훌륭한 인질이 마흔여덟 명
<훌륭한 인질이 마흔여덟 명>
-싸악......!
“.........?”
“.........?”
주위의 경물이 느리게 움직인다.
물론 소음도 사라졌다.
높게 떠오른 하림이 천신처럼 지상으로 내려설 때, 적아는 불을 뿜었다.
순식간이었다.
잔뜩 독이 오른 적아를 얼마나 세차게 내려 그었는지, 두개의 머리가 허공으로 떠오르는 것은, 마치 봄날에 휘날리는 꽃가루처럼 훨훨 멀리멀리 날아갔다.
-떼그르르르......!“
-텅....텅......!“
땅바닥에 떨어져버린 두 육신을 벗어난 임자 잃은 머리통들은, 통통 튀며 이리저리 흩어져 떨어졌다.
그리고 중인들은 입을 벌린 채 그 머리통들이 멈추어 설 때까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아......!”
“아...아......!”
탄성을 터트리는 중인들과는 다르게 남아있는 적의 두 노인들의 입에서는, 호곡성 비슷한 절규가 터져 나왔다.
“안....돼....!”
“형...형....님...!”
두 노인의 신형이 번개처럼 목 잃은 시신에게로 다가선다.
그러나 그들은 몇 걸음 가지 못하고 그 자리에 못이라도 박힌 듯이 멈춰서야했다.
아직도 선혈이 뚝뚝 떨어지는 적아를 들고 있는 하림이 서서히 등을 돌려 마주섰기 때문이다.
“그 자리에서 한 발짝만 더 나온다면 저 늙은이들을 따라가게 만들어주지!”
“네...네놈,,,이.....!”
암영사괴는 구순이 넘은 노괴들이었다.
악인들이었지만 그 긴 세월동안에 그들은 친 형제들처럼 우애와 의리를 지키면서 살아왔다.
그것은 그들이 추구하는 인생관 같은 것들이, 서로 잘 맞았기 때문에 가능하게 했을 것이고, 하나같이 지금처럼 누가 먼저 죽을 수 있다는 것은, 생각해보지도 않았던 암영사괴들이다.
그들은 믿기지 않은 이 현실에 슬픔도 인지하지 못하고, 그저 경악과 공포만을 느끼고 있을 뿐이다.
아직 솜털도 가시지 않는 애송이의 신위가, 닳고 닳은 노괴들을 공포에 젖게 만드는 순간이었다.
하림이 서서히 도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뒤쪽에 있던 양석호가 노괴들의 뒤를 차단하고 섰다.
노괴들의 안색이 아까와는 다르게 까맣게 죽어갔다.
그들은 목 잃은 시체들과 하림을 번갈아가면서 쳐다보면서 이빨을 지그시 깨문다.
(아형아, 아무래도 이 자리를 피하는 것이 상책인 것 같구나.)
(아니, 형님, 지금 형하고 아우의 시신을 두고 도망가자는 말이오?)
(저 적혈마도라는 놈, 보통이 넘는다. 자칫 잘못하면 너하고 나도 먼저 간 동생들 따라가게 생겼다.)
(크...흑.....삼십년을 그 지옥 같은 곳에서도 살아남았었는데......크흑......)
하림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왜 도망가려고.....?”
“헉....!”
두 노괴의 눈이 화등잔만 해진다.
(형...형님, 저놈이 혹시 전음까지 엿듣는 거 아니오?)
(설...설마.......?)
“맞아! 늙은이들이 생각하는 것이 맞는다고.....!”
“허엇....! 네놈이 정...정말......!”
“자, 그럼 늙은이들이 도망가기 전에 얼른 끝을 봐야겠지.....?”
“헉....!”
하림이 적아를 들어 흐르는 선혈을 털어내면서 노괴들을 향해 몸을 날렸다.
“받아랏...!”
“헉...저놈이.......!”
하림이 자신들을 향해 무섭게 솟구쳐 날아오르자, 두 노괴는 화들짝 놀라며 몸을 날린다.
“앗.....저 늙은이들이....?”
“적혈마도, 두고 보아라, 청산이 푸르고 유유히 장강이 흐르는 한, 이 원한을 잊지 않고 꼭 갚고 말 것이다.”
뒤쪽에 있던 양석호는 설마 저들이 줄행랑을 놓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터라, 순식간에 종적을 감추는 그들의 모습에 오히려 깜짝 놀랐다.
그는 높게 날아올라 두 노괴들이 사라지는 것을 보고, 서서히 땅으로 내려서고 있는 하림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는 하림을 바라보는 시선이 많이 달라져 있었다.
자신과 견주어도 하등 차이가 날 것 같지 않은 절세무공의 고수, 나이는 어리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심계.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에 전혀 망설이지 않는 독기어린 결단력. 양석호는 하림이 두 노괴의 목을 망설이지 않고, 베어버리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아마 저런 모습은 정파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결코 하림이 과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자신도 망설임으로 인해 잠시 시간을 지체할 뿐이지, 결과는 그들의 목을 벨 것이기 때문이다.
“우.....욱......!”
땅으로 내려서던 하림이 돌연 피를 토하고 주저앉는다.
기혈이 역류하고 내력을 무리해서 끌어올리다보니 내상이 좀 더 심해진 것이다.
“앗...아우....! 괜찮은가....”
“어멋...주공....!”
“주군...!”
하림에게서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던 양석호는 대경해서 번개같이 하림을 부축한다.
하림은 힘겹게 입을 달싹인다.
그는 사실 이미 내상을 입은 상태에서 더 중한 내상을 각오하고, 기혈을 끌어올려 허장성세로 암영사괴를 속이고 남은 두 노괴를 쫒아버린 것이다“
“형님, 괜찮습니다. 도림?”
“예, 주군.....!”
“호법를 부탁해!”
“예. 주군,”
“주군, 저 노괴들의 뒤를 밟아볼까요?”
온혁세의 말에 하림이 힘겹게 돌아본다.
“아니....아직은 그들을 쫒기에는 무리야.”
“예, 주군...”
“놔두면 언젠가 원한 때문이라도 내 앞에 나타나겠지.”
그 말을 끝으로 하림의 두 눈이 스르륵 감겼다.
팽도림과 온혁세등이 하림에게서 등을 돌리고 주위를 경계한다.
양석호도 그들과 몇 걸음 뒤에 서서 그 역시 주위의 경계하기 시작했다.
무당의 천룡이라 불리는 양석호의 호위까지 받는 하림이다.
그리고 모습은 드러내지 않았으나, 개방의 호위인 운령이 근처에 있었고, 또 그 주위로 하오문의 비호대 사십팔 인도 그곳에 있었다.
한마디로 하림의 주위엔 이미 철통같은 경계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멀찍이서 이들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무림인들 또한, 하림일행이 있는 곳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하림의 도에 암영사괴 중 두 노괴의 목이 떠오르는 광경을 잊지 못하고, 계속 이야기하면서 감동스러워 했다.
하림의 신위, 그것은 본인은 잘 알지 못했으나 이미 연일 강호를 위진 시키고 있었다.
하오문이 배출한 절세의 기남, 후기지수들 중에 누구도 따라올 수없는 무공을 지니고, 정의를 벗어난다면 거침없이 혈도를 휘두르는 철혈의 사내, 거기에 고금제일의 미남이라던 춘추시대 송옥과 서진의 반안도 따라오지 못할 아름다운 용모까지, 하림은 벌써 강호의 모든 여협들의 꿈속에서나 나타날 것 같은 왕자가 되어있었다.
그리고 해월장을 떠나 이곳으로 오기까지, 은근히 그의 뒤를 쫒는 추종의 무리들까지 생겨나고 있었다.
적혈마도 장하림, 그는 이미 뜨고 있는 강호의 신성이었다.
오늘 다시 한 번 무림의 희대의 악인이라던 암영사괴들을 죽임으로서, 그 명성이 더욱 빛나게 되었다.
이제는 많은 신진고수들이 그의 명성을 시기하고 또 경원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하림의 성격상, 그는 남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자신만의 강호를 만들어 나갈 것이다.
운기조식하고 있는 그의 머리를 내려 쬐고 있는 태양조차, 슬그머니 구름 속으로 얼굴을 감추면서 그림자를 만들어 주었다.
***
설예주는 사과처럼 빨갛게 얼굴을 붉히면서 자신의 주군을 훔쳐보기에 여념이 없다.
그러다가 가끔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그녀의 볼우물이 깊게 파이는 미소를 지어내곤 한다.
그녀는 알까?
하림 옆에 바짝 붙어있는 그녀를 바라보는 여인들이, 쌍심지를 바짝 올리고 노려보고 있는 숫자만 이 근처에서 수십이나 된다는 것을....
하림은 운기를 마치고 부서진 객잔 옆에 있는 낙영객잔으로 자리를 옮기고 있었다.
그들이 앉아있는 곳은 이층이었는데 하림이 자리를 잡자, 순식간에 커다란 객잔은 발 디딜 틈도 없는 만석이 되어 버렸다.
“은자 천 냥이에요, 듣자하니 이정도면 된다고 하던데 맞나요?”
하림의 탁자에는 양석호와 온혁세등이 앉아있고, 유일하게 팽도림은 하림의 등 뒤에 서 있었다.
그리고 하림의 앞에는 중년이 넘어선 장년인이 허리를 굽히고 있었다.
그 장년인은 부서진 객잔의 주인이었던 것이다.
“예, 대협, 그저 감읍할 따름 입니다”
“미안하게 됐어요, 생활의 터전이었을텐데.....여기 백 냥은 제가 드리는 위로금입니다. 받아주세요.”
하림이 내민 은자꾸러미를 받아든 객잔주인은 눈물을 흘리면서, 고마움에 그저 고개만 숙일 뿐이었다.
그는 목이 메어 한참을 꺽꺽거리다가 겨우 입을 열기 시작했다.
“대...대협....소인도 듣고 보니 그 노인들이 저희를 죽이려 들었다 들었습니다, 하물며 목숨까지 구해주시고 이렇게 보상까지 직접주시니, 소인이 뭐라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할지 난감 할 따름입니다. 대협,”
“괜찮습니다. 심려하지마세요. 운천, 주인을 모셔다드려.”
“예, 주공. 가시지요.”
하림에게 끝없이 고개를 숙이는 객잔주인을 앞세워 담운천이 층계를 내려가다가 다시 돌아왔다.
“주공, 마두의 목에 걸린 현상금을 처리해주겠다고 합니다, 어떻게 할까요?”
“아마도 경험이 많으니까 도움이 될 거야, 들고 다녀와.”
“예, 주공.”
탁자 밑에 있던 둥그런 보자기 두개를 쥐고, 담운천이 주인이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갔고, 일행은 마침 나온 식사를 하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우, 대단하더군, 필도에게 말만 들었지만 그는 자기도 아우에게 어쩔 수없이 손을 들었다고 해서 농담으로 알아들었었는데, 정말이었군.”
“하하....형님,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제가 어떻게 대형을 이기겠어요. 대형께서 많이 양보를 해주셨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아니..아닐세, 나도 자네와 비무를 한다면 아마도 필도와 다르지 않을 것이야. 놀랍군, 이런 무학이 있다는 것은 새삼 놀라울 따름이네.”
“하하...형님, 너무 과한 칭찬이에요,”
하림이 두 손을 내젓는다.
“이 사람아, 암영사괴라는 이름은 결코 그렇게 작은 것이 아니네. 그들을 본 무당이 나서서 만겁뢰로 보냈기 때문에, 귀에 못이 박히게 들어서 알고 있다네. 누구도 그들을 한 번에 죽일 사람은 없다는 것이지.”
하림 또한 옥황심법의 공릉이 없었다면, 아마도 그 자리에 드러누울 사람이 자신이라는 사실을 더 잘 안다.
“하하...그래도 형님에 뒤에 계셨기에 가능한 일이었어요.”
“이 사람이... 이제 아무것도 못하고 구경만 하고 있었던 날 놀리는구나.”
“에이...설마요, 형님, 농이 과하십니다.”
“그럼 어디 길고 짧은 것을 한 번 대 볼 텐가?”
“어이쿠, 소제가 졌습니다. 졌어요.”
“예끼...사람, 이제 나를 놀리는구나. 하하하....”
두 사람은 찻잔을 들고 파안대소를 터트린다.
그 모습을 지근거리에서 바라보는 중인들마저 얼굴에 미소를 띠우고 있다.
이제 하림은 어디를 가든지 유명세를 치르게 될 것이다.
어느덧 그의 얼굴이 많이 알려지기 시작했고, 많은 사람들이 그가 격전을 치루는 것을 봤기 때문에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마저 생겨난 탓이리라.
“앞으로 늦어봐야 엿새면 정주에 갈수 있다면서요?”
“그렇지, 아마 이변이 없다면 그렇게 될 걸세.”
“기대가 됩니다.”
“뭐가 말인가?”
“하하...뭐긴요, 하오문주 전횡의 등장이 말이죠.”
“자네는 그가 올 거라 믿는군.”
“하하....오지 않으면 찾아가야지요.”
“아니, 자네, 그가 있는 곳을 모른다 하지 않았는가?”
“하하...형님, 저 뒤에 훌륭한 인질이 마흔여덟 명이나 있지 않습니까?”
“으..잉...? 하하...그렇군.”
객잔 밖에 있던 하오문 비호대 검안추의 어깨가 부르르 떨린다.
‘무....무서..운놈....!’
그는 객잔에서 조금이라도 멀어지기 위해서 슬그머니 뒷걸음질 했다.
그는 이제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저놈은 분명히 말나온대로 실행에 옮길 것이라는 사실을....믿어 의심하지 않는다.
-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Comment '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