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화 – 대동에서 비롯된 고목을 위한 날개
“공자님의 뜻과 이상이라 하시면?”
“대동이지요.”
“대동?”
치익- 화르르륵-
그렇게 손님을 안으로 맞이하며 유표가 초 하나를 새로이 키는 사이, 일렁이는 촛불을 바라보던 순상은 형주로 떠나기 전, 황보력과의 대담을 떠올렸다.
‘그건 또 무슨 말씀이십니까? 형주라니요? 그것도 사공께서 직접 말입니까?’
‘예, 사도. 그렇게 되었습니다.’
‘아니, 이미 연주와 예주에 사람을 보냈다 하지 않았습니까?’
‘그래도 부족합니다. 고작 연류에서 나온 물자만으론 사례의 이들을 모조리 먹여살릴 수 없습니다.’
‘허지만......, 유표, 그 자는......’
‘예, 압니다. 무례하지요. 불충이자 불의입니다. 팔급이란 과거가 그의 지금을 반영해주긴커녕 도리어 그의 부정을 지금까지 가려주고 있었사오니, 이 또한 문제지요. 그럼에도 그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이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것은 여전히 사례의 사정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 아닙니까?’
‘헌데도 그러하겠다는 말입니까? 사례의 사정은 여전히 좋지 않단 말입니다.’
‘해서, 지난날 사도께서 포홍의 사절을 맞이하며 언급하셨다는 대동사상이 필요합니다.’
‘대동?’
‘실권을 쥐여주되, 희망과 함께 던져주어 그 자격을 묻게 하는 것입니다. 본연의 의지로 선을 넘지 못하도록 만들 것이니 믿고 맡겨주십시오.’
‘내 다른 건 몰라도, 그 대동이 이리 쓰이게 될 줄은 몰랐소. 허나 이는......’
‘예, 압니다. 어차피 위협을 받는 황권이지요. 그 황권의 그 존립을 놓고 말들이 많아질 만큼 사례는 위태로운 상황이며 그 바탕엔 옥새가 깨진 현실과 이를 지켜내지 못한 책무가 남아있음을 알기에, 되려 그 판을 뒤집고자 하는 것입니다.’
‘판을 뒤집는다?’
‘하늘은 거역해도 그 하늘을 선출하는 청류의 이들은 거역하지 못하게 만들 것이옵니다. 하늘을 쥔 것도, 그 하늘을 뽑는 것도 누구의 손을 거쳐야 하는지 누구의 인정이 있어야 하는지 그 현실을 깨닫게 하겠다는 말이지요.’
화륵-
“생각이 많으신 것 같은 얼굴이십니다, 사공. 고작해야 초 위에 피어난 작은 불꽃을 앞에 두고 깊은 눈동자를 드러내시니 말이지요.”
그렇게 불꽃의 너머로 들려오는 유표의 목소리에 순상은 상념을 벗어나 현실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 현실 앞에 여전한 경계와 복잡한 감정이 뒤섞인 눈빛을 드러내는 유표가 있으니, 이는 순상의 앞에서 감추려 해도 감춰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는 주목이야말로 생각이 많아 보입니다.”
“크흠, 우선 말씀부터 편히 하시지요. 제가 한참 후인이지 않습니까?”
“허허허, 위세 따위 부리고픈 마음도 없습니다. 사적인 예우와 대접도 더더욱 사절이니, 나는 지금 공을 엄연한 자격을 갖춘 이로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격.......”
그렇기에 순상은 노골적인 의미가 서린 발언을 그에게 던졌다.
이를 곱씹는 유표의 안색 또한 이전과는 사뭇 다른 것 또한 실로 그 때문이었고 말이다.
“어쩌면 선제께서 지난날 흔들리는 난국에 앞서 주목을 부활시킨 것 또한 이러한 일들을 예견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소. 거기에 돌아가신 전임 사도께서도 일찍이 이를 눈치채신 모양인지 주목을 하나 더 늘렸고, 말이요.”
그러니까 순상의 말은 나라가 기울어 앞날이 흐릿하니 유씨의 이들 여럿을 난세를 극복하기 위한 포석이자 안배로 쓰기 위함이 아니었겠느냐는 뜻이었다.
다시 말해, 이는 이를 듣는 유표가 아주 좋아할 법한 정당성을 던져준 것이다.
“사공.”
“왕, 하고 싶소?”
그러나 순상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
유표가 이에 반응할 찰나 다시금 순상이 그를 긴장하게 만든 것이다.
“대부를 넘어 공경을 지나고 후와 왕을 넘어 그 이상을 바라시오?”
“사, 사공! 어찌 이를......”
“면전에서 묻느냐? 허면 내 대저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이를 달리 물어야 하겠소?”
꾸욱-
유표의 얼굴이 당혹과 더불어 일그러진 이 부분에서 순상은 유표의 앞으로 다가와 손을 뻗어 그의 양심이 자리하고 있을 그의 가슴을 찔렀다.
“아닌 말로 도가 지나친 무례에 애초에 하늘이라고 있어도 없는 척 쳐다도 보지 않는데, 허면 내가 거기다 대고 더 뭘 할까? 그나마 이리 찾아와 그 의중을 묻는 게 최선인 것을, 애초에 은혜조차 모르는 이 아닌가?”
“후우.”
“팔급의 호칭도 사대부들의 인정도 이름난 덕망과 명성도 모두 허송이자 허도의 것이었으니, 다들 그 눈이 뒤집힌 게지. 아니면, 이제와 그 모든 걸 갖추고도 더한 욕심을 부리는 그 누구의 눈이 뒤집어졌거나.”
“신랄하십니다, 사공.”
그러나 그럼에도 유표는 자신이 뒤집어쓴 가식의 가면을 벗어던지지 않았다.
“그러나 천하가 이 지경이 된 것에는 필경 그만한 배경과 연유가 있음은 압니다. 고래로 우리의 청사에 가히 이러한 적이 있었습니까? 옥새는 깨어졌고 천자의 어미가 직접 난을 일으켜 그 천자를 옹립할 이들을 치려 하였음은, 가히 하늘조차 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그 대죄는 모두를 악정과 사욕이 뒤섞인 혼란 속으로 밀어 넣고 있습니다. 천하 곳곳에 반란과 전화의 들불이 번졌고 그들 중 다수가 이 나라에 대한 미련을 떨친 채, 전복을 꾀했습니다.”
“그래서 자네도 그리되겠다는 소린가?”
“이런 말씀을 드려서 송구하지만 노골적으로 정반댑니다. 유라는 성씨를 타고난 저희는 그에 대한 최소한의 책무를 짊어지고 있습니다. 배신당한 천하에 대해 사죄하고 속죄하며 이 유씨 천하가 그릇된 것만이 아님을 만백성에게 보여주어야 할 책임. 토호와 군벌들을 비롯한 특정한 이들의 집권과 그들의 이기심으로 고통받을 천하를 끝장내고 그에 떨고 있는 백성들을 보듬어 다시금 이 세상을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려 놓는 것. 그것이 바로 저희와 같은 유씨의 성을 품고 태어난 이들의 책무일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그 누구보다 가장 큰 책무를 지닌 이들은 제 할 도리조차 제대로 다하지 못하고 있지요.”
“책무라 책무.”
실로 유려한 언변을 포장 삼아 노골적인 자신의 입장을 정당화하려는 유표의 변설은 가히 대단한 것이었다.
그저 에둘러 이를 인정할 뿐, 자신이 책잡힐 그 어떠한 언행을 흘리기보다 그저 이 모든 것을 외부의 탓이자 환경, 그리고 시대의 흐름으로 만들어내고 있었다.
“노골적인 힐난이로군.”
“뭐, 그 누구도 나름의 할 말은 있기 때문이지요.”
“좋아, 인정함세. 우리의 무능이고 우리의 부족함이지. 허나 그럼에도 아직 이 천하는 황상을 하늘로 뫼신 채, 기존의 체제를 유지하고 있네.”
“부정하진 않겠습니다.”
“그래서 하는 말이야. 자네는 일찍이 우리가 내보인 신탁통치, 이를 어찌 생각하나?”
“훌륭한 신료들이 만들어낸 최고의 업적입니다, 외척의 권한을 제한시키며 자칫 문제의 소지가 다분할 황권의 제제라는 문제를 품고 있으나 이는 그 보령이 어린 천자를 대신하는 수렴청정을 대체 할 더할 나위 없는 청류의 성공이자 온 천하를 들썩일 일이지요. 그러나 필경 두 가지 문제는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래, 허면 그 두 가지 문제가 뭘까?”
“하나는 책임, 책무지요. 이전이라면 그 모든 문제를 천자와 외척을 비롯한 이들의 부정으로 돌리는 것이 가능하였으나 권한을 가져온 만큼 그만큼의 책임이 늘어나게 되었지요. 그리고 이는 그리 황권을 가져온 사례의 조당을 향한 평가이자 심판이 됩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천권의 대리자가 생겼다는 것, 그것도 특정한 피를 지닌 이들의 것이 아니라 이 나라의 근간이라 할 수 있는 유자들이 직접적으로 이 나라의 대소사를 관장하고 이끌어가는데 확고한 입지를 다졌다는 것.”
순상의 날카로운 언변은 칼이 되어 유표의 가면을 베어냈다.
그렇기에 한편으론 기뻐하면서도 또 한편으론 분노하고 있는 그 일그러진 두 얼굴이 한 사람의 안면 위에 자리하고 있었다.
“알고 계셨습니까?”
“그렇기에 자네의 표정이 그리 복잡한 것이지. 신하로서의 그대는 분명 이를 환영할 일이었다. 그러나 그대의 몸을 타고 흐르는 황족의 피가 이를 분노케 한다. 그 자격은 분명 자신들과 같은 유씨의 이들만이 가질 수 있는 것. 설사 불온한 마음을 가져도 이것은 유씨의 이들 외에 그 누구에게도 허락되어선 안 된다는 것.”
“예, 분명 주제를 넘었지요.”
뿌드득-
그렇게 본성을 드러낸 유표가 이내 자신의 가슴에 닿은 순상의 손가락을 거세게 움켜쥐었다.
이에 순상은 고통을 느끼며 신음했으나 그럼에도 유표를 대함에 흔들림이 없었다.
“크흑! 자네는 유자인가?”
“그 이전에 유씨입니다.”
“그러나 천하는 자네가 훌륭한 유자임을 인정했지, 자네가 꾸는 불온한 꿈을 인정하지 않았어!”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합니까, 사공-!”
“그래, 할 말이 많겠지!”
“당연하지요! 이 나라가 누구 때문에 이렇게 되었는데! 애초에 제대로 수습하고 정리하지도 못할 일 연달아 벌렸으면 그에 대한 책임이라도 지고 물러나던가! 이미 죽은 황보숭에 대한 죄책감과 양심의 가책을 무기 삼아 온 천하를 들쑤시면서, 그의 유지로 잇는다는 걸 핑계로 그 어떠한 권력도 내려놓지 않으면서! 이리 멋대로 찾아와 멋대로 남의 흉중에 담긴 진심조차 왜곡하면서 결국 도움을 요청할 거, 뭐 그리 자존심 하나 허락지 않는지 어떻게든 뻗대고 굴복시키려고 지금 이 사람의 허리를 어떻게든 수그리게 만들려 하고 있지 않습니까?”
“끄흐윽!”
그렇게 분노가 서린 유표가 순상의 손가락을 거의 부러트릴 듯 비틀어버렸다.
그리고 그 분노는 결국 자신의 본성이 까발려진 것 외에 그가 작금의 현실을 온전히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미 알고 있었군......., 끄흐으윽!”
“예, 알다마다요. 이미 완을 기점으로 엄청난 양의 물자를 쌓아놓았습니다. 해서 사례의 생존을 보전해주는 대신 받아낼 것이 뭐가 있을까 생각하며? 최대한 좋게 가려고 그 마음을 먹었는데, 대저 꼭 이렇게 사람을 들쑤셔서 꼭 더러운 꼴을 보게 만드셔야겠습니까?”
“후우, 흐흐흐. 자네는 천하를 쥐지 못해.”
“사고오옹!”
“자네도 잘 알 게야. 이 나라는 유자들의 나라야, 청류의 세상이고 유학의 땅이다-!”
쿠웅-
“빌어먹을 그걸 누가 모르는 줄 아는가-!”
고통 속에 신음한 순상을 앞에 둔 유표가 발을 구르며 그의 손가락을 내던지듯 밀어버렸다.
그러나 그 힘에 밀려 내동댕이쳐진 순상은 고통 속에 신음하면서도 유표의 현실을 일깨우는데 최선을 다했다.
“자네의, 자네의 천하는 불안정하지. 감히 난국을 빌미로 하늘을 꿈꾸고 있으나 그런 자네의 뿌리는 갑목이 아니라 을목이지.”
“을목이라......, 형주의 호족들을 이야기하시는 게로군요, 제기랄.”
“그래, 자네는 시대를 풍미할 거목이기에 갑목이 되어 위로 솟으려 하나, 을목은 넝쿨이고 덤불이기에 옆으로 퍼지는 기운을 가지고 있지. 자네의 바탕이며 뿌리가 되어줄 이들은 결국 자네가 거목이 되기 이전에 자네를 갈기갈기 찢어낼 게야. 그들은 자네를 빌미로 자신들의 영역을 더 넓히려 하는 것뿐이니까. 그리고 스스로의 노력으로 굳이 높이 오를 필요도 없이 자네를 타고 휘감아 오르면 그뿐이니, 그리 자네를 붙들고 어떻게든 자네를 놓아주지 않겠지. 자네를 잠식해 높이 오르고 자네를 빌어 각자의 욕심으로 각자의 그릇에 맞는 그 작은 천하를 굽어보겠지.”
“형주......., 하아.”
순상의 안목은 정확했다.
아무런 연고도 없이 형주에서 기반을 잡은 유표 또한 자신의 상황을 정확히 꿰뚫어내는 순상의 말에 다시금 자신이 놓인 현실을 체감했으니까.
“그래, 자네는 결국 형주를 벗어나지 못해. 거목의 싹이 자라나 작은 나무가 되었다고 해도 그 모든 나무가 거목이 되지는 않는 법이지. 도리어 덩굴에 휘감겨진 큰 나무조차 그리 덩굴에 뒤덮여 고사하기 마련이거늘, 어찌 그보다 작은 나무가 뿌랭이에서부터 넝쿨과 덤불을 끼고 있는데 어찌 거목이 되겠는가?”
순상 또한 이를 알기에 집요하게 유표를 물고 늘어졌다.
“그야 모를 일이지요.”
“오기 부리지 말게. 덩굴에 잠식된 거목의 싹은 결국 거목은커녕 그 덩굴의 자신을 뒤덮는 속도를 이겨내지 못해 말라 비틀어진 고목(枯木)이 되기 마련이야.”
“후우, 그래서 이제는 저주라도 하시려는 겁니까? 그래봤자 먼저 망하는 것은 사례일 텐데요?”
“그리 사례가 망해도 자네가 천하를 차지하지 못하고 그전에 고목이 된다는데, 이 늙은이가 지금까지 쌓아 올린 그 모든 명망을 걸지.”
콰앙-
“도박사도 아닌 늙은이가......., 그만하시지요?”
이에 반응하는 유표 또한 점점 흔들리다 못해 한계치에 다다르고 있었다.
“위에 서고 싶나?”
“........!”
그러나 그 뒤에 곧바로 순상이 던진 말에 유표는 잠시 그 눈동자가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허면 우리의 손을 잡게.”
“손? 오만 욕을 다 보인 뒤에 이제와서?”
“이제는 착각에서 깨어날 때도 되지 않았나? 자네의 착각은 이 세상에 민심과 천심을 정하는 이들이 따로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야. 허나 내 앞서 말했지. 이 땅은 누가 뭐라 해도 유학의 땅이라고. 허니 잘 생각하게, 자네가 유자일 적에 대한 인정과 지지가 자네가 황족임을 강조하며 멋대로 위를 보기 시작할 때에도 영원할 것이라 생각하나?”
“.......”
“이제 더는 천심(天心)이 민심(民心)이 아니야. 이제는 사심(士心)이지.”
“사심......”
“천하의 모든 선비가 사례에 모여있네, 그 말인즉 사례의 의중에 따라 이 나라의 민심과 천심이 정해진단 소리지.”
사례의 조당이 황보숭의 죽음과 더불어 외척과 명가의 변란과 더불어 옥새를 비롯해 잃은 것이 암만 많다고 하더라도, 황권을 가져오면서 그 천심을 가져오면서 세상의 중심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지닌 천자에게서 그 밑에 자리한 청류의 사대부들에게로 옮겨졌다.
이를 깨우친 순상은 지금 유표에게 이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어쩌란 겁니까?”
“미력한 말이지만, 참으로 입에 담기 부끄러운 말이지만 이제는 우리가 세상을 정하네.”
“실로......, 광오하군요.”
“아닌 것 같은가?”
그러나 유자이기도 한 유표가 이를 모를 리 없었다.
사실, 지금까지의 그 모든 대화와 말싸움 또한 이를 바탕으로 서로 밀리고 밀리지 않기 위한 것에 불과했으니까.
그러나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대동.”
“대동?”
“우리가 다음으로 나아가야 할 이상사회. 황권이 무력해진 지금, 그 모든 권한을 가져온 우리가 다시금 만천하에 우리의 무능을 속죄하기 위해 천하의 이들에게 내어줄 수 있는 더할 나위 없는 기회.”
손가락이 휘어 고통 속에 신음하는 와중에도 흘러내리는 식은땀조차 닦지 않은 채, 안광을 드러내는 순상의 모습에서 알게 모를 위압감이 느껴졌다.
“큰 도가 행해지면 전체 사회가 공정해져서 현명한 사람과 능력 있는 사람이 지도자로 뽑히게 되며 신의가 존중되고 친목이 두터워지는 법이네.”
“현명한 사람과 능력 있는 사람이 지도자로......!”
그리고 그 속에서 유표는 순상이 이야기한 바가 무엇인지를 조금이나마 깨달을 수 있었다.
지금 사례의 이들은 선양에 빗대어 자신에게도 그 기회가 열려있음을 도리어 직접, 그것도 그들 스스로가 공증(公證)을 해주겠다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미쳤군, 지금 늙은이는 이 나라를 부정하는 것이다!”
“부정이 아니라 지난날의 과오와 실수에 대한 책임이지. 더 나아가 이는 자네와 같은 이들에게 충분한 기회가 될 걸세. 자네가 이야기했던 자격, 스스로에 대한 증명이 되겠지.”
“작금의 황상께서 그리 문제가 있는 거요?”
“참담한 일일세, 모친의 죽음으로부터 비롯된 비극은 황상의 정신을 갉아먹었으니까.”
타악-
“후우-.”
유표는 꺼질듯한 한숨을 내쉬는 것과 동시에 손을 들어 자신의 얼굴을 덮어버렸다.
암만 보위에 욕심이 인다고 한들, 그 또한 이러한 상황은 상상을 못했던 것이다.
“우리는 선택을 해야 하네. 당장에 가족의 희생된 어린아이가 보위에 오른다는 것 자체가 언제 터질지 모르는 위험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까. 그리고 그제야 우리는 알게 되었지. 어째서 돌아가신 사도께서 당연한 권리이기도 한 수렴첨정이 아니라 새로이 신탁통치라 하여 우리와 같은 이들의 손에 그만한 권한을 가져왔는지 말이야.”
“........”
“이런 말을 꺼내게 되어 미안하지만은 결국 유자인 유리는 유학의 품에서 그 답을 찾아야 했네. 그리고 때마침 작금의 사도께서 그 해답이라고 우리 모두에게 내어주신 것이 바로 그것이지.”
“대동......, 공자의 이상사회......, 그래서 뜬구름 잡는 소리를 지금까지.......”
그러나 그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유표는 이를 정확히 이해했다.
순상이 언급한 대동 사회는 이미 유학이라는 땅, 유씨라는 하늘, 한나라라는 천하의 안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이미 천하만민이 인정하는 규격화 된 틀 안에서 공자의 이상을 진정으로 실현하겠다는 것이다.
“우리의 입장이 자네와 같으이. 더 이상의 혼란을 막기 위해 더는 백성들이 피해를 보지 않기 위해서라도 누군가는 저 하늘 위에 올라서야 해. 그러나 그 기회를 자네에게만 넘겨줄 순 없는 일이지. 이는 공정하지 못한 일이지 않은가?”
“해서 지금 내가 그 후보 중에 하나가 되었다 이 말이군.”
“유씨의 이들은 많으니까. 자네보다 더 나은 사람이 이 천하에 없으리란 보장도 없으니까.”
그리고 이것은 유표의 심간을 흔들기에 충분했다.
비좁은 형주를 바탕으로 제대로 된 기반이라고도 할 수 없는 토착 호족들과 엮여 천심과 민심을 좌지우지하는 저들을 배척할 것인가?
아니면 그 반대로 저들의 인정 속에 조금 더 노력과 시간을 들여 온전히 천심과 민심을 가져올 것인가?
“황보가의 이들은 보위에 욕심도 없소?”
물론, 그 와중에도 심간의 한구석엔 적지 않은 의구심도 있었다.
“황보숭은 살아서도 죽어서도 충신이었고 이는 앞으로도 그럴 걸세. 그분의 조카이자 그 유지를 받든 황보력도 그럴 것이고.”
“빌어먹을 정도로 꽉 막힌 가문이군.”
“대신 그들의 이름과 가문은 영원히 살아 숨 쉴 것일세. 청사 속에 기록되어 앞으로를 살아갈 후인들에게 더할 나위 없는 귀감이 되어주겠지.”
그러나 다른 이도 아닌 순상의 보증이 더해지니 이는 더 이상 의구심이 아니게 되었다.
“이게 그들이 살아가는 방식인가?”
“유씨가 유씨만의 길을 가듯, 그들도 그들 가문에게 허락된 충신의 길을 가는 것일세.”
“이 또한 대동이로군. 그들이 행할 수 있는 가장 큰 도가 그것일 테니까.”
“바로 그것이야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이 행할 수 있는 가장 큰 도를 실현해야 하네.”
무엇보다 자신들과는 다른 생을 살아가는 이들에 대해 깨닫고 나니, 그의 마음 또한 급격히 기울어지고 있었다.
“그래, 각자가 사는 게 다른 게지. 모두가 대도를 운운하지 않을 것이니, 사공께서 언급한 대로 나 또한 저 토호 놈들에게 코가 꿰여 저들을 위한 고목으로 죽을 길을 굳이 택할 필요도 없고.”
스윽-
그렇게 유표가 처음으로 순상에게 손을 내밀었다.
“........”
터억-
이에 한 동안 말이 없던 순상 또한 그리 유표가 내민 손을 잡았고, 이에 유표는 단숨에 그를 일으켜준 뒤, 병사를 시켜 손가락을 치료할 의원을 불러들였다.
“이것이 자네가 이 세상에 첫 번째로 내보인 대동일세.”
“대동이고 나발이고, 황보력은 황보숭만큼 빨리 죽지 않았으면 좋겠군.”
이에 짐짓 감동한 모양새를 보이는 순상이었으나 그의 앞에서 이를 에둘러 표현한 유표는 딴청을 피우기에 바빴다.
그러나 암만 에둘러 표현한 농일지라도 이는 적잖은 그의 진심이 담겨 있었다.
저들의 말이 사실이라면 작금의 사례의 조당과 청류를 틀어 쥔 황보력은 자신을 천하로 이끌어줄 이가 된다.
거기에 지난날 죽은 황보숭이 황족의 대한 대우이자 주목으로 자신을 형주목으로 앉힌 과거가 있으니, 그에 대한 일말의 미안함 또한 저들과 손을 잡고 사례를 돕는 일로 씻어낼 수 있기에 유표는 그리 순상의 뜻에 따라주기로 마음을 먹었던 것이다.
휘이이잉-
그렇게 유표는 치료를 마친 순상과 더불어 형주에서 생산된 엄청난 양의 물자가 완을 통해 사례 하남윤으로 넘어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이제는 서늘하다 못해 살이 에이는 것 같은 바람은 겨울날의 한파를 생각나게 할 정도였으나 그럼에도 그의 품에는 순상이 약속한 아주 소중한 것이 남겨져 있었다.
스윽-
“사지절(使持節) 진남장군(鎮南裝軍) 개부벽소(開府辟召) 의동삼사(儀同三公) 독교양이주(督交揚二州) 형주목(荊州牧).”
순상이 유표에게 남겨준 그것은 허울뿐인 천명의 자격이 아니라 실질적인 천하를 향한 한 걸음이었다.
원 역사에서 이각과 곽사가 집권한 이후 유표가 조공을 바쳐 얻어냈던 그 말도 아니 되는 벼슬이자 특권이 이리 다시금 그를 찾아와, 그가 형주를 벗어날 수 있는 날개가 되어준 것이다.
- 작가의말
늦어서 죄송합니다.
어떻게든 오늘 업로드 분량의 날짜를 지나지 않기 위해 겨우 마무리를 지었습니다만, 연휴 이후 자꾸만 이것저것 준비해야 할 것들 또 터지는 것들이 많아서 진짜 제정신이 아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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