돼지바.
내 시야에 땅에 두 손을 짚은 채 울면서 웃고 있는 조봉식과, 그를 아무 말없이 바라보고 있는 문수환이 들어왔다.
언제부터 둘이 알게 된 건지는 모르겠으나, 말투나 행동에서 둘의 관계는 꽤 오래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마치 나와 철중이 형의 관계랄까.
단순한 고용 관계라기보단 동네 형 동생에 가까운 모습같다.
저런 문수환은 지금 무슨 기분일까.
‘조봉식을 이해해줄 것인가, 배신감에 사로잡힐 것인가.’
나는 일단 조봉식의 말도 안 되는 부탁을 들어줄 생각이 없었기에 단호하게 거절했다.
“아니요. 전 절대 당신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을 겁니다.”
“왜... 왜...? 그, 그렇지. 내가 수환이를 시켜서 그 희원이라는 꼬마애도 이용했고, 사람들도 여럿 죽여댔다. 네 입장에서 날 죽이는 게 그 뭐냐... 기분 푸는 거에도 좋고, 사회를 건강하게 만들 수 있지 않겠어?”
“사람이 하지 않던 말을 하면 누가 고이 다 듣고 있을까요.”
“그, 그럼 수환아... 너라도, 내 부탁을 들어주면 안 되겠냐...?”
어차피 문수환이 부탁을 들어준다고 해도 내가 막을 거고, 애초에 문수환이 저 부탁을 들어주진 않을 거 같은데.
‘배신감이든, 조봉식을 생각하는 마음에서든 말이야.’
어떤 감정이고, 어떤 기분인지 문수환의 얼굴만 봐서는 알 수 없는 상황에, 문수환은 말없이 무릎을 굽히며 조봉식과 시선을 맞췄다.
“진심입니까. 부대표님을 죽여달라는 게.”
“그래... 난 지쳤고, 최소한 내 가족이라도 살리고 싶다. 수환이 너에겐 정말로 미안한... 말이지만... 부탁한다...”
문수환은 조봉식이 건넨 손을 자신의 두 손으로 잡은 채 고개를 한 번 아래로 숙였다가, 조봉식을 향해 웃는 표정을 지었다.
“네. 그것이 부대표님의 진심이라면야.”
“고, 고맙다... 고마워...”
‘이해심이 배신감을 이겼군.’
문수환에게 있어 조봉식의 절망감과, 자신과 해방단체 동료들보다 가족들을 우선적으로 챙기는 가장의 그서은 문수환이 조봉식에게 갖고 있는 친근함, 존경심을 뛰어넘진 못한 모양이었다.
하나 여기에 내가 있으므로.
“문수환. 넌 그 부탁을 들어줄 수 없다.”
“왜. 너가 여기 있어서?”
“그것도 맞고. 넌 능력이 안 된다.”
능력이 후달린다는 말을 듣자 문수환은 코웃음을 쳤다.
“하! 너 나한테 꼼짝도 못 한 거 기억 안 나냐?”
“잘 기억나는데. 그래도 넌 안 돼.”
나와 문수환의 능력차를 따지기 이전에, 시간과 관련된 문제에서 문수환은 자유롭지 못하다.
나와 문수환의 첫 대면에서도 나는 문수환을 알고 있었지만 문수환은 나를 몰랐다.
나조차도 조봉식의 계획을 진행한다고 가정했을 때 계획의 성공을 확신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과연 문수환이 조봉식을 죽이는 게 문제 해결로 이어질 지는 미지수다.
그리고 능력차로 따졌을 때, 아직 나와 문수환 중 누가 더 우위에 있는지는 확인하지 못한 상태이나, 까짓거 뭐 해보면 되겠지.
나는 오른손을 마치 문고리를 잡듯 오므린 뒤 시계 방향으로 반바퀴 돌렸다.
“어어...!”
우리 셋의 몸이 기우뚱해지는 것처럼 기울다가, 다시 중심을 잡을 수 있게 되었다.
“뭐, 뭐지...?”
“하늘색이...!”
그와 동시에 낮임을 확실하게 알려주던 푸르른 하늘의 색깔이 어느덧 주황색으로 변하며 시간이 바뀌었음을 알려주었다.
“너... 우리한테 거짓말 친 거냐? 시간을 어떻게 돌리는지 모른다고?”
“아니? 몰랐는데, 그냥 이번에 해보니깐 된 거야. 아마 2025년으로 돌아왔을 거다.”
어쩌다 보니 문수환, 조봉식과 대립이 된 상황.
문수환의 손이 움직이려 하자, 나는 먼저 검지만을 움직여 문수환을 벤치에 앉혔다.
“크윽...!”
“김성진이... 힘을 숨기고 있던 거냐...?”
“나도 잘 모르겠다니깐요?”
애초에 내 능력도 모르는데, 내가 얼마나 센지 어떻게 알아.
‘이렇게 하지 않는 이상 말이야.’
나는 다음으로 조봉식을 문수환 옆에 앉혔다.
“윽...!”
“몸이... 움직이질 않네...”
“이제 알겠냐? 넌 나한테 안 돼. 그러니깐 조봉식 씨의 계획은 내가 있는 한 이루어지지 않을 거다.”
그러면서 나는 염동력으로 같이 돌아온 비닐봉지를 오른손에 가져왔다.
‘다 녹았네...’
비닐 안의 아이스크림을 꺼내 보니 이미 다 녹은 상태라 밑부분이 빵빵해진 상태였다.
이대론 다시 얼려도 먹기엔 불편할 텐데.
“야. 그것도 녹기 전으로 시간을 돌리면 되잖아.”
“입은 움직일 수 있나 본데. 그런데 어떻게 시간 돌리는지 까먹었다. 너가 어떻게 못하냐?”
“그걸 까먹을 수도... 아니다. 줘 봐라.”
나는 둘의 행동 제한을 푼 뒤 문수환에게 비닐봉지를 건넸다.
착. 착. 착.
문수환은 또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를 부적 세 개를 아이스크림에 각각 붙였다.
치이이이-.
그러자 부적이 타면서 아이스크림이 담겨 있는 비닐이 세로로 길게 늘어났다가 다시 줄어들었다.
“여기. 여깄습니다.”
‘왜 내가 메로나지?’
조봉식은 비비빅, 문수환은 돼지바, 나는 메로나였다.
“야. 돼지바 내놔라.”
“내가 얼렸냐. 니가 얼렸냐. 그리고 내 돈 주고 사 온 거야. 이 새끼야.”
“뭐? 함 더 멈춰줄까?!”
나와 문수환이 아이스크림을 갖고 옥신각신하자,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조봉식이 얕게 헛웃음을 내뱉었다.
“왜요. 웃겨요? 아깐 그렇게 진지하더니, 어떡하나. 분위기 다 흐트러졌는데.”
“아니... 흐하하하하... 웃기네. 참 웃겨.”
조봉식은 한 손에 비비빅을 든 채 노을을 바라보며 웃었다.
“하하하하하!”
나는 그 틈에 문수환과 나의 아이스크림을 바꿨다.
“야 야...! 이 씨...”
“적당히 눈치 챙겨? 흐흐흐.”
문수환은 당장 일어나서 뺏으려다가도 옆에 앉아 웃고 있는 조봉식을 보곤 그냥 메로나를 먹기로 한 것 같았다.
지이익-.
나와 조봉식이 비닐을 뜯자, 문수환이 힐끔 눈치를 보다가 비닐을 뜯고 아이스크림을 먹기 시작했다.
웃는 걸 멈춘 조봉식은 아이스크림을 먹다가,
“수환아. 미안하다. 너무 나만 생각했던 것 같다.”
“뭘요. 부대표님 힘든 거 당연한 건데.”
‘왜 이렇게 훈훈해?’
조금 전까지 나를 죽여줘라 한 사람이 맞나.
뭐, 이 훈훈함이 나쁘진 않다.
화르르륵-.
나는 막대에 붙어있는 조그마한 초코 부스러기마저도 다 해치운 뒤 막대를 불태웠다.
“그냥 버리지. 왜 태우고 지랄이야. 지랄은.”
“야. 임마. 바르고 고운 말 쓰라고. 욕하지 말고.”
내 말이 틀린 말은 아니었던 지라 문수환은 굳이 반박하지 않았다.
나는 이제 비비빅을 거의 다 해치운 조봉식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는 아이를 가져본 적도, 또 소중한 누군가를 잃어본 적도 없기에 당신의 슬픔에 완전히 공감하진 못합니다. 하지만 오늘 당신의 얘기를 들으면서 적어도 당신ㅇ...”
“야. 서론이 왜 이렇게 길어. 후까시 잡지말고 본론이나 말해.”
“수환아...”
“아... 예.”
나는 문수환을 한 번 쳐다봤다가, 다시 시선을 돌렸다.
“오늘 당신의 얘기를 들으면서 적어도 당신이 도망자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말은...?”
“‘주인공화’를 없던 일로 해달란 부탁을 들어주겠단 말이 아닙니다. 나는 그 뒤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든 간에 당신이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채 죽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네가 내 부탁을 들어주지 않는다면, 과연 앞으로 가족들을 살릴 기회가 있을까 싶다. 그럴 바엔...”
“아뇨.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내 말을 듣고 있던 문수환이 머리 위에 물음표를 띄웠다.
“그럼 뭐 어떡한다는 얘기냐?”
“뭐긴. 전부 다 구하겠단 얘기지.”
“하지만 난... 더 이상 힘 낼 그게 없다. 그만 힘들고, 그만 슬퍼하고 싶다. 네가 우릴 위해 도와주겠단 소리는 참으로 기쁘지만, 난 너무 지쳤어.”
과연 내가 조봉식의 마음 속 불씨가 완전히 꺼지기 전에 모두를 구할 수 있을까.
아직 모르는 게 투성이 일 텐데도?
마음 한 편에는 너무 일을 크게 벌리는 게 아닌가 하는 불안감도 있었지만, 그래도 눈앞의 이 사람들을 모른 척 하기란 불가능하였다.
“몇 년, 몇 년까진 버틸 수 있겠습니까.”
“그건 내가 알 수는 없는 법이지. 하루에도 마음이 휙휙 바뀌기 마련이라고.”
“최대한 빨리. 최대한 빨리 방법을 찾겠습니다.”
조봉식은 막대를 만지작 거리다가, 내게 말했다.
“굳이 내가 죽는 걸 보기 싫어서 그런 거라면, 정 이렇게까지 우릴 도와주지 않아도 돼. 아까 내가 말했듯이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옅어진 건 사실이니까.”
“하지만 아까 가족 얘기하니깐 거의 울 던, 아니, 그냥 울던데요.”
“가족을 볼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게 내 목숨을 대가로 할 정도까진 아니게 되었단 소리다.”
“그럼 아까 조봉식 씨 스스로 죽여달라고 한 건 뭡니까. 왜 이렇게 말이 앞뒤가 안 맞아요?”
“원래 사람은 모순투성이인 법이다. 지금은 이렇게 노을도 보고, 니들 다투는 것도 보니깐 마음이 편해져서 그런 거고, 아까는 아까대로 마음이 급해져서 그런 거고. 오래 사니깐 시간이 전부 다 해결해주지는 않지만, 그래도 대부분은 해결해주는 거 같더라.”
왜 갑자기 현자가 된 거지?
죽음을 한 번 찍어 먹고 오더니 삶의 지혜를 얻게 된 건가?
“그럼 다행이네요. 좀 늦어도 되죠?”
“뭔 말을 못하겠네. 아무튼, 더 이상 죽을 생각은 없다. 뭐 일을 관둘진 몰라도. 그러니깐, 너무 우리 일에 네 삶까지 끌어다 쓸 필요는 없다고.”
“뭐, 낯간지럽지만, 그래. 성진아. 네 일도 아닌 거, 자기 일처럼 생각해서 도와준 건 참 고맙다.”
“왜 비꼬는 거 같지?”
“사람이 말을 하면 임마. 아무튼, 부대표님 말대로, 막 네 삶 제쳐두고 우리 일 도와줄 필요는 없는 거 같다. 내가 생각해봐도.”
서로 말하다 보니, 분위기가 차분해졌다.
“그럴 생각은 애초에 없었는데?”
“에휴. 됐다. 됐어.”
“나도 내 목숨 닳아가면서 도울 생각 없어. 없습니다? 예? 그래도 좋은 게 좋은 거다. 뭐 이렇게 생각하거든요. 그러니깐 당신들 돕는 겁니다. 당신들이 막 사람들 등 처먹고 그랬으면 안 도왔어.”
“우리가 그렇게 보이냐?”
“어.”
문수환은 피식 웃다가, 벤치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내게 손을 내밀었다.
“잘 부탁한다.”
“나야말로.”
텁-.
나는 문수환의 손에 돼지바 비닐을 넘겼다.
“쓰레기 잘 버리고. 어?”
“지 걸 남한테...”
“도와주지 말까?”
“아으 확...”
나는 이마에 검지와 중지를 댄 채 둘에게 말했다.
“뭐 도움이 될 만한 거 찾게 되면 제가 그쪽으로 가겠습니다.”
“그래. 일이 다 끝나고 나면, 보수는 뭘 원하든 다 주마.”
“보수는 이미 받았는데요?”
조봉식이 어리둥절해하자, 나는 집으로 순간이동 하기 전, 왼손으로 문수환의 손에 있던 비닐을 가리켰다.
“돼지바요.”
- 작가의말
슬슬 결말부로 들어서고 있습니다. 12월 말~1월 초에 끝날 것 같습니다.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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