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상치 않아.
“어으...”
어제 일찍 들어와서 푹 잤더니 되려 몸이 쑤신다.
“오늘이 평일인가?”
임종훈네 회사에 들어와선 평일 주말 가릴 거 없이 일을 받을 때만 왔다갔다 하다 보니 더 이상 평일과 주말을 구분할 수 없게 되었다.
일이 없다면 맘대로 쉬어도 되니 나쁜 건 아니지만 그래도 뭐냐. 뭔가 다른 사람들과 다른 삶을 사는 거 같아 가끔은 이질적인 기분이 들곤 한다.
‘토요일...’
시간은?
“7시라...”
나는 스마트폰을 들고 거실로 나와 소파에 앉았다.
한 5분을 그렇게 멍하게 있다가 문득 어제 귀찮아 올리지 않았던 커튼 때문에 거실로 약간 들어온 햇빛을 발견했다.
발견했다기보단 인식했다랄까.
그리고 그 햇빛으로 인해 둥둥 떠다니는 먼지도.
“오늘 미세먼지가 많나?”
그런데 미세먼지는 눈에 안 보이는 거 아니었나.
띠리링-.
일단 티비 옆에 있던 공기청정기를 가동시킨 뒤 다시 소파에 앉았다.
위이이잉.
[ 쾌적 ]
그다지 먼지가 많지는 않았는지 공기청정기 소음이 거슬릴 정도는 아니었다.
“평화롭네.”
‘그런데 왜 이렇게 할 일 없는 사람이 된 거 같지.’
“내가 할 게 뭐 있더라...”
짝-.
나는 박수와 함께 내가 해야 할 것들을 떠올렸다.
“어디에 좀 써놔야겠는데.”
언제든 확인할 수 있어야 하고 들고 다님에 있어 불편하지 않아야 하며 빼먹지 않아야 한다.
“종이는... 들고 다니기 귀찮고.”
종이를 가지러 가려던 몸을 다시 돌려 소파에 앉았다.
“휴대폰...? 바탕화면에 적는 건 좀 그렇고, 메모장은... 매번 키기 귀찮은데.”
나는 곰곰이 생각했다.
“뚱이...?”
아니다. 그럼 뚱이가 날 한 대 칠 거 같아.
“그럼...”
나는 내 기준 대각선 왼쪽 방향에 있던 하얀 패널을 쳐다봤다.
.
.
.
[ 초코쿠키 : 작가님. 슬슬... ]
ㄴㄴㄴ [ tmdgns123 : 저... 이러다 하차할지도...? ]
ㄴㄴㄴㄴㄴ [ 새우젓닌 : ㅋㅋㅋㅋㅋㅋㅋ ]
[ 맹구수호자 : ㄷㄷㄷㄷ 이걸 이렇게... ]
[ 한국호두과자협회 : 그저... 개좆병종훈!]
ㄴㄴㄴ [ 김김김김 : 대단하다! 씹종훈! ]
ㄴㄴㄴㄴㄴ [ oled111 : 이래도 참는 성진이는... ]
ㄴㄴㄴㄴㄴㄴㄴ [ 푸른소나무 : 실수로 다른 회차 눌렀는데 사장님 민심 왜 이리 씹창남? ]
.
.
.
[ 렌고쿠 쿄쥬로 : 화염의 호흡 제 1형! 시라누이!!! 푸화아아악!!!(별점 썰리는 소리) ]
ㄴㄴㄴ [ 빅궷츼 : 이 새낀 맨날 여기 있노 이 정도면 걍 찐팬 아님? ]
ㄴㄴㄴㄴㄴ [ tndud100 : ㄹㅇㅋㅋㅋㅋㅋㅋ ]
[ 말랑이 : 성진게이야... ]
ㄴㄴㄴ [ 레이디구구 : ㄹㅇ... ]
.
.
.
어느 순간부터인지는 모르겠으나, 저렇게 하얀 패널에 댓글들이 쫘르륵 달리는 걸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다 보면 이 녀석들 말하는 게 서로 다르다.
‘마치 지들 할 말만 하는 것처럼.’
즉, 지금 내 행동을 보고 저렇게 댓글을 달고 있는 건 아니라는 소리다. 각기 다른 시점이겠지.
“참, 계속 봐도 적응은 안 되네.”
별 별 게 다 일어나는 세상이라 할지라도 저렇게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이, 애초에 사람인지 아닌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저렇게 보고 있다고 생각하니 무시하려고 노력을 해봐도 조금은 시선이 끌리기 마련이다.
‘게다가 반응도 직접 볼 수 있으니...’
도움도 여러 번 받긴 했지만, 그래도 없는 편이 더 낫지 않은가.
“하지만 그렇게 하진 못하고...”
억울해서라도 하얀 패널을 메모장으로 써야겠는데.
생각해보니 하얀 패널만큼 메모장에 알맞은 게 없다.
굳이 갖고 다닐 필요도 없고, 원할 때마다 주변을 둘러보면 어디에든 있으니, 제격이다.
후웅-.
나는 재빨리 하얀 패널에게 달려들어 팔을 휘둘렀으나, 손에 잡히는 건 없었다.
‘그렇다고 도망가지도 않고.’
하얀 패널은 그냥 내 앞에 가만히 있었다.
“어떻게 하면...”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그냥 손으로 하얀 패널을 잡았다.
엥.
“잡았네?”
이게 그냥 잡는다고 잡힐 줄이야.
나는 하얀 패널을 잡은 채 위아래로 들었다 내렸다가도 해보고, 옆으로 휘적거리기도 해봤다.
그런데 마치 손에 아무것도 없다는 듯 무게는 느껴지지 않았고 종이를 잡은 채 휘적거리기만 해도 느껴지는 공기저항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정체가 뭐야?’
일단 하얀 패널을 들고 다시 소파에 앉은 뒤 소파 앞 낮은 책상에 올려놨다.
여전히 댓글들은 계속 올라오는 상황.
이 시끄러운 댓글창을 날리고 메모장으로 쓰면 딱 좋을 것이다.
“음...”
에라 모르겠다 식으로 하얀 패널을 손에 잡는 데 성공한 상황이라 머릿속은 물음표로 가득 찬 상황이었다.
여태껏 내가 거의 절하다시피 부탁을 해도 잡히지 않던 게 갑자기 이제 와서 이리 허무하게 잡을 수 있게 되니 참...
“혹시 이것도?”
나는 스마트폰 화면 넘기듯 하얀 패널에 검지를 대고 왼쪽으로 슥 밀었다.
“왜 되냐고...”
하얀 패널을 밀자, 댓글창은 옆으로 밀리고 말 그대로 하얀 패널이 돼버렸다.
“근데 펜은...”
뭔가 착착 되긴 하는데 쓰는 건 어디서 구하지?
‘그냥 펜을 쓰면 되는 건가?’
뭔가 그건 안 될 것 같았기에 몸을 움직이는 수고를 들이진 않았다.
“흐음...”
한 5분 동안 하얀 패널과 눈싸움을 한 결과,
“뭘로 써야 돼?”
얻은 건 없었다.
‘그래도 지금까지 내가 원하는 대로 된 걸 보면 잘~ 하면 쓸 수 있을 거 같은데...’
상식적으로 갑자기 손으로 집을 수 있게 되고, 갑자기 화면을 밀 수 있게 됐는데, 갑자기 쓸 수도 있지 않겠는가?
물론 이 세상이 비상식적이긴 하다만.
나는 계속 의미없는 혼잣말을 이어갔다.
“어떻게 해야 할까... 뚱아. 뭐 좋은 방법 없니?”
어.
“뚱아. 펜으로 변해봐.”
툭.
내 말에 뚱이로 추정되는 펜이 공중에 생겨난 뒤 손에 떨어졌다.
딸깍-.
윗부분을 눌러 심을 나오게 한 뒤 하얀 패널에 대고 글씨를 써봤다.
[김성진]
“왜 써지지.”
전에 데이빗 우든과 마주할 때 뚱이를 처음 만나면서 하얀 패널의 선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건만, 그게 사실까진 아니어도 하얀 패널과 뚱이 사이에 어느 정도 연관성은 있는 모양이다.
“일단 중요도 순으로.”
뭐가 됐든 하얀 패널과 뚱이도 내가 알아야만 하는 대상에 포함돼 있으니, 우선 지금 내가 해결해야 하는 순서대로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1. 조봉식 건
2. 운명
3. ‘주인공화’
4. 하얀 패널
5. 내 능력
6. 뚱이
대충 큰 틀로 적어봤더니 이 정도가 나왔다.
사실 큰 틀이라고 하기에도 애매한 게, 이 여섯 개 전부 다 연관성이 있다.
즉, 하나를 해결하려면 나머지 것들도 전부 다 해결하는 게 필요하단 소리다.
아닌가?
다시 생각해보니 하나만 해결해도 나머지가 술술 풀린단 소리와 다를 바가 없다.
‘개꿀인데...?’
이 여섯 개에서도 실제로 중요한 건 조봉식, 해방 단체와 관련된 것밖엔 없다. 이들의 문제는 실제로 지금 관련자들이 고통받고 있는 중이니 빨리 해결해야하는 건 당연하지만, 나머지 다섯 개는?
‘죽기 전까지만 해결하면, 아니, 솔직히 몰라도 큰 문제는 없다.’
‘주인공화’의 비밀이든, ‘운명’이 날 어디론가 이끄는 것이든 뭐든 간에 내게 딱히 해가 되진 않는 상황이니, 굳이 이것들을 {알아야만 하는 것}에 적어놓은 건 단순한 내 호기심이라 할 수 있겠다.
“대충 이 정도면 되겠지.”
나는 뚱이를 책상에 내려놓은 뒤 하얀 패널을 손에 들어 올렸다.
“좋아.”
그대로 하얀 패널을 휙 던지니, 하얀 패널은 다시 내 기준 대각선 왼쪽에 날라가 고정되었다.
“넌 이제 메모장 역할이나 해라. 댓글은 나중에 직접 만나서 들으면 그만이거든.”
‘봐 봤자 신경쓰이기만 할 뿐이고.’
“후...”
오랜만에 일찍 일어났건만, 시계를 보니 벌써 8시가 넘은 상황이었다.
“밥이나 먹지 뭐.”
***
나는 대충 아침을 먹고 대충 옷을 갈아입은 뒤 임종훈의 사무실로 향했다.
똑똑똑.
안쪽에서 들어오란 소리가 들린 뒤,
벌컥.
“오늘은 표정이 좋아보이시네요?”
“어제는 뭐 안 그랬습니까.”
어제 똥씹은 표정으로 나가던 게 누구더라.
나는 작은 냉장고에서 콜라 두 캔을 꺼낸 뒤 하나를 임종훈에게 건넸다.
치익-.
“그래서, 어제 일은 잘 끝내셨습니까?”
“끝냈는데, 못 끝냈습니다.”
임종훈은 콜라를 마시다 말고 머리 위에 물음표를 띄웠다.
“원래 있던 문제는 해결했는데, 하나가 또 생겼단 겁니다.”
“음... 그런데 아침 일찍 여기 온 거 보니깐 저랑 뭔가 관련이 있는 겁니까.”
“아니, 그건 아니고. 도움ㅇ...”
“바쁩니다.”
“에이. 거 참.”
말은 이렇게 하지만, 마지못해 도와주는 게 임종훈이다.
임종훈은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 의자에서 일어난 뒤 내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뭔데요. 빨리 끝냅시다. 오늘도 일이 산더미인데.”
“아니 뭐, 사장님이 직접 뛰시란 건 아니고, 요거요거. 두뇌를 좀 빌려달란 말입니다.”
“그래서 뭔데요. 뭔데 이리 혀가 길어.”
나는 주변을 둘러보며 어딘가에 있을 하얀 패널을 찾고 있었다.
“왜, 왜요. 주변에 뭐 있나?”
“있는데... 보이실려나.”
‘저기 있다.’
나는 내 기준 남서쪽에 있던 하얀 패널을 발견하곤 염동력으로 왼손에 가져왔다.
그리곤 아무렇지 않게,
‘잡았다.’
나는 하얀 패널을 휘휘 왔다갔다하며 임종훈에게 말했다.
“이거 보이세요?”
“... 갑자기 뒤를 쳐다보며 손을 뻗더니 저한테 이거 보이냐고 하면 제가 뭐라 반응을 해야 합니까.”
“안 보이시나 보네.”
굳이 안 보여도 상관은 없다만, 하얀 패널이 보이기만 한다면 이번 일에 임종훈의 관심이 커지게 되면서 상당 부분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거다.
나는 책상에 하얀 패널을 내려놓은 뒤 째려보듯 노려보았다.
“?”
“기다려보세요.”
네 입장에선 미친놈처럼 보이겠지.
하지만 천재는 어느 시대에서든 이해받지 못하는 법.
‘보여라보여라보여라보여라.’
아무 말없이 하얀 패널을 노려보기를 10분,
나는 뻘쭘해서 고개를 못 들어올리고 있었다.
‘그런데 왜 말이 없지?’
보통 같으면 “장난치지 말고 꺼지세요.”라거나 “뭐 몰래카메랍니까?”라고 할 임종훈인데.
나는 슬며시 하얀 패널에 고정돼있던 시선을 임종훈 쪽으로 옮겼다.
‘뭐야.’
임종훈이 놀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제가 미친 게 그렇게 놀랄 일입니까?”
“아니 그게...”
“거 사람 섭섭하게, 그냥 미친놈이라고 하세요.”
“아니... 이거 뭡니까?”
이게 뭔데...
임종훈의 시선은 정확하게 하얀 패널을 향하고 있었다.
“이거... 보여요?”
“어... 보이네요...”
‘왜 보이지?’
오늘은 정말 아침부터 심상치가 않다.
잡히지 않던 하얀 패널이 잡히고,
손으로 미니 댓글창에서 메모장으로 바뀌고,
이젠 다른 사람 눈에도 보인댄다.
오늘 하루.
심상치 않다. 심상치 않아.
- 작가의말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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