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화 – 죽은 이들의 망령 속에 살아가는 이들의 끝은 이미 예견된 것
“낭중령! 아니, 가 문화! 가문화아아아아-!”
순간, 물가에 홀로 남겨진 채, 사라진 제 부모를 찾는 어린아이가 된 심정으로 스스로가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 무기력을 느낀 황보력은 알게 모를 공포와 두려움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대전이 떠나가라 그 목청이 찢어지게 소리를 치는 그는 그토록 자신이 은연중에 바라고 있었던 가후의 자리를 비워내는 것에는 성공하였으나, 도리어 그것이 이 난세에 턱하니 던져진 채, 홀로서기를 해야 하는 자신에 대한 막연하고 무거운 먹구름이자 압박감이 될 줄은 꿈에도 예상을 못했다.
“내가 버려졌다고? 감히, 저 빌어먹을 놈에게 내가 버려져?”
하지만 그 감정은 곧 이내 곧 버림받게 된 것에 대한 분노로 뒤바뀌어 있었다.
어떻게 보면 자신이 자초한 일이나 그 반대로 그간 함께해온 세월 대비 모든 것을 그리 스스럼없이 등질 정도로 차디찬 모습을 보이는 그의 외면은 가히 죽은 숙부를 비롯한 자신을 무시한 이기적인 처사였다.
“나는 아해가 아니야! 그것도 네놈이 알려준 대로! 네놈이 가르쳐준 방도대로 살아가야만 하는 어린 것이 아니란 말이야!”
부웅- 부웅-
아무도 없는 공간에 헛짓거리와 다름없을 발길질과 주먹질을 날리다 못해 저 홀로 자빠지고 구르며 병신마냥 발광을 벌인 것도 한 차례.
“허억......, 네놈은 감히 이리 나오면 안 되었어! 나 황보력을 무시해선 아니 되는 거였어! 처음엔 그저 알아서 처신을 잘하는 듯하여 살려주려 했더니 감히 멋대로 나를 등지고, 그 관계를 끊어? 내 명을 거부해? 감히 이 땅에 자리한 모두를 이끌어갈 구세주나 다름없는 이 유일무이한 사도를 앞에 두고 이리 나와?”
다시금 비틀대며 바닥을 기어올라 자신이 앉을 사도의 상좌에 겨우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거친 숨을 몰아쉬는 그는 이내 곧바로 자신의 가장 든든한 조력자로 탈바꿈한 대장군 주준을 대전으로 불러들였다.
저벅저벅-
“주 장군. 아니, 주 대장군!”
그렇게 대전의 문을 열고 들어온 그는 지난날 하진에 비견될 화려한 갑주를 걸치고 있었다.
물론, 하진만한 덩치는 아니었으나 노인에 다다른 것 치고는 그 체구가 보통이 아닌 것은 물론, 새하얀 머리칼과 수염은 가히 장수를 뛰어넘어 현기가 느껴지는 묘한 기운을 갈무리한 듯 보였다.
“어인 부름이시옵니까?”
“가 문화가 나를 버렸어......., 내가 그를 내쳤어야 했는데 도리어 내가 그의 버림을 받았다.”
“역시 보통의 인사는 아니군요.”
“허니 잡아와.”
“.........”
콰앙-
“대사마의 직을 반납한 지가 언제인데, 아직도 스스로가 대장군임을 지각하지 못하는가! 공은 대장군이다! 이 땅의 모든 군대를 다스리며 통솔하는 대장군이야! 그러니까, 가서 당장 붙잡아와! 명을 내리건 군사를 풀건 뭐든 해서 그놈을 내 앞에 끌고 와!”
“그리하겠습니다.”
그렇게 무거우면서도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은 주준이 사도의 자리에서 발악을 하는 황보력을 뒤로한 채, 궁성문을 나섰다.
“대장군.”
“아, 모두 모였군.”
그리고 그런 그의 앞에는 그의 부장들이자 군부의 중역이라 할 수 있는 이들이 우르르 자리하고 있었다.
예상치 못한 황보력의 부름에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한 주준의 대처가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사도의 명이시다. 궁성을 나와 도망친 가 문화를 쫓아라.”
“하, 하오나 당장에 어디로 갔는지조차 모를 이를 어찌......”
“그가 궁성을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았다.”
“낙양성의 열두 대문을 닫겠습니다.”
“아니, 이미 빠져나갔을 게다.”
“허면? 어찌 추적을 해야 합니까?”
“어디로 갔을지야 빤한 게지.”
그렇게 자신을 따르는 이들 앞에 눈을 빛내는 주준은 이내 손을 뻗어 서쪽을 가리켰다.
“예?”
“함곡관 앞에 병력을 두어라. 그곳마저 벗어났다면 호산 인근까지 병력을 진출시켜라.”
“하, 하오나 대장군! 그리되면 포홍의 영역을 넘게 됩니다.”
“상관없다. 도망자의 조사와 관련하여 황명을 들먹이면 돼. 큰 피해를 끼치지 않는다면 제가 짐승이 아닌 인간으로 대접받기 위해서라도 포홍은 황명을 따를 사람이니 뒤탈은 없다.”
“하지만, 작금의 그곳은 서원군을 비롯한 중군 교위 풍방이 다스리고 있지 않습니까?”
“알지, 잘 알지. 도적놈들에게 이겼다는 것도 들어서 알지만 반대로 도적들에게 그 전력이 절반이 깨진 채, 도망쳤다는 풍문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도 아주 잘 알지. 거기에 그 풍방을 죽음으로 내몬 것이 가후 아닌가? 지금도 자다가 놀라 벌떡일 터인데, 그리 자신을 죽이려 했던 이를 붙잡아 압송하는 일의 협조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야.”
“하지만, 그렇다고 무조건 서쪽으로 간다는 보장은 없지 않습니까?”
“아니, 그래서 서쪽이다. 그에게 당장에 가장 많은 선택지를 줄 수 있는 곳은 당장에 이 천하에 서방과 북방을 제하곤 없음이야.”
“서쪽으로 향하는 것이 어째 서쪽과 북쪽, 둘 모두를 허락하는 선택지가 된단 말입니까?”
“바로 그곳에 삼보가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지. 삼보는 북쪽으로 하동과도 가까우며 병주와 사연택이 지척이다. 거기에 서쪽으로 나아가면 본래의 그의 고향이 자리한 옹, 량주가 있을뿐더러 그 너머에 자신이 완성시킨 서역도호부가 있지. 물론, 예상을 뛰어넘어 하내를 통해 하동으로 들어가는 경우도 있겠으나 그러기엔 군량을 미끼로 흑산적을 불러들인 과거를 기억하는 하내 태수, 저수가 이 기회를 그냥 두고 있진 않을 게야.”
“예, 대장군!”
두두두두-
그렇게 주준을 비롯한 이들이 말을 달리며 서쪽으로 나아갔다.
황건의 난 이후, 이 땅에 탄생한 세 영웅이라 불린 사내 중 한 사람이자, 자신의 숙부를 제하고 가장 다방면에 고른 재능을 보였던 사람.
노식에 비해, 때론 황보숭에 비해 늘 부족하다, 아쉽다는 평이 줄을 이었던 그는 의외로 점령지에 대한 수복과 행정을 비롯한 정치적 사안에 놀랄 만큼의 수완을 발휘하고 있었고 그 외의 것들에도 예상치 못한 재능과 성공을 꽃 피워낼 줄 아는 인물이었다.
군재가 부족하다 한들, 이를 메워낼 정도로 뛰어난 그 다방면의 재능은 가히 작금의 조당을 이끌어나가는 황보력에게 놀랄 만큼의 도움과 지지를 선사해주었고, 거진 황보숭 내각에 뒤를 자처한 새로운 정부인, 신 황보력 내각의 출범을 예견할 정도로 그 수완이 좋았던 그는 지난날 가후가 낙양을 벗어나 하내로 향하게 되는 순간 부로 황보력의 신임을 받으며 중역이 되고 또 그의 새로운 보좌가 되었다.
그리고 그가 내보인 통찰은 예상보다 정확한 것이었다.
* * *
휘이이잉-
이제는 차갑게 느껴지는 가을날의 바람이 부는 자리.
드높은 성벽과 더불어 한 때는 이 땅에서 가장 드높은 위명을 지녔던 관문이 버티고 서 있는 자리.
그 함곡관의 성벽 위에서 올라선 가후와 그 아래 이를 올려다보는 주준은 서로를 향한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확실히 나도 이제 늙었나보이. 알아도 행동이 굼떠 자네를 붙잡지 못하였으니.”
그렇게 자신의 솔직함을 드러낸 주준이 표출한 감정은 미련이었다.
“설마, 장군이셨습니까? 제가 없는 그 찰나에 사도를 부추긴 이가?”
그리고 이를 받아들이는 가후가 표출한 솔직한 감정은 의심이었다.
“자네는 내가 이 나라의 낭중령을 내치려 했던 것을 어찌 생각하는가?”
“이런......, 진정으로 장군이셨군요.”
그리고 이내 다시금 주준의 입에서부터 흘러나온 그 솔직함은 가후의 의심이 틀리지 않았음을 직접 확인시켜 주고 있었다.
물론, 아무리 가후라도 이를 받아들이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다.
가히 예상치 못했던, 생각조차 못 했던 이의 뒤통수로 말미암아 가후는 지금의 자신이 입술을 깨물려 그 아래로 피가 흐르는 것조차 제대로 느끼지 못하는 상황이었으니 말이다.
“꽤나 놀란 모양이로군.”
“허면, 아니 놀라겠습니까?”
“허니 내 이리 자네의 앞에 직접 묻고 있지 않은가? 자네는 이 나라의 낭중령을 내치려 한 나의 판단을 어찌 생각하는지?”
“그거야......, 옳고도 또 옳은 결정이라 생각합니다.”
“그래, 바로 그걸세. 그리고 그 연유는 역시 빤한 것이겠지?”
그렇게 가후의 앞에 찰랑이는 술 한 병을 흔들어 보인 주준은 이내 제 손에 쥐고 있던 병을 떨어트렸다.
퍼석-
“........!”
그렇게 바닥에 떨어진 병은 깨어졌고 그 아래 뿌연 곡주가 마치 핏물마냥 천천히 대지를 적시며 그 주변을 물들였다.
“네놈 때문에 내가 아끼던 술친구가, 나와 영광의 시절을 함께 한 나의 전우이자 막역한 지우가 죽었다.”
“주 장군!”
“가 문화, 이 못난 것아. 숭이, 그놈이 내 앞에 몇 번이고 말을 했는 줄 아느냐? 죽은 염충에게 미안해 죽겠다면서 내가 천하의 목소리를 외면했다면서 그리 오열을 하고 울며불며 나를 껴안고 밤을 지샜다. 허나 그럼에도 자신은 죽은 염충이 되고 싶지 않다고 했지.”
“그건......”
“그리고 그에 얼마 지나지 않아 조금씩 변해버린 그놈은 사적으로 나를 찾지 않았다. 나라에, 황실에, 백성에, 청류에, 조당에 미친 그놈에게 더는 같이 울어줄 친구 따윈 중요한 게 아니었던 게야.”
“나라의 일에 어찌 그리 허물과 다름없는 사감을 대십니까?”
“네놈 같은 놈이 이래서 사람을 이해 못하는 게다. 아니, 본성을 이해해도 그 본질은 이해 못하는 게지. 알면서도 행하지 않으면 이는 안다 할 수 없는 게다.”
“소인은 제가 아는 바를 그대로 행했습니다. 누가 뭐래도 이 나라를 위해서!”
“그 안에 나라만 있더냐? 사람은? 아니, 너와 가까운 사람은?”
가후에게 있어 제일 가까웠던 사람.
냉혈안과 같은 그에게도 그나마 사람다움을 주변에 확인시켜 줄 수 있었던 그의 진심이 담겨있었던 사람.
타악-
“염충......, 제기랄.”
가후는 저도 모르게 제 미간을 짚으며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이제 알겠더냐?”
친우의 죽음에 슬퍼하며 분노하는 그 동기가 실상 자신의 것만이 아님을, 남에 대한 진실된 이해가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음을 뼈저리게 깨닫는 순간이 아닌가?
“그 빌어먹을 설교를 남에게 오랜만에 듣습니다. 거기에 하필 그 빌어먹을 친우의 얼굴이 떠오르니 실로 씁쓸해지기도 하는군요.”
“나라를 위한다는 핑계로 죽은 이의 그림자를 덧씌우지 마라. 그 죽은 이의 사기(死氣)가 네놈의 그 요사스러운 사기(邪氣)와 만나 제 자신을 잃어버린 망령을 만들어내었다. 그리고 그 제물이 바로 내 술친구인 황보숭이야. 너는 이를 받아들일 수 있겠더냐?”
“........”
더는 말이 없는 가후의 납득은 가히 이에 대한 동의와 이해를 반증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그놈은 그리 죽으면 아니 될 놈이었다. 네놈만 들러붙지 않았더라도 산자의 육신에 죽은 이의 혼령이 들러붙을 일은 없었어.”
“그럼에도 좌장군은 이를 받아들이셨습니다. 또한 당시의 황보력은 그런 제 의사를 존중해주었습니다.”
“다시 한번 말하마. 그럼에도 그는 염충이 되고 싶지 않아 했다. 지금의 사도, 아니 황보력 또한 당시에는 이를 몰랐던 게지.”
그렇게 잠시 죽은 황보숭을 기억하며 생각에 잠긴 주준은 지난날, 가후가 떠난 이후 자꾸만 불안 증세를 보이는 황보력과의 술자리를 떠올렸다.
* * *
탁-
“후우, 꿈에 숙부가 나와.”
“이해가 갑니다.”
“빌어먹을 황제도, 가 문화도, 대소신료들도 모조리 다 거슬려.”
거의 술에 젖은 황보력은 그 시선조차 몽롱한 얼굴로 계속 잔을 들이키고 있었다.
쪼르륵-
“가 문화?”
그리고 때마침 등장한 가후의 이름에 반응한 주준은 그리 따르던 술을 멈춘 채, 묘한 반응을 보였다.
“왜 할 말이라도 있나?”
“아닙니다, 사도.”
“난 할 말 많은데? 흐흐흐, 뭐 투정 같기는 하지만 또 원망 같기도 하지만. 그래, 어리숙하기도 하고 망상 같기도 하지만, 내 숙부의 죽음에 엮인 그 수많은 연놈들이 끝도 없이 계속 머릿속에 떠올라.”
이제와 하는 말이었으나 황보력이 그리 피해망상증이자 편집증마냥 어린 황제(소제)를 거슬려하는 연유가 여기에 있었다.
죽인 하 태후의 아들이 바로 그 어린 것이었으니 그 어린 황제를 마주할 적마다 숙부를 죽인 그녀의 망령이 그 어린 것의 뒤편에서 자신을 농락하는 것처럼 느껴져, 그 환각을 억지로 짓누르며 본성을 억제하는 것이 점점 더 힘들어졌던 것이다.
하지만 막상 그러한 배경 속에 꼭 태후만 자리한 것은 아니었다.
그 누구도 흉수가 되며 원인이 될 수 있으며 책임의 소재를 물을 수밖에 없는 그 병적인 집착과 광증은 결국 지난날 황보숭과 함께하며 크던 작던 황보숭에게 단 한 번이라도 영향을 끼쳤던 모든 이들에 대한 의구심이자 의문으로 변해있었다.
“명가의 이들을 처리하자는데 동조한 이들, 내 숙부를 부추겨 황제에게 자신들에게 유리한 정책의 승낙을 받아낸 이들. 숙부의 곁에서 바람을 넣고 들어 올리며 멋대로 행가래를 태우듯이 아부한 이들까지. 다, 의심스러워 다. 다 죽여버리고 싶단 말이지. 이제와 눈치만 살살 살피며 게으름만 피워내는 것들이, 그리 내 숙부가 살아있을 적에는 얼마나 빠릿빠릿했던지.”
하지만 이러한 주준의 불완전하고 불균형적인 정신 상태를 마주한 주준의 눈은 묘한 빛으로 가라앉아 있었다.
자신의 술친구이자 전우였던 황보숭의 죽음이 덧씌워진 것만은 그 조카인 황보력 뿐만은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그 속에 가 문화도 있지요?”
“암, 있지. 흐흐흐, 같은 편임에도 어째서인지 점점 더 눈에 띄고 더 거슬려.”
“동감입니다.”
“흐흐흐, 한잔하지.”
“예, 사도.”
째앵-
그렇게 서로의 잔을 부딪치는 황보력과 주준은 가후에 대한 반발과 불만이라는 동질감에 하나 된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이들이 이리 나름의 의기를 투합하는 서로가 기억하는 공통된 비사가 있기 때문이었다.
“푸흐, 이제와 이런 말을 해서 미안하지만 나는 가 문화에 대해서만큼은 열렬한 지지자였다.”
“알고 있습니다. 그 또한 죽은 술친구의 입에서 많이 들었던 이야기니까요.”
“그러나 그의 독촉과 독선 그리고 기존의 위계를 뛰어넘으며 점점 주변의 모든 것에 영향을 끼치며 자신의 자리를 넓혀가는 그를 보며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렇게 시작된 태초의 고백은 고해성사와도 같은 성격을 띠고 있었다.
어릴 때의, 뭣 모를 적의 황보력은 자신의 숙부가 대체 왜 그렇게까지 가후를 인정하고 용인하면서도 항상 그에 대해 경계하고 날이 선 모습을 보이며 그의 제안이 늘 신중한 모습을 보였는지 이를 이해하지 못했다.
허나 그런 숙부인 황보숭의 죽음과 더불어 많은 것을 느끼며 통감하게 된 그는, 이내 자신의 숙부가 그리 비참하게 될 수밖에 없었던 현실과 책임에 대한 소재를 찾아다니며 그에 대해 모든 것에 의미를 부여하다 문득 자신의 곁에 있는 가후를 발견한 뒤, 그리 자신의 숙부를 죽음으로 이끈 모든 것이 거진 전부 그와 연관이 있음을 깨닫고야 말았다.
물론, 정확히는 황보숭이 낙양에 들어선 이후 그 모든 순간에 가후가 자리하고 있었기에 그런 피해망상을 꿈꿨던 것이었지만 말이다.
“그는 어디에나 있었다. 모든 것에 관여했고 모든 것을 자신의 방식대로 처리했다.”
“그러면서도 강압적이었습니다. 도리어 이 사람의 술친구에 대한 존중 따윈 없었지요.”
“알면서도 용납하면서도 멀리하면서도 수긍했다.”
“그렇기에 같이 울고 같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하지만 이걸로 미워할 순 없어, 미워할 연유도 없음이야. 그의 활약은 숙부의 당연한 허락이자 용인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로 인해 변했습니다. 이 사람은 전우와 지우 그리고 술친구를 동시에 잃었습니다.”
“하지만, 그래. 그 빌어먹을 하지만이 문제야. 하지만, 그래서. 그렇다고 그가 내 숙부를 죽일 연유가 없지 않은가?”
“연유는 없어도 그리 밀어 넣긴 했지요.”
“밀어 넣어? 숙부를? 그놈이 내 숙부를 밀어 넣어? 설마......”
순간의 흐릿해진 기억 속에 황보력은 황보숭이 생전에 자신과 벌였던 설전이자 마찰의 순간들을 떠올렸다.
‘충성이라? 그가 정녕 내게 충성한다 생각하느냐?’
‘너는 아직도 그의 의중을 모르는구나.’
‘지금까지의 그 모든 행보가, 그 모든 무례가 그에게 면죄부를 주는 것은 물론 도리어 공훈이 되었고, 그가 저지른 그 모든 과거가 이번 일로 말미암아 모두의 뇌리 속에 선한 기억을 간직한 추억으로 포장이 되게 생겼단 말이다!’
‘가 문화, 이놈이. 제 안전을 도모하고 그에 살길은 마련해놓고서도 되려 그 바깥에서 나를 옥죄는 게다. 나를 밀어 넣는 게야. 나더러, 내 손으로 외척을 비롯해 황문의 이들을 축출해 그 피를 직접 이 두 손에 적시라는 게다. 그리고 다 죽고 없는 그리 붉디붉은 천하를 가지라는 게다.’
“........!”
그리고 안개이자 미로마냥 출구가 보이지 않는 그 기억들을 모조리 헤집은 끝에, 그토록 자신이 바라던 정답을 향해 그 끝에 자리한 출구에 무엇이 자리하고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사도?”
“이놈이......,”
뿌드드득-
어느새 술에 절어 제대로 된 이성적 판별이 서지 않는 그의 주먹이 굳게 쥐어졌다.
“그랬어, 네놈이 정녕 그리 내 숙부를 사지로 밀어 넣은 것이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 속에서 부들거리며 흔들리는 술잔 또한 황보력이 쥔 주먹의 악력을 이기지 못했다.
파삭-
“사, 사도! 괜찮으십니까?”
그렇게 깨진 그의 손아귀에서 핏물이 터져 나왔다.
“주 장군. 그놈이 원흉이야. 그놈이.......”
이에 놀란 주준이 그의 손을 닦아주기 위해 황보력에게 다가설 그 무렵, 술에 취해 이성을 놓아버리고 그 환각과 망상 속에, 어쩌면 그보다 더 깊숙한 곳에 숨겨진 진실을 발견한 황보력은 이내 그를 붙잡고 그날의 이야기를 주준에게 꺼내놓았다.
그 후의 이야기야 더 말할 것도 없고, 술에 취한 와중에 주준에게 이 모든 사실을 읊으며 가후에 대한 욕설과 폭언을 쏟아낸 것으로 말미암아 그날의 술자리 또한 깨어졌다.
* * *
“그래서? 부추겼습니까?”
그렇게 황보력의 손에서 깨어진 술잔의 파편과도 같이 또 그의 손아귀에서 터져 나온 핏물과도 같이 주준이 기억하는 그 날의 술자리가 사라지며 다시금 그의 앞에 현실이 도래했다.
“지금 묻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부추겼나고!”
그런 주준의 앞엔 가후가 있었고, 자신의 귀에 또렷이 들리는 것을 다시금 답을 바라는 그의 진정이 되지 않은 거친 목소리였다.
“그래, 부추겼다.”
“하......”
이제와 자신이 자리를 비운 공백의 변화가 무엇이었는지, 그 계기가 무엇 때문이었는지를 확실하게 깨닫게 된 가후는 그 얼굴에 자신의 노기를 담았다.
“어째서 그랬습니까?”
“다시금 술이 깬 황보력이 그러더군. 아무래도 자신이 많이 취해있었기 때문에 그랬던 것 같다고. 허니 그날의 허무맹랑한 추론과 자신이 드러낸 감정에 너무 과하게 반응하지 말라고, 증좌도 없고. 무엇보다 그 당시엔 그것이 최선이었으니, 이걸 다른 의도가 있었다 보는 것이 더 이상하다고 말이지.”
“역시 사도께선 실로 옳으신 판단을 내리셨군요.”
“아니, 황보숭과 달리 그릇된 판단을 내린 게지. 그가 내 앞에 털어놓은 모든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확실히 황보숭을 죽음으로 내몬 원흉이 누구인지를 확신할 수 있었다.”
스윽-
그렇게 서서히 움직이는 그의 어깨를 따라 팔뚝을 타고 팔꿈치를 거치며 올라서는 그의 팔목의 끝에 자리한 손이 누군가를 가리키기 위해 검지를 내뻗어 아주 익숙한 모양을 잡았다.
그리고 그리 내뻗은 검지의 끝에는 함곡관의 성벽 위에 자리한 채, 심히 거슬린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가후가 있었다.
“네놈, 누가 뭐래도 네놈이 원흉이야.”
“하아, 결국 모두가 똑같군요. 그 빌어먹을 죽은 이들의 망령 때문에 다들 애먼 산 자를 잡아먹으려 하는 꼬라지가 참 가관입니다.”
결국, 이 예상치 못한 파국의 시작도 과정도 끝도 모두 한결같았다.
그렇게 가후는 눈알이 빠질 것 같은 격통 속에 억지로 이를 외면하기라도 하듯, 그러면서도 이를 받아들이겠다는 듯 고개를 들어 두 눈을 감고 하늘을 보았다.
“그러는 네놈이야말로, 황보숭을 제물로 삼았다. 이미 죽어 돌아오지도 않을 염충의 유지를 운운하며 이미 뒈진 그놈의 사상을 멋대로 이 땅에 뿌렸다.”
그러나 여전히 두 눈을 감고 하늘을 보는 와중에도 그의 귓전에는 여전히 거슬리는 주준의 목소리가 남아있었다.
“염충의 이상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또한 이는 그 유지를 지키고자 했던 산자의 노력이었습니다! 그쪽이 뭘 안다고 이를 함부로 말하십니까!”
“나도 마찬가지야. 염충이 아닌 황보숭의 판단은 틀리지 않았다. 이 또한 억울하게 죽은 그를 추하고 추모하며 기리기 위한 산자의 노력이야.”
이는 이미 예견된 결말과도 같았다.
서로가 서로의 입장을 양보할 수 없는 것이었고, 그 비틀림은 다시는 이 땅에 돌아오지 않을 이들을 기억하는 산 자들의 채울 수 없는 공허함을 달래기 위한 발버둥이었다.
“너는 내 손에 죽는다.”
그렇게 군사들에게 전투를 개시하기 위한 신호를 보내기 위해 손을 들어 올린 주준이었다.
“예서 어디 전쟁 한 번 벌이실 요량이시라면 각오하십시오. 그땐 정녕 포홍과의 전면전입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가후 또한 감았던 두 눈을 부릅뜨고 그 이를 훤히 드러내며 징그러울 미소를 지어 보였으니, 이미 그들은 서로에 대한 예견된 결말을 맞이할 각오를 마친 상황이었다.
- 작가의말
- 실상 공지는 따로 올려두었으나 그래도 급하게 짬을 내어 1편을 다급히 만들었습니다.여전히 부족하고 아쉬운 필력이긴 하나 이리 쓰여진 한 편이 누가 되었든 명절 기간에 심심한 이들의 찰나를 달래줄 수 있다면 그 또한 보람이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다들 즐겁고 행복한 추석 명절 보내세요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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