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화 – 거자(去者)는 모든 것을 훌훌 털어버리고 새로운 곳을 향해 떠난다
“전쟁? 전면전? 우습군, 어차피 내가 풍방에게 서신 하나 찔러넣으면 그땐 자네는 더는 오도 가도 못 해.”
“허면 그리하시지요? 그때까진 시간을 벌 수 있으니 제겐 더 유리합니다.”
“가 문화!”
“왜 그러십니까? 아니면 지금 당장 함곡관을 치시지요? 황명을 운운하면 되지 않습니까? 도망자를 쫓는 것에 협조하라 설명하면 그보다 더 좋을 수 없지 않겠습니까?”
“이놈이, 정녕!”
“주 장군, 아니 얼마 전에 승진하셨으니 대장군이 되셨지요? 허나 그 정도 자리에 올랐으면 최소 그 정도 식견은 보여주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네놈이 정녕 죽고 싶은 것이야!”
“세상에 암만 모든 것을 깨우치고 살아도 온 세상이 다 내 뜻대로 돌아가진 않는 법입니다, 주 대장군. 물론, 시도는 좋았지요. 예상 외로 사례의 조당에 꾸준한 복종을 표하는 포홍의 모습이 저도 이상하게 느껴지니 말입니다. 허나 아무리 그래도 그 생각을 단단히 잘못하신 겝니다. 옥새가 깨어진 마당에 대저 그 황명을 뭐로 증명하실 겁니까?”
“.......!”
이미 가후는 이곳에 오면서까지 모든 대처와 상황판단을 끝내놓고 있었다.
그것도 주준이 생각한 것 이상으로 말이다.
“그러는 너는 대저 어떻게 그곳으로 들어간 것이야! 어찌 너는 그리 포홍의 영역에서 그놈들 틈에서 당당히 서 있을 수 있느냔 말이다!”
그렇기에 주준은 다급했다. 그리고 또 억울했다.
가후는 포홍을 적대한 사람이다, 가후는 풍방을 죽이려 했던 사람이다.
한데 막상 신분을 숨기고 함곡관 안으로 들어갔어도 감지덕지인 판에 저리 배짱 좋게 성벽의 위에서 자신을 향해 왈가왈부를 할 수 있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헌데도 함곡관의 성벽 위에 군사들은 그런 가후를 두고서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병사들과 군관들이 즐비한데도 누구 하나 그런 가후를 붙잡으려 하지도 또 말리려는 이도 없었다.
“그야 뭐 그쪽이 알 필요는 없고, 이젠 진짜 안녕입니다. 허니, 가서 사도께 이 사람의 말이나 전해주시지요.”
그리고 그리 주준이 안달이 난 상황 속에서 가후는 그 마지막 자신의 짐을 덜어낼 준비를 마쳤다.
“말?”
“마지막 당부라 하여 할 말을 다 하고 나온 줄 알았거늘, 장군 덕택에 나 또한 죽은 이의 허상 속을 헤집으며 살았던 것을 알았으니 내 최소한의 짐은, 그 모든 응어리를 내 이 자리에서 털어낼 것입니다.”
그래, 결국 주준의 말처럼 자신 또한 염충이라는 이 하나 때문에 여기까지 왔다.
결국 그 앞에 내세운 충정이니 의리니 백성을 위함이니 이 나라를 위함이니 하는 것들은 모두 부질없는 것이다.
“후우, 사도......”
그렇게 가후는 다시 한번 마지막 충심을 담은 충고이자 그가 작금의 난세 속에 살아남아 천하를 쥘 수 있는 대계를 펼쳤다.
“.......주준 장군으로 하여금 대장군부를 부활시키신 것은 실로 잘하신 선택이시옵니다. 권력은 무형으로부터 나오는 만큼 관리가 어렵습니다만, 주준 장군의 군사력이 뒷받침된다면 이 땅에서 어느 누구도 사도께 반발할 이는 없을 겁니다. 그리고 일찍이 소모한 군량을 미끼로 흑산적을 끌어들여 포홍의 하내를 박살 내었으니 하내는 더 이상 여력이 없고, 하동을 잠시 잃었던 대신 하동의 모든 소금을 가져다 바쳤으니 하동에서 생산된 소금은 앞으로 소모될 엄청난 전비를 감당한 자금줄이 될 것이옵니다.”
“가 문화......”
“또한 정원에게 넘긴 오천의 병력의 희생으로 우리는 사연택의 무역로까지 확보해 자금줄마저 생긴 병주라는 든든한 동맹마저 생기게 되며, 그 정원에 귀속된 나머지 흑산적들 또한 한동아는 그의 지배 아래 귀속되어 더는 이 땅에 해를 끼치지 못하겠지요. 잠시 하동을 탐한 여포가 유비를 깨부순다고 한들, 백성들의 반발에 그 땅을 다스리지 못할 것이며 그 유비를 평원으로 보내 원소를 견제하고 기주와 청주에 펑원으로 이어지는 포위망을 구성. 이내 청류의 영향력 아래 우리는 아직도 내전이 지속되는 연주까지 손에 넣을 구상을 마쳐야 합니다.”
“지금 무얼 하고 있는 게냐?”
“그렇게 기주, 연주, 청주를 손에 넣고 병주를 동맹으로 두며 위아래에 자리한 원가를 정리하면 모든 것은 끝이 납니다. 이를 위해선 형주에 자리한 유표를 다독이시고 일찍이 하진의 토벌군에도 참여했고 포홍과 악연으로 자리한 서주자사 도겸과 손을 잡으십시오. 그리 원가의 근거지인 예주를 정리하면 자연스레 조가의 이들 또한 수그릴 것이고 그리되면 그 아래 자리한 양주마저 절로 석권하게 되는 것이옵니다.”
“이 미친놈이 지금 뭘 말하고 있는 게야? 이 정신 나간 놈이 지금.......!”
“그리고 그 끝에 이르러, 포홍을 정리하십시오. 반드시 익주에 자리한 유언과 공조하고, 또 위로는 병주의 정원과 손을 잡고 세 방향에서 그를 압박해야 합니다. 삼보를 집어삼킨 것도 모자라 서역 무역로의 영향을 받아 엄청난 인구와 재화를 쓸어 담기 시작한 옹주는 필경 엄청난 영향력과 지배력을 발휘할 겁니다. 그 콩고물에 수그리며 천하에서 가장 강력한 이에게 복종하기 시작한 량주의 군벌들과 그 너머의 강족과 저족을 비롯한 이족들의 존재마저 잊지 마십시오.”
“가 문화, 정녕 미쳤느냐-!”
“그들이 하나 되면 그 군세는 필경 수십 만을 상회할 것이며, 그들의 강함은 지난날 대장군이 일으킨 토벌군과 회맹군을 합친 것보다 몇 배나 더 강할 것이옵니다. 그리고 이를 상대하기 위해선 옹량주를 제한 온 천하에 전쟁이 끝난 직후, 그리 남아도는 수많은 정병들을 모조리 동원해야 할 것입니다.”
“이......!”
“사도, 우리는 역사의 교차점에 서 있습니다. 새로이 태어날 진나라에 맞서기 위해선 반드시 천하의 모든 곳이 하나 되어 힘을 합쳐야 합니다. 합종군을 잊지 마십시오. 포홍을, 옹주와 량주를 막아내지 못하면 이 천하는 다시금 전국으로 돌아갑니다. 이미 한 차례의 춘추전국을 겪고도 다시금 그 전국을 겪게 됩니다. 그리고 그리 진이 천하를 통일하면, 이 나라는 끝입니다. 유학도, 사대부도, 청류도, 한도 이 땅에 뿌리 내린 모든 것이, 불타 없어질 겁니다. 허면.”
스윽-
그렇게 사례에 자리한 조당을 이끄는 황보력이 확실하게 천하를 쥘 수 있는 그 모든 방안이 담겨있는 그만의 설계와 천하 대계가 함곡관의 성벽 위에서 바람과 같이 흩날렸다.
그리 자신의 모든 짐과 응어리를 털어낸 후련한 모습의 가후는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충격을 받아 그 자리에서 굳어진 주준을 뒤로한 채, 성벽을 터덜터덜 내려왔다.
“자네, 정녕 미쳤는가!”
그리고 그리 힘없이 모든 기운을 소진한 채, 벽을 짚어가며 성벽의 돌계단을 내려온 가후의 앞엔 주준이 했던 말과 거의 같은 말을 다른 목소리로 소리치는 이가 있었다.
“덕분에 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경조운.”
그런 가후의 앞에 여전한 모습으로 서 있는 것은 지난날 영제의 임종을 지켜본 채, 그의 유지를 만천하에 확인시켜주었던 경조윤 갑훈이었다.
그리고 이 눈앞의 갑훈 덕에 가후는 함곡관의 성벽에서 당당히 주준을 만나 그와의 모든 것을, 황보력과의 모든 것을 끝낼 수 있었다.
“이 사람, 살려달라 하더니 나까지 죽음의 구렁텅이로 몰고자 하는 겐가? 그런 게야? 뭐, 진이 부활해? 청류가, 사대부가, 유학이 사라져? 자네 정녕 지금 그게 이 자리에서 입에 담기에 얼마나 가당치 않은 이야기인 줄은 확실히 알고 있는 게야!”
허나 막상 그런 사정을 알고 있음에도 가후는 폭탄을 터트려버렸으니, 오늘날의 이를 용인한 갑훈 또한 이제는 그 책임을 나누어지게 되었다.
“어떻게, 이제는 갑 장사께서도 선택을 하셔야지요?”
그러나 그럼에도 도리어 가후는 이전보다 더 뻔뻔스러운 낯빛을 드러내고 있었다.
“뭐라?”
“실상 이미 알고 계시지 않았습니까? 전임 사도께서 죽은 이후, 그 뒤를 이은 황보력의 폭정이 나날이 심해지는 것. 그리고 그 화살이 애먼 황제를 향하고 있음을, 알고 계시기에 이에 환멸을 느끼고 본래의 자리로 오신 것 아닙니까?”
“그건......!”
그 덕에 당혹을 금치 못한 것은 갑훈이었고, 가후는 아주 정확히 그 연유를 짚어내고 있었다.
“염충의 죽음 이후, 나도 미쳐있었고 황보숭의 죽음 이후, 그 조카인 황보력이 저리 갈피를 잡지 못한 채 흔들리며 점점 더 과격해지고 있습니다. 이미 신탁통치라 하여 황권마저 가져왔으니, 힘도 없는 어린 애 하나 가둬두고 병신 만드는 거야 쉬운 일이지요. 거기에 그 중심을 잡아주리라 여겼던, 황보숭의 빈자리를 채워줄 것이라 좋게 보고 있었던 주준마저 저리 나왔습니다.”
“후우, 그건 자네가 미운털이 단단히 박혀서 그런 게지.”
“예, 제 책임입니다. 복수지요. 각오했었고, 그럼에도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것이 내 품에서 죽어간 염충이 그 마지막까지 바라던 비원이었으니까, 황보숭을 이 시대에 걸맞은 새로운 주군으로 모시고 새로운 세상을 여는 것 그것이 염충이 그토록 바라던 것이었으니까.”
“그래서, 처음은 그리 염충을 핑계로 찾아가 그와의 연고를 만든 게지. 그때 알았어야 했어, 내게 찾아와 뜬금없이 황보숭의 거취에 대해 물었을 때, 그때 깨달았어야 했다.”
갑훈은 지난날을 회상했다.
그리 자신을 찾아온 가후에게 황보숭이 자리한 군영의 위치를 말하지 않았더라면 과연 오늘의 이 일들은 없었을까?
회한이 이는 순간이었다.
“그러고 보니 갑 장사와 제 인연도 꽤나 질긴 편이로군요.”
“그리 부르지 말게. 지금까지 내게 그리 부르는 놈은 포홍, 그놈뿐이니까.”
“그러고 보니 어디 있습니까? 지금?”
“누구, 포홍 말인가?”
“예.”
“당연히 주천군은 지났으니 동탁이 자리한 서역의 끝인 돈황 쪽에......, 한데 이걸 왜 묻는가?”
“가야지요. 갈 겁니다.”
“자네 정녕 미쳤는가! 가면 그 목이 잘릴 것이 빤한데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게야!”
“가면 답이 생기겠지요. 아니, 이미 서로의 죄를 씻겨줄 공은 서로에게 있습니다.”
그와 동시에 가후는 손을 뻗어 자신에게 은혜를 베푼 눈앞의 갑훈을 가리켰다.
“저를 설득시켜 포홍을 위해 일하게 하셨으니, 제가 멋대로 일을 저지르도록 기회를 내어준 죗값은 충분히 용서받고도 남으실 겁니다.”
그리고는 이내 그 방향을 바꿔 자신을 가리켰다.
“그리고 저는 아직도 사례와 옹주 사이에 마음을 정하지 못하는 갈팡질팡하는 경조윤의 마음을, 진심 어린 충정을 얻어갈 것이니 그 완전한 귀속에 의해 제가 멋대로 저지른 일을 용서받을 기회를 얻게 되겠지요.”
“나는 온전히 용서받고, 그대는 기회의 선에서 그치는가?”
“그 기회가 제게는 더 중요합니다. 출셋길의 보장은 아니어도 생명줄의 보장이자 새로운 보금자리에 몸담기 위한 가장 좋은 선택지가 될 것이니까요. 그 기회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죗값을 치르기 위해서라도, 그 죄를 씻기 위해 그들을 위해 일해야 한다는 그것 하나만으로도 그들은 소인을 살려두다 못해 소인을 그 수하로 들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치밀한 계산이 녹아든 그의 판단에 혀를 내두른 갑훈이었다.
“광오하군, 실로 광오한 자신감이야. 그러나 세상 모두가 능력만으로 사람을 쓰지 않는다네.”
“하지만 포홍은 소인을 쓸 수밖에 없습니다.”
“어째서?”
“제 손으로 쌓아 올린 것을 제 손으로 무너트리는 것만큼 가장 쉬운 일은 없으니까요.”
“........!”
거기에 그치지 않는 또 다른 충격은 다시금 갑훈을 놀라게 하였으니, 그는 작금에 자신의 눈앞에 자리한 이가 대저 세상을 어찌 사는지 실로 궁금해졌다.
도저히 정의를 내릴 수 없는 자, 세상을 사는 기준조차도 없는 듯 여겨지는 그는 가히 일반적인 사람의 틀을 한참이나 벗어나 자리하고 있었다.
“실로 재미있지 않겠습니까? 지금까지 제가 쌓아 올린 모든 것, 저 성벽 위에서 황보력에게 내어준 천하를 얻기 위한 그 대계마저도 제 손에 의해 모조리 무너질 겁니다. 포홍이 어찌 이를 거부하겠습니까?”
“자네는......, 실로 무서운 사람이야.”
“무섭다, 무섭다 하지 마십시오. 이미 한배를 탄 사이이니, 이것으로 저희의 관계는 교착이자 유착이 되었습니다.”
“자네, 정말!”
“허면 몸조리 잘 하십시오. 만일 풍방을 비롯한 이들이 찾아오거든 가후를 설득시켜 포홍에게 직접 보냈다고 하십시오. 허면 풍방 또한 갑 장사를 더는 어쩌지 못할 겁니다.”
“하아, 경조윤이라니까.”
거기에 능글맞을뿐더러 뻔뻔한 면까지 있으니 가히 감당할 수 없는 이에게 코가 꿰인 것을 인지한 갑훈은 그 머리를 긁적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세간의 이들은 저희의 관계를 모르지요?”
“알아도 밝히지 않았어. 그 어느 쪽이든 불똥이 튀는 것이 싫었으니까. 이전에도 또 지금에도.”
“좋습니다, 뭐 지금까지야 그렇다고 치지요. 허나 앞으로는 달라져야 합니다. 저도 또 경조윤께서도 말이지요.”
“나더러 이제와 포홍 놈에게 수그리란 말인가?”
“이미 직책상으로도 상급자가 아닙니까?”
“자네는 왜 포홍을 택했나? 다른 선택지가 없는 것도 아니었고.”
“미련이 없으니 제일 편한 선택지를 고르게 되더군요.”
“뭐라? 편해?”
“제가 기존에 쌓아 올리는 것을 무너트리는 일이야 그리 어렵지 않으니 중노동이 필요치 않고 밥벌이를 하는 것 또한 뭐 서역도호부의 확장과 관리 정도면 충분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사람이 자기가 할 일을 너무나도 잘 알아도 할 말이 없는 법이다.
그리고 이쯤 되면 애초에 가르치기는커녕 누가 떠받들어도 이상하지 않을 고위 인력이, 그것도 자신의 프로젝트를 도맡아 진행하는 일이니, 만일 포홍이 이 자리에 있다면 가히 만세를 부르며 자발적 스카웃에 대한 환희를 보낼지도 모를 일이었다.
허나 그거야 뭐 끝에 가봐야 할 일이고, 막상 포홍이 어떨지조차 예견할 수 없는 갑훈은 그저 자신이 사고할 수 있는 선에서, 그가 떠올린 그만의 걱정거리를 예견할 뿐이었다.
“이미......, 다 생각을 해두었군. 그러나 그리 되면.......”
“지난날 이 나라의 경제를 주무르던 대사농이었던 풍방과 충돌한다, 이 말씀이지요?”
“후우, 그래.”
갑훈이 걱정스러운 부분은 바로 이것이었다.
일찍이 가후가 자리한 사례의 조당에서 벌어졌던 파벌의 정리 또한 실상 이러한 측면을 은연중에 담고 있으며 거기에 가후가 등장하기 이전에 포홍을 대신해 거진 모든 경제적 측면을 관리하는 이는 그 누구도 아닌 풍방이었다.
이미 지난날 옹주가 성립된 이래, 그가 옹주에 자리하게 되면서 수많은 이들이 포홍을 만나지 못한다는 핑계로 포홍이 아닌 그에게 몰려들었던 연유 또한 이것이었고 말이다.
그리고 새로이 포홍 측에 몸을 담은 가후가 가히 기존의 그가 도맡았던 영역이나 다름없는 서역도호부, 경제적 측면의 일부를 가져가게 된다면 이는 가뜩이나 그 사이가 좋지 않은 이들의 예견된 충돌을 부추기는 꼴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그 속에 과연 가후가 가만히 있으랴?
“제발 그때가 찾아왔으면 좋겠습니다. 아직은 갈 길이 머니 말입니다. 허면, 제가 기틀을 닦아 놓을 터이니 그때 오시시지요.”
투욱- 툭-
허나 그러한 걱정에도 가후는 별일이 아니라는 듯, 그저 손을 들어 갑훈의 어깨를 털어내는 것으로 그에 대한 걱정을 대신 씻어냈다.
그와 동시에 천천히 그 몸을 돌려 서쪽으로 나아가니, 그는 그렇게 갑훈의 시선에서 점점 더 멀어지고 있었다.
“잠깐!”
“아직 하실 말씀이 남았습니까?”
“말을 내어주지. 호위도 붙여주겠네.”
“역시, 상황판단이 빠르십니다.”
이미 그럴 줄 알고 있었다는 듯, 그 입가에 미소를 드리우는 가후를 보며 갑훈은 자신의 판단을 후회했다.
그러나 기왕지사 이미 터진 일에 이리 한배를 탄 이상, 또 반강제적이나마 자신 또한 그리 포홍의 앞에 수그리며 충성을 다해야 하는 이상 갑훈이 자신을 위해서도 또 자신과 같은 이들에 대해서도 내려야 할 선택지는 빤한 것이었다.
“자네의 말대로 세상이 기울어지고 변할진 몰라도 당장은 그에 적응 못 하는 이들의 도피처는 한곳이라도 있어야 되겠지.”
“그 처마는 제가 아닌 경조윤께서 되어주셔야 합니다.”
“아니, 내가 권력을 가지면 나 또한 변할 게야. 청류의 세상을 그리겠지. 그리 나를 미워하는 그놈, 그 어릴 적에 그놈을 내버리고 온 내가 또다시 그놈을 그리 상처입힐 수 없어.”
“........”
“나는 그놈 앞에 죄인이야. 멋대로 정을 품고 들여놓고 그 애를 이용해 먹은 파렴치한 인간이지.”
“그 죄책감 지난날 동씨와 하씨의 분쟁과 더불어 동탁과 포홍이 난을 일으킬 적에 이미 치르지 않았습니까?”
“천하가 갈라지는 것을 지켜봤지. 이름난 이들이 사라지고, 기존의 이들이 무너지며, 그리 세상이 기울어지는 것도. 물론, 잠시나마 그대와 황보숭과 같은 이들이 있었지만, 막상 그들 또한 이제는......”
“후후후, 이거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래서였을까? 결국 그 모든 것이 염충에 씌인 자신에 의한 것임을 인지한 가후는 알다가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자조적인 웃음과 함께 사죄를 건넸다.
“아니야, 그 또한 업보라면 업보인 게지. 죽은 이는 죽은 이일 뿐, 더는 신경 쓰지 말게. 차라리 산 자에게 신경을 쓰게. 그 미안함에 포홍을 배신할 수 없게 된 나처럼, 그 때문에 이리 자네에게 코가 꿰인 나처럼.”
“명심하지요. 이리의 품에도 사람을 포용할 수 있는 온기가 있음을 만천하에 알리겠습니다.”
“결국 진나라도 사람 사는 곳이지. 법가가 선다 한들, 나는 각오하겠네.”
청류이자 사대부이며 유자인 그가 내린 그만의 선택.
설사, 이 땅에 자신들의 쌓아온 모든 것이 사라질지라도 자신은 어떻게든 그 명맥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했다.
“꼭 그렇게 된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그저, 당장은 또 다른 한이 자리하는 가능성이 높으니 그저 마음 편히 먹으십시오.”
“자네와 함께하는 황보숭이 어디 한순간이라도 그 마음을 편히 먹었던 적이 있던가?”
“산 자에게 신경을 쓴다면 이전과는 다르지 않겠습니까?”
“그렇겠지.”
“허면, 부디 돌아올 때까지 몸 보증하시길 바랍니다.”
그렇게 가후는 갑훈에게 넘겨받은 병사 일부를 호위 삼아 그들과 함께 서쪽을 향해 내달렸다.
- 작가의말
드디어 명절 연휴가 끝났습니다.
다들 기분 좋은 명절이 지나셨기를 바랍니다ㅎㅎ
그리고 이제야 주인공의 등장이 가까워졌네요. 여기까지 참 오래 걸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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