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한 형제.
우린 한 형제.
하림은 당문에 며칠 동안 지내면서 혈마의 뒤를 쫓기로 하였다.
물론 이것은 제갈성곡의 생각이었고 하림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내는 동안 하림은 운기를 쉬지 않았고, 그의 곁에는 팽도림과 운령이 언제나 두 눈에 불을 켜고 지키고 있었다.
하림은 요즘 들어 살짝 마음이 들뜨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혈마와의 대결이후 꿈적도 않던 해검양의 내단이 슬슬 동요를 하 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은 하림에게 매우 고무적인 일이었다.
만약에 이 시점에서 순탄히 해검양의 내단만 녹여 낼 수 있다면, 하림으로써는 또 한 번의 엄청난 기연을 얻게 되는 것이다.
총사 제갈성곡은 혈마의 뒤를 파악하느라 정신이 없고, 당독호는 폐허가 된 당문을 수습하는데 혼신의 힘을 쏟고 있다.
한편. 당왕은 지하 연무실에서 정신없이 땀을 흘리고 있었다.
본래 하림이 당문에 전해준 것은 두 가지였다.
하나의 신법과 한가지의 암기가 바로 그것이었다.
당왕은 그것 때문에 연공실에 박혀 나오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당왕과 당독호는 하림이 전해준 당문의 절기 중에, 암룡구궁신법(喑龍九穹身法)을 재해석해서 전해준 비급을 받아들고, 망연자실해서 할 말을 잃었었다.
그리고 천뢰구라는 쇠구슬처럼 생긴 암기를 개조해서 광폭천뢰구라는 이름으로 건네받은, 두 사람은 또 한 번 두 눈이 찢어져라 치켜떠야 했었다.
천뢰구는 본시 당가의 독문 폭약암기로써, 암기 속에 비침을 넣어 폭발하게 되면 비침이 쏘아져나가 적을 필살하는 무서운 암기였는데, 하림이 그 암기 속에 비침 대신 폭약을 장착하여 시범을 보여 준 것이다.
작으면서 고성능의 폭약을 만들어 장착할 수만 있다면, 그 위력은 무시무시할 것이다.
아무리 상대가 혈마라 할지라도, 면전에서 속수무책으로 터지는 폭약을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방을 점하며 신출귀몰할 변화를 주는 신법에, 당가의 특기인 암기술중 광폭천뢰구를 장착한 당가무인을 무시할 강호인들은 몇 안 될 것이다.
이것이야 말로 혈마의 급습으로 폐허가 되다시피 쓰러져가는 당가를, 단번에 오대세가 중에 제일 앞줄에 놓이게 만들어 줄 것이 자명하다.
아니 오히려 혈마의 공격이 당문으로서는 전화위복이 되었다고나 할까?
이 불가능한 모든 것을 하오문의 문주라는 약관이 갓 넘은 젊은이의 손에서 탄생하게 되었다.
당왕과 당독호는 진심으로 하림을 향해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리고 당왕은 그저 넋을 놓고 허허거렸고, 당독호는 채신머리없이 목 놓아 통곡하였었다.
그날이후 당가의 장인들은 연무실에 틀어박혀 시간가는 줄 모르고 폭약에 매달렸다.
당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하여튼 바쁘다.
이튿날 찾아온 법송과 방호상이 하림에게 정식으로 사과했고, 그들은 그 자리에서 하림에게 부탁을 한 가지 했었다.
바로 이십일웅이 자신들의 대원들과 비무를 해주었으면 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전날 비오는 날 개 패듯이 맞았지만 그들이 원한다는 것이다.
하림은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어디든지 의외는 있었다.
“주공, 그들과 비무하는 것은 혹시 명령입니까?”
희희 낙낙하며 문을 나서는 사마갈의 발목을 잡은 것은 의외로 당수영이었다.
당수영은 하림을 향해 진지하게 묻는다.
당연히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하림과 당수영에게 쏠렸다.
“명령은 무슨, 대주들이 와서 부탁하기에 말해본거야.”
“그럼 하 기 싫은 사람은 안 해도 상관없습니까?”
“당연하지, 그런데 수영은 싫은가보군.”
“예, 주공, 전 내키지 않습니다. 아시다시피 그들은 항상 우리를 깔아보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런 그들을 위해서 우리가 땀을 흘릴 필요는 결코 없다고 봅니다. 저는...!”
당수영의 말에 엉덩이를 떼려 했던 사람들이 그 자리에 눌러 앉는다.
심지어 한껏 들떠서 문을 나서려던 사마갈 조차도 멋쩍은 표정으로 다시 안으로 들어와 버리고 말았다.
“그래, 뭐 알아서해. 그런 것까지 강제할 수 있나.”
“이해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주공!”
당수영은 하림을 향해 가볍게 포권을 하며 고개를 숙인다.
하림은 빙긋 웃으면서 모두를 바라본다.
“며칠은 이곳에서 추이를 살펴야 할 것 같으니 각자 하고 싶은 일들을 하도록.....!”
“옛....주공!”
“옛...!”
흩어지는 이십일웅들의 입가에는 대부분 밝은 미소가 걸쳐져 있다.
자신들의 위치가 한층 격상되었다는 것을, 그리고 자존심이라면 한 다리에 두 다리를 낄 저들이 자신들을 인정했다는 것을 느꼈으니, 저절로 미소가 지어질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림은 방문을 나서는 그들의 뒤통수를 바라보면서 그들이 흘리는 밝은 기운에 미소를 띠었다.
***
하오문 조사 해검양의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있던 내단.
단전에서 꼼짝도 안하던 것이 드디어 허물을 벗기 시작했다는 것을 느끼는 하림은, 온몸에 짜릿할 정도로 희열이 찾아왔다.
임맥과 독맥을 힘차게 돌고 있는 내기가 수시로 상중하의 세 단전을 거침없이 넘나든다.
내기가 지나는 곳에 마치 화려한 꽃이 피워 올리고, 천룡이 승천하는 기개로 천령혈을 뚫고 하늘로 솟구치기를 멈추지 않는다.
그의 머리위로 세 송이의 아름다운 꽃들이 피워 오르고, 투명하게 엷어지며 없어졌다 생기기를 반복하고 있다.
삼화취정을 벗어나며 환골탈태를 했던 육체에 흐르는 내기는 거침이 없다.
잘 닦인 관도 위를 달리듯 거침없이 하늘로 솟구쳤던 내기는, 어느새 새 내기를 가득품고 하림의 몸으로 조용히 들어와 또다시 상중하 세 단전을 넘나든다.
자신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모습을, 또 다른 의식의 영으로 허공에 뜬 채로 관조를 하고 있는 하림은, 어쩌면 이대로 자신이 광활하게 넘나드는 자연의 내기를 타고, 허공을 누빌 수 있다는 생각도 떠올렸다.
조금은 어이없는 생각이었을까, 피식 웃는 하림은 다시 집중을 해서 자신의 단전을 노려본다.
그곳에 똬리를 틀듯 꼼짝 않고 박혀 있던 내단의 색깔이 어느새 선홍색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러나 색깔만 약간 변해있을 뿐 달리 변화는 감지되지 않았다.
하림은 실망하지 않았다.
이렇게 시달리다보면 언젠가는 물에 물이 섞이듯 술술 풀어져 나갈 것이다.
하림은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바삐 움직이는 내기를 갈무리하기 시작했다.
긴 호흡을 마무리하며 가늘게 눈을 뜨는 하림은 곧바로 팽도림을 찾는다.
“도림!”
“예, 주공!”
하림의 부름에 방문이 조금 열린다.
팽도림의 건장한 몸이 단숨에 그의 면전에 이른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지?”
“주공께서 마지막 운기 들어가시고 꼬박 하루가 지났습니다.”
“그래? 그렇게나 시간이 흘렀나?”
“예, 주공!”
“운령하고 고생이 많았겠네. 가자, 시장한데 내려가서 식사나 하자고.”
“주공, 아래층에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주인에게 일러 이곳에서 드시는 것이 어떠하신지요?”
“그래? 그러지 그럼!.......모두 어디 갔어?”
“근처에서 기웃거리는 것을 보고 주공께서 운기중이라 알렸더니, 너도나도 할 것 없이 모두 제방에 틀어박혀 운기 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 끝난 사람들은 모두 오라하지, 식사나 하자고.”
“예, 주공!”
팽도림이 허리를 숙이고 밖으로 향할 때 운령이 방안으로 들어오면서 말한다.
“팽형님, 가실필요 없어요, 모두들 주공의 움직임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어서, 이미 모두가 깨여 있는데요? 곧 모일 겁니다.”
“운아우, 그랬나? 그럼 음식이나 좀 시켜야겠군.”
“하하....그것도 당문의 지시로 이미 대령하고 있습니다. 숙수가 몇 번이나 들렸다 갔는걸요.”
“음...당문에서 신경을 많이 쓰는 모양이구나.”
하림은 침상에서 일어나 탁자로 옮겨 앉았다.
“다들 모여, 눈치 보지 말고 들어오지 뭐하고 있어.”
-우르르르르......!
하림의 말이 채 떨어지기도 전에 방문이 열리면서 우르르 몰려 들어온다.
“오늘은 모두 나와 한잔 하자!”
“하하...그러시죠, 주공!”
팽도림이 탁자에 앉으며 크게 웃는다.
하림은 그의 웃음소리를 들으면서 참 좋구나 하는 생각을 해본다.
언제나 딱딱하고 경직되어 살던 팽도림이 이제 여유를 찾고 환하게 미소 지을 수도 있다.
하림은 그것이 더 고무적이었다.
“도림, 그동안 고생 많았다.”
“주공, 별 말씀을요, 주공께서 잘 이끌어 주신 덕입니다. 안 그런가, 운령아우?”
“헤헤....맞아요, 주공께서 내린 은공으로 우리가 이만큼 사람답게 살게 됐지요.”
“하하.....어찌되었던 좋아, 좋아! 참, 운령, 할아버지는 지금 어떻게 지내고 계신가?”
하림은 개방방주 홍삼공의 익살스럽고 자애로운 표정이 떠올랐다.
“아....방주님이 얼마 전에 이곳으로 향했다고 들었습니다. 주공.”
“할아버지가?”
“예. 바로 주공을 만나기 위해서라는데 얼마나 있어야 도착할지는 아직 전해진 바가 없습니다.”
“하긴 워낙 바람 같으신 분이니.....!”
“주공, 또 얼마 전에 검후께서도 제자들을 이끌고 이곳으로 출발하셨다 들었습니다.”
“어머니까지....?”
“예. 주공!”
“음.....! 어머니는 한동안 폐관에 드셨다들었는데 어느새 끝내고 나오신 모양이군.”
“지금 세인들의 이목이 이곳으로 집중되고 있답니다.”
“좀 많은 사람들이 필요하다, 아무리 우리가 일당 백이라 하여도 한계가 있는 법, 이럴 때 무림지사들이 나서준다면 더 바랄 것이 없을 텐데....”
하림이 고개를 내저었다.
무림맹의 주축을 이루던 제 밥그릇 챙기기에 바빴던 구대문파와 오대세가들의 행태 때문에, 무림의 정기는 매우 혼탁해 있었다.
그러니 심지어 마공에 눈독을 들이는 화산파도 나타나지 않았던가.
하림은 내젓던 고개를 멈추고 술잔을 들어올렸다.
“다행히 당문에서 큰 힘이 되어 주리라 믿는다.”
“당문에서요. 오라버니? 이렇게 폐허가 되다시피 한 당문에서 무슨 기대를 해요.”
조소접이 의아한 눈빛으로 하림을 바라보며 꽃잎 같은 입술을 놀린다.
“그래, 당문에서 지금 폭약을 담은 암기를 개발하고 있거든.”
“아....! 그...그런데 오라버니, 폭약 그거 불법 아닌가요?”
“맞아, 불법이지...그러나 이건 거기에 해당하지 않아, 글자그대로 암기이니까....”
하림의 말이 끝나자, 당수영이 나섰다.
“주공께서 전해준 비책이 그것이었나 보군요. 당문의 암기술에는 말씀하신 것과 비슷한 암기술이 있기는 하죠.”
“맞아! 거기에 내 생각을 조금 보탰을 뿐이야.”
하림의 말에 당수영이 두 눈을 크게 뜬다.
“아...혹시 그럼 천뢰구를 말씀하시는......?”
“응, 수영이 잘 알고 있구나! 맞아 천뢰구에 비침 대신 폭약을 장착한 것이지.”
“아.....그런...!”
“왜? 성능에 의문이 생겨?”
하림의 말에 당수영이 세차게 고개를 젓는다.
“아니...아니오, 주공께서는 어떻게 그런 생각을 떠올릴 수 있는지 놀라서 그렀습니다.”
“하하....생각해보면 단순한 것을 우리는 때로 어렵게 생각하니까 풀어내지 못하는 문제가 많은 것이야.”
당수영은 하림을 경외감이 가득한 시선으로 바라보면서 고개를 끄덕인다.
“당문에서 광폭천뢰구만 완성하면 혈마와 대적도 한결 수월하겠는데요.”
“아니...아니야! 폭약정도로 혈강시들의 금강불괴의 몸을 부술 수는 없을 거야. 다만 당문이 이전처럼 속수무책으로 당하지는 않을 테지.”
하림의 말이 끝나자, 당수영이 그 자리에서 부복하며 두 손을 들어 포권하며 외친다.
“주공! 진정으로 감사합니다.”
“하하....당문의 혈겁이 내내 가슴 아팠던 모양이구나. 수영!”
“예, 주공! 어찌 편할 수가 있겠는지요. 그런데 이제 주공 덕택으로 적어도 패망한 당문이라는 소리는 벗게 될 것 같으니, 이 얼마나 감읍할 일이겠습니까?”
“하하...일어나라! 우리는 이제 모두 한 형제나 다름없는 사람들이다. 너의 일 하나가 이제는 우리 모두의 일이 되어있다는 말이다.”
“주...주공.....!”
하림의 말에 당수영이 목이 매여 말을 더듬거리고, 장내에 있는 모든 이들이 공감하는지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나 그들의 가슴속은 뜨겁게 두방망이질하고 있었다.
한 형제라 하였다, 자신들의 주군이....
모두가 두 눈이 뜨거워지는 순간, 하림이 술잔을 높게 치켜들었다.
“자. 우리는 한 형제이다. 맞는가?”
순간, 객잔이 떠나가게 우뢰와 같은 함성이 터져 나온다.
“옛! 우리는 한 형제이다! 맞습니다.”
“하찮은 혈마에게 죽지마라! 이것은 큰형으로써 명령이다. 알겠는가?”
“옛! 혈마 놈을 짓이겨 놓겠습니다. 큰형님!”
“좋아! 대하오문을 위하여....건배!”
“와아아아아.....! 대하오문을 위하여....건배....!”
순간순간 터져 나오는 우뢰와 같은 함성은 당가타를 들었다 놨다 들썩였다.
벅찬 감정으로 단숨에 술잔을 비운 이들은 술잔을 높이 던져내며 손으로 받아냈다.
-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파란 하늘 올려 보며 오늘도 화이링~입니다.
Comment '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