딴다는 말에 부모님은 처음에 응원했다. 8년 다니고도 대리인 건 그나마 괜찮다. 문제는 후배가 과장이 되었다는 거다.
아버지는 그런 상황에서 회사에 붙어있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잘 아시는 분이다.
허나, 자격증 따는 기간이 길어지자 부모님은 기대 대신 걱정의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서울대 로스쿨 합격이라는 걸 자랑도 못 하고 숨겨야 했다. 8년 동안 쌓아온 것을 싹 다 버리고 새로 시작한다는 말이니, 아들이 변호사 된다고 해도 걱정이 이만저만 아닌 걸 알기에.
그래도 이건 약과다. 고진감래를 매일 되뇌며 정신의 압박을 이겨냈다. 같이 강의를 듣는 학생들의 은근한 따돌림도 웃어넘겼다.
로스쿨 2년 차에 카드 도둑맞은 게 큰 타격이었다. 비밀번호를 어떻게 알아냈는지 안에 돈을 대부분 빼갔다. 잔액 18만 원 남기고.
그때부터 밤마다 택배 상하차 알바를 했다. 몸만 쓰는 일이어서 공부하면서 할 수 있다는 점도 마음에 들었고, 일당이 20만 원씩 나와서 마음에 들었다.
몸은 고되지만, 버티기 어려울 정도로 힘들 때마다 천마신공이 지친 육신을 치유했다. 돈이 도둑맞은 건 마음이 쓰리지만, 내가 괴로웠던 건 도둑맞은 돈이 아니라 그로 인해 이어진 상황들이다.
"선배. 밥 좀 사주세요."
"나 약속 있어. 다음에."
"저 선배 별로야. 나이도 많고 얼굴도 그렇고."
밥 잘 안 사는 노땅 선배로 찍혔다. 누나는 밥 잘 사면 드라마로도 찍는데, 오빠는 사주는 게 당연한지 안 사면 욕먹는다.
"형. 단체 미팅이야. 저쪽 여섯, 우린 다섯. 형 와서 숫자만 채워 줘."
원래라면 거절해야 하지만, 부탁한 사람이 선배다. 내가 사춘기 고딩이면 선배 말을 씹는 게 멋지다고 생각하며 콧방귀로 일관했겠지만, 최소한의 사회성은 갖춰야 한다는 걸 알 나이다.
"흐흐흑, 왜, 엉엉."
한마디도 안 하고 가만히 있었다. 그런데 짝이 다섯 지어지고 마지막 남은 여자애가 갓 산 명품백을 도둑맞은 것처럼 서글프게 울었다.
누가 결혼하재? 마음에 안 들면 찢어진 후 그냥 바이 하고 헤어지면 되지. 서울대 로스쿨 오빠들이라고 잔뜩 기대하고 나온 건 알겠지만, 어차피 재들도 결혼까지 갈 건 아니야.
명절만 되면 집안 어른들이 장가 안 가냐, 취직 안 하냐, 옷 좀 사 입어라고 잔소리한다. 그러면서도 곧 사십 되는 놈이라고 용돈 한 푼 안 주신다.
알바로 번 돈은 또 도둑맞을까 봐 은행에 금고를 대여해 현금으로 쌓아뒀다. 검사가 된 후에 청렴하게 살려고 최대한 아껴 썼다.
"검사님, 검사님."
귀에 울리던 이명이 사라지고 눈이 번쩍 떠졌다. 사실 천마라는 자부심 아니었으면 열 번도 더 쓰러졌을 일이 여럿 남았지만, 빨리 깬 탓에 미처 회상하지 못했다.
"역시 불세출."
"이번에 여섯 번째야?"
"일곱 번째야."
나는 병원 응급실의 침대에서 일어났다. 간호사가 도도도 달려온다.
"괜찮습니다. 내부 출혈 없고요. 심박 수 정상입니다. 귀에 이명도 없고 시야 정상. 뇌에도 손상 없습니다. 퇴원하겠습니다."
입을 쩍 벌리고 굳은 간호사를 향해 김 검사가 상냥한 얼굴로 설명했다.
"트럭에 치여 병원 들어온 게 일곱 번쨉니다. 앞에 여섯 번 모두 작은 후유증도 없었습니다."
"뭐 하시는 분인데요?"
"대한민국 검사입니다."
간호사가 김 검사의 훈훈한 얼굴을 흠모의 눈으로 바라본다. 동그란 눈동자가 일그러지며 하트 모양으로 변하려고 하는 꼴이 눈 시려서 초를 쳤다.
"선배님, 며칠 뒤면 저 서른아홉 생일입니다. 오실 거죠?"
간호사 얼굴에 실망이 떠오르고 김 검사가 당황한다. 그러나 처음 보는 사람에게 사실 선배인 내가 열 살이나 어리다고 설명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퇴원 수속은 수사관한테 맡기고 김 검사랑 먼저 나왔다. 나보다 고작 몇 개월 빨리 임용되었다고 선배 행세를 하던 김 검사한테 한 방 먹이니 기분이 상쾌하다.
"형, 벌써 일곱 번이야. 저쪽도 멈출 생각 없는 거 같은데, 형이 그만두는 건 어때?"
"칼산 불바다가 가로막아도 내 길은 정해졌어."
"이러다 가족한테 손쓰지 않을까?"
"그렇게 멍청한 놈들 아니야. 가족을 건드리면 다른 검사들이 가만있을까? 자기 가족도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면 적극적으로 날 도울 거야. 대한민국은 검사동일체(檢事同一體)라는 거 몰라?"
게다가 난 차 부장 후계자로 거론되고 있다. 검찰 생리에 밝고 일 처리가 확실하며 여자든 뇌물이든 이빨도 안 들어가는 강직한 검사. 차 부장이랑 일주일에 술 서너 번씩 먹는 검사.
"근데 형은 미리 알았어? 트럭이 덮치는 걸?"
"일곱 번씩 당하면 너도 느낌이 올 거야. 다음부터 너도 태워줄까?"
"불사조는 형 혼자서 해. 난 삼대독자야."
트럭에 치이고 멀쩡했을 때 다들 명이 질기다고 했다. 두 번째에 불사조란 이름이 생겼다. 그리고 세 번째도 차는 폐차밖에 답이 없는 상황에 사람만 멀쩡하자 불세출이라는 별명이 생겼다.
불사조 세 번 한 천동출.
자동차 회사에서 광고 모델 섭외로 연락 온 적도 있을 정도다. CM 그룹이 대주주로 있는 회사라는 게 문제여서 그렇지.
"검사님. 옷 갈아입으시는 게 좋겠습니다."
일 참 잘하는 내 사무관. 보통은 사무관이 초임 검사보다 나이가 많다. 그래서 기분 나쁜 일이 꽤 많이 벌어진다.
그러나 39세에 검사가 된 천동출의 사무관은 그럴 일 절대 없다.
"아니야. 이대로 가야 상대를 압박할 수 있어."
내 차는 폐차장으로 갔기에 사무관의 차를 타고 경찰서로 갔다.
"불 검사님, 오셨습니까."
내 동선이 그리 다양하지 않기에 이 경찰서는 벌써 다섯 번째다. 여기도 불세출의 별명이 쫙 퍼져서 나를 불 검사라고 부른다.
"그러다 더 친해지면 아예 세출아 하겠습니다."
"경위 나부랭이가 어찌 감히 검사님께."
"유선 전화 좀 씁시다."
양 반장 자리에 가서 전화기를 들었다.
"형님. 별일 없으시죠?"
"그래. 다들 무사해. 비바람 조짐도 없고."
"저도 잘 지냅니다. 이번 일 끝내고 제가 술 사겠습니다."
김청탁. 김촌지 선생님의 동생.
김촌지 선생은 돌에 분필을 잡았고, 김청탁 경찰관은 돌에 수갑을 잡았다. 돌잔치에 온 어떤 형사가 장난으로 자기 수갑을 생일상에 올렸는데, 김청탁이 덥석 잡은 거였다.
두 분의 부모님은 선생이 될 것 같은 아들에겐 촌지라는 이름을, 경찰이 될 것 같은 아들에겐 청탁이라는 이름을 지어줬다.
그래서 김촌지 선생님은 평생 촌지 안 받고 사셨고, 김청탁 형님도 청탁 한 번 안 받고 정직하게 사셨다.
내가 부모님 안전을 살펴달라고 부탁한 게 첫 청탁인 셈인데, 대가성 없음므로 불법은 아니다.
부모님 주변이 안전하다는 걸 확인한 후 취조실에 들어갔다. 트럭 운전자가 피 묻은 넝마를 입고 멀쩡하게 걷는 날 보고 눈이 화등잔처럼 커졌다.
"오호. 역시 우연이 아니군. 날 알아보는 걸 보면."
트럭 운전자가 미처 입을 열기 전에 연속으로 공격을 날렸다.
"대한민국 검사를 죽이려 했으니 이제 사돈의 팔촌까지 다 감옥으로 갈 거야. 어디까지 듣고 얼마 받았는지 모르겠지만, 아저씨는 물론 아저씨 주변 사람들도 다 호적에 빨간 줄 그어야 할 거야. 대한민국에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 어디 있다고."
"몰랐습니다."
"그래. 상대가 검사라는 건 몰랐겠지. 싸구려 국산 차 타니까 죽여도 괜찮은 거 같았겠지? 너 내가 누군지 알아? 중앙지검 특수본 천동출이야. 특수본 나오면 최소 지검장 달고 퇴직하는 거 몰라? 검사 중에서도 엘리트만 가는 곳이야. 잘하면 법무부 장관이나 검찰총장도 하고 청와대로 갈지도 모르는 사람이라고."
"죄송합니다. 진짜 몰라요."
"모르면 다야? 모르면 다냐고. 너도 미리 알아봤겠지. 의뢰한 쪽에서 말해줬거나. 기껏해서 과실치사로 몇 년 받고 나올 거고, 손 써서 형량 반만 채우면 빼내겠다고 했겠지? 안 죽으면 살인미수니까 더 적게 받을 거라고 했겠지?"
"아닙니다."
"그런데 법전에도 없는 죄가 있는 거 알아? 괘씸죄라고. 너 앞서서 트럭으로 날 들이받은 사람이 여섯이야. 전부 10년 이상 받았고 가족 중 절반 정도가 감옥에 갔어. 너도 걔들처럼 버텨. 어차피 넌 배후가 누군지도 모르고 브로커만 알 거 아니야. 그러니까 제발 불지 말고 버텨. 형량 최대로 때릴 수 있게 말이지."
"알아요. 브로커를 미행해서 의뢰자랑 대화하는 거 동영상 찍어뒀습니다. 제발, 제발 감옥 보내지 마세요. 어머니랑 딸이 있습니다. 돈 못 받고 제가 감옥으로 가면 둘 다 굶어 죽어요."
"알았어. 진술이 사실이면 선처하지."
- 작가의말
고진감래라. 고는 고구마의 고, 감은 사이다의 감이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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