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상천하(天上天下) 유아독존(天上天下).
나는 임종훈이 한 달 후의 미래를 알고 있다는 것에 의문을 품으며 물었다.
“제 능력이라고 생각하세요. 아무튼, 저 위에 있는 천마를 설득하거나 막아야 합니다.”
비장한 표정의 임종훈에겐 살짝 미안하지만, 난 이 일이 이렇게까지 비장할 필요가 있는지 이해가 잘 가지 않았다.
“그럼 지금 회장실로 가서 제압을 하든 설득을 하든 하면 되는 것 아닙니까? 왜 이리 비밀스럽게...”
“무려 천마라니깐요? 천마 말이에요. 천마.”
천마들이 아이돌이 돼서 춤추고 노래 부르는 세상에, 대기업 회장이 천마인 게 무슨 대수인가?
회장이 천마니 자연스레 회사는 천마신교 소속인 게 당연한 것이고.
내가 크게 놀라지 않자, 임종훈은 나를 이상하게 바라봤다.
“아니, 천마라니깐요? 마(魔)의 화신!”
“네. 천마. 그게 뭐 별 일입니까?”
“아니... ‘주인공화’로 늘어난 천마들이 아니라, 진짜 천마입니다.”
“진짜 천마라는 게...”
임종훈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말 그대로입니다. ‘주인공화’로 갑자기 천마가 된 게 아니라 원래부터 천마였다는 소립니다.”
“천마가 실존하는 거였습니까? 무협지에 나오는 게 아니라?”
“네. 어렵사리 알게 된 것이지만, 스카이 디엠은 명나라 때부터 이어져 온 천마신교의 자금줄이자, 본거지입니다. 그리고 천마인 스카이 디엠의 회장은...”
임종훈은 손가락으로 천장을 가리켰다.
“수 백 년 동안 이어져 내려온 세와 무공을 바탕으로 완성된 진짜 천마입니다.”
임종훈의 말대로라면, 이 건물의 주인은 ‘주인공화’로 사람들의 상상으로부터 만들어진 무공, 심법을 쓰는 천마들과 달리 오랜 시간 그 전통이 끊어지지 않고 전해져 내려온 무공, 말 그대로 신공(神功)을 무기로 사용하는 천마란 소리다.
확실히, 진또배기 무공을 써대는 진또배기 천마라면 한국이 지도에서 지워져버린다는 소리도 어느 정도 납득이 갔다.
아무리 ‘주인공화’로 초인들이 늘어났다 할지라도 수 백 년의 세월은 쉽사리 무시할 수 없는 법이니.
“이제 깨달으셨습니까? 지금 저 위에 있는 회장은 사람이 아니...”
똑똑똑.
임종훈이 내게 말을 하던 중, 회의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벌컥.
문이 열리더니 건장한 체격의 남자가 웃으며 들어왔다.
임종훈도 아는 얼굴이라는 듯 일어서서 남자를 맞이했다.
“하하하하. 임 대표님. 오랜만입니다. 이렇게 좋은 기회로 다시 만나다니, 영광입니다.”
“하하하하. 저야말로 영광입니다. 양 전무님. 어떻게,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예. 물론이죠. 저번에 건네주신...”
양 전무라 불린 사람은 뭔가 하면 안되는 말을 했는지 말을 하다 말고 뒤에 있는 우리 둘을 슬쩍 봤다.
“아, 이분들은 저희 회사 직원들입니다.”
“하하하. 다들 반갑습니다. 양승준 전무라 합니다.”
양승준은 그러면서 우리 둘에게 악수를 건넸다.
“자, 그럼 회의를 진행해볼까요?”
“좋습니다. 우선...”
***
빌딩 3층. 회장실.
임종훈의 예상과는 다르게, 스카이 디엠 빌딩 내 회장실은 생각보다 낮은 3층에 위치해 있다. 상층은 지상과 너무 멀어 왔다갔다 하기 귀찮다는 스카이 디엠의 회장, 유상천의 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흠... 피구인데 공이 다섯 개라...”
“네. 회장님. 참가자들이 전부 신체능력이 뛰어나기에 충분히 가능할 겁니다.”
“공은 무슨 소재인가? 잘 터지지 않으면서도 탄성이 좋아야 때리는 맛이 있지.”
“일단 기존 폴리 우레탄 폼보다 신축성과 여타 성느...”
스카이 디엠의 회장, 유상천이 비서에게서 프로듀스 천마의 종목 중 하나인 피구에 관해 설명을 듣고 있었다.
프로듀스 천마는 스카이 디엠에서도 주목하고 있는 사업이자, 유상천이 개인적으로도 좋아하는 프로그램이었으니, 더욱 신중하고, 꼼꼼하게 일들을 진행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좋아. 그럼 이렇게 하지. 양 전무한테 수고했다고 전해주고. 자네도 수고했어.”
“물러가보겠습니다.”
탁.
“벌써부터 기대되는군. 천... 음?”
잠시 피구공 다섯 개가 휙휙 지나가던 상상을 하던 유상천의 기감에 꽤나 강대한 기가 포착됐다.
그리고 그 기를 지닌 사람이 지금 그의 회사에 들어오고 있었다.
벌컥.
유상천은 그대로 회장실에서 나가 로비가 한눈에 들어오는 난간 앞에 섰다.
고개를 숙여 로비를 바라보니, 건물로 들어오는 세 남자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이들 중 대장 격으로 보이는 인물의 가슴팍에 스카이 디엠의 뱃지가 있던 걸로 보아 스카이 디엠과 협력관계에 있는 회사의 관계자인 듯 하였다.
“호오...”
그런데 신기하게도, 뱃지를 달고 있는 자보단 그 뒤에 따라오는 검은 정장의 남자의 기가 몇 배는 더 크게 느껴지고 있었다.
이들은 안내 담당자를 따라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고개를 돌려 엘리베이터가 도착한 층 수를 확인해보니, 10층이었다.
“10층이면... 강 비서.”
유상천이 강 비서라는 자를 부르자, 갑자기 유상천의 앞에 비서가 나타났다.
슈-욱!
“부르셨습니까.”
“오늘 10층에서 본사와 미팅을 갖는 회사가 어디지?”
“양 전무님께서 이터니티의 임종훈 대표님과 잠시 후 미팅을 진행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일단 알겠네. 수고했어.”
“또 부르실 일 있으시면 불러주십시오.”
슈-욱!
“기대가 되는군.”
천하제일(天下第一), 아니, 고금제일(天下第一)의 칭호로도 설명할 수 없는 천마(天魔) 유상천의 마음에 호기심이 스멀스멀 피어나고 있었다.
***
“네. 그렇게 하는 걸로 합시다.”
“그럼... 얼추 다 정해진 것 같군요. 역시 대표님과는 잘 통하는 것 같습니다. 하하하하하.”
거진 1시간 동안 수 많은 말들이 오고 갔다.
프로듀스 천마가 열리는 상암 월드컵 경기장의 구조가 어쨌느니부터 시작해서 관객들의 이동경로 예상에 따른 경호 인력 배치, 긴급상황 발생 시 대피 경로 설정에 관한 것들 등등 꽤나 세부적인 부분까지 검토하는 걸 보면서 대기업은 괜히 대기업이 아니라는 것을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이와중에 막힘없이 술술 말을 이어나가는 임종훈 또한 역시 만만치 않은 사람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기도 하였다.
“꽤 빨리 끝났군요. 어떻게, 밥이라도 한 끼 하시렵니까?”
“오. 좋습니다. 마침 저희 직원들도 점심을 안 먹어서 말입니다.”
“그럼 제가 아는 맛집으로 가시죠. 물론 밥은 제가 사겠습니다.”
건장한 체격에 호쾌한 성격까지, 겉보기엔 대장군이나 다름없는 양승준은 그래도 대기업 전무이긴 하다는 듯 회의를 진행할 때엔 누구보다 냉철하고, 누구보다 섬세한 면을 내비쳤다.
이것만 본다면 단순히 능력좋은 대기업 전무라 볼 수 있겠으나, 스카이 디엠 자체가 천마신교라는 것을 인식하고 보니, 꽤나 높은 직급에 있는 양승준은 천마신교의 중요 전력 중 하나일 것이 분명하였기에 천마신교의 수준이 상당할 것임은 어느 정도 짐작이 갔다.
“자, 그럼 갑...”
“양 전무. 잠깐만 기다려주게나.”
일어서려는 양승준이 그 소리를 듣고 고개를 오른쪽을 돌렸다.
!
우리도 양승준을 따라 고개를 돌렸는데, 처음 보는 남자가 바닥에 떨어진 마이쭈 껍질을 줍고 있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는 안들렸는데...?’
“쓰레기는 쓰레기통에 버려야지. 참. 이리 바닥에 흘리면 어떡하나.”
“엇! 회장님! 언제 오셨습니까!”
양승준이 환하게 웃으며 회장이라 불린 사람에게 다가갔다.
저 사람이 천마군.
“방금 왔네. 회의가 끝나기 전에 왔어야 됐는데, 좀 늦었나 보군.”
“아닙니다. 회의가 생각보다 일찍 끝나서 그렇습니다. 저분들이랑 대화 좀 나눠보시죠. 좋은 분들이십니다. 자, 이 분은 우리 회사의 회장니...”
유상천은 우리에게 다가와 한 명씩 악수를 건넸다.
“스카이 디엠의 회장, 유상천입니다.”
“이터니티의 대표, 임종훈이라고 합니다. 만나뵈서 영광입니다.”
“최승한이라 합니다. 사장님 밑에서 이것저것 배우고 있습니다.”
“김성진입니다. 프리랜서입니다.”
프리랜서라는 말에 유상천이 크게 웃었다.
“하하하하. 직급이 되게 특이하시네요? 회사원이 프리랜서라니.”
“저희 사장님이 좀 별납니다.”
“그건 그렇고, 잠깐만 앉아서 대화를 좀 나눠도 되겠습니까?”
“네. 좋습니다.”
배가 고팠으나, 어차피 유상천을 한 번 만났어야 됐기에 본인이 스스로 우리에게 온 지금 굳이 밥을 먹으러 가겠다고 대화를 거절할 필요는 없었다.
“이번 프로듀스 천마 때 경호를 담당하신다 들었습니다.”
“네. 저희 회사 직원들이 철두철미하게 만약의 사태가 일어나지 않도록 계속해서 경호할 계획입니다.”
“하하하. 대표님만 봐도 이리 듬직하시니, 믿음이 안 갈래야 안 갈 수가 없군요.”
잠시 유상천과 임종훈이 얘기를 나누는 동안, 유상천을 슬쩍 살펴봤다.
‘기가... 일반인 수준인데...?’
40대 초 중반처럼 보이는 외모에, 건장한 체격을 지닌 겉모습과는 정반대로 그 안에 흐르던 기는 일반인이라 봐도 무색할 정도로 평범했다.
세간에 유상천이 천마라는 것이 밝혀지지 않은 건 평소에도 지금처럼 자신의 기를 숨기고 있었던 것의 영향으로 보인다.
유상천과 임종훈의 얘기가 얼추 끝나고, 이번엔 유상천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김 프리라 부르면 되겠습니까?”
“음... 그냥 김성진 씨라 불러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하하하하. 알겠습니다. 성진 씨.”
유상천은 웃으면서도 계속 내 눈을 응시하고 있었다.
마치 내 안을 들여다보듯 말이다.
“아, 혹시 뉴스에 나오신 적 있으십니까? 제가 사회 쪽은 잘 찾아보질 않아서, 그런데 성진 씨는 언제인진 모르겠지만 한 번 뉴스에서 본 것 같아서 말입니다.”
“아... 예. 한 두 번 나왔습니다.”
그때, 양승준이 유상천에게 귓속말로 뭐라뭐라 하였다.
양승준의 말을 들은 유상천이 아하! 그래? 라는 표정으로 날 쳐다봤다.
“음... 무협지로 치자면, 협객 김성진 정도 되겠네요.”
천마에게 협객이라 불린다라, 좋아해야 하는가. 싫어해야 하는가.
“저도 회장님을 한 번 비유해봐도 되겠습니까?”
“오. 좋지요. 젊은 사람에게 어떻게 보이는지 알아보는 것이 필요하긴 하였죠.”
반응을 한 번 보자.
“무협지를 좋아하십니까?”
“예. 원래 무협지라면 거의 모든 남자의 로망 아니겠습니까.”
“그럼... 천마(天魔)도 아시겠습니다?”
!
잠깐 동공이 흔들린 쪽은 유상천이 아니라 양승준과 임종훈이었다.
유상천은 내 질문에 태연하게 답했다.
“잘 알죠. 모든 무림인들의 적이자, 악의 화신. 뭐 이런거잖습니까.”
“천상천하(天上天下) 유아독존(唯我獨尊).”
유상천은 내 말에 잠시동안 말이 없었다.
양승준은 유상천이 조용히 있는 것을 보곤 급하게 말을 돌리려 하였다.
“하하하하. 그럼 이제들 밥이나 먹으러...”
“살아있는 재해요, 모든 생명을 위협하는 존재.”
“잠시만요. 김성진씨...!”
나는 유상천을 쳐다보고 있었고, 유상천 또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오만의 극치이자, 융통성이란 찾아볼 수도 없는 병신.”
쿠구구구궁.
양승준의 몸에서 뻘건 기가 스멀스멀 피어오르며 바닥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되도 않는 교리로 사람들을 혼란에 빠뜨리는 사이ㅂ...”
“갈(喝)!”
양승준이 호통을 치며 내게 달려들려 할 때, 임종훈도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손을 움직이려 하였다.
그때.
척.
유상천이 손을 들어 모두를 멈췄다.
“허허허허. 역시 젊은 분들이시라 그런지 아주 혈기왕성한 게 여기까지 느껴지네요.”
유상천은 여전히 태연하게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 작가의말
천마피구는 정통무협이다... 아님말고.
Comment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