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화 – 이상과 환상의 폭주(2)
“나 원, 참. 갑자기 맹자라니.”
스승과의 해후는 실로 부간에게 많은 부담을 안겨주었다.
황궁을 나온 스승은 황보력을 비롯한 청류의 이들에게 핍박받는 황제를 구하겠다는 명분을 내세웠으나 그 이전에 저들이 내세운 공자의 이상을 깨야 한다며 그와 대비되는 이를 내세우길 원했으니, 결국 공자와 그 이름을 나란히 하는 맹자가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아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지.”
맹자는 현실에 기반한 이야기를 주류로 삼았고 이는 과격한 부분을 내포하고 있을 정도로 기존의 이들과 다른 방향성을 제시했다.
특히나 그 무엇보다 역사 속에 가장 많이 등장하게 되는 역성혁명론은 가히 지도자를 바꾼다는 점에서 공자의 대동사회와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지만, 보다 확실하게 공자가 내세운 대동사회의 문제점을 찍어누른 점에서만큼은 이보다 더 높은 평가를 받는다.
“군주의 정당성은 백성에게 있다.”
사실 이 또한 달리 본다면 공자의 대동과 같은 명분론을 벗어나지 못한다고 말할 테지만, 백성에게 잘하지 못하면 대놓고 갈아엎어도 된다는 전제가 깔려있다는 점이 가장 큰 차이였다.
공자의 대동 사회의 경우 애초에 가려 뽑는다는 전제가 깔려 있는 반면, 맹자는 그 전제조차 두지 않은 격이니 도리어 이것이 어그러진 이상이 현실에 강림하여 그릇되게 이용되는 경우 자체를 수습할 수 있는 여지마저 남겨둔 셈이다.
덜그럭- 덜그럭-
“아직 멀었느냐?”
“후우, 뭔 놈의 강론을 준비도 없이 하려고 하십니까?”
“머릿속에 든 것만 읊어도 된다. 애초에 내가 뭐 대단한 사인도 아니고 변방 촌구석에 그나마 뚝심 조금 있는 것이 다니니 밑천을 보여도 그 솔직함을 무기로 삼을 것이라.”
“때론, 그 솔직함이 무능으로 비춰질 테지요. 암만, 맹자가 현실에 기반된 사상을 펼쳤어도 딱 하나 거슬리는 것이 있습니다.”
“거슬리는 것?”
덜컥-
“찾았다!”
그렇게 필사된 서책들을 뒤지던 부간은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의 내용이 적힌 중용의 일부가 적혀있는 성선설의 내용이 담긴 서책 하나를 꺼내 들었다.
“만물의 일체는 도와 같고 도는 태생에 뿌리와 같으니, 이는 곧 선의가 모든 것의 뿌리라고 봐도 되는 것이겠지요?”
“이제는 도가적 해석마저 곁들이려 함이냐?”
“난국이라도 경연은 지속되고 있습니다. 그 사이에 유자들의 교류와 담론을 넘어선 강론의 자리는 자발적으로도 만들어지곤 하지요. 최소한도 약점이 잡힐 부분에서 밀리면 아니 됩니다.”
“도성의 유자들도 어지간히 할 일이 없나 보구나.”
“주로 변방 출신의 유자들은 스승님처럼 법가나 병가에 관심을 보이곤 합니다. 현실이 힘드니 맹자의 사상에 물들기도 하고 어쩌면 저희가 이해한 염충 또한 그러한 맹자의 역성혁명을 꿈꿔왔는지도 모르지요.”
“그러나 도성의 이들은 다르다?”
“예, 할 일도 적고 보통은 호기심을 비롯해 유가의 우수성과 정당성을 증명하기 위해 다른 학문을 곁다리로 배운 뒤, 이와 관련한 문제를 지적하며 이를 유학의 우수성으로 풀어내려는 경우가 있으나 의외로 그에 감화되어 그 방향을 틀거나 반대로 그 모든 학문을 유학으로 흡수하려는 움직임이 있습니다. 아니면 주로 주석을 단 해설의 문집을 쓰거나 관련 내용을 다른 방식으로 풀어내는데, 뭐가 되었든 이게 골치가 아픕니다.”
“학문의 중첩은 더 많은 갈래를 낳는다. 사고는 넓어지고 지식의 수준은 높아지며 논제는 조밀해지고 이는 깊은 통찰을 통해 더 심오한 지성과 더 거대한 사상을 낳는 게지. 그러나 그 중심은 항상 유학이다.”
갑훈의 말은 작금의 시대를 반증하고 있었다.
“예, 그래서 저희가 법가나 병가의 이들을 비롯한 다른 제자백가를 먼저 꺼내지 않는 이유기도 하지요. 누가 뭐래도 이는 세간에 사장된 학문이며, 작금의 우리가 선 이 땅은 유학을 하늘로 떠받들고 사는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불해도, 이사도, 한비도, 상앙도 입에 담지 않은 게지.”
“하지만 신도(慎到)는 언급지 않으셨습니다.”
“신도는 금기야. 도가와 법가의 혼용성을 지닌 그는 세속에 정착한 유학과 같은 맥락의 방향을 제시했다. 그러나 유가와 같은 부작용도 적지. 신도의 도법(道法)은 유학의 대안이다. 자신들을 대체할 사상을 그들이 과연 허락하기나 할까?”
“신도의 사상은 현실적이었습니다. 유가의 사농공상과 같은 계급과 군주와 신하를 일컬음이지요. 그 계급이 도리어 위엄과 위신의 구분을 낳고 그 덕에 천하가 안정된다고 보았습니다. 아무리 높이 있다 한들, 자신의 아래에 자리한 미천한 이들의 일에 관여하면 그 위신이 떨어지기 때문에 함부로 관여할 수 없고, 그 아래 자리한 이들은 이미 나고 자라면서부터 자신들의 위에 누군가 자리하고 있음을 깨닫게 되기 때문에, 이를 뛰어넘을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자들 외에 크나큰 변동이 없이 세상이 유지되며 안정된다 하였습니다.”
“옳거니, 네가 말을 잘 하였구나. 허나 이는 우리의 몫이 아니다.”
“우리의 몫이 아니라 하심은?”
스윽-
제자인 부간의 앞에 미소를 띠운 갑훈은 이내 손을 들어 서쪽을 가리켰다.
“네 사형의 몫이다.”
“사형? 아!”
그렇게 갑훈이 말하는 바를 깨달은 부간은 그 자리에서 뭔가 익숙하면서도 어색한 이름을 불렀다.
“포 사형!”
“그렇지, 포 사형이긴 하지. 하하하! 하지만 포홍이 이를 듣고 웃겠구나.”
“지금 당장 서찰을 쓰겠습니다.”
“좋을 대로, 어차피 네 사형이 바라는 것도 이와 같을 게다.”
“저희가 맹자의 사상으로 저들과 맞서는 것 말입니까?”
“우리는 우리의 목표를 위해 이러는 것이지만 최소한도 그놈에게는 시간 벌이라는 목적만 충족되어도 상관이 없는 일이니까.”
갑훈은 풍방을 떠올렸다.
그러나 그 찰나에 눈치를 채었는지 제자인 부간이 그에 관심을 보였다.
“설마, 제가 모르는 무언가가 또 있습니까?”
“궁금해하지도 말고 설사 알았다고 한들, 티를 내지 말아야 한다. 어차피 우리는 이 사례 내에서 우리의 이상을 위해 노력하면 그만이니까.”
“허면 그와 관련된 귀띔이나 암시라도 알려주십시오. 뭐라도 알아야 추론을 할 것이 아닙니까?”
“지금 이 사례엔 이상만 자리한 것이 아니다.”
“예?”
“누군가는 환상을 팔고 있지.”
“.......!”
부간의 움찔함에 가벼이 어깨를 두들겨준 그는 제자가 챙긴 서책과 함께 자리를 털고 일어나 밖을 나섰다.
이에 다급히 부간 또한 그 뒤를 쫓았고 그들의 행보는 담론과 강론이 벌어지는 학당들과 경연이 벌어지는 태학 등에서 초빙된 자리였다.
그리고 그 속에서 갑훈은 조금씩 자신의 사고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작금의 이 나라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그 끝이 과연 어디로 향하게 되는지 말이다.
* * *
“그러니까, 지금 갑훈이 서책을 끼고 제자와 더불어 학행을 벌이는 중이란 말입니까?”
“예, 이미 크고 작은 학당들은 물론, 태학 내에 속한 이들 사이에서도 이에 술렁임을 보이고 있고 나름의 관심도 보이고 있는 모양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갑훈의 소식은 그 누구보다 빨리 풍방의 귀에 들어가게 되었다.
더 이상은 사절과 같은 모양새가 필요치 않으니 최소한의 호위만 붙여놓은 양봉이 곧바로 병사들과 함께 돌아와 이를 알렸던 것이다.
“재미있군요, 그리 싫은 티를 내던 주제에 막상 궁에서 나오자마자 저리 나오다니.”
“저 그보다도, 경조윤이 궁을 나오자마자 눈물을 보였습니다.”
“눈물?”
“예, 내가 너희를 잘못 이해하고 있었다면서......”
그리고 그와 동시에 풍방의 눈이 조금은 징그러운 모습으로 빙그르르 한 바퀴를 돌았다.
“주, 중군 교위 어른?”
“눈물이라, 눈물? 북지의 강족들을 상대로 철벽의 모습을 내보인 그가, 눈물?”
그렇게 다시 한번 풍방의 눈동자가 반 바퀴를 돌았다.
“필경 그만한 연유가 있는 게야. 하긴, 그래야 지금의 저 모습이 설명이 되겠지.”
콰앙-
그렇게 책상을 때리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선 풍방이 성큼성큼 전각을 벗어났다.
이에 그런 그의 곁에 수십에 달하는 문사들과 관리들이 따라붙었고, 부랴부랴 양봉 또한 그 곁에 붙어 어떻게든 말을 이으려 하였으나 풍방은 그보다 더 급한 볼일이 있는 듯 보였다.
“저......”
“미안하지만 나 대신, 옹주로 넘어가서 수레와 달구지 좀 수매해오세요.”
“예? 아니, 지금 가져오신 양도 엄청난 마당인데 말입니까?”
“필경, 연유가 있어요. 그가 저리 나왔다는 건 보통 작은 사고를 치겠다는 소리가 아닙니다. 하지만, 우후훗. 그 덕에 이쪽의 운신의 폭이 넓어졌으니 이 기회를 놓칠 수야 없지요.”
펄럭-
“이 순간부로 그대들은 기존의 우리가 수매하기로 마음먹은 양의 두 배를 계산합니다. 우선은 미곡부터 시작하세요!”
바람을 일으키듯 소매를 펄럭인 풍방의 손짓에 그런 그를 보좌하던 수십 명의 이들이 제각기 주판을 비롯해 죽간과 서책 그리고 작은 붓을 꺼내 들며 바쁜 손놀림을 보이기 시작했다.
사방에서 타닥이는 소리와 함께 주판알이 오르내리고 있었고, 그 와중에 슥슥 소리를 내며 빈 공간이 그득한 죽간과 서책의 빈자리가 빠르게 채워지고 있었다.
“이, 이게.....”
“상방 영(英)에서 기장과 보리, 그리고 수수가 각 8천 석!”
“상방 상(商)에서 단일 백미가 2만 5천 석!”
“상방 유(類)에서 맥곡을 포함한 모든 하곡이 사만 사천 석!”
“인근의 영세 상인들과 전답을 기준으로 추수된 작물을 직접 사들이는 양까지 따진다면 추가로 팔만 섬. 아니, 많게는 십만 섬도 가능합니다.”
이 말도 아니 되는 산법의 계산과 결과를 눈앞에서 지켜보는 양봉은 가히 그 눈을 껌뻑이며 이에 제대도 된 반응조차 보이질 못했다.
“백미를 포함한 미곡은 못해도 5만 섬을 채워야겠습니다. 맥곡과 잡곡을 포함한 하곡은 모두 합쳐 20만 석은 나와야 합니다.”
“허면, 이게 1차분입니까?”
“예, 이 상태로 세 차례를 더 수매할 겁니다.”
“다들 미쳤군, 팔십만 석을 저리 아무렇지 않게 논하다니. 하, 제기랄! 이게 진짜 말이 되는 소리야?”
정녕, 이게 정녕 꿈이 아니라 현실이긴 한가?
세상을 자본으로 보는 이들은 군량 일만 석에도 휘청이는 자신과는 애당초 그 궤를 달리하고 있었다.
“하오나 그리되면 지출이 너무 커집니다.”
“서역에서 가져온 오만스러운 잡것들, 그 모든 귀하고 천한 것들이 모두 다 ‘서역에서 넘어온 것들’이라는 번지르르한 치장을 달고 있습니다. 첫 장사의 이율은 원가의 스무 배를 붙여도 모자란 데, 감히 지금 내 앞에서 그따위 소리를 합니까?”
그러나 그러한 양봉의 자조적인 비아냥조차 작금의 사안을 논하는 이들에겐 들리지 않는 듯 보였다.
“허영과 포장을 더하겠습니다. 더 많은 이들에게 더 적은 물량을 찢어 공급하겠습니다.”
“좋아요, 바로 그런 자셉니다. 덤벼드는 놈, 매달리는 놈 모조리 물어다가 그 코를 꿰십시오. 부모건 자식이건 선산이건 모조리 담보로 잡아도 좋으니까, 안되면 모조리 노예로 팔아버려도 좋으니까 최대한 부풀려 파십시오. 내가 제시한 것 이상으로, 그보다 더한 이득을 봐도 좋으니까 어떻게든 그 안에 헛된 망상과 환상을 집어넣어서라도 팔아치우십시오.”
“서역에도 약재와 단사가 있지요. 부적과 제기가 있으며 진사와 비슷한 광물과 염료가 있으니 당장에 인근의 의방과 음양사들을 통해 수익을 내겠습니다.”
“좋습니다, 좋아요. 다음은 대완마를 비롯해 하서주랑을 넘어온 가축들입니까?”
“소금과 비단도 있습니다! 이는 어찌합니까?”
“모조리 수매하세요. 특히 소금은 초도 수급 물량을 넘어서면 네 배, 비단은 제값의 여섯 배까지 쳐줘도 상관없습니다. 모자라면 더 요청하세요. 옹주의 재화는 사례를 사고도 마르지 않습니다.”
이미 풍방은 당연하고도 익숙한 것인 양 슬쩍 손을 들어 보이며 그 결과를 듣고 잠시 고심하다 더 나은 개선점과 목표를 이들에게 제시해주었다.
“이미 옹주몽의 이전에 천하각지에서 몰려든 유민들도 모자라 이제는 지난 도적들의 난을 피해 하동을 거쳐 넘어오는 이들까지 생겨났습니다. 아무리 정국거가 자리한 관중 평원이 대풍이 든다고 해도 매해 풍작이 나지 않는 이상, 그 모든 유민들 전부를 먹여 살리지는 못합니다. 거기에 십만 가까이 불어난 군병들을 먹여 살릴 식량은 더 급하며 그와 같이 소비되는 생필품과 소모품을 감내해야 합니다. 이를 위한 지출이고, 그 지출을 뛰어넘기 위한 수익을 우리가 만들어내야 합니다.”
그 모습은 가히 군계일학을 넘어선 일봉(一峯)과도 같으니, 어느덧 양봉은 자신보다 키가 작은 그를 실로 거인처럼 우러러보고 있었다.
“양 두령, 안 가고 계속 여기 있을 겁니까?”
“예? 가, 갑니다!”
그렇게 날이 선 모습을 보이는 풍방의 따가운 눈초리에 다급히 자리를 떠나는 양봉이었으나, 그럼에도 그의 얼굴엔 가히 웃음이 떠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나의 선택은 틀리지 않았다. 험산에서 도적으로 썩느니 이리 어른을 모시고, 드높이 날아오르겠다.”
푸르르릉-
“가자, 애들아! 사례의 모든 것을 실어 나를 수레와 달구지를 가져오자꾸나! 와하하하!”
두두두두-
사람의 선택이 이래서 중한 것이다.
자신의 눈으로 확인한 결과가 선사한 감동은 가히 일금이 천금과 같으니 말이다.
* * *
“하지만 그 반대라면 이는 당연히 문제가 되겠지.”
콰앙-
“대체 사례 땅에 그 많은 오수전이 뿌려질 때까지 다들 뭘 한 게야!”
모두가 자리한 자리에서 책상이 부서질 정도로 강하게 주먹을 내리친 이는 당연히 황보력이었다.
뒤집혀도 아주 제대로 뒤집혔다.
반대도, 가히 이런 반대가 없었다.
이 시대에 어울리지 않을 표현일지는 몰라도 애당초 저 옹주의 이들을 엿 먹이기 위해 내어놓았던 계획은 예상과는 달리 정반대의 결과물을 내어놓고 있었다.
“정궁, 유홍!”
그렇기에 황보력은 서역도호부의 성공 직후, 이번 계획을 세운 당사자들을 호명할 수밖에 없었다.
작금의 조당에 가장 중한 위치 중 하나인 상서령과 시중을 맞고 있으면서 원 역사에서는 사공과 사도를 연임했던 인물인 이들은, 예상보다도 훨씬 빠른 서역도호부의 성공에 발맞춰 다급히 그에 대한 수혜를 보기 위한 오수전을 찍어낼 것을 건의했고 그 부작용으로 쌓이기 시작한 불량 화폐의 처분을 고심하다 이를 떠넘길 계획을 상신했던 것이다.
물론, 그 책임은 이를 수락한 황보력에게도 있었다.
허나 그가 이를 수락한 것은, 애초에 감수할 위협은 모조리 저들에게 떠넘기고 그 대신 온전한 수익을 모두 이쪽으로 가져올 수 있다는 그 불공평한 등가교환의 매력이자 이점으로 자리매김했었기 때문이었다.
그럴듯한 계획은 환치(換置)의 운용과 묘리를 담고 있었고, 이는 마치 암중에서 상대를 잠식해 들어가는 독수와 같았으니 곧바로 저들이 이를 눈치챌 수는 없으리라 여겼다.
거기에 가히 인질이나 다름없는 가족들도 모자라 삶의 터전까지 사례인 이들이 그 사례의 주인인 자신들을 감히 거스를 순 없는 일이었기에, 무슨 일이 있어도 사례 땅엔 그 어떠한 피해도 오지 않으리라 여겼다.
“한데, 왜! 어째서 왜! 이 땅에 저 빌어먹을 악화(惡貨)가 먼저 풀렸냐는 말이야!”
“그, 그것이......”
“말해!”
“저, 전임 대사농 풍방이 직접 상방의 이들을 상대했다 합니다. 거기에 이미 옹주에 오수전이 넘쳐흘러 유민들에게도 곡식이 아닌 오수전을 쥐어 주는 형국이라 동전은 받을 수 없다고, 해서 더는 상계의 이들 뿐 아니라 민간에도 화폐를 풀어야 한다고, 지금 옹주는 그리하고 있으니 사례 또한 그리 해야 한다고......”
웅성웅성-
그리고 관련된 보고를 받는 조당의 이들은 이에 예상치 못한 충격을 받은 모습이었다.
“뭐? 동전이 넘쳐흘러? 이 사례조차 그러지 못한 마당이거늘, 옹주는 벌써 이를 넘어섰다는 게냐?”
“그 가치가 떨어지는 불량 화폐, 저질화폐만 아니라면 민간에 화폐가 널리 보급된다는 소리는 도리어 단점보다 장점이 더 많다는 뜻이옵니다!”
“그렇사옵니다, 본시 화폐라는 건 미곡과 철, 쌀 그리고 소금과도 같은 세수와 공물에 쓰이는 필수불가결의 물자의 불편함을 뛰어넘으려는 노력이자 효용성에서 출발한 것으로서 그 보관과 이송 그리고 계산이 용이한 것이 장점이옵니다.”
특히나 마치 상대를 비웃기라도 하듯 사례와의 격차를 아득히 벌려버린 옹주의 상황은 그 어떠한 부작용도 없이 착실한 발전을 이루어나가고 있었으니, 사례의 이들 또한 이러한 문제에 하나둘 현실을 직시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알아도 너무나 늦게 이를 알아챈 것이 문제였다.
콰앙-
“사도, 사도!”
“무슨 일이야!”
“승상부에서 급보이옵니다!”
“승상부?”
다급히 전각의 문을 열어젖히며 안으로 들어와 바닥에 엎드려 소식을 전하는 관료의 모양새가 가히 심상치 않았다.
“예! 민호와 제사, 그리고 누에치기를 관리하는 호조는(戶曹) 물론이고, 상소문을 관리하는 주조(奏曹), 소송에 관한 사무를 주관하는 사조(辭曹), 군졸과 물자 운반의 업무를 도맡은 위조(尉曹), 거기에 화폐와 소금 그리고 철의 관리를 맡은 금조(金曹)는 물론, 창고에 보관된 곡식과 물자를 관장하는 창조(倉曹)에 관련 사무와 모든 서류를 관장하는 황합주부(黃閤主簿)까지 다들 난리가 아니 옵니다!”
이미 반쯤 넋이 나간 채, 식은땀을 흘리며 소식을 전하는 그는 이미 부들부들 떨다 못해 더 이상은 무리라는 듯 절규에 가까울 보고를 올리고 있었다.
“사도, 서역도호부! 이를 재고해주십시오! 무슨 일이 있어도 이를 수습해주십시오! 저희는 아직 준비가 아니 되었습니다! 실로 이런 말씀을 드려 송구하오나, 작금의 이 사례가 지금 미쳐 돌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황보력에게는 아직도 현실로 와닿지가 않았다.
“승상부는 말 그대로 한 나라의 모든 살림을 책임지는 승상이 속한 곳이다.”
“사도! 이러다 다 죽습니다!”
“거진 그 나라의 바탕이 되는 모든 행정사무를 관장하는 곳이란 말이다!”
“서역에서 들어온 물품과 끝도 없이 쌓이는 오수전 외에 남은 것이 없습니다!”
“뭐라고?”
“비단과 같은 사치품은 물론, 식량을 포함한 모든 물자가 모조리 사라지고 있단 말입니다-!”
한데, 그런 승상부가 가히 이번 일에서만큼은 백기를 들고야 말았다.
Comment '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