닭 쫓던 개 신세.
닭 쫓던 개 신세.
높다란 백마방의 담에 스며들듯 사라진 하림의 신형이 넓은 연무장이 있는 전각 앞에 모습을 나타냈다.
“으음......!”
하지만 이내 스치는 바람에 묻혀 실려 온 피비린내에 낮은 신음을 토해냈다.
주위를 둘러보는 그의 곁으로 이십일웅이 한 몸인 것처럼 동시에 몸을 드러냈다.
참혹한 현장을 바라보는 그들의 반응 또한 하림과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흐음......!”
“음.....지독하군....!”
“마기......!”
하림 또한 지독한 마기가 사방으로 넓게 퍼져 있는 것을 보고 이마를 찌푸린다.
“혈마....구나....!”
신음처럼 내뱉는 하림의 말에 이십일웅이 고개를 끄덕인다.
“음.....! 누군가 아직 있다.”
하림은 전각을 노려보고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팽도림이 장내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잠시 후에 그는 한 흑의인을 안고 연무장으로 뛰어 나왔다.
바닥에 내려놓은 흑의인은 이미 한 팔이 잘리고 온몸이 피갑 칠되어 있었는데, 이미 기식이 엄엄(奄奄)하다.
“크흑......! 이 도살도귀가 ....이...렇게....죽다니.....! 커헉....!”
그는 이미 비몽사몽한가운데 앞에 있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분간도 못하고 서서히 눈을 감는다.
팽도림이 그의 명문혈에 진기를 주입해 보았으나 이미 소용없는 일이 돼버리고 만다.
축 늘어진 그를 하림이 바짝 다가앉는다.
“도살도귀라.......명호는 살벌해도 내력은 그리 혼탁하지 않는 자인데....이자도 백마중에 일인인가?”
혼자 말처럼 뇌까리는 그의 말을 운령이 바로 대답해온다.
“주공, 그자는 비록 마두이지만 쓸데없는 살인은 안하는 자였답니다. 자신의 기준에 꼭 죽여야 할 자만 죽였다고 합니다.”
“그래....?”
“그러나 손속이 잔인하고 자비가 없어서 그를 마두로 분류하고 무림맹에서 잡아 들였다고 알고 있습니다.”
“흐음......! 하여간에 정파는 그것이 문제야, 자신들이 무슨 권리로 사람을 분류를 한단 말인가?”
“........?”
“사람은 누구나 그 사람만의 사정이 있을 진데 함부로 판단해서 마두와 영웅으로 가르다니..... 너희는 앞으로 강호 행함에 이르러, 남을 자기의 기준으로 판단하고 핍박하는 우(愚)를 범해서는 안 될 거야!”
“예....주공....명심하겠습니다.”
“예, 주공.....!”
이십일웅이 두 눈을 반짝이며 이구동성으로 대답한다.
그들의 힘찬 대답소리에 하림은 빙긋 웃으면서 도살도귀의 천령혈과 태양혈을 거의 동시에 짚어간다.
-타닥...탁....!
이십일웅은 하림의 돌발행동에 두 눈을 크게 뜨고 주위로 가까이 몰려든다.
그들의 뒤쪽으로 제갈성곡을 필두로 무림맹의 인물들이 안으로 물밀듯이 들어서는 것이 보인다.
“끄....응.......!”
“앗.....저자의 혼이 돌아왔다.”
시체나 다름없던 도살도귀의 입에서 나직한 신음이 토해져 나오고 지켜보던 이들이 깜짝 놀라서 한걸음씩 뒤로 물러선다.
“단명회혼술.....짧겠지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상황정도는 알 수 있겠지.....!”
단명회혼술, 하림이 가진 무서에 기록이 되어 있던 비기이다.
보기에는 간단하지만 그의 내력의 효용으로 만들어내는, 바로 죽은 자를 일깨우는 회혼의 술,
“끙.......!”
하림의 말이 끝나기 전에 도살도귀의 눈이 힘겹게 열렸다.
“누....누구시오......?”
“도살도귀......!”
“누군데 본인을 알고 있소?”
도살도귀는 앳되어 보이는 자가 자신을 알아보자, 힘겹게 치켜뜨고 있던 두 눈을 더욱 크게 떴다.
“이 귀중한 시간에 굳이 그런 건 알 필요 없고 어떻게 된 일인지 그거나 말해봐!”
장내에서 듣고 있던 사람들은 하림의 말이 딱딱하고 고압적으로 들려왔으나 도살도귀의 귀에는 그렇게 들리지 않았나보다.
그는 하림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
“그대였군, 명부로 가는 나를 잡아 챈 것이.....현 강호에 그대 같은 사람이 있었다니.....이름이 알고 싶소...!”
“장하림.....!”
“음...혹시 하오문주....?”
“맞아! 궁금증이 풀렸으면 이제 말해봐! 오래 갈것 같지 않으니......”
도살도귀는 하림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군....우리 백마방은 어차피 우물 안의 개구리였구나. 그대 같은 자가 있는 백도를 넘보다니......커헉......!”
하얗게 눈을 까뒤집는 그를 바라보며 하림은 고개를 가로 젓는다.
그리고 이내 그의 명문혈에 진기를 주입했다.
잠시 경련을 일으키던 도살도귀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난....소....용....없소,,,이미 힘줄이 가닥가닥 끊겼으니.......혈....혈마였소.....불과 몇 시진 전쯤에....거세고 거칠 것 없는 두려운 마기가 온산을 뒤덮었소...”
“혈마와 혈강시.....?”
“혈강시.....? 아....! 그것들이 혈강시.....라 해도 되겠군....맞소...그들이오.”
“백마방 인물들은 모두 죽었나?”
“아.....아니오....혈마는 복속(服屬)을 원했소...대항한 것은 우리고.....”
“혈마가...복속을......? 이상하군....혈마는 결코 누구를 거느릴 정도로 그렇게 번거로운 것을 싫어하는 자 일 텐데.....?”
“컥.......! 흐으음.....! 사실 혈마는 한마디도 하지....않았소....! 혈마를 대신해서.....말한 자는.......커헉....!"
“이봐.....! 조금만 힘을 좀 더 내봐......! 혈마 대신 말한 자라니......?”
시커멓게 죽은피를 내쏟는 도살도귀의 명문혈에 진기를 주입하며 하림이 급하게 외친다.
하림의 덕분이었는지 도살도귀의 두 눈이 돌연 또렷이 변했다.
회광반조(回光返照).
마지막 힘을 쥐어짜듯 그의 입이 서서히 열렸다.
“큭......스...스스로....혈복(血僕)이라 하였...........크흑..........허억......!”
하얗게 눈을 까뒤집는 도살도귀는 그렇게 하림의 품에서 죽었다.
하림은 부릅뜬 채 치켜뜬 그의 눈을 손바닥으로 쓸어내리면서 서서히 일어났다.
“누굴까? 그사이에 혈마한테 종이라 칭하는 자가 붙어있다?”
“오라버니.....! 세상에 누가 혈마의 그 지독한 마기를 견뎌내면서 그의 곁에 머물 수 있을까요?”
다가온 조소접이 고개를 갸웃 거리며 묻는다.
그녀의 뒤로 제갈성곡이 걸어 나온다.
“우리가 혈마를 너무 만만하게 본 것 같으오, 장문주.”
“그러게 말입니다. 마기로 인해 아무도 그의 옆에 설 수 없다는 고정관념 때문에 실수를 한 것 같아요.”
“흐음....큰일이군.”
“소접. 세상에는 별의별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깜박했다. 나 스스로 혈마를 너무 잘 안다고 떠들었던 것이 자만이었어.”
“오라버니, 그것이 어디 오라버니 탓이겠어요. 너무 자학하지 말아요, 그래도 우리한테 혈마는 하나도 변하지 않았잖아요.”
“흠....그것은 결코 그렇지 않다, 누군가가 혈마를 조종해가며 혈마의 능력으로 세상을 먹으려 든다면, 충분히 말이 되는 소리기 때문이다.”
“...........?”
“설마......?”
하림의 말에 사람들의 반응이 각양각색으로 흘러나온다.
-피오오오옹......!
허공에서 휘파람소리처럼 날카로운 소리가 흘러나오더니 순식간에 하림의 어깨로 내려 꽃인다.
“짹짹.....짹....!”
금아다.
덩치에 맞지 않게 참새소리를 내면서 하림의 귀에 부리를 비빈다.
(하루거리까지는 혈마의 존재가 보이지 않는다고.....)
(없어....그 무시무시한 마기는 눈을 씻고 봐도 안보여...어린주인아!)
(그럼, 도대체 이 짧은 시간에 어디로 갔단 말인가?)
(짹짹.....! 그건 어린주인이 알아봐야지, 금아가 그런 것 까지 알 수 있나.. 뭐...!)
(하긴, 너한테 더 큰걸 바라는 내가 바보지...!)
(뭐....? 그 말, 그거 칭찬 아니지.....?)
(뭐, 좋을 대로 생각해!)
(........?)
“이미 혈마의 종적이 묘연합니다.”
하림은 제갈성곡을 바라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장문주, 어떤 대단한 자이기에 혈마를 충동질하여 백마방의 마두들을 데리고 갔을까요?”
“완전히 닭 쫒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이 되고 말았군요. 총사님.”
“그러게 말입니다, 그들의 다음 목적지가 어디일 것 같소?”
“모르지요, 혈마에게 두되가 되는 자가 들러붙었다면, 정말 쉽지 않은 싸움이 되고 말겠군요.”
“으음......!”
두 사람의 안색이 침중하게 변해갔다.
“도림,”
“예, 주공!”
“백마방을 샅샅이 뒤져서 단서를 찾아봐, 혹시라도 뭔가 나올 수 있을지 모르니....”
“존명....!”
팽도림이 이십일웅과 각 전각사이로 스며들듯 사라진다.
“대주들도 이리 와보시오.”
제갈성곡이 지황대주 법송과 인봉대주 방호상이 급히 나선다.
“총사님, 부르셨습니까?”
“예, 두 분도 대원들과 함께 백마방을 훑어보도록 하세요. 그들이 흘린 단서가 있을지도 모르지요.”
“예, 총사님.”
장내에는 이제 하림과 제갈성곡만이 남아 긴 침묵이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먼저 그 침묵을 깨며 하림이 입을 연다.
“총사님, 만약에 말입니다.”
“아...! 말해보시오, 장문주.”
“만약에 제가 혈마라면.....?”
“장문주가 혈마라면...?”
“지금 무슨 생각을 할수 있을까요?”
“흐음.....! 글쎄요.....”
“만약에 제가 혈마라면 아마도 눈에 보이는 무림집단은 모두 표적으로 삼을 것 같은데, 그렇지 않을까요?”
“헉...! 장문주의 생각도 그렇소?”
“그..그럼, 총사님의 생각도...?”
“맞소. 맞아...!”
두 사람의 눈에 어두운 기운이 묻어난다.
이렇게 혈마의 뒤꽁무니만 쫓아다닌다면 매번 닭 쫓던 개 신세를 면치 못할 것이다.
그사이 무림의 정파는 하나둘씩 사라지거나 혈마의 마기에 빠져 혈강시 신세로 온 강호를 뒤덮고 말 것이다.
절대 그렇게 되서는 안 된다.
더욱이 혈마의 곁에서 그를 부추기는 자까지 등장한 마당이니 두 사람의 마음은 다급하기 그지없는 것이다.
-휘리리리릭......!
“주공, 다녀왔습니다.”
팽도림이 앞장서고 이십일웅이 품에 철궤하나씩을 안고 돌아온다.
“무엇이야?”
“예, 백마방이 전쟁준비를 단단히 하려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
“예, 이것들은 어디서 끌어 모았는지 금원보들이 잔뜩 들어있고, 각 창고마다 가득 찬 무기에 식량 또한 장난이 아닙니다.”
“으음.....! 그런데 혈마가 이것들을 가져가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이상하군?”
“장문주, 아마도 백마방 마두들은 마기에 이지를 상실해서 끌려간 것 같군요.”
“총사님, 그런 것 같죠?”
“그렇지 않다면 이런 엄청난 재화가 그대로 남아있다는 것이 설명이 안 되는 것 아니오?”
“흐음....앞으로 우리는 어쩔 수없이 강시를 상대로 싸우게 되는군요.”
하림은 쓴웃음을 지었다.
제갈성곡 또한 그의 웃음과 다르지 않았다.
다만 그의 두 눈은 하림보다 더욱 어두워져 있다는 것이 조금 달랐다고나 할까.
-스르르륵....!
이때, 허공에서 왜소한 검은 인영이 하림의 앞으로 미끄러지듯 떨어져 내린다.
“주공, 보고 드릴일이 있어요.”
“응, 예주, 무슨 일이야.....!”
“예, 본문의 제갈군사께서 보낸 전서에요.”
그녀는 품에서 곱게 접은 봉서를 꺼내 하림의 앞에 내민다.
봉서를 바라보는 하림의 두 눈이 반짝 빛난다.
- 작가의말
많이 추워졌습니다.
건강조심하세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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