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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쇠의 서재입니다.

천마에 빙의하다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퓨전

완결

글쇠
작품등록일 :
2019.11.01 10:16
최근연재일 :
2020.01.06 18:00
연재수 :
89 회
조회수 :
41,909
추천수 :
885
글자수 :
363,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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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1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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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
추천
4
글자
9쪽

저지르고 보자

DUMMY

"천동출. 우리 결혼하자."


태양보다 더 눈 부신 난순이가 내게 프러포즈한다. 빨간 목과 귀, 은근슬쩍 내 눈을 피하는 모습이 귀엽다.


"또 꿈이네?"


"내가 맘에 안 들어? 표정이 왜 그래?"


뾰로통한 표정으로 입술을 삐쭉인다. 설마, 귀엽게 보이려고 저러는 건가? 의도가 어떻든 간에 귀여운 건 인정.


"얼마면 돼? 얼마면 되냐고? 네 몸과 마음을 얻는 데 얼마면 되냐고."


억양이 평소랑 조금 달랐는데 여태 몰랐네.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느낄 수 없을 만큼 미세한 떨림을 이제야 알아챘다.


"저기, 도움 필요하세요?"


지나가던 여자 둘이 핸드폰을 들고 난순이한테 질문한다. 이미 112가 찍혔고 여차하면 통화 버튼을 누를 기세다.


"우리 사귀는 사이에요."


두 여자는 예수가 아미타불 외치는 걸 들은 사람처럼 하얗게 질린 채 도망쳤다. 그땐 그저 상황이 이해되지 않아서 그러는 줄 알았는데, 난순이가 기세를 피워올린 거였다.


여자들이 오줌 안 지린 걸 보면 아예 이성을 잃지는 않은 것 같고.


"천동출, 넌 입이 없어? 왜 말을 못 해. 이 여자가 내 여자다. 이 여자가 내 사람이다. 왜 말을 못 해? 너 내가 창피해?"


저 때 거절해야 했다고 생각했는데, 기세에 눌려 거절할 엄두도 못 냈던 거였다. 거절할 마음도 전혀 없었고.


"자. 이거 마시면 이제부터 우리 사귀는 거다. 안 마시면 다신 안 보는 거고."


내 손에 바나나 우유 하나가 쥐어졌다. 난 천천히 우유를 입가로 가져갔다.


"버틸 생각이 없었어."


저 때 개세가 겨우 11성을 바라보고 있었다. 난순이의 내력에 전혀 저항하지 못했다고 지금까지 핑계를 댔는데, 사실 난 제대로 저항하지 않았다. 내가 온 힘을 다해 저항했다면 우유갑이 찢기고 바나나 우유가 사방으로 쏟아졌겠지.


그렇게 난 못 이기는 척 바나나 우유를 입에 흘려 넣었다.


꿈의 마지막은 언제나처럼 구김살 없는 난순이의 밝은 얼굴이었다. 그리고, 그 얼굴엔 거짓 한 점 없었다.


###


난순이가 떠나고 3년이 흘렀다. 난 부부장검사가 되었고, 부장검사가 내년에 옷 벗고 총선에 출마하면 자동으로 부장검사가 된다.

고작 서른넷에 부장검사를 다는 전대미문의 사태가 벌어지는 것이다.


"부부장님, 내년 앞에 부 떼고 선배들 다 옷 벗기시는 거 아니죠?"


희한하게도 난 선배들한테 인기가 좋다. 보통 후배가 치고 올라오면 싫어하는데, 난 후배들이 싫어하고 선배들이 좋아한다.


"선배야말로 평검사 주제에 부장한테 업무 지시하는 거 아니지?"


내 말에 선배들이 음흉한 웃음을 짓는다. 간밤에 조금 다른 꿈을 꿨더니 내가 제정신이 아니다.


"오해는 말고. 만약에, 만약에 되면 그럴 거 같다는 뜻이야."

"걱정 마. 넌 정치색도 없고 어디 줄 잡은 것도 아니잖아. 비리 기업을 털긴 했지만, 결국 그 기업들 다 잘됐고. 네가 말실수 좀 한다고 꼬투리 잡을 사람은 없어."

"뇌물 받은 정치인들은 감옥 가고 재산 압수당했잖아."


내 말에 선배들이 킥킥 거렸다.


"너 어떤 때 보면 참 순진해. 힘 잃은 정치인은 쓰레기보다 못해. 쓰레기는 분리수거하고 재활용이라도 하지. 정치인은 버릴 곳도 없어."


정승 집 강아지가 죽으면 조문객이 줄을 서지만, 정작 정승이 죽으면 대문 활짝 열어도 손님이 없는 거랑 같은 도리다.


"근데 선배님들. 내가 CM 그룹 사위가 됐는데 왜 누구도 이상하게 생각 안 하지?"


문득 든 생각이다. 지금까지 나랑 난순이가 부부라는 사실을 들은 사람은 대부분 의구심을 숨기지 않았다. 유독 선배들만 지금까지 티를 안 냈다.


"너 초짜 주제에 우리 특수본으로 배정받은 거 기억해?"

"그럼요. 그때 다들 내 가죽 벗길 기세여서 엄청 쫄았죠."

"쫄기는 무슨. 부장님 질문에 꼬박꼬박 대답하던 놈이."


그럼 초짜 주제에 부장님 생까?


"그날 신입 환영 파티를 열고 5차까지 갔잖아."


기억이 생생하다. 원래부터 주량이 좀 있는 편이고, 내공 덕분에 술을 암만 마셔도 안 취한다. 그날 고주망태가 된 선배들을 내가 끝까지 케어했다.


"5차 끝나고 우리 사우나 갔잖아. 거기서 네가 어떻게 제수씨랑 결혼했는지 납득했어."


갑자기 눈물이 핑 돈다. 그 훌륭한 걸 합쳐서 50년 가까이 썩히고 있다는 사실을 절대 들키지 말아야지.


나의 '훌륭함'에 관해 농담 몇 마디 더 나누고 우린 헤어졌다. 난 방으로 가서 여전히 줄지 않는 비리 기업 자료를 검토했다.


"검사님, 혹시 운명을 믿으십니까?"

"글쎄요. 운명이란 주어진 환경에서 내가 이룰 수 있는 것의 한계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범위 안에선 내가 하기 나름이라고 여겨요."

"제가 자주 가는 운명 까페가 있는데요. 어제 들은 말이 너무 인상 깊어서요."


평소라면 그냥 웃고 넘겼을 텐데, 왠지 귀를 기울이고 싶은 마음이다.


"인간의 시작과 끝은 정해졌다. 노력에 따라 그 과정이 달라질 뿐."


내가 흥미를 느끼자 조사관이 신나서 침을 튀긴다. 나보다 몇 살 형인데, 운명 어쩌고 하면서 아직 솔로다. 선은 절대 안 보고 운명적인 만남만 기대하는데, 평소엔 집과 검찰청, 주말엔 집에서 게임을 한다. 온라인 말고 콘솔 게임.


###


아릿하다. 왜지? 왜 꿈에서 난순이 얼굴이 흐릿하게 보이는 걸까?


잠에서 깨니 아련한 뭔가가 남아서 내 가슴을, 내 머리를, 내 영혼을 저리게 한다.


'인간의 시작과 끝은 정해졌다. 노력에 따라 그 과정이 달라질 뿐.'


조사관의 목소리가 귀에 맴돌며 수천수만의 메아리를 만들었다. 어느새 내 귀는 물론 머리까지 조사관의 말로 꽉 찼다.


"설마."


나도 모르게 입을 열어 말했다. 쉽게 털어놓기 힘든 비밀을 간직했기에 생각을 많이 하고 말을 적게 하는 습관을 길렀다. 아무리 혼자 있어도 최대한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했는데, 당황한 나머지 혼잣말을 했다.


'나 34살에 죽는 건가?'


조사관의 말이 맞는다면 난 내년에 죽는다. 회사에서 회식을 끝내고 귀가하던 중에 죽은 8년 차 회사원, 그 죽음을 알고 관심을 줄 사람이 백 명도 안 되는 천동출이 아니라.

수천만 명이 이름과 얼굴을 알고, 술자리에서 가끔 입에 올리기도 하는 스타 검사 천동출. 과정은 훨씬 화려하지만, 결국엔 34살에 죽는 운명을 못 피하고 화려하게 지는 거다.


난 침대 머리에 둔 휴대전화를 들고 번호를 눌렀다.


"항공사죠. 미국으로 가는 티켓 한 장 주세요. 최대한 빨리, 목적지는 뉴욕이요."


운 좋게 당일 티켓을 산 나는 바로 차를 몰고 공항으로 갔다. 과속으로 딱지 세 개 정도 끊은 것 같지만, 티케팅하면서 뇌리에서 지웠다.


비행기는 도쿄 공항에서 2시간 정도 머물고 다시 날았다. 나는 시차에 적응하려고 억지로 잠을 청했다.


"손님, 뉴욕 공항입니다."


승무원이 흔드는 바람에 깼다. 평소에도 잠귀가 무척 밝은데 소음이 많은 비행기에서 이토록 편하게 자다니. 설마 운명의 끝이 다가와서 그런 건가?


만약 같은 날 같은 시각에 죽는다면, 난 아직도 반년 정도 남았다. 얼마 안 남은 삶을 지금처럼 허비할 수 없다.


"난순아, 나야. 주소 불러 줘."


주소를 듣고 바로 택시를 잡았다. 택시는 엄청난 배기음을 자랑하며 뉴욕 시내를 질주하여 난순이가 알려준 주소에 날 내려줬다.


"동출아."


멀리 청초한 수선 한 떨기가 나를 향해 손짓한다. 반가움에 손을 흔들며 달려가니 수선이 화사한 복사꽃으로 변한다.


"난순아. 보고 싶었어."


와락 안았다. 여전히 내 경지가 까마득히 낮지만, 난순이는 저항하지 못했다. 마치 천마신공을 펼친 것처럼, 난 내 주변을 완전히 통제했다.


"나도."


기어들어 가는 소리를 뛰어난 청각 덕분에 안 놓쳤다. 품에서 떼어놓고 보니 난순이 얼굴이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얼핏 아름다운 장미가 떠올랐지만, 가시가 없다. 최소 나한테는.


"어떻게 왔어?"


비행기라고 대답하면 분위기 깨지겠지?


"보고 싶어서."

"너도 집유의 끝에 이르렀구나."


그제야 머리가 맑아졌다. 비행기에서 엄청난 소음에도 잘 잤던 게 이해된다. 조사관이 한 운명에 관한 말을 듣고 엄청난 경험치를 얻어 레벨이 꽉 찬 거였다. 경지가 급히 오르면서 일시적으로 감각이 흐려졌던 거다.


"아니야. 그냥 보고 싶어서 온 거야."


난순이 얼굴이 다시 빨개졌다. 난 갓 태어난 병아리처럼 움츠러든 고운 어깨를 부드럽게 그러안고 저택으로 들어갔다.


미리 끓였는지 찻주전자 주둥이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운명의 끝은 정해졌다고? 가능성 있어."


차를 마시며 내가 들은 말을 난순이에게 전했다.


"그래서 말인데. 우리 하자. 그냥 해."

"뭐, 뭘, 뭘 어떻게."

"우리가 신혼 밤에 이미 해야 했던 일."


난 석 달 굶주린 호랑이처럼 난순이를 덮쳤다.


작가의말

천동출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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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 견제 20.01.05 173 5 9쪽
84 생방송 20.01.05 172 5 9쪽
83 자충수 20.01.04 154 6 9쪽
82 민중의 칼 20.01.04 156 4 9쪽
81 지뢰밭길 20.01.04 140 4 9쪽
80 가시밭길 20.01.03 142 8 9쪽
79 천동출 20.01.03 151 4 9쪽
78 진상 20.01.03 139 5 9쪽
77 성화신의 정체 +2 20.01.02 161 7 9쪽
76 합체와 분리 20.01.02 139 5 9쪽
75 전쟁 20.01.02 153 5 9쪽
» 저지르고 보자 20.01.01 176 4 9쪽
73 정조를 지켜라 20.01.01 198 4 9쪽
72 검사 천동출 20.01.01 154 4 9쪽
71 청천벽력 +2 19.12.31 163 7 9쪽
70 전학생 19.12.31 189 4 9쪽
69 세상이 너무 쉬워 19.12.31 129 6 9쪽
68 생김에 관한 고찰 19.12.30 152 7 9쪽
67 나는 강하다 19.12.30 127 6 9쪽
66 처형식 19.12.30 124 6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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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말종의 반격 19.12.28 125 6 9쪽
60 동맹주 19.12.28 124 5 9쪽
59 무마동맹 19.12.27 141 4 9쪽
58 천마신공 19.12.27 143 4 9쪽
57 아비수의 마왕들 19.12.27 149 6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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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어마어마한 지원군 +1 19.12.25 154 6 9쪽
54 마교와 전쟁 19.12.24 142 7 9쪽
53 애송이들아 +2 19.12.23 156 8 9쪽
52 대기업 회유 +2 19.12.22 181 7 9쪽
51 독점금지법 +2 19.12.21 179 5 9쪽
50 후원금 +5 19.12.20 171 6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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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청문회 +2 19.12.18 172 5 9쪽
47 무림맹의 저력 +2 19.12.17 165 7 9쪽
46 비무 대회 +2 19.12.16 187 7 9쪽
45 천마의 대응 +4 19.12.15 187 7 9쪽
44 후보자 토론회 +2 19.12.14 176 7 9쪽
43 영혼 분리 +2 19.12.13 181 7 9쪽
42 공약 +3 19.12.12 219 6 9쪽
41 출마 선언 +2 19.12.11 187 6 9쪽
40 차별에 관하여 +2 19.12.10 219 7 9쪽
39 빙의가 준 계시 +2 19.12.09 268 7 9쪽
38 세 번째 빙의 +2 19.12.08 215 7 9쪽
37 탄핵 +2 19.12.07 202 10 9쪽
36 프리즌 브레이크 +4 19.12.06 218 8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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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문신 법술 +3 19.12.03 226 5 9쪽
32 천마 감옥에 갇히다 +2 19.12.02 240 5 9쪽
31 범인 검거 +2 19.12.01 213 7 9쪽
30 두 번째 빙의 +3 19.11.30 250 6 9쪽
29 대호법의 활약 +3 19.11.29 252 5 9쪽
28 상거지 만수로 +2 19.11.28 286 8 9쪽
27 첩자 이야기 +2 19.11.27 282 8 9쪽
26 유치원 삼법 +2 19.11.26 339 7 9쪽
25 민폐 천마 +2 19.11.25 282 6 9쪽
24 망나니 천마 +2 19.11.24 308 9 9쪽
23 최악의 16팀 +3 19.11.23 300 9 9쪽
22 노력하는 천마 +2 19.11.22 384 7 9쪽
21 무림맹의 재도발 +5 19.11.21 361 8 9쪽
20 배움은 끝이 없다 +2 19.11.20 375 8 9쪽
19 영혼과 육신 +1 19.11.19 412 9 9쪽
18 첫 경험 +6 19.11.18 522 13 9쪽
17 세상에 이런 일이? +2 19.11.17 417 13 9쪽
16 뒷수습 +4 19.11.16 421 12 9쪽
15 말종의 사신 +2 19.11.15 444 14 9쪽
14 엄친아 할아비 +3 19.11.14 467 13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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