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세기전(開世技傳).
개세기전(開世技傳).
“푸하하하하........저.....저...건....! 푸하하하하......!”
얼굴이 굳어진 채로 하림이 내미는 고서를 쥔 의선인과, 진지한 표정의 하림의 얼굴에 균열이 간 것은 대소를 터트리는 운령에 의해서였다.
“주...주공....! 그것은 개새끼전.....! 주공께서 설마 천하의 악인들만 모아서 써놓은 야설집을 보실 줄 속하는 전혀 몰랐습니다. 풉......!”
“야....야설집....?”
손수건에 가려져 있는 하림의 얼굴이 또 한 번 부셔져 내렸다.
“하하....! 뭐, 속하는 그래도 이해합니다, 주공 연치에 당연한 것입죠.”
“그러니까 운령은 내가 개새끼전이라는 야설집을 본다, 이런 이야기인 것인가?”
“푸훕....주공, 그건 창피할 일이 아닙니다요, 항간에 은밀히 성안에는 밤마다 이루어지는 거래가 있지요, 수많은 사람들이 바로 그 야설집을 구하기 위해서이죠.”
“계속해봐!”
“흐흐.....서책이 워낙 인기가 많아서 암암리에 엄청나게 높은 가격으로 구매가 이루어 진다합니다.”
“그러니까 이게 그 개새끼전인가 뭔가 하는 책이다?”
“하하하....엄연히 제목에....어...? 개세기전? 언제 제목을 바꿨을까?”
운령의 두 눈이 커다랗게 치켜떠졌다.
“아까는 분명 개새끼전이었는데.......? 주...주공....이것이.....대체....?”
운령은 그제야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어렴풋이 깨달을 수 있었다.
사색이 되어가는 운령을 바라보며 하림이 서서히 움직였다.
“뿌드득....! 운령....! 넌 아무래도 개방으로 다시 돌아가서 그림자로 살아야 될 팔자인 것 같구나!”
“헉! 주....주공....! 그것만은.....!”
“아니면 하루에 한 번씩 정식으로 정신교육을 받거나......!”
“허억....! 주....주공....! 그것도 제발.....!”
슬금슬금 뒷걸음치며 하림의 눈치를 보는 운령의 얼굴이 사색으로 변해간다.
하루에 한번 정신교육, 예전에 치를 떨며 받아봤던 기억이 있다.
다시는 떠올리기 싫은 기억......운령은 천지가 무너지는 것을 느끼며 절망하기 이른다.
그렇다고 넙죽 개방으로 도망가서 또다시 그림자로 살아갈 자신은 더욱 없다.
바로 이때, 사색이 된 운령의 운명에 한줄기 희망을 던져주는 이가 있었으니 그는 바로 도림이었다.
“주공! 속하가 불민하여 운령의 혓바닥이 큰 실수를 한 것 같습니다, 벌을 주시려면 속하도 같이 받기를 청합니다!”
“도림, 이것은 단순히 감싸주려 해서는 안 된다. 자신의 주공을 얼마나 우습게보았으면 이런 짓을 떠벌인단 말인가?”
“주공.....헤이해진 운령의 자세는 속하가 목숨을 걸고 고치겠습니다. 그러니 한번만 용인(容忍)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하림은 과묵한 도림이 이렇게까지 청을 하자, 슬그머니 마음이 풀어지는 것을 느낀다.
“좋아! 그렇다면 운령의 처우를 도림에게 맡기지. 하지만 또다시 운령의 경솔함이 내 귀를 훑는 순간, 두 사람은 아마도 크게 각오해야 할 것이야!”
“감사합니다, 주공!”
도림이 땅으로 무너지며 큰소리로 외치면서 한손으로 얼른 운령을 잡아당긴다.
멍하니 넋을 놓고 있던 운령이 화들짝 놀라면서 자신도 모르게 무릎을 내려찍었다.
“주....주공...! 감...감사합니다.”
하림은 다시 한 번 운령을 쏘아보고는 의선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이거 중요한 대화에서 아래 부하로 인해 부끄러운 추태를 남겼네요.”
“허허.....! 아닙니다, 장문주!”
“자, 그럼, 우리가 아까 나누었던 대화를 이어나가 볼까요?”
하림의 말에 의선인의 얼굴에 긴장감이 떠돌기 시작했다.
그는 손에 쥔 고서를 떠들어 볼 생각도 잊은 채 하림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문주, 이것이 정말 그것이란 말이오?”
어쩌면 뜬금없는 그의 말에 하림이 어깨를 으쓱했다.
“아....마도요?”
짧은 하림의 한마디에 의선인의 얼굴에 숨길 수없는 격동의 빛이 일렁이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오.....오......! 오.....오.....!”
그는 황급히 고개를 숙이면서 고서를 조심스럽게 넘겼다.
순간 그의 입에서 아까와도 같은 감탄사가 쏟아져 나오는 것이 아닌가?
“오.....오......! 진짜란 말인가?”
“................!”
“오......내 진정 화타의 진전을 볼 수 있다니......오오......!”
곧이어 눈물까지 글썽이는 그를 살핀 하림이 입을 열었다.
“선인, 그것은 화타의 마지막 저서요, 그가 말년에 인간의 배를 열어 생채연구를 했었죠, 그 기록들과 치유법을 상세히 적은 화타의 마지막 필생의 역작이자, 진본이지요.”
“오오.......문주, 어떻게 이 귀한 것을.......화타의 열 제자 중에 제일 자질이 떨어진다는 아홉째 제자가 훔쳐서 달아난 것으로 전해 내려오는데 말이요.”
“아마도 맞을 것 입니다.”
“그 아홉째 제자는 그 뒤로도 자취를 감추고 나타나지 않아서, 이미 이 고서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사람들 기억에 흔적을 남기지 않았지요.”
“그래도 용케 그 이름을 기억하고 있는 의선인님이 계셨군요.”
“나야 은밀히 내려오는 조상님들의 유전 속에서 몇 마디 글귀를 전해들은 것뿐이랍니다.”
하림은 손을 들어 하늘을 가리켰다.
그의 손에서 네 개의 한자가 그려졌다.
개세기전(開世技傳).
세상을 여는 기술을 전하다.
연기처럼 서서히 사라져가는 글귀를 바라보면서 의선인은 다시 한 번 격동을 참지 못했다.
몇 장을 들춰본 고서에는 한순간 그의 혼백조차 끌어들이는 힘을 느꼈다.
(저것만 익힐 수 있다면........아마도 성수신의를 밀어내고 천하제일의 의술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하....하지만.........!)
이 대목에서 생각을 멈춘 의선인은 멍하게 하림을 바라보았다.
그가 말한 조건이 있었던 것이다.
대하오문의 밑으로 들어오라는 것......
지금껏 활인의가는 수백 년 동안 누구의 속박도 받지 않고 살아 내려왔다.
그의 눈동자가 쉼 없이 경련을 일으켰다.
이때 하림이 손을 내밀었다.
“선인께서는 고서를 보셨으면 돌려주시지요, 워낙 귀한 물건이라 볕을 보면 훼손될 것입니다.”
“아.....아.....! 그....그렇겠군요.”
하지만 선뜻 그의 손은 앞으로 나오지 않는다.
보다 못한 하림이 그의 손에서 고서를 힘 있게 낚아챈다.
“아아.......!”
한순간에 세상을 잃은 것 같은 신음이 의선인에게서 흘러 나왔다.
하림은 그의 표정을 보고 씽끗 웃음을 띠었다.
“자! 저는 활인가를 얻기 위해서 가져온 패를 모두 보여 드렸습니다, 그러면 이제 선인께서 그 답을 해주셔야할 차례이지요.”
“끄응........!”
의선인의 입에서 묵직한 신음이 흘러 나왔다.
시간이 흐른다.
한번은 하늘을 바라보고 또 한 번은 얼굴을 가리고 있는 하림을 바라본다.
이어서 계속 반복이다.
물론 중간에 긴 한숨도 흘러나온다.
하림은 그런 그를 바라보며 인내심을 가지고 태평스럽게 서있었다.
이윽고, 무슨 생각을 한 것인지 그가 진지한 얼굴로 하림 앞에 섰다.
“문주!”
“네, 말씀하시죠, 선인님,”
“괜찮다면 가리고 있는 얼굴을 보여 주실 수 있겠소?”
그의 말이 뜻밖이었는지 도림과 운령, 그리고 하림까지 흠칫했다.
하지만 하림은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들어 얼굴을 드러냈다.
순간,
“아.....아.....!”
“왜 그러신지요?”
하림의 말에 의선인이 하림을 향해 처음으로 포권을 한다.
“문주의 용안을 보고 많이 놀랐소, 산사람 얼굴에 광휘가 흘러나온다는 사실을 믿지 않았는데 본인은 오늘 처음 보았소, 그러니 어찌 놀라지 않을 수가 있겠소.”
“하하하.....오늘 저의 밑천까지 모두 보여 드렸으니 이제 답을 하실 수 있겠는지요?”
하림의 말에 의선인이 빙그레 미소를 짓는다.
하림을 만나서 처음으로 부드러운 안색을 띠는 그이다.
“문주의 말씀대로 본 활인의가가 대하오문으로 적을 옮긴다면 그 개세기전을 주실 것이오?”
부드러운 말투로 물어오는 그를 향해 하림은 고개를 가로 젓는다.
“아니지요, 그것은 아니 될 말입니다.”
“허어......? 아까 하신 말과는 다르지 않소?”
의선인은 황당함에 두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하림은 빙그레 미소를 짓는다.
“선인, 본 고서는 본문의 큰 재산입니다, 선인께서 보았듯이 이 고서는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세상을 다시 뒤집을 수 있다는 광세비서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제가 드리지는 못하지만 선인께 무상 임대는 가능하지요.”
“무....무상임대........요?”
하림이 쏟아낸 뜻밖에 말에 의선인이 놀란 듯이 목소리가 커졌다.
“무....무상임대라면.....?”
“하하....선인님, 말 그대로 무상임대 해드리는 거지요, 기한은 무기한...!”
“무....기한........?”
“예, 무기한이지요......”
하림이 빙긋이 웃으며 말을 맺자, 의선인은 할 말을 잃은 채로 하림을 한참이나 바라본다.
그러다 잠시 후,
“푸하하하하......핫...! 세상에 본노의 입에서 앙천대소가 흘러나오게 할 사람이 있었을 줄이야!....하하하핫....! 얼마 만에 통쾌하게 웃어 보는 것이란 말인가?”
의선인은 정말로 유쾌하게 웃어 재꼈다.
그 모습을 의원들을 비롯한 병자들까지 하던 일들을 멈추고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한참을 웃던 의선인이 돌연 하림의 앞에 허리를 굽혔다.
“문주님, 들어가시죠, 문주의 예를 이곳에서 드릴 수야 없지요,”
“하하.....그럴까요?”
하림에게 극진하게 예를 차리면서 앞서가던 의선인이 나직하게 말했다.
“총관, 급하지 않은 환자들은 잠시 진료를 거두고 본 의가사람들을 모두 모으게.”
“예, 가주님!”
머리가 반백인 총관은 허리를 펴고 바삐 안으로 사라졌다.
대체로 소박하게 꾸며진 대청 안으로 백여 명 가까운 사람들이 모여 들었다.
-웅성웅성....!
큰소리는 아니지만 소곤거리는 소리는 하림의 귓속으로 모두 들어 왔다.
대부분, 아까 밖에서 본 일들을 쑥떡거리는 중이리라.
이때 총관이 앞으로 나서면서 좌중은 어수선함이 사라지고 침묵이 이어졌다.
의선인은 탁자에 앉아 있다가 차를 한 모금 하고, 하림을 향해 고개를 숙이고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는 느린 걸음으로 몇 걸음 앞으로 나갔다.
그의 발자국소리는 조용했고 강경했다.
외견으로 보기에 칼날 같은 예기가 흘렀고 눈가에는 강한 신념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좌중을 한 바퀴 휘둘러보던 그의 입에서 조용하지만 의지가 담긴 말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활인의가 여러분........!”
- 작가의말
기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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