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 웰컴 투 아메리카(3)
“이제 악수할 정도는 되지 않나요?”
장태산의 첫사랑!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은 반가운 인사가 아니라 이제 겨우 불구대천의 원수에서 오해가 풀려 단순한 비즈니스 관계 정도라고나 할까?
아무튼, 장태산으로서는 마음이 착잡할 수밖에 없었다.
마지못해 잡은 손이었지만 그녀의 손끝이 닿자 세포가 전율을 일으키듯 과거의 기억을 일깨우고 있었다.
장태산이 과거의 기억에서 고통의 순간을 보내고 있다는 걸 전혀 눈치채지 못한 그레이스는 여전히 우아하고 상큼한 반전의 미모를 뽐내며 더 몰의 배경으로 달빛 아래에서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정말 오랜만에요. 어쨌던 당신과의 오해가 풀려 다행입니다. 잘 지냈나요?”
반가움을 꾹꾹 눌러 담은 그의 인사였지만 서서히 그녀 또한 장태산의 기분을 이해하고 있었다.
적당히 서로에 대한 안부인사가 마무리되자 그레이스는 본격적인 이야기를 꺼내었다.
그녀가 미국에 온 진짜 이유는 미국의 숨은 조종자이자 보이지 않는 결사체인 일루미나티와 프리메이슨의 협정을 연장하는 대표로서 왔다고 했다.
알프레드 채프먼이 계승자로 알고 있었던 장태산은 궁금증을 물었다.
“장자 계승으로 알고 있었는데 ······, 알프레드는 안 왔나요?”
“어차피 연장하지 않을 겁니다. 제가 온 이유가 연장 협의가 아닌, 협상 종결을 위해 온 것이에요.”
“그렇다면 일루미나티가 당신을 순순히 그냥 보내주려고 할까요?”
“그렇기 때문에 알프레드가 아닌 내가 와야 하는 게 맞는 거죠.”
“그건 너무 위험하잖아요.?”
“그럼 당신이 도와주면 되잖아요.”
장태산의 염려 섞인 물음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그녀는 도움을 청했다.
“그건 ······.”
장태산이 즉답하기에는 곤란한 몇 가지가 떠올랐으나 입 밖으로는 나오지 않았다.
“알아요! 마스터장태산! 당신이 우리의 싸움에 관여할 명분이 없다는 것을요. 그렇지만 나는 내 동료들의 희생을 조금이라도 최소화하고 싶어요. 그래서 안 되는 줄 알면서도 ······.”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그녀의 시리도록 하얀 볼을 타고 흐르는 빛줄기가 보였다. 그것은 그녀의 눈물자욱을 타고 달빛에 반사된 황홀한 아름다움의 극치였다.
‘젠장! 저러면 반칙이잖아!’
누가 그랬던가 ‘여자의 눈물은 무기’라고 말이다.
천하의 힘(?)쎈 남자 장태산도 여자의 눈물에는 한없이 약해지기 때문이었다.
“저기 ··· 미스 그레이스! 우리 재단이나 팀에서 도울 방법이 있는지 한번 알아볼게요.”
장태산의 말에 그녀는 손등으로 자신의 눈물을 닥아내고 있었다.
“흐흑, 말이라도 고마워요!”
그때였다.
‘지이잉! 지이잉! 지이잉!’
장태산의 전화기가 다급한 신호음을 울려왔다.
“여보세요!”
장태산은 몸을 돌리며 전화 통화를 위해 인적이 드문 쪽으로 서너 걸음을 올겼다. 그 순간 그레이스의 슬픈 눈빛이 매우 짧은, 그야말로 찰나의 순간에 묘한 변화를 하였다. 그것을 그녀 자신을 제외하고 알거나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장태산에게 걸려온 전화의 주인공은 조아라였다.
장태산은 너무도 놀랬다. 지금껏 자신이 해외출장을 나오면 단, 한 번도 개인적이건 업무적이건 간에 늦은 시간에 전화한 적도 없거니와 있다고 해도 겨우 문자나 깨톡이 전부였었다.
그런 그녀가 이 늦은 시간에 전화를?
장태산은 순간 속으로 엄청난 당황을 했다. 마치 무슨 바람피우다 들킨 유부남 마냥··· 음, 거의 맞는구나!
-태산씨! 쉬는데 방해한 건 아니죠? 어? 호텔이 아닌가 봐요. 어디에요?
“으응, 그냥··· 운동 삼아 잠깐 호텔 앞에 나왔어요. 근데 아라씨가 전화를 다 주고 ··· 무슨 일 있어요.”
-아뇨! 그냥 태산씨가 보고 싶어서 목소리라도 들으려고 전화한 거예요.
순간 장태산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했으나, 속은 사시나무 떨듯 떨고 있었다.
“고마워요. 내가 먼저 전화해야 했는데, 이렇게 전화를 다 주고 ······.”
-누가 먼저 하면 어때요. 그나저나 이렇게 못소리 들으니 왠지 보고 싶어졌어요. 어떡하죠? 화상통화 할까요?
“화···화상···통화요?”
-어머 태산씨는 내가 안 보고 싶은가 봐?
“그··· 그럴리···가요?”
-그럼해요 우리!
“지금은 운동중이어서 옷도 그렇고 땀도 많이 흘리고 있는데 이따 샤워하고 하면 ··· 안 될까요?”
-태산씨? 당신답지 않게 왠지 이상해요. 정말 별일 없는 거죠?
장태산이 전화기를 붙잡고 안절부절 하는 모습을 본 그레이스는 뭔지는 모르겠지만 어렴풋한 눈치로 우선은 도움을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통화중이던 장태산의 전화기가 다른 전화가 걸려온 신호를 내보이자 장태산은 반가워하며 황급히 조아라에게 양해를 구했다.
“저기 아라씨! 지금 다른 전화가 들어오네요. 아마도 일정 때문에 온걸 거예요. 내가 있다가 전화 할께요.”
그렇게 인사를 마치고 걸려온 전화기를 받으니 다름 아닌 그레이스였다.
그녀 쪽을 쳐다보니 손에든 핸드폰을 흔들어 보여주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당신이 곤란한 것 같아 보였거든요, 어째 도움이 됐나요?”
“뭐, 고··· 맙습니다.”
장태산의 얼버무림에 그냥 넘어가려 했던 그레이스는 왠지 장난기가 발동했다.
“와이프? 여자친구? 애인? 누구?”
그러자 장태산은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
장태산의 대답을 듣는 순간 그레이스의 가슴 한 켠에서 무언가 아리고 답답한 것이 느껴졌다.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이라. 그 사람은 참 좋겠군요. 당신의 사랑을 받을 수 있어서···.”
말은 담담히 하였지만, 아랫입술을 깨 물만큼 마음이 아파왔다.
“그레이스 당신은 내 첫사랑이었소. 당신에 대한 내 사랑도 지금의 그녀 못지 않았소.”
“역시 당신은 나쁜 남자군요. 지금의 사랑도, 과거의 사랑도 모두 중요하다니 이래서 남자는 ······.”
그녀가 미처 말을 끝내기도 전에 장태산의 말이 그레이스의 귀에 선명하게 들려왔다.
“그 사람이 내 사랑을 받을 수 있어서 좋은 게 아니에요. 사랑하는 그 마음을 알기에, 서로의 마음에 언제나 상대가 있기에, 더욱 안심하고 열렬히 사랑할 수 있는 겁니다. 매일 매 순간 말입니다.”
“그렇군요. 아무튼, 축하해요. 당신의 사랑과 사랑하는 사람에게 모두 말이에요. 언제 기회가 되면 그 사람을 꼭 한번 보고 싶군요. 그럼······.”
그레이스는 왠지 경쟁에서 패배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얼른 이곳을 벗어나고 싶었다. 그래서 서둘러 장태산에게 작별을 고하고 돌아서 자신의 길을 걸었다.
그레이스는 조금 전 자신이 달려온 길이었지만 왠지 돌아가는 발걸음은 너무도 무겁게만 느껴졌다. 정리를 했다고 잊었다고 끊임없이 되뇌였던 그 남자였건만 막상 보고나니 더욱 갈망하게 되는 것 같았다.
왜냐하면, 그녀에게도 장태산은 바로 첫사랑이었기 때문이었다.
‘잘가요 내 사랑!’
그렇게 마음으로 자신의 감정을 추스르며 돌아가는 길에 갑자기 수풀 속에서 검은 그림자가 ‘팍’ 하고 튀어나왔다.
그녀가 미처 대처하기도 전에 그녀의 양 손과 입에 포승줄과 재갈이 물리며 복부에 사정없이 주먹을 날려 왔다.
둔탁한 마찰음이 공원 한편에서 일어났으나 주변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조금전에 정확히 얻어맞은 보디 히트로 그레이스는 기절 직전이었다.
자신의 몸뚱이를 질질 끌고는 시꺼먼 두 사람이 수풀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미국의 공원은 낮과 밤이 너무도 다른 곳이었다. 특히나 치안이 말이다.
그레이스는 흐려져 가는 자신의 정신을 붙잡고 룬어를 읊조리기 시작했다.
수풀이 우거진 안쪽에는 사람이라고는 찾아 볼 수가 없었다. 그레이스를 끌고온 두 사람중 한 사람이 그녀의 옷가지에서 지갑과 핸드폰을 챙기고는 다른 주머니도 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남은 한 사람이 음흉한 눈빛을 흘리며 그녀의 금발을 만져대고 있었다.
순간 사방이 암흑에 빠진 것처럼 어두워졌다. 그러자 두 녀석들은 자신의 행동을 멈추고 서로를 마주 보는 것이었다.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것인지 한 녀석이 다시 그녀의 복부를 강타하였다. 아마도 그녀가 룬어를 중얼거리니 거슬렸던가 보다.
녀석의 펀치에 그만 기절해버린 그레이스는 더 이상 다크나이트를 소환하지 못하게 되었다.
바닥에 쓰러져 의식을 잃은 그녀를 바라보던 한 녀석이 그녀의 운동복을 벗겼다.
희고 탄력적인 그녀의 피부가 어둠 속에서도 빛을 발하듯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놈들은 순간 탄성을 질렀다.
한 녀석이 그녀의 모자를 벗겨내자 너무도 아름다운 금발의 미녀가 드러나는 것이었다.
운동복이 탈의되자 그녀의 탱크탑 속옷이 땀에 젖은 상태가 드러났다. 그것은 더욱 치명적인 욕망이 일어나기에 충분한 자극이었다.
두 녀석은 서로의 입맛을 다시며 그녀의 하의를 각자 한쪽씩 잡아 들고는 벗겨내 버렸다.
속옷 차림의 반라 상태가 되어 쓰러져있는 금발의 미녀를 보고 있자니 두 녀석이 갑자기 횡재한 모양으로 광대가 한껏 치켜 올라가며 뜨거운 콧김을 사정없이 뿜어대고 있었다.
“이봐! 우리 오늘 로또 걸린거야. 크크크.”
“오늘은 양보 못 해, 내가 먼저야!”
“무슨 소리야 아까 순서는 정했잖아. 이제와 이러는 게 어딨어?”
갑자기 자기들끼리 순서 가지고 싸움이 시작되었다.
결국은 만국의 진리 가위바위보로 결정하기로 합의를 보고 둘은 비장한 각오로 게임을 시작했다.
“가위바위보!”
둘 다 가위를 냈다.
그런데 주먹이 하나 더 참가를 했던 모양이었다. 두 개가 아니고 세 개의 가위바위보가 되었던 거였다.
물론 주먹을 내어 이긴 사람은 장태산 이었다.
“와! 내가 이겼네! 땡큐! 그럼 저 여성은 내가 데려갈게. 안녕!”
그리 말하고 장태산은 서둘러 떨어져 있는 운동복을 주워든 후, 그녀를 안아 들었다.
“이···놈은 뭐야? 너 뭐야?”
“나! 이 여자의 전 남친! 그러니 용서해 줄 때 얼른 꺼져!”
장태산이 장난은 이쯤이라는 듯 그 둘을 노려보자 녀석들은 생전 처음 경험해보는 무서운 공포감에 갑자기 온몸이 얼어붙는 듯 했다.
“왓 더 퍼······ 씨발 뭐냐고?”
공포는 쉽게 극복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경험해 본 사람은 알 것이다. 얼마나 무서운지 말이다.
장태산의 눈에서 무시무시한 안광이 쏟아져 나왔다.
놈들은 그 자리에 주저앉아 너무도 무서워 똥오줌을 지리고 있었다.
장태산은 서둘러 그녀를 회복시키고 보살피기 위해 자신의 방으로 데려갔다.
‘내 손은 약손’을 통해 그녀를 돌보니 다행히 크게 다친 곳은 없었다. 아마도 복부의 통증과 놀람으로 인한 쇼크였을 것이었다.
장태산의 서둘러 그녀를 깨우기보다 휴식이 필요하다고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만하길 천만다행이라 생각하고 그녀를 침대에 뉘어두고는 샤워를 하러 들어갔다.
하필 그때였다.
장태산이 샤워하고는 속옷을 갈아입고 가운을 걸친 채로 막 화장대 앞에서 머리를 말리던 그 순간이었다.
- 작가의말
충전!
여러분 정말정말 건강 조심하세요.
화이팅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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