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화 – 이상과 환상의 폭주(1)
“하하하, 걱정일랑 마시오! 우리야 어디 뭐 지불할 대금이 부족해서 그럴까 봐?”
촤르륵-
“대인, 암만 저희라고 서역과의 교역에 준비를 하지 않았겠습니까?”
촤륵-
물론, 끽해야 주머니 하나, 자루 하나 분량의 오수전으로 그 많은 양의 교역품을 살 수 있는 것은 아니나 정작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따로 있었다.
‘준비는 확실하다 이건가?’
사례의 상방의 이들은 이미 이런 상황이 올 줄 알고 이를 소화하기 위한 대금을 준비해두었고, 그 대금은 모두가 한결같이 모아둔 엄청난 양의 오수전을 뜻했다.
‘만일, 그리 모아둔 것이 아니면 엄청난 양의 동전을 찍어냈다는 소리가 되겠지. 서역 무역로가 점점 현실로 다가오면서, 사례의 이들이라고 어디 가만히만 있었을까?’
“훗.”
그래서였을까?
눈앞에 놓인 자루 중 몇 가지를 무작위로 자신의 앞으로 가져온 풍방은 이내 스스럼없이 이를 열어 그 모든 동전을 상 위에 쏟아 냈다.
촤르르륵-
“대, 대인!”
촤르르르륵-
각자가 준비했다는 성의에 따라 그 소리의 길이가 달랐으나 그리 모든 것이 하나로 합쳐지면서 드러나게 된 풍경은 가히 오수전으로 쌓은 동전의 산과 같았다.
그러나 그리 모든 동전이 제 모습을 드러나게 되면서 풍방은 그 속에 담긴 이질감을 눈치챌 수 있었다.
‘역시, 무작정 찍어내니 어설프고 하자가 많은 동전이 많군.’
언뜻 봐도 글자가 제대로 새겨지지 않거나 규격이 묘하게 맞지 않는 듯 보이는 동전들이 이곳저곳에 뒤섞여 있었다.
당시 화폐의 주조 권한은 나라에서 가지고 있었고 조폐장이나 다름이 없는 재상급인 승상에 속한 승상부의 금조(金曹)에서 그 모든 사무를 관장했는데, 화폐를 찍어내는 부분에 대해서는 거진 나라의 살림을 관장하며 황제를 위한 예산을 짜는 대사농 또한 나름의 권한을 지니고 있었다.
소위, 끗발이 좋으니 그 영향력이 상당했던 것이며 당연히 이에 대한 경험 또한 충분했던 것.
그리고 당시 영제의 비자금을 위해 차환 비슷한 돈놀이로 허점을 만들어 많은 양의 오수전을 영제에게 헌납했던 풍방 또한 일찍부터 이러한 전력을 지닌 채, 추가 생산한 싸구려 동전을 민간에 풀어 이를 대신 해결했던 과거를 지니고 있었다.
본래의 제대로 주조된 오수전은 모조리 영제의 주머니로 들어가고 말이다.
‘장인의 수는 부족하고 물량은 많이 뽑아야 하니 틀도 제대로 안 찍고, 제대로 식히기도 전에 꺼내서 주물 틀어지고 난장판이로군. 민간에서 동전을 주조하는 것은 불법이니 딱 봐도 쉴 틈도 없이 무리해서 뽑아놓은 것이 확실해.’
“대, 대인?”
“모두가 똑같이 다 오수전이라니, 실망을 금할 길이 없군요.”
“똑같은 오수전?”
“설마 성의가 부족하다고 오해하시는 게야? 이는 그저 우리가 얼마나 많은 준비를 했는 지를......”
“그게 아니면 설마 다른 무언가가 필요하시다는 건가?”
웅성웅성-
그리고 분위를 조장하기 위해 일부러 인상을 찌푸리며 거부감을 드러내는 풍방은 발언으로 말미암아 사례의 상방의 이들 사이에 술렁임이 터져 나왔다.
“이런 말씀을 드려 송구하지만 여러분들의 성의, 여러분들의 오수전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이미 천하에 돈 많다 하는 이들이 부랴부랴 싸 들고 모조리 옹주로 몰려든 터라 도리어 저희도 처치 곤란이지요.”
풍방의 발언은 반쪽짜리의 진실을 담고 있었다.
실상 옹주에 오수전이 차고 넘치는 것도 맞았지만 문제는 오수전을 받아오지 말라는 포홍의 명이었다.
‘설마, 사위가 이걸 알고?’
만일, 혹시나, 아주 희박한 가정에 의한 것이지만 이는 이전의 자신을 찍어누른 것과 같은 선상에 놓일 수 있는 의구심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그의 지낭 역할을 해주는 이가 있거나.’
하지만 그 의구심이 이렇게 되면 이는 이전보다 더 합당한 것이 된다.
특히나 자신을 만나러 오기 전 가후를 만났더라면 더더욱, 그렇다면 이 모든 것이 쉬이 설명이 가능한 사안이 된다.
하지만 지금 이를 논하기엔 당장에 일이 중요했다.
“처치 곤란이라니요? 아니, 그렇게나 오수전이 많다는 말입니까?”
“말 그대로지요, 산더미가 따로 없습니다. 오죽하면 요역에 참여한 백성들에게 곡식이 아닌 동전을 나눠주겠습니까?”
포홍은 동서금로의 건설에 참여한 유민들과 백성들에게 이를 녹봉으로 주었다.
본디 상인들만의 신용증서이자 그들만을 위한 화폐나 다름이 없었던 것이 세수의 납부와 관리의 용이성을 위한 국가적 화폐로 자리를 잡았으나 아직도 민간에선 이를 꺼리거나 잘 통용되지 않는 경우가 많았고, 이것이 난세가 도래하며 다시금 잊혀지는 와중에 옹주는 홀로 역주행을 시작한 것이다.
마치 일찍이 화폐 경제를 안착시키려는 듯, 쓸데없이 차고 넘치며 특정한 이들의 주머니에만 쌓이기 시작한 오수전의 폐해를 경계하기라도 하듯 말이다.
“허면, 저희는 어찌해야 할지.”
“대금은 세 가지로 나눠 받겠습니다. 하나는 쌀, 둘은 비단을 비롯한 면포 그리고 마지막 셋은......, 소금으로 하지요.”
“소, 소금!”
“비단이야 당연히 서방에 보낼 물량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고, 거기에 미곡까지 말입니까?”
그리고 예상치 못한 세 가지를 요구하는 풍방이 펼친 세 손가락으로 말미암아 사례의 상계의 수많은 이들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그리고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빤한 것이었다.
“아니, 왜들 그러십니까? 마치 다들 어디서 급작스레 생겨난 오수전을 처분하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말이지요?”
“.......!”
“대인! 설마 저희가 그런......”
“그, 그러게 말입니다. 저희가 장사한 세월만 짧게는 십수 년, 많게는 수, 수십 년인데 어찌......”
“그래요, 그리고 나도 그 긴 세월 속에 이 나라의 살림을 관장하는 대사농으로 있었지요.”
그렇게 씨익 웃으며 이빨을 드러내는 풍방으로 말미암아 상방의 이들은 절로 겁을 먹으며 위축이 될 수밖에 없었다.
타앙-
“우리 솔직해집시다. 환치(換置)도 이런 환치가 없지요. 제대로 주조조차 되지 않은 나랏돈 넘겨받고 처치 곤란인 마당에, 다들 죽기 싫어 민간에 돌지도 못하는 거. 어떻게든 처분하려는 것 아닙니까?”
그리고 이로써 풍방은 이들에게 주도권을 가져오고 있었다.
촤륵-
“위에서 압박은 내려오고 당장에 서방 교역의 이득이 있어야 재정은 윤택해지고 또 그래야 여러분들도 새로운 기대 속에 숨통도 트이는데 그렇다고 자신이 준비해놓은 교역품이랑 자신이 쌓아둔 오수전은 쓰기 싫은 게지요. 어차피 나라에 빼앗길 거, 그 대가라고 제대로 유통조차 되지 않을 것이며 상인들끼리도 받아주지 않을 문드러진 구리 동전, 화폐로서 인정조차 못 받을 것이 빤한 이 썩어빠진 가짜 동전. 실로, 처분 곤란하시지요?”
“........”
“이거 민간에 풉시다.”
“대, 대사농!”
“아니, 대인! 대체 그게 무슨 말씀이시옵니까!”
그리고 그리 풍방에게 말려든 이들은 그에 대한 살길이자 구명이며 해답이라고 내어놓은 풍방의 말에 놀라 자빠질 듯 가히 격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어차피, 이 나라는 본시 화폐가 안착한 나랍니다. 세수도 교역도 이걸로 받았겠다, 도리어 쌀과 포목 같은 물자가 대우받는 게 더 이상하단 말이지요. 안 그렇습니까?”
“크흠! 그건 그렇지만......”
“어차피 서역과의 교역이 뚫리게 되면 더 많은 물자가 돌게 됩니다. 그때마다 무겁고 제대로 틀에 담지조차 못하며 담다 흘러내리고 비 오면 썩어서 쓰지도 먹지도 못하는 쌀, 화폐로서 의미 있습니까?”
“어, 없습니다.”
“비단이든, 삼베든, 면포도 마찬가지. 매양 칼이나 가세 가지고 다니며 일정 부분을 찢어 건네줄 것도 아니고 또 그 보관도 쉽지 않으며 불타면 모조리 사라지고, 습하면 삭아버리며 곰팡이가 필 직물, 의미 있습니까?”
“의미 없, 없습니다.”
“그러니까 하는 말이에요. 여러분들도 편하고 우리도 좋습니다. 어차피 서역과의 교역이라는 새로운 시대가 열렸습니다. 온 나라가 여기 계신 상방의 이들처럼 물건을 교환하고 화폐로 그 대금을 지급합니다. 허면 백성들 또한 그래야지요. 당당히 제 물건의 값을 지불하고 자신이 판 물건의 얼마나 되는 가치인지 이를 알며, 또 매양 나라에 납부하는 세금 또한 썩은 쌀과 곰팡이가 핀 직물을 핑계로 매양 앓는 소리를 하는 일도 없게 됩니다.”
그렇게 풍방은 이들의 앞에 달콤한 현실마냥 포장된 이상을 꺼내놓았다.
“거기에 여러분들이 대금만 지급하면 물건은 물론, 식량과 특산물을 매입하기도 유리합니다. 백성들조차 화폐를 쓰니 여러분들은 굳이 그들에게 다른 것을 내려줄 필요도 없고, 동전 몇 푼 쥐여 주면 끝나는 게지요. 매번 무겁고 보관하기 힘든 쌀, 포목 이 따위 것들을 수레에 싣고 다니면서 백성들에게 대금이라고 지급하고 다니는 짓도 할 짓이 못 될뿐더러 기존보다 더 많은 양의 물자를 수레에 실을 수 있으니 낭비되는 공간도 줄일 수 있습니다.”
그는 마치 약을 파는 약장수처럼 현실에 뿌리를 두고 있으나 점차 자라나 그 궤를 벗어난 거대한 환상을 팔고 있었다.
“지금 다른 지역보다 선진화된 옹주가 하는 일이 뭡니까? 바로 민간에 화폐를 보급하는 일입니다. 내 사위가 그랬지요, 경제(經濟)라고. 허면, 경제가 뭡니까? 돈이 나서 사람을 구제하고 어려움을 건넌다. 해서 사람의 삶을 윤택하게 만들어주고, 그 편의를 찾아준다! 이 말입니다!”
그렇게 가슴을 치며 목소리를 높이고 주변의 시선과 믿음을 하나둘씩 끌어오기 시작한 풍방은 여전히 건실하고 믿음직한 얼굴로 진지한 설득에 가까울 선동에, 선전에 임하고 있었다.
“허나 사실 이는 잘못된 겁니다! 본디 가장 선진화되어야 할 곳은 이 나라에서 가장 존귀한 이가 머무는 이 사례이자, 천하에서 가장 발달 된 체계와 체제를 갖추고 있어야 할 낙양이지요. 한데, 여러분들은 대저 여기서 뭘 하고 있습니까?”
“.......”
“여기! 지금! 우리의 눈앞에 자리한 이 오수전 꾸러미가! 지금 이 자리 모인 우리에겐 당장에 처분해야만 하는 덤터기, 쓰레기일지 몰라도, 사례에 자리한 백성에겐 아닙니다! 그들에게 이는 새로운 세상을 맞보게 해 줄 수 있는 기회이며, 세상이 어찌 돌아가는지를 가르쳐주는 스승이 됩니다!”
“스승......”
“이는 가히 천금이 아닌 일푼을 쥐어도, 일문을 쥐어도 깨닫게 될 수 있는 만고의 가치이며! 배움을 위한 훌륭한 교보재이고! 아무런 대가 없이도 위에서 내려주는 은혜이자 깨달음입니다! 그 잘난 사대부나 족인들, 유자들이 떠들어대는 교화? 그거 아무것도 아닙니다!”
“교화......”
촤르르륵-
“이게, 이게 진짜 교화지요.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고 각자에게 필요한 가치를 만들어내는 것. 받는 사람이나 사는 사람이나 공통으로 통용된 가치를 인정하고 그 속에 각자가 원하는 것을 취하는 것.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는 그 길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경제(經濟)라 나는 말하고 싶습니다.”
그렇게 제 손아귀에 한 움쿰 오수전을 쥐고 다시금 이를 흘려 보인 풍방은 어느덧 자신에게 모여든 반쯤 몽롱한 시선을 느끼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여러분들도 이제 우리와 함께 해야지요. 경제는 그리 나누고 또 흘러야 하는 것이고, 옹주의 다음은 누가 뭐래도 사례입니다. 그 수혜를 여러분들이 가져야지요! 이 좋은 것을 모두에게 권해야지요! 그리하여, 우리 함께 더 나은 내일을 위해 나아갑시다! 우리를 무시하는 저 답 없는 유자들, 매번 필요할 때마다 우리를 찾으면서도 제대로 된 대우와 대가조차 지불하지 않는 저 관료들. 저들과 굳이 함께 갈 필욘 없습니다. 허니 나와 같이 갑시다.”
“같이....., 정녕 대사농 어른과 같이 말입니까?”
“쉽진 않겠지요. 그러나 이건 진심입니다.”
덜컥-
“가, 같이 가겠습니다!”
당연히 이러한 풍방의 모습에 조금씩 감화되어 반응하는 이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드르륵-
“대사농 어른과 함께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누가 뭐라고 한들, 그의 말솜씨는 제법이었고 그가 포장한 가치는 실질적으로 자신들 가장 좋은 변명거리이자 양심의 가책을 지워내기 합당한 설득을 담고 있었다.
터엉-
“이를 어찌 치워내야 할지 곤란한 와중이었습니다, 한데 대사농께서 이리 몸소 저희를 이끌어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나이다.”
그렇게 주변에서 줄줄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이들이 우르르 풍방에게 예를 표했다.
그들 중에는 실질적으로 풍방의 선동에 끔뻑 넘어간 이들도 있었고, 그 속에 본질을 꿰뚫은 채 자신이 얻게 될 이득이 무엇인지 확인한 이들도 있었다.
허나 뭐가 되었든 이는 당장에 그들에게 더할 나위 없는 득이었다.
당장에 자신들이 감내해야 할 손해와 곤란은 훗날, 어쩌면 멀고도 가까운 미래에 이를 짊어져야 할 사례에 한정된 백성들의 몫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이 처치곤란한 쓰레기가 천금이 되어줄 겁니다, 이 모든 덤터기가 그대들에게 천금의 재화를 선사할 겁니다. 그리고 이러한 가치의 상환은 오직 천하에 우리와 같은 이들만이 할 수 있습니다. 이게 경제고, 이게 우리가 이 나라와 사회에 이바지하는 길입니다.”
그렇게 그 입이 찢어져라 미소를 지은 풍방은, 그리 모여든 사례의 상방의 이들에게 크나큰 충격을 주었다.
그 뒤, 사례 인근에는 엄청난 양의 오수전이 풀리고 있다는 풍문이 들리기 시작했다.
* * *
그리고 낙양 모처.
“예기의 예운편을 보면, 대동에 대한 처음을 이리 말한다.”
대도지행야 천하위공(大道之行也, 天下爲公)
선현여능 강신수목(選賢與能 講信脩能)
[큰 도가 행해지면 전체 사회가 공정해져서 현명한 사람과 능력 있는 사람이 지도자로 뽑히게 되며 신의가 존중되고 친목이 두터워진다.]
“이 말이 뜻하는 바는 무엇인지 알겠더냐?”
“오랜만에 찾아오셔서 어인 어려운 질문이십니까?”
도성에서 말단의 벼슬을 하고 있던 자신의 제자인 부간을 찾아온 갑훈은 실로 간만에 마주하는 제자를 앞에 두고 안부는커녕 전혀 생뚱맞은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답이 먼저니라, 내게 답을 다오.”
“후우, 좋습니다.”
이에 잠시 머리를 긁적이던 부간은 하나의 답을 내어놓았다.
“불계승(不繼承), 가선입(可選入).”
“이어받는 것은 금하고, 가려 뽑는 것은 옳은 일이다.”
“정확히는 이어받는 것은 아니니 금해야 하며, 가려 뽑는 것은 옳기도 또 좋기도 하다는 소립니다.”
하지만 고심 끝에 부간이 내어놓은 그 답이 갑훈에겐 가장 골머리를 싸매는 일이 되었다.
“그게 문제다.”
“설마? 황궁에 드셨다더니, 그 문제를 가지고 나오신 겁니까?”
“네놈은 이를 어찌 아느냐?”
“말단이라도 간혹 궁에 출입할 일은 있습니다. 허니 들려오는 이야기나 분위기야 온전히 모르고 있진 않은 게지요.”
“허 참, 못 보던 사이에 아주 잘 컸구나.”
확실히 세월을 느낄 수 있는 해후였다.
그러나 스승인 갑훈이 바로 본론에 들어가듯 그 제자인 부간 또한 바로 본론에 뛰어들고 있었다.
“그보다도, 대동이라니 정말로 예상치 못했습니다. 솔직히 낭중령께서 계실 당시 작금의 사도께서 신탁통치를 강력하게 밀어붙였다고 했는데 그게 어째서 그랬는지 이제와 설명이 되는군요.”
“허면 네놈은 그게 무엇인 줄 알았더냐?”
“처음엔 그저 외척의 잠식을 막으려는 발판인 줄 알았습니다. 그 때문에 실로 젊은 사인들과 유자들 대다수가 이에 동의를 하며 돌아가신 전임 사도이신 황보숭 장군의 이름을 부르며 찬사를 보냈지요.”
“그래, 나도 처음에는 그 정도 선에서 그치는 것인 줄 알았다. 허나, 그게 아니었지. 황보력은 변했다. 그리고 또 변했지.”
“옥새가 깨진 이후, 한동안 좋지 않은 모습을 보이셨던 것은 압니다. 실로 고생이 많으셨지요. 천하각지에서 이를 두고 아직도 말들이 많았으니 그 권위의 회복을 위해 부던히 노력하셨을 겝니다.”
부간 또한 많은 것은 알지 못하나 그간의 세월 동안 궁을 드나들며 지켜보고 또 깨닫게 된 것들이 많았다.
그리고 이는 갑훈에게 대저 왜 그가 변했는지를 지켜보는 일종의 전환점이 되어주었다.
“황보력의 이야기가 나왔으니 이에 대해 그나마 가까이에서 소식을 들은 네 이야기를 들어보도록 하자꾸나. 대저 왜 그가 변했겠느냐?”
“다시 한번 언급을 드리지만, 옥새의 일이 컸습니다. 물론, 제일 큰 것은 황보숭 장군의 죽음이지만, 당장에 선장이 되어 흔들리며 요동치는 배를 수습해야 했기에 내부 단속에 힘썼지요. 실질적으로 수십이 넘는 이들이 죽거나 그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습니다.”
“거기에 가 문화가 떠난 것도......”
“많은 영향을 끼쳤겠지요. 진짜 홀로서기가 시작된 것이니까요.”
“그 홀로서기가 진정 이상을 향한 집착을 만들었을까?”
“음, 어쩌면 지금까지 내딛은 자신의 행보에 대한 정당화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멋대로 내린 사적인 판단도, 후회되는 과거도, 더는 바꾸지 못할 현실도 그 하나로 모두 대변이 가능하며 설명이 가능하니 말이지요.”
그리고 고심 끝에 부간이 내어놓은 대답은 하나였다.
“내가 틀렸음을 인정할 수 없다는 게냐?”
“자신을 부정하면 자칫 잘못하다간 자신의 숙부마저 부정하게 됩니다. 그리되면 가문의 운명마저 위험해지고, 거기에 이미 황제의 권력까지 앗아온 마당에 다시 이 모든 걸 내려놓기도 뭣한 상황이지요. 거기에 자신을 따르는 청류의 이들까지 그 입장을 난처하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무엇을 위해 달려왔고 무엇을 위한 개혁이었는지 결국 스스로가 알고 깨우쳐야 합니다. 만일, 천하가 이를 되묻는다면 황보력은 그에 대한 답을 해야 하는 입장인 거지요.”
“돌이킬 수 없는 게로구나.”
결국 그가 택한 선택지는 현실에 기반한 판단이란 것인데, 그렇기에 이상에 더 집착한다는 말은 진정 그가 염충이나 가후라는 미몽에서 얼추 벗어났음을 보여주는 반증이 되었다.
“허면 황보력은 실로 정상이다. 아니, 여전히 불안한 듯 보이지만 말 그대로 미몽에서는 깨어난 셈이지. 하지만 그리 찾은 답이 정녕 공자의 대동사상이라니, 실로 만감이 교차하더구나.”
대동사상의 가장 중한 문구는 말 그대로 이 시대에 어울리지 않을 인간의 이상을 담고 있었다.
이는 황제의 자리를 대물림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에게 인정받는 지도자를 뽑아 선출하겠다는 뜻이다.
거기에 소위 만민평등을 운운하며 그 누구도 후(后)와 제(帝)가 되며 이를 넘어설 수 있음을 의미하는데 이는 말 그대로, 고하의 존엄성을 지우는 일이었다.
“천자(天子)에서 하늘(天)을 지워 범인이 남는다(子).”
이는 결국 그에 대한 정통성과 신분과 계층을 비롯해 지금까지 두 차례에 걸쳐 존속한 이 한을, 이상의 집합체였던 유학을 현실로 구현한 이 한을 스스로 부정하는 결과를 낳는다.
“존엄이 사라지고 정통성이 부정되면 필경 사회에 혼란이 찾아온다.”
하지만 그 혼란 이전에 앞서 생각해보아야 할 것은, 과연 모두에게 인정받는 지도자를 선출하는 이들은 누구이며 그리 인정을 받은 이가 과연, 정녕 백성을 포함한 모두에게 인정을 받는 지도자가 될 수 있냐는 소리다.
“결국 이 시대와 백성의 목소리는 묻힌다. 아니, 애초에 있으나 마나 한 이들이 백성이니 이들은 논외야.”
그렇다면 결국, 민심을 운운하며 그 자리에 남는 것은 오직 작금의 황보력을 비롯한 유가 그들 중 청류의 이들 뿐이다.
애초에 호족과 사인들 중에서도 백성을 통제의 대상으로 보았던 법가나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백성을 바라보는 병가와 같은 이들은 모조리 제외를 당한다.
허면 당장에 이를 증명하는 것이 뭐가 있을까?
“향거리선제, 그 하나로 나는 학을 떼었다.”
결국, 거창한 명분보다 사적인 친분이다.
자기네들끼리 후보를 내어놓고 자신들끼리 평가를 한다.
그리 자신들끼리 나눠 먹고 그리 출사한 조정 내에서 서로가 연이고 줄이라 끌어주고 밀어주고 당겨주고 별짓을 다 한다.
“확실히 그 하나만 봐도 알 수 있지요. 그 또한 대동의 일부지만 대동으로 작동하지 않습니다.”
이는 집권 세력의 이들이 멋대로 자신들의 이익을 대변할 인사를 기가 막힌 명분 아래 후보로 내세우겠다는 소리며, 그러한 이들로 채워진 대동 또한 실로 편협한 특정 세력을 위해 존재하는 그들만을 향한 이상향일 뿐이다.
그것도 공자의 가르침을 배웠다는 이들이 그리 나오니, 실로 얼마나 어처구니가 없을까?
“그래서 내가 그 대동을 부수려 한다.”
“스승님.....”
안광이 드러나는 눈빛을 보아하니 이미 갑훈은 각오를 다진 듯 보였다.
“저들이 공자를 가져온다면 우리는 뭘 가져와야겠느냐.”
“하아, 그 빤한 답을 제가 꼭 해야 합니까?”
하지만 예상치 못한 일에 그 인생마저 꼬여버린 부간은 자신의 머리를 쥐어뜯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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