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 위에서 가장 강한 군대, 밑에서 가장 강한 도적(3)
지축이 흔들렸다.
굉음이 들렸다.
서로가 서로를 향한 거리가 그리 길지 않았음에도 순식간에 달려든 이들의 충돌은 가히 대단한 것이었다.
콰앙-
“꺼흑!”
푸욱-
푸히히히잉-
놀랍도록 단순한 추돌이자 한눈에 보아도 그 승패가 빤한 당연한 일이었으나, 그럼에도 기다란 극을 쥔 채 방진을 짠 백파적들을 향해 돌격을 감행하는 서원군들의 저력은 가히 대단한 것이었다.
그 말의 가슴이 꿰뚫리는 와중에도 활을 당겨 화살을 쏘다 못해 그리 날뛰는 말에서 떨어진 뒤에도 칼을 뽑아 쥐고 길게 늘어진 극날의 아래로 파고들어 저들의 허리와 다리를 베어내며 전선을 무너트렸다.
푸욱- 푹- 푹-
“끄흑!”
“꺼흡!”
그러나 고작해야 앞선 전열 하나만이 극을 쥐고 있는 것이 아니었음은 물론, 그 뒤에 자리한 이들이 연달아 극을 내지르며 그 빈틈을 메우니 쉬이 접근하는 것조차 어려운 것이 현실이었다.
“지금이다, 쏴라!”
피비비비빙-
거기에 서황의 묵직한 도끼가 위에서 아래로 휘둘러지면서 수백 대의 화살이 하늘을 날았고, 이는 곧 그 뒤에 돌격을 감행하지 못한 서원군들을 향한 혼란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파바바바박-
“끄하아악!”
“아악!”
“제기랄, 뭣들 하느냐! 원진을 구성하고 연달아 활을 날려라!”
두두두두-
물론, 서원군 또한 가만히 당하고만 있지 않았다.
언제나, 언제나 그랬듯 무적이나 다름없었던 당연하고도 가장 능숙한 전술을 꺼내 들며 전방과 후방의 거리를 벌리고 보다 먼 거리에서 원진을 돌며 기사로 장거리 사격을 개시하는 서원군의 이들이었다.
“쏴라!”
피이잉- 피잉- 피잉-
그렇게 연달아 원을 그리며 수십 발의 화살이 지칠 기미가 없이 연달아 날아가자 백파적 측에서도 하나둘 사상자가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이미 방패병들의 비호를 받는 궁수들을 비롯한 백파적 측의 피해는 예상보다 적었다.
부웅-
“극사들은 전진, 앞으로.”
펄럭-
“전진 앞으로!”
척척척척-
그렇게 노골적인 군대와 같은 집단의 지휘를 표방한 백파적이 움직였다.
다시금 공기를 가르는 서황의 서늘한 도끼질과 그 앞에서 휘날리는 공세의 깃발은, 앞서 돌격을 감행하는 서원군들을 막아낸 최전방의 극병들을 한 걸음, 두 걸음 앞으로 전진시키기 시작했다.
당연히 서원군의 입장으로서는 이미 희생양이 나온 마당에 한 차례 실패한 돌격이니 그다음 차례의 이들은 말이 내달리며 충분한 충격력을 얻을 수 있는 최소한이 거리마저 빼앗기는 상황이었다.
“전방의 이들도 마찬가지다, 후보! 기사!”
두두두두-
그러나 확실히 서원군의 이들은 놀라웠다.
“당겨, 쏴!”
피비비비빙-
곧바로 말머리를 돌리며 방진을 유지한 채 다가오는 백파적들과 최소한의 안전거리를 벌린 채, 그 가까이에서 활을 당겨 극병들을 향해 연달아 화살을 날렸다.
“흐윽!”
“어헉!”
그렇게 한 차례의 화살 세례로 말미암아 방패조차 들 수 없는 극병들이 우르르 쓰러졌다.
“다시금 뒤로 물러나 거리를 벌린 뒤, 사격한다!”
두두두두-
그리고 이는 또다시 반복되었다.
“쏴라!”
피비비빙-
여전히 진격을 멈추지 않는 극병들과의 거리가 다시금 벌어지자마자, 또다시 수백 대의 화살이 앞서 전진하는 극병들에게 꽂혔다.
“방패를 든 이들은 앞으로. 좌우로 갈라져 나아가 극병들이 앞을 받친다.”
이에 서황 또한 가만히 있지 않았다.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도 말에서 내려오지 않은 채, 흔들림이 없는 기사 속에 놀라운 대처를 보여주는 서원군이 예상외의 동요는커녕 그 속에서도 놀라운 결집력을 보여주니, 이는 자신들의 피해를 줄이기 위한 조치였다.
그렇게 생전 처음으로 제대로 이 나라의 으뜸가는 정규군을 상대하는 서황의 눈빛이 깊어지고 그 표정이 인상적으로 변할 무렵, 여전히 흔들리는 분노 속에 뚫리지 않을 전방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풍방은 여전히 답이 보이지 않는 전장의 활로를 찾느라 고심 중이었다.
“어떻게 해야, 어떻게 해야 저길......”
“그 수가 너무 많사옵니다. 일단 천천히 대처하시며.......”
그 옆을 보좌하는 것은 물론, 당연히 일찍부터 그의 안전을 걱정했던 허정이었으나 문제는 그 또한 당장에 풍방을 설득시킬 뾰족한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천천히? 천천히 하면 뭐 달라지는 것이 있더냐!”
“하오나, 작금의 저들은 거진 모든 종류의 병력을 운용하고 있사옵니다. 극병에 궁병과 부족하지만 기병까지 갖추고 있는 이들입니다.”
“거기다 병력도 많지, 빌어먹을.”
“다시금 돌격을 감행하기 위해서라도 거리를 벌려야 합니다. 좋든 싫든 극병의 수를 줄여놓아야 뭐든 가능한 법이니 말이옵니다.”
“말이야 쉽지! 말이야! 문제는 화살이다! 화살이 없단 말이야!”
“허면 후퇴라도......”
“후퇴? 지금 그걸 말이라 하느냐! 후퇴헤서 다시금 저 빌어먹을 개미지옥 안으로 들어가라고? 나더러 산중대호의 아가리 속으로 그 머리를 디밀란 말이야!”
“그, 그게 아니라 저희가 기거하였던 고을 인근에서라도.....”
“병신 같은 놈, 모조리 불을 질러 남은 것도 없는 그곳에 거기다 연기를 피워 일찍이 위치를 노출시킨 그곳에, 거기다 예서 멀지도 않은 그곳에서 대저 뭘 할 수 있단 말이야!”
거기다 더더욱 애석한 것은 허정 또한 장수로서의 자질이 없는 이는 아니었으나 그럼에도 당장에 전장 바깥의 상황을 살피는 안목과 이를 돌이키며 되새기는 지모는 부족했다.
사람이 암만 추해질 때가 있어도 본래의 바탕이 있는 이가 여전한 실력을 보일 때가 있듯 작금의 상황에 혼란에 빠진 풍방을 제대로 잡아줄 수 없는 허정이었다.
“그렇지.”
그리고 그러던 차에 또다시 비틀린 풍방의 지모가 튀어나왔다.
“예?”
“너희 가문의 이들, 허가장의 사내들.”
노골적으로 손을 들어 그 희생양이나 다름없는 이들을 지목한 풍방은 그리 반강제적인 희생을 허정의 앞에 종용하고 있었다.
“중군 교위!”
“왜! 어차피 전장인데 이제와 그 목숨이 아깝나?”
“그것이 아니오라......”
“해서 여기서 모조리 다 죽을 테냐?”
“그건.......”
“하라면 해.”
스윽-
“뚫어. 아니, 죽여. 그리고 좌우로 벌어져 반으로 갈라라.”
이미 허정의 말은 귓등으로 듣지 않는 풍방은 마치 기도를 하듯 두 손을 모아 이를 서황이 자리한 백파적의 중심을 향해 뻗었다.
“우리가 다시금 쐐기꼴로 돌격할 수 있게 저 전방의 거추장스러운 것들을 찢어버려.”
그리고는 그리 한데 모았던 두 손을 거꾸로 뒤집어 마치 이를 찢어내듯 손톱을 세우며 아직 어찌하지 못한 저들의 미래의 허상을 좌우로 찢어발기고 있었다.
“하아, 제기랄.”
그렇게 인상을 찌푸린 허정은 곧바로 자신이 이끄는 허가장의 이들을 불려들였다.
기존의 서원군과 비견되거나 그 이상이라 할 수 있는 큰 체구, 육중하면서도 무거운 몸놀림과 보병전에 특화된 이들이 내보이는 놀라운 전투력.
허저에게 치욕스럽게 짓밟힌 과거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발버둥에서 비롯된 재능의 발현일지, 혹은 자신을 그리 짓밟은 허저에 대한 좋지 않은 기억 때문에 고른 노골적인 희생양인지는 몰라도 풍방에 대한 좋지 않은 마음만큼만은 그 누구보다 확실하게 가지게 된 허정은 모든 것을 내려놓은 채, 칼을 뽑아들며 서서히 앞으로 나섰다.
쿠웅- 쿠웅- 쿵-
“저, 저놈들은 또 뭐야!”
그러나 허가장의 이들치고는 날렵하게 내딛는 그의 걸음 뒤로, 그러한 그를 지원하듯 압도적인 위화감을 자랑하는 허가장의 이들은 묵직하디묵직한 걸음으로 그런 그를 따랐고 이는 곧 극을 내민 채 방진을 유지하며 다가오는 백파적들을 향한 반격의 신호가 되었다.
철컥- 서걱-
“끄흑!”
그렇게 가장 먼저 그 선두에서 칼을 뽑아 상대를 베어낸 허정은 자신의 칼을 높이 들며 그 비좁은 협곡의 하늘에 끝에 도달할 만큼 우렁찬 외침을 보였다.
“누가 뭐래도! 우리는 주공을 따른다! 그런 우리의 주공은 이 나라의 옹주목이자 표기장군인 포홍이며, 누가 뭐래도 우리의 자부심은 오직 그분을 통해 채워진다!”
와아아아아아-
그리고 그것은 이내 엄청난 반응을 이끌어 내었다.
괴성과 더불어 그 육중하고 우람한 체구를 지닌 허가장의 이들이 달려들며 그 기다란 극의 방진을 부수며 아예 그 진을 와해시키기 시작했다.
퍼억-
“어흑......”
쩌엉-
“크하아악!”
철퇴와도 같은 묵직한 일격에 사람의 얼굴이 돌아가는 것은 물론, 그저 쇠몽둥이와도 같은 봉을 휘둘러 극날을 찌그러트리고 있었다.
“우랴아압!”
쩌저저적-
“비켜라!”
“크흑, 놔! 이거 놓으란 말이다!”
그도 모자라 아예 그 몸뚱이를 들이밀어 상대방의 극을 부숴버리지 않나, 아예 내지른 극의 끝을 붙잡고 이를 놔주지 않는 이들까지.
가히 무적에 가까울 모습을 보이는 이들의 원시적이고 호쾌한 모습에 기존의 규율적인 모습을 갖추고 있던 백파적의 극병들이 도리어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었다.
“지금이다! 지금 병력을 좌우로......, 어?”
그리고 이러한 현장의 상황을 그 누구보다 빨리 인지한 허정은 이내 풍방의 계획대로 그 병력을 좌우로 벌리며 앞서 자리한 극병의 방진을 찢어내려 했다.
부우웅-
그러나 대저 언제 도달한 것인지 그런 그의 머리 위로 무언가 서늘하면서도 묵직한 금속의 날이 공기를 가르며 지나가고 있었다.
“........!”
푸화아아악-
그리고 그 너머에서 무언가 터지는 소리가 난 순간, 그런 그의 머리 위에서 시뻘건 핏물과 조각난 고깃덩이들이 마치 이제 막 내리는 비처럼 후드득 떨어져 내렸다.
“확실히 기회를 줄 수 없는 놈들이로구나. 인정하마, 여유를 주면 도리어 이쪽이 말려들 것이다.”
“네, 네놈은.......”
그리고 어느덧 무의식중에 들어 올린 고개의 너머에는 이제 막 핏물을 적힌 도끼를 쥔 채, 매서운 눈빛으로 그런 허정을 내려다보는 서황이 있었다.
“이 서 공명이 예서 네놈들을 다 죽여주겠다.”
“큰형님! 피하시오!”
“.......!”
순간, 이를 지켜보는 허가장의 이들이 소리쳤으나 그 또한 찰나였다.
그러나 이는 순간의 허정의 반응을 이끌어냈고, 그렇게 졸지에 하늘에 솟아 땅으로 떨어지는 엄청난 도끼질에 살기 위해 반쯤 무의식적으로 그 몸을 날린 그였다.
콰앙-
사방에 흙과 자갈이 튀어올랐고 그 흙먼지 너머로 무심한 듯 다시금 자신의 도끼를 들어 올리는 서황의 일격은 가히 지난날 그가 맛보았던 이각의 칼질이 남긴 공포와 두려움을 상기시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아, 아우야......”
“처음은 피했구나.”
그리고 그것은 졸지에 지금까지 별다른 흔들림이 없이 당당하던 허정을 그 누구보다 유약한 사내이자 노골적인 의존증 환자로 변모시키고 있었다.
“대체 어디 있느냐, 아우야?”
“허나 그 다음은 얼마나 가겠느냐?”
“제기랄, 이러다....., 정녕 이 우형이 죽겠구나.”
부우웅-
“흐읍!”
까아아아앙-
“확실히 그저 멋들어진 갑주만 걸친 것은 아니야. 허나, 고작 이 정도라면 실로 실망을 금할 길이 없다.”
어느새 위축되다 못해 무너지기 시작한 허정은 제대로 된 방어조차 힘겨운 모습을 보였다.
자신의 칼을 찍어내리는 도끼질 하나 막아내는 것에 전신의 모든 기력이 빠져나가는 것은 물론, 그 비좁은 협곡 하늘의 무게마저 온전히 견뎌내야 하는 느낌이었다.
까드드득-
“끄흐으윽!”
“더!”
“끄흐으으윽!”
“더 힘을 써보란 말이다!”
그리고 땅바닥 저 깊은 곳의 무저갱으로부터, 그림자의 가장 깊고도 어두운 어둠으로부터 올라선 두려움과 나약함은 그런 그의 몸을 붙잡고 얼마 남지 않은 그의 의지마저 꺾어내며 끌어내리고 있었다.
퍼어억-
“끄흑!”
그렇게 이번엔 서황의 발길질에 나가 떨어진 허정이었다.
“이 나라 제일이라는 서원군도 이게 고작이라면 정녕 다 죽었구나. 아랫것들이야 제법이거늘, 막상 그런 그들을 이끄는 이들이 다들 이래서야.”
“.........”
그래서였을까?
그리 무기력하게 바닥에 쓰러진 허정을 보던 서황은 이내 실망스럽다는 얼굴뿐이었다.
그러나 그런 서황을 위에 두고서도 채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이 그저 그 절망과 공포에 짓눌려 자신을 내려다보는 서황의 앞에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던 허정은 그 속에 여전히 저항할 수 없는 자신의 무기력에 치욕스러움을 느꼈다.
“끄흐윽......., 끄흑.......”
그러나 그리 차오른 치욕스러움이 만들어낸 물기는 그 무엇보다 솔직했다.
이는 또다시 흙더미가 가득한 바닥을 구르는 그의 몸뚱이를 조롱하며 그런 그에게 절망과 공포가 무엇인지를 되새겨주는 과정에 불과했다.
“아무래도, 네놈은 아닌 것 같구나.”
철컥-
그렇게 이내 눈시울이 붉어진 허정에 대한 미련을 접은 서황은 이내 그런 자신을 노려보는 허가장의 이들을 향해 다시금 자신의 도끼를 드리웠다.
“그래, 네놈은 아니야. 도리어 내 도끼를 받아낼 자격이 있는 놈들은 도리어 이놈들이다.”
그리 허정이 꺾였음에도 여전히 거센 저항의 의지를 보이는 것은 물론, 복수심을 불태우며 흉흉한 살기마저 피워내는 이들을 향해 서황은 딱 한 마디를 건넸다.
“간다.”
“........!”
“감히, 허가장의 사내들을 모독한 놈이다! 죽여버려!”
와아아아아-
“아, 안돼......, 안, 안 돼.......”
그 목이 메여, 소리조차 나오지 않아 어쩔 수 없이 흙더미 위에 엎어진 채, 이를 지켜봐야만 했던 허정은 다시금 최선을 다해 소리쳤다.
“아, 안...... 안ㄷ.......!”
투콰아악-
그리고 비극이 시작되었다.
살점과 핏물이 동시에 찢기고 터지는 소리와 더불어 사방에서 사람의 목과 머리가 분리되고 있었다.
“아아......., 으아아아......., 으아아아아!”
이를 지켜보는 허정은 마치 실어증에 걸린 사람처럼 나오지 않는 것 같은 목소리로 그 몸을 꿈틀거리며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렀다.
후두두둑-
“괴, 괴물......”
사방에서 붉은 피가 빗방울마냥 쏟아졌으며, 간혹 그 사이로 살점이 붙은 뼛조각과 더불어 부서져 조각난 사람의 사지가 그 바깥으로 떨어져나왔다.
투욱- 툭-
“으아아아! 아아아아악!”
지난날 낙양의 서문 위에서 피의 비를 뿌리는 허저의 모습이 떠오르듯, 그 무엇보다 자랑스럽고 전율을 느꼈던 당대의 희극은 정확히 그와 같은 비극이 되어 자신의 앞에 그대로 펼쳐지고 있었다.
“저, 저게 무엇이더냐......, 저, 저놈이! 대저 뭐 이렇게 강하더냐!”
그리고 이러한 서황의 살육은 허정뿐 아니라 보다 먼 거리에서 이를 지켜보는 풍방에게도 적잖은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사, 살아야 한다! 살아야 해! 내가 살아야 사위의 체면이 선다! 그렇지! 내가 살아야......”
푸히히히힝-
그렇게 두려움에 젖어 곧바로 말 위에 오른 풍방은 곧바로 고삐를 쥐고 말머리를 돌리려 했다.
“후퇴하라! 후퇴! 전군에 명을 내린다, 퇴각.......!”
“누구 마음대로.”
푸히히히잉-
그러나 비공식적으로 서원군을 이끄는 수장이라고 사람보다 큰 덩치를 자랑하는 풍방을 태운 명마는 도리어 이전과 같은 비명을 지르며 그 자리에서 꼼짝을 하지 않았다.
“네, 네놈....., 대체 어느새.......”
마치 귀신을 본 것 같다는 얼굴로 허저를 마주한 풍방은 차마 그 말꼬리를 덧붙일 수가 없었다.
이미 안장에 메인 목의 수급만 해도 거의 대여섯은 되어 보였고, 무엇보다 똑같이 말등에 앉아있음에도 그리 고개를 돌리려는 자신의 말머리에 자리한 갈기를 부여잡고 이를 놔주지 않는 그의 놀랄만한 신력에 그 말문이 막혔기 때문이었다.
터억-
그렇게 풍방을 막아 세운 허저는 이내 미련이 없이 자신의 말에서 내려왔다.
“후우웁-.”
그리고는 마치 무언가를 터트리기 위해 힘을 모으듯, 거대한 공기를 빨아들이듯 그 입을 작게 모으며 그 몸에 엄청난 힘을 주었다.
“전구우우군! 돌겨어어어어억-!”
마치 세상을 찢어내는 파공성이 이러했을까?
협곡을 타고 불어오는 날카로운 칼바람 같이 서원군의 후미에서 졸지에 불어닥치는 그 정체 모를 두려움과 위협이 실린 바람에 소름이 돋는 전율을 느낀 서원군들이 일제히 반응하며 말배를 차고 백파적들을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두두두두-
“뭐, 뭐야! 이, 이놈들이 갑자기 왜!”
“쳐라! 한 놈도 봐주지 말고 반쯤 무너져내린 저들의 중앙을 그대로 돌파한다!”
그렇게 인근에 자리한 주변의 모든 산천초목을 떨게 하는 호랑이의 포효와도 같은 허저의 음성은 서원군에게 기적과도 같은 전의를 선사했다.
콰앙- 콰앙- 쾅-
묵직한 충격음과 함께 백파적의 이들이 날아가고 있었고, 심지어 그 무식한 기병들의 돌진을 막기 위해 방패를 들고 뛰어든 이들조차 이에 밀려나 못해 전열을 잃고 무너지고 있었다.
저벅저벅-
“네놈이 원흉이로구나.”
“비켜라.”
철컥-
“개소리.”
그리고 이 모든 것이 후방에서 새로이 나타난 일천에 달하는 서원군과 그러한 이들을 이끌며 나타난 허저임을 확인한 서황은, 이내 그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그의 앞을 막았다.
“죽어도 못 간다.”
“저기 있는 네 두령이 잡혀있어도 말이냐?”
“.......!”
그러나 서황이 그리 살기를 내비친 순간, 허저는 자신의 뒤를 가리켰다.
다각- 다각-
“양 두령!”
그리고 그곳에는 밧줄에 매인 채, 미안하다는 얼굴로 그런 서황을 내려다보는 그의 주인이 양봉이 자리하고 있었다.
“미안하구나, 이리 잡혀버렸으니.”
“이,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말 그대로다. 도리어 붙잡혔지.”
“아니, 아무리 그래도......”
“전공을 다툰다고 순차적으로 덤벼들었던 것이 화근이 되었다. 이들이야말로 진짜 서원군이었지. 거기에 하필, 번쩍이는 갑주 다 상한다고 모조리 사로잡으라는 대두령의 말을 들었다가 이 모양이 이꼴이 되었지. 거기다 고맙게도 나를 구하겠다 기세등등한 두령 몇 놈이 저치에게 달려들었다 연달아 다섯이 죽고 나니 그 다음에는 아예 대두령조차 나를 구할 시도조차 않더구나.”
채 몇 시진도 지나지 않는 과거였으나 마치 이를 다시는 되새기기조차 싫다는 듯, 그 인상을 찌푸린 양봉의 대답에 서황은 곤란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리고 그 찰나를 놓치지 않은 허저는 이내 자신이 멈처 세운 풍방마저 한 자리에 불러들이고 있었다.
“오면서 봤습니다. 양릉현과 평양현 인근의 고을이 전소되어 있더군요.”
“해서, 또 거기다 대고 내게 시비를 걸 셈인가?”
“도리어 그 반댑니다.”
“뭐?”
“이놈들 데리고 내려가시지요?”
“.......!”
허저의 깜짝 놀랄만한 제안에 양봉도 또 서황도 심지어 풍방도 다들 경악스러운 반응을 보였다.
“네놈들을 어찌 믿고!”
“감히, 내 주인을 겁박해 나까지 붙들 셈이냐!”
“이놈들을 죽이는 것도 아니고? 붙잡아 압송하는 것도 아니고 데려가라고? 그게 무슨 말도 아니 되는 소리야!”
“이대로 끝내실 겁니까? 이대로 패전하고 군량도 잃은 채 모든 것을 끝내실 겁니까?”
그러나 다른 이들의 의중은 이미 상관없다는 듯 다시금 풍방의 앞에 그를 자극하고 있었다.
“제 앞에 보여주신다는 것, 아직 다 안 보여주셨습니다. 도적이 되는 것, 그리 나쁘지 않지요. 갑주만 잠시 벗으면 그뿐이니 상관 없습니다. 거기다 제가 가져온 수급도 있으니 이거 아직 패전 아닙니다.”
“네, 네놈! 지금 네가 하는 말이 뭘 뜻하는 줄 아느냐!”
예상을 뛰어넘어도 한참을 뛰어넘는 수준이었다.
그저 우직하고 미련한 이인 줄 알았던 허저는 일찍이 풍방이 세워 두었던 계획의 실행을 노골적으로 부추기고 있었다.
“하물며 잃어버린 군량과 그만한 성과를 더한다면 상황은 달라집니다. 무엇보다 하동이 박살나면 우리 또한 저들에게 나름의 복수를 하게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러나 저들은 정체를 숨겼음이야. 저들의 직접적으로 하내를 박살내고 이쪽의 신경을 건드려 이쪽을 꾀어내고 우리를 이리 함정에 몰아넣었다는 증좌가 없다.”
“그건 이쪽 또한 마찬가집니다. 여기, 우리 대신 밀어 넣을 이들도 있고, 뭣하면 앞서 언급한 대로 갑주를 벗으면 그뿐이지요. 거기다 나중에 저것들이 돌아선다 한들, 본디 도적이었던 이들의 말을 믿어줄 이는 없습니다.”
“하........”
실로 어이가 없었다. 악도 이리 순수한 악이 없었다.
그러나, 그러나 그래서 더 마음에 들었다.
이번만큼은 자신의 패배를 인정할 수밖에 없는 풍방은 이내 실로 인간으로서의 모든 양심을 지워버린 악마와도 같은 얼굴로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는 서황과 양봉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네놈들이 털어먹은 모든 것에 사 할을 내려주마. 옹주에 이르면 네 두령 또한 함께 풀어주겠다. 어차피 네놈들을 살릴 마음도 먹지 않는 저것들, 당장에 저것들보다야 더 많은 이득과 생존을 보장하마. 어떻게, 이를 따르겠더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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