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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성 님의 서재입니다.

삼국지 : 내가 죽어 소금에 절여지기까지

웹소설 > 일반연재 > 대체역사

필성필성필
작품등록일 :
2020.05.11 16:04
최근연재일 :
2022.11.09 06:27
연재수 :
430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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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3,864,810

작성
20.10.15 0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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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글자
20쪽

144화 – 이제 한파가 들이닥칠 겁니다(3)

DUMMY

“폐하?”


묘하게 떨림이 이는 목소리, 두려움 속에 구원을 바라는 이의 목소리는 가히 간절하고 절박한 것이었다.


“폐......!”


쿠웅-


“황상께선 지금 표기장군의 불충을 꾸짖고 계신 것이오! 어찌 그리 모든 것을 독단으로 결정짓는가!”


그러나 이를 눈치챈 갑훈이 채 반응하기도 전에 발을 구르며 황제의 영향력을 지워버린 황보력이 그 앞에 서며 갑훈을 막았다.


“사도......”


스윽-


그도 모자라 절을 하고 있는 갑훈의 앞에 그 몸을 수그려 그의 귓전에 노골적인 경고를 전하는 황보력이었다.


“그대가 진정 이 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하고자 하는 유자이며 사인이라면, 돌아가신 숙부님의 유지를 기억하며 그분의 업적을 인정해야 한다. 그분의 창안하신 질서에 의문을 품지 아니하며 그에 대한 반기를 들지 말지어다.”


“.......!”


쿠웅-


그렇게 다시 한번 발을 구르며 갑훈을 움찔하게 만든 황보력은 은근슬쩍 그 고개를 돌려 용상에 자리한 소제를 노려보았다.


“지, 짐은 이만 자리에서 일어나도록 하겠소. 뒷목이 뻐근하고 피로가 찾아오니 아무래도 휴식을 취해야.....”


“그러시겠습니까? 허면.”


그렇게 눈앞에서 거추장스러운 어린 것을 치워버린 황보력의 고개가 다시금 자신의 발밑에 자리한 갑훈을 향해 돌아갔다.


“일어나시오.”


“........”


“경조윤, 이제는 일어나도 좋소.”


그렇게 한 차례 두려움을 느꼈나 싶어 자신의 위엄에 갑훈이 겁을 먹었다 판단한 황보력이 다시금 갑훈을 부르며 그가 자리에서 일어날 것을 명했다.


“경조윤?”


그러나 어찌 된 영문인지 도리어 갑훈은 그리 절을 올린 상황에서 도리어 요지부동의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하, 이게 진짜......, 경조윤. 내 말 안 들리나?”


“들리옵니다.”


“한데, 어째서 태도가 그 따위야?”


상황이 이러하니 당연히 황보력의 입에서 좋은 소리가 나올 리가 없었다.


“신은 이 나라의 하늘이신 황상 폐하의 명을 받드는 신하이지, 일개 신료의 명을 듣는 이가 아니옵니다.”


“뭐라? 일개 신료?”


한데 그런 황보력의 앞에 뻗대는 갑훈으로 말미암아 순식간에 조당의 분위기가 차디찬 얼음장마냥 굳어져 버렸다.


거진 기존의 황보숭의 정예군을 비롯해 주준을 통해 확실히 군부마저 장악한 황보력에게 반기를 들 이가 없는 사례의 조당은 이 살얼음과도 같은 판 속에 숨조차도 제대로 쉬지 못한 채, 서서히 갈라지며 떨어져 나가는 두 세력의 대변자를 지켜보고 있었다.


“신탁통치는 돌아가신 숙부의 업적이야. 감히 내 앞에 그분의 업적을 모욕해?”


“그 또한 실상은 낭중령의 머리를 통해서지요. 거기에 그 누구보다 이를 찬동하고 밀어붙인 것은 작금의 사도가 아니십니까?”


“이놈이......!”


갑훈은 가후를 통해 내부자가 아니면 알 수 없는 진실을 전해 들었고 그것을 즉각 활용했다.


“거기에 신탁통치는 태후의 헌정문과 관련이 있습니다. 황상을 상징하는 황명의 직인이 찍혀있지 않으니 더더욱 효력이 없지요.”


“흥! 교묘한 말솜씨로 주변을 흔들려는 개수작을 잘 알겠다만은, 숙부님도 나도 외척의 발호를 경계하기 위해 태후에게 양보와 약속이 담긴 서약문을 받아낸 것이다. 그것도 이 나라를 수호하려는 우리의 힘으로, 그 마지막까지 이 나라를 걱정하는 충신들의 절개와 충정으로 말이야! 한데 황상이, 황상의 직인인 옥새가, 황명이 왜 나오느냐? 황상께선 당연히 누려야 할 것을 누리시면 그뿐인 것을.”


그러나 찰나의 동요를 끝으로 곧바로 화려한 언설을 보이는 황보력 또한 보통이 아니었다.


그 또한 황보숭과 같은 황보 가의 재지(才智)를 가지고 태어난 자.


가히 부족함은 있어도 미력함은 없는 인물이었다.


“그런 분이 이 나라의 황상을 핍박하십니까?”


“핍박이라, 핍박. 그래, 네놈들과 같이 내부의 사정을 모르는 놈들은 당연히 그리 잘난 체를 하며 저만의 옳음과 충심만이 진실이라 떠들어대겠지. 그 진실이 무엇인지조차 모른 채, 그 모든 것을 제대로 마주할 용기조차 없으면서도 우리가 어떠한 수모를 받으며 끝까지 이 나라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워온 것을 모른 채, 일개 변방을 전전하며 작은 위명과 보신을 위해 발버둥 칠 것을 투쟁의 역사라 읊으며 도리어 진정한 전장에서 목숨을 내걸고 초개와 같이 보잘 것 없는 모습으로 모든 것을 내던져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가치를 쟁취한 우리를 욕 보이겠지.”


“우리?”


순간, 상대적으로 큼지막한 의미를 내포한 단어를 언급하는 황보력으로 말미암아 여전히 들려지지 않은 갑훈의 고개가 슬그머니 뒤를 향해 돌아가고 있었다.


“.......!”


그렇게 돌아간 자리에는 거진 결단과 흥분이 뒤섞인 모습으로 날카로운 안광을 쏘아대며 갑훈을 노려보는 대소신료들이 있었다.


“설마......”


“그래, 그 설마다.”


황보력이 말하는 우리.


굳이 그 기원을 논하자면 일찍이 두씨와 환제 시절로 넘어갈 것이며 영제의 시절을 거치며 무려 3차에 달하는 당고의 금을 겪었던 무리.


그 속에서 하진의 바짓가랑이를 부여잡고 바득바득 올라와 겨우 기틀을 잡고 외척과 환관을 향해 반기를 들고 저항을 시작하며 그들 대신 이 땅의 이들을 살피기 시작한 대리(代理).


그런 그들이 끝까지 지향하며 바라고 꿈꾸며 이루고자 했던 그 모든 염원이 담긴 사리(事理).


그 사리가 마치 사리(舍利)처럼 굳어져 이 세상을 밝게 비추는 호박과 같은 만경(萬景)이 되어 모두에게 공맹의 도리와 덕을 설파하여 그들을 교화하고 끝내 유가의 이상이자 요순시대의 실현을 위한 이상사회의 건국을 이륙하는 끝을 보는 것처럼, 작금의 갑훈이 마주한 이들은 그 하나를 위해 모든 걸 제칠 각오로 작금의 신탁통치를 이륙한 것이었다.


“빌어먹을.......”


갑훈은 소름이 돋아나는 것을 느끼며 천천히 자리를 털고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작금의 폭주를 멈추지 않는 이들에게 있어 소위 하늘의 자손이라는, 천하의 모든 것을 관장하고 다스리는 천자조차도 자신들에게는 그저 하나의 과정이자 통과의례이며 허상에 불과한 소리였으니, 이는 그 끝조차 이미 공자에 의해 완성이 되어 있는 결말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소리다.


“갑자기 대동(大同)이라니, 대저 그 빌어먹을 놈의 원한과 권력욕이 뭐 그리 많기에 갑자기 공자의 대동사회(大同社會)를 들먹이느냐! 이 빌어먹을 것들아-!”


대동. 대동 세계. 대동 사회.


공자를 통해 탄생한 유교의 끝이자 그가 그려낸 인류의 마지막 이상이 그려진 유교의 이상사회.


천지와 만물의 모든 것이 사람과 맞물리는 것을 넘어 융합하고 융성하여 거대한 하나의 덩어리를 이루는 세계.


세상의 모든 것을 공공의 소유로 두고 구성원들은 이를 공변하며 모두가 각자의 이해와 득실이 아닌 전체의 이해와 득실일 위해 움직이고, 그 숭고한 노동의 가치를 보존하며 공통된 생산과 공평한 분배의 과정을 거치고 그 속에 단 하나의 질서이자 규칙이 적용되는 인륜(人倫)의 세상.


아마 포홍이 이를 보았다면 빌어먹을 정도로 구역질이 나는 사회주의 지상낙원이자 이 지구 상에 실재하지 않는 공산주의 유토피아라며 이를 욕보이고 씹어대지 않았을까?


그러나 그것과는 비슷하면서도 다른 의미로 갑훈은 이를 들먹인 황보력과 그를 따르는 청류의 이들에게 분노하고 있었다.


파악-


도저히 일렁이는 울화가 치미는 것을 참을 수 없었던 갑훈은 이내 자신의 앞에 자리한 황보력의 멱살을 틀어쥐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도대체 내가 이곳에 없는 동안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이야! 하진이 살아있을 적에도, 황보숭이 살아있을 적에도 이러지 않았던 네놈들이 대체 왜 이제와 이리 불경하고 불충한 마음을 먹은 것이야!”


왕도 없고 계급도 없으며 차별도 없고 오직 평등과 공평만이 존재하는 인륜이란 이름의 정립되지 않은 단 하나의 무질서를 방조하는 인간 본성에 의존한 본연의 질서만이 자리한 세상.


듣기만 해도 아름다워 보이는 파라다이스와 천국에 또 다른 이상향이 아닐까 하는 그 모습에 대저 왜 갑훈은 소리를 지르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던 것일까?


첫째는 당연히 불순한 의도였다.


저만의 옳음에 치우쳐 그릇됨을 보지 못하고 외면한 채, 실질적으로 자신과 다른 이들을 짓밟고 잠식하며 굴종시키고 복속시키려는 자신들의 추악한 본성을 가려줄 명분.


또 그러한 자신들의 무기한적인 집권을 향한 욕망을 정당화하기 위해 감히 그 누구도 아닌 공자의 이상을 도구로 가져다 쓴 것이 눈에 훤하였기 때문이다.


“모욕도 이런 모욕이 없다! 네놈들이 암만 지금까지 핍박을 받았어도, 그렇다고 어찌 그 모든 충의와 질서를 저버리고 이 나라에 자리매김한 모든 것을 너희들의 손에 쥐려 하느냐!”


“흥, 암만 유자라 한들, 법가의 때가 탄 변방이 이가 이를 어찌 알 수 있으랴? 그래서 그대는 안 된다는 것이다.”


“제발 세상을 똑바로 봐라! 이 못난 것!”


둘은 바로 사람의 본성이 어떠한지를 인지하는 현실성이었다.


이는 갑훈이 나고 자란 환경에서 기인한 연유인데, 인간 본성에 대한 심도 깊은 고찰에 뛰어들 필요 없이 그가 나고 자라며 배우고 깨우친 환경이 이미 이를 증거하고 있었다.


야만인과 문명인을 비롯해 서역과 중원 각지의 이들이 교차하는 서역 인근에서 자라난 그는 일평생을 수많은 사람들 속에 뒤엉켜 살았고, 이는 신분, 민족, 출신, 연령, 성별에 관계 없이 그 모든 인간이 뒤섞이는 긍정적이고 부정적인 모든 측면을 봐오며 자라왔던 것이다.


”네놈들이 이상을 보고 책 속의 세상을 그리며 자랐다지만 나는 아니다! 나는 돈황에서 나고 자라 인간의 실체를 보았어! 애초에 황보숭을 추대하려 했던 염충조차도 이 나라와 이 나라의 근간이 기울었음을 알고, 새로운 모습으로 이 나라를 뒤바꾸려 했다. 나는 그런 염충의 의견에 반대하고 그들의 일으킨 난에 맞서 싸웠으나 그놈이 오죽하면 그랬겠더냐!“


“흐하하하! 염충이라, 염충? 재미있군, 어? 아주 재미있어!”


그러나 도리어 이에 흥분한 황보력은 호탕한 웃음을 내보이다 돌연, 정색을 하고 갑훈의 얼굴을 때렸다.


퍼억-


“크윽!”


“포홍 놈이 머리가 좋구나, 그나마 무식한 놈들 사이에 똑똑한 놈. 그래도 선제의 총애를 받으며 나름 변방의 사인들에게 지지와 성원을 받는 놈을 보내 이쪽이 함부로 할 수 없도록 하였으니 말이야.”


때려놓고 할 말은 아니었으나 그것이 죽이지 못해 한이라는 소리임을 알아듣지 못할 갑훈도 아니었고 말이다.


허나 그리 얼굴을 맞았음에도 갑훈에게 이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것이......”


“중요하지.”


“뭐라?”


“그 몇 되지 않는 똑똑한 놈들 중에 가 문화가 있지? 그 가 문화가 좋은 것을 알려주었다. 허니 우리를 욕하려면 그에 앞서 먼저 그쪽으로 도망친 가 문화를 먼저 욕해야지, 아니면 애초에 받아주질 말던가.”


“.......!”


순간, 갑훈은 이에 격정적으로 반응하면서도 그에 대한 아무런 말도 꺼낼 수가 없었다.


이는 황보력의 신랄할 비판이자 능욕이었다.


어차피 자신들 또한 그런 가후가 아니었다면 이리 나아가지도 못했을 것이니, 청류의 집권과 더불어 황제마저도 제칠 수 있는 방도와 이러한 이상을 향해 나아가는 길을 알려준 그 모든 책임은 가후에게 있다는 소리다.


그리고 그런 가후를 이제와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너희가 감히 충성 운운하며 이쪽을 비판할 자격은 있느냐고 되묻는 것이다.


“그리고 반란군의 수괴인 염충을 가져온 것 또한 그 예시가 잘못되었다.”


거기에 갑훈이 놀랄만한 황보력의 반격은 또 있었다.


“뭣이?”


“염충이 나왔으니 그쪽으로 어디 한번 풀어보자고. 그는 숙부를 이상적인 지도자로 삼았고, 새 나라, 새 시대를 열어젖힐 새 천자로 그를 받들 계획을 세웠다. 뭐, 나도 숙부와 함께 몇 번 그를 만난 적이 있어 그의 야망을 모르는 바는 아니야. 도리어 설렌 적도 있었지. 내가 생각하기로도 이 나라가 썩긴 했었거든. 황실과 중상시 그리고 외척과 탁류는 필경 노골적인 한계점을 가진다. 거기에 외척에 의존하는 청류도 마찬가지야.”


갑훈이 모르는 비사가 밝혀지는 것도 놀라웠지만, 그와 동시에 놀랄 만큼의 통찰과 이해를 보이는 황보력의 모습 또한 가히 대단한 것이었다.


“이를 위해선 기존의 모든 불온하고 불완전한 체제의 개선과 기존의 굳어진 권력구조의 개혁을 넘어서 그와 관계된 모든 것의 혁파를 제시해야만 했다. 허나 이를 위해 그저 막연함에 가까운 숙부의 추대와 모두의 지지를 얻을 수 없는, 소위 일국의 통치가 어떤 것인지조차 이해할 수 없는 량주의 이들을 가져다 반란을 일으켜봤자 그 결말이야 빤한 것이었지. 이를 알기에 나도 또 숙부도 어쩔 수 없이 그에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허, 허면 이를 알고도......”


그러니까 이미 이 당시 황보력 또한 거의 황보숭에 근접한 안목과 사고를 지녔다는 말이 되었다.


“뭐, 당시 조정의 압박에 내몰린 것도 내몰린 것이나 이를 이해 못 한 것은 아니었지. 또한 숙부보다는 내가 더 그에 대한 고심이 깊었지. 고로 나는 염충의 죽음에 많은 것을 느끼며 감정을 주체하지 못했고 량주의 토벌에서 날뛰었다. 그리고 내 손으로 적장의 몸에 칼을 찔러넣어 그 반란을 끝낼 적에도 나는 잊지 않은 것이 있지.”


아니 어쩌면 그런 숙부보다 더 자신이 깊은 이해와 성찰을 지녔다 스스로 고백하고 있었다.


그렇게 황보력은 지난날 숙부인 황보숭과 더불어 농서의 반란을 정리할 적의 기억을 떠올렸다.


‘감히, 네놈이 숙부님을 역적으로 만들려 하느냐?’


‘쿨럭! 네, 네놈은 누구냐?’


‘내 이름은 황보력, 나는 그분의 조카니라.’


‘그렇구나, 허면 네놈이라도 희망을 가져라.’


‘그 무슨 소리더냐?’


‘나라가, 세상이 썩었으니 누군가는 이를 바로 세워야 한다.’


‘감히, 이 역적 놈이 끝까지......!’


‘흐흐흐, 염충! 염충, 네 이놈아! 네가 옳았다, 끄흑! 네가 옳았어, 하하하하하!’


그렇게 자신의 칼을 맞고도 즐거워한 적장 왕국은 이내 자신을 떨쳐내며, 숙부를 보기 위해 성벽 아래로 뛰어내렸다.


‘황보숭! 잘못된 시대를 타고자 잘못된 판단을 내린 이들에게 둘러싸인 나의 주인이여! 나는 모든 것을 내려놓았으니, 어디 가까이서 그 얼굴이나 한 번 보고 죽읍시다!’


‘이, 이놈이 정녕 미쳤나! 크윽, 숙부님!’


여전히 자신의 귓전에 울리는 그 비명소리.


그와 동시에 떨어지는 적장을 향해 내뻗은 그의 손은 결국 그를 잡지 못했다.


이는 황보력을 다시금 그날의 자리, 그날의 그 성벽 위로 불러들이는 듯했다.


뿌드득-


“나는 이를 잊을 수가 없다.”


그렇게 그날의 손으로 주먹을 쥐는 것으로 황보력은 다시금 현실로 돌아왔다.


“황보력.....”


“내가 실상 가후에게 홀린 것도, 그런 그가 날뛰길 바란 것도 그래서였지. 나는 답을 안다. 문제를 알아. 허나 그 답까지의 과정과 이를 해결할 방도를 알지 못했다.”


그날의 성벽 위에는 염충에게 물든 적장 왕국이 있었고, 그런 그가 떨어져 내린 자리에는 자신의 숙부와 가후가 있었다.


“가후라, 결국 네놈도 염충에게 홀린 것이더냐?”


“허면, 그 당시에 홀리지 않은 이가 누가 있으랴? 지금의 너도 그런 염충을 이해하고 있지 않더냐?”


“그건......”


“홀린 게 아니야. 그건 나중의 문제다. 그전에 우리 모두가 아는 것은 이 나라가 썩었다는 것이지.”


쿠웅-


황보력이 한 차례 발을 굴렀으나 그 파동은 가히 갑훈을 비롯해 대전에 자리한 모두를 전율하게 만드는 것 같았다.


“그래서 이를 바로 잡기 위한 것뿐만이 아니라, 그리 썩은 세상으로의 회귀조차 허락지 않으려고 한다.”


“황보력.....”


“지금이 아니면 우리는 다시금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그러니까 더는 나를, 아니 우리를 막지 마.”


어느덧 갑훈의 눈엔 복잡한 심경이 뒤섞여 있었고, 그런 갑훈을 내려다보는 황보숭의 목소리는 더더욱 복잡한 심경이 담겨 있었다.


저벅저벅-


“나는 미몽에서 깨어났다. 깨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흔들리고 더 불안정하지만, 그렇기에 그간 흐릿하던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을 더 또렷이, 오롯이 보며 그 하나를 위해 똑바로 걸음을 내딛으려 한다.”


그렇게 갑훈도 모자라 좌우로 도열한 수많은 대소신료들을 뒤로한 채, 무거운 걸음을 내딛는 황보력은 짙은 여운을 남기며 대전을 빠져나갔다.


“오늘의 조회는 파한다.”


쿠웅-


그렇게 황궁의 문이 닫혔다.


모두가 흩어져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고, 거진 축객령마냥 내쫓긴 갑훈은 닫혀진 황궁 문에 등을 기댄 채, 그 머리를 부여잡으며 힘없이 주저앉아 고개를 떨궜다.


“미몽에서 깨어난 너는 우리 모두의 현실을 앗아갈 괴물이 되었구나. 이상을 위해선 현실을 희생해야 한다. 그 모든 것을 제물로 바쳐도 모자라단 말이다, 이 미련한 것아.”


“경조윤?”


“끄흑......, 내가 잘못 이해하고 있었다. 네놈들을......, 너희를, 끄흐흐흑!”


“아니, 설마 지금 우시오?”


그렇게 볼일이 다 끝날 때까지 자신을 기다린 양봉의 앞에서 갑훈은 소리 없이 흐느꼈다.


* * *


쪼르륵-


“이상이 현실을 앗아가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 법이지요. 이는 마치 차디찬 겨울날의 한파를 아무것도 없이 견디는 것과 같습니다.”


“예?”


그렇게 궁 밖을 나온 갑훈이 주저앉아 흐느낄 즈음하여, 자신의 잔을 채우고 있는 풍방은 포홍이 내린 명령을 되짚어보며 찰나의 감상에 취해 있었다.


“신탁통치라고 자신들이 직접 황제의 권력을 가져왔으니 그에 대한 책임도 따르게 된 셈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가 좋지 않으면 이는 결국 자신들의 무능으로 비춰질 수밖에 없지요.”


“하하하, 그게 이 자리와 무슨......”


그리고 그런 그의 앞에는 수십 명이 넘는 이름난 상방의 대변자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허나, 그 무능과 상관없이 이리 이 사람을 찾은 사례의 여러분들 결국 이 사람에게 쌀을 팔러 오신 것 아닙니까?”


“아이고, 어디 쌀 뿐이겠습니까? 문방사우나 족자를 비롯해 죽간과 목함이라던지, 독과 그릇을 비롯한 도자기라던지, 청동으로 만들어진 제기, 향로, 술잔에 무구나 장신구, 옥으로 만든 장신구와 귀품들을 비롯해 단사나 약재서부터 그냥 돈이 되는 거면 뭐든 서역과의 교역을 통해......”


“송구하지만 초도 물량은 없습니다. 장안조차 이를 소비하기에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런 그들을 앞에 앉혀두고서도 풍방은 이내 아쉽다는 얼굴로 가벼운 거절의 태도를 취했다.


“예? 아니, 그게 무슨......”


“어쩔 수 없습니다. 그만큼 옹주에 자리하고 계신 분들의 수가 많고 그분들의 부유함이 가히 끝도 없으니 말이지요. 거기다 귀품들만을 들여온 것도 아니라서 그 희소가치가 더더욱 올라갑니다.”


“상관없소! 얼마가 되었든 상관없으니 우리에게도 그 물량을 좀 내어주시오!”


“허나 이쪽 또한 그만한 양해를 받으려면 서역의 귀품을 대신할 사례를 해야 합니다. 그들의 손에 다른 것을 쥐여줘야 그만한 물량을 빼 올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여전한 태도를 고수하는 풍방의 모습에 이럴 줄 알았다는 듯, 상방의 대변자들은 그 품에서 각기 오수전이 담긴 주머니와 자루들을 꺼내놓기 시작했다.


작가의말

대동과 관련해서는 다음화에 한번 더 다뤄보도록 하겠습니다.


이게 짧게 나오느라 다 다루지 못한 부분이 있는데;; 예기 예운편에 나오는 제일 중한 부분을 빠트린 것 같아서 그렇습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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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4

  • 작성자
    Lv.99 겨울벚꽃
    작성일
    20.10.15 13:16
    No. 1

    재밌게보고 갑니다
    연의엔 언급도 거의없고 정사에서도 짤막하게 나온 인물들로 생생하게 글 풀어내시니 재밌네요

    그럼 건필하세요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35 필성필성필
    작성일
    20.10.15 14:12
    No. 2

    응원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더 노력하겠습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39 알카시르
    작성일
    20.10.16 00:17
    No. 3

    처음에 황제가 무슨 말을 하려 한 것일까요... 설마 도성으로 군대를 데려와 황보력과 주준을 위시한 역적 청류를 토벌하라고 명하고 싶었을까요... ㅎㄷㄷ

    신탁통치가 황제의 재가가 아닌 태후의 재가를 받은 것이므로 무효란 말은 어폐가 있지 않나요? 당시 태후가 황제를 대신해 보정을 맡았으니 태후의 재가도 황제의 재가와 동등한 효력이 있다고 봐야 맞을 것 같네요.

    설마 량주에 아직도 법가의 학맥이 남아서 갑훈이 법가를 배웠을 린 없고, 그냥 옛날에 유대인이나 빨갱이가 나쁜 놈의 대명사였던 것처럼 이 시대엔 나쁜 놈은 무조건 법가로 모는 행태가 흔했을까요?

    황보숭은 너무 충성심이 강해서 염충의 제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작가님께선 그저 승산이 없다 여겨서 황보숭이 거절한 것으로 설정하셨나 보군요. 그렇다면 만약 황보숭이 암살 시도를 무사히 넘겼다면 정말로 찬탈을 했을지도 모르겠네요.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35 필성필성필
    작성일
    20.10.16 02:34
    No. 4

    황제(소제)는 포홍을 찾았던 것이지요. 일찍이 몇 분이? 댓글로 예측하셨던 것처럼 포홍이 승전과 더불어 낙양으로 입성해 자신을 찾을 줄 알았던 겁니다. 죽은 영제의 유언도 있고 일종의 구원?을 바란 것인데, 관련 이야기는 스포이니 글에서 풀도록 하겠습니다.

    어폐가 당연히 있긴 합니다만, 또 본문 속에도 들어가 있긴 합니다만 당대에 한하여 그것도 당시 하태후에게 양보를 받아낸 것에 불과합니다. 국법이나 황제의 엄령이 서리다 못해 옥새를 찍어 황명으로 빼박 처리하세요.는 아닌 부분이었지요.

    다만, 언급해주신대로 이미 한 차례 황권이 태후에게 이양되었기에 황제의 권력을 가져왔다는 해석도 가능하지만, 갑훈의 입장에서 이는 말장난이자 자신과 반대되는 입장이니 그 반대로 말을 하는 거지요.

    그리고 다음은 법가인데, 량주에 법가의 학맥이 남았다기 보단, 제자백가 중에 밀려난 이들이 피해를 보는 경우도 많고 또 변방의 이들이 현실론에 적용되어 법가나 병가를 지향? 하거나 접할 기회가 나름 많았던 또 그들의 사고방식에 걸맞았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생존을 위한 발버둥, 통제, 집단, 전쟁 등이 특화되어 그런 느낌입니다.

    잡가나 음양가야 다른 방식으로 민간에 스며들어 사장되면서도 길게 살아남은 걸로 아는데 이도 정확히는 모르겠습니다.

    뭐 이를 대변할 인물이야 거의 몇 되지 않지만, 도가가 길게 살아남은 것마냥 민간에서 계속 전승된 느낌도 있는 것 같아서요.

    다시 돌아와서 법가에 대한 이해도 이런 식으로 해석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겁니다. 유가에 의해 밀려났으나 민간에 나름 전파되고 은연중에 인기가 있었으며 그 서적들도 나름 유자들임에도 이를 지향하거나 기억하고 배운 경험이 있는 이들도 꽤 남아있었던 것 정도?

    다음화 소설 본문에서도 아마 이러한 내용이 담겨져 나올 듯 싶습니다. 그러니까 매도를 해도 얼추 합당한 이유나 나름의 배경이 있는 매도가 되겠네요.

    그리고 황보숭에 대한 내용은 충심이 강하다는 것도 맞습니다. 다만, 제가 지난 화의 댓글에서 칼부림의 정충신을 언급한 적이 있는데 그와 비슷한 느낌이라 봐주셔도 괜찮습니다.

    머리 속으로 사리에 대한 판별이 스는 충신이라는 거죠. 무조건적인 맹복이라기보단 충신이란 타이틀에 대한 집착이 강한 것. 본문에서도 이와 같은 내용이 담겨있긴 합니다.

    그리고 황보숭이 나중에 진정 찬탈을 자의로 꿈꿨을지는 제가 거기까지 시나리오를 쓰지 않아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아마 그때까지 가후가 곁에 있었으면 억지로라도 찬탈 시켰을 것 같네요;;

    억지로라도 천자의 위에 앉게 만들었을 것 같기도 합니다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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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 내가 죽어 소금에 절여지기까지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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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 153화 – 대동에서 비롯된 고목을 위한 날개 +3 20.10.26 1,242 27 21쪽
153 152화 – 대추노노(帶推老奴), 그렇지 않다 +7 20.10.23 1,235 25 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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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 149화 – 한파의 전조(2) +4 20.10.20 1,225 26 22쪽
149 148화 – 한파의 전조(1) +2 20.10.19 1,219 25 20쪽
148 147화 – 이상과 환상의 폭주(3) +7 20.10.18 1,212 28 18쪽
147 146화 – 이상과 환상의 폭주(2) +10 20.10.17 1,235 26 19쪽
146 145화 – 이상과 환상의 폭주(1) +5 20.10.16 1,296 22 21쪽
» 144화 – 이제 한파가 들이닥칠 겁니다(3) +4 20.10.15 1,265 25 20쪽
144 143화 – 이제 한파가 들이닥칠 겁니다(2) +6 20.10.14 1,265 25 18쪽
143 142화 – 이제 한파가 들이닥칠 겁니다(1) +6 20.10.13 1,253 25 17쪽
142 141화 – 서원군을 지우겠습니다, 장인 +6 20.10.12 1,269 25 16쪽
141 140화 – 무역로의 분쟁은 비단 전쟁을 부른다(3) +2 20.10.10 1,221 25 16쪽
140 139화 – 무역로의 분쟁은 비단 전쟁을 부른다(2) +6 20.10.09 1,217 23 20쪽
139 138화 – 무역로의 분쟁은 비단 전쟁을 부른다(1) +5 20.10.08 1,229 26 17쪽
138 137화 – 서방 원정의 성공과 포홍이 구상하는 것 그리고 +7 20.10.07 1,252 23 17쪽
137 136화 – 회자(會者)는 모든 것을 쥐고 익숙한 곳을 향해 돌아온다 +8 20.10.06 1,219 27 22쪽
136 135화 – 거자(去者)는 모든 것을 훌훌 털어버리고 새로운 곳을 향해 떠난다 +22 20.10.05 1,222 25 19쪽
135 134화 – 죽은 이들의 망령 속에 살아가는 이들의 끝은 이미 예견된 것 +6 20.09.30 1,180 24 22쪽
134 133화 - 천하의 정세가 너의 죽음을 바라지 않는다 +6 20.09.29 1,206 23 23쪽
133 132화 – 거짓된 백성의 왕을 살려둔 이유 +6 20.09.28 1,203 20 19쪽
132 131화 – 생존을 위한 선택 +5 20.09.25 1,218 20 17쪽
131 130화 – 가히 왕이로구나, 칭왕의 죄를 물을 수가 없다 +11 20.09.24 1,239 22 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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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 123화 – 위에서 가장 강한 군대, 밑에서 가장 강한 도적(1) +10 20.09.15 1,288 21 18쪽
123 122화 – 서쪽 끝의 이야기 +10 20.09.14 1,283 24 18쪽
122 121화 – 그 공을 굴리는 자가 바라보는 곳 +4 20.09.11 1,278 29 16쪽
121 120화 – 장연이 쏘아 올린 흑산적이란 이름의 공 +6 20.09.10 1,256 26 18쪽
120 119화 – 블랙 마운틴 밴딧 인베이전(3) +6 20.09.09 1,250 30 20쪽
119 118화 – 블랙 마운틴 밴딧 인베이전(2) +8 20.09.08 1,305 26 22쪽
118 117화 – 블랙 마운틴 밴딧 인베이전(1) +11 20.09.07 1,334 25 20쪽
117 116화 – 판이 커지면 새로운 참가자가 등장하기 마련이다(2) +4 20.09.06 1,368 27 21쪽
116 115화 – 판이 커지면 새로운 참가자가 등장하기 마련이다(1) +8 20.09.05 1,347 29 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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