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왕이시여.
혈왕이시여.
-휘이이이익......!
“아아아아악......!”
육금황은 어쩌면 생의 마지막소리가 될지 모르는 비명을 질렀다.
폐부를 쥐어짠다는 것이 이런 것이었던가?
그는 슬쩍 돌아본 시선에서 삐죽삐죽한 바위들이 솟아있는 땅이 보였다.
“제길......다 틀려버렸다......!”
한 서린 음성이 흘러나오면서 그는 눈을 감는다.
자신은 이제 곧 처참하게 터져나가면서 죽게 되리라.
그때였다.
-쑤아아아앙.....!
자신이 떨어져 내린 절벽위쪽에서 거센 바람이 몰려오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그 소리는 지금 자신의 귓전을 거세게 울려대는 바람소리와는 기묘한 차이가 있었다.
슬쩍 한쪽 눈을 뜨던 육금황의 두 눈이 화등잔만큼 커지면서 입이 쩍 벌어진다.
육금황의 눈에 들어온 것은 분명 붉은 그림자였다.
-쓔우우웅...!
굵은 동아줄 같은 붉은 그림자는 거의 땅에 닿을 듯 내려 꽂이는 육금황의 몸을 감싸며, 쏘아놓은 화살처럼 허공으로 날아올라간다.
“아아아아악.....!”
육금황은 살았다는 안도보다는 자신을 감싸 안은 붉은 동아줄 같은 그림자가 뿜어내는 마기에, 정신 줄을 놓을 것 같아서 또 비명을 질러댄 것이다.
순식간에 육금황은 허공에서 사라져버렸다.
“아아아아악.....!”
남아있는 흔적은 천장절애를 타고 흐르는 육금황의 처절한 비명소리 뿐.
-쿵....!
“으윽......!”
혼미한 정신 속에 자신의 몸이 딱딱한 바위바닥에 내동댕이쳐지는 것을 느낀 육금황은 짧게 비명을 질렀다.
“카카카.....넌 뭐하는 종자지?”
서서히 고개를 치켜들던 육금황은 흡사 유부에서 들려오나 싶은 소름 돋는 목소리에, 전신이 바짝 오그라드는 것을 느꼈다.
“아아.......!”
그는 두려움에 물든 시선으로 고개를 들던 찰라, 자신을 에워싸고 있는 붉은 그림자들을 바라보고 탄성을 질렀다.
열개가 넘는 혈구들이 자신을 둘러싸고 있고, 정중앙 커다란 혈구 속에는 가부좌를 틀고 앉아있는 괴인영이 눈에 들어 왔던 것이다.
소음의 위치로 보아 방금 전의 그 소름 돋는 소리는 분명 저 괴 인영에게서 들러왔을 것이다.
“오오.......혈...혈왕님이시여......! 드디어 이 미천한 놈의 소원을 들어 주셨군요.”
“카카카.......혈왕?...혈왕이라고....?”
“오오......그렇습니다. 혈왕님....장차 이 거대한 중원의 주인이 되실 분이시니 당연히 혈왕님이라 불러야 옳을 것입니다.”
“카카카......호오....그놈, 입안에 온통 참기름을 머금고 있는 놈이구나. 감히 본좌를 감언이설로 꼬이려하다니....네놈은 죽고 싶어 환장한 놈이겠구나.”
괴인영이 들어있는 혈구가 사정없이 일렁거린다.
괴 인영, 즉, 혈마는 손상된 마기를 다독이려 이 괴산에 올랐다.
그런데 파리보다 더 하찮은 놈 하나가 계속 윙윙거리는 소리를 해대니, 좀처럼 집중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면상이나 보고 잡아 죽이려고 놈을 살려 데려왔는데, 이놈 하는 꼴이 자신을 비웃는 것 같지 않은가.
혈마의 마기가 불쑥 튀어나오면서 육금황의 목젖을 향해 곧장 뻗어간다.
“헉...! 혈왕님.....어찌.....헉.....!”
“네놈은 지금 본좌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뭐? 거대한 중원이 주인이 될 것이라고....?”
“헉...!”
붉은 마기에 목젖을 잡힌 육금황은 하나 남은 팔을 허우적거린다.
“방금 전에 어떤 버러지 같은 양아치새끼하나 처리하지 못하고 도망쳐왔거늘...뭐, 중원의 주인?”
“헉.....살려주십시오, 혈왕님, 살려만 주신다면 이 미천한 놈이 반드시 혈왕님을 이 중원 주인으로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카카카....벌린 입이라고 아주 찰지게 말은 잘도 쏟아 내는구나....네놈의 이름은...?”
“켁.....켁.....! 혈왕님....숨을.....숨을 쉴 수....”
이미 목젖을 잡혀 허공에 띄워진 채, 발버둥을 치는 육금황의 두 눈이 하얗게 치켜떠 돌아간다.
“켁......혈....왕....님......살...려.....!”
거의 끝부분은 미약하게 흘러나오는 육금황의 목소리.
일렁거리는 혈구 속에서 혈마는 육금황의 숨통을 조금 틔어준다.
그러나 아직 목젖은 그대로 잡혀 있는 육금황......
“케엑.....!....콜록....콜록.....!”
눈물콧물 다 쏟아내던 육금황이 두려운 눈으로 혈구를 바라본다.
“카카....감히 다시 한 번 본좌의 심기를 건드린다면, 그 목 위에 달린 것을 쥐어 뜯어버릴 것이다. 이름?”
“허억.....! 육...육금황입니다. 혈마님.”
“카카아......뭐하는 놈이냐?”
육금황은 마지막 잡은 생명의 고리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 입술을 깨물며 혈마를 향해 고개를 들지도 못하며 눈도 뜨지 못했다.
“혈왕님, 저는 본시 화산파의 대제자였습니다.”
“카오......! 화산파? 대제자라면 차기 장문인에 내정된 자 아니더냐?”
“그....그렇습니다.....! 원래대로라면 반....반드시 그렇게 되었을 것입니다.”
“카카....원래대로라고...?”
“예....적혈마도라고 그 육시할 놈만 만나지 않았다면 한 팔을 잃지도 않았을 것이고, 얼마 후면 화산의 장문인도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혈마님...!”
“뭣이...적혈마도....?”
“예. 혈왕님, 순전히 그놈 때문에 제 인생이 이렇게 비참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적혈마도가 너의 팔도 잘랐다.?”
“옛! 혈왕님, 그놈의 도에 이리 된 겁니다.”
“카카....도(刀)에? 그놈은 검을 쓰던데.....?”
“그.....그럴리가요? 분명히 그놈은 도의 고수였습니다. 그래서 별호도 적혈마도이고요.”
“카카....음....적혈마도....일리가 있구나. 네 놈은 과연 그놈을 씹어 먹어도 시원치 않겠구나.”
“혈왕님, 이르다 뿐이겠습니까, 당장이라도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하나도 남김없이 씹어 먹어버리고 싶습니다.”
“카카카......!”
이 순간에 혈마의 마기가 움켜잡았던 육금황의 목젖을 놓으며 사라진다.
육금황은 자신의 말이 먹혀든 것을 느끼며 쾌재를 불렀으나, 본심을 꾹 눌러 참고 땅바닥으로 무너지듯 오체투지를 한다.
어떻게든 약을 쳐서 혈마를 꼬드겨야 자신이 살 수 있다.
그러니 지금부터가 중요하다.
“혈왕님! 이 미천한 놈의 목숨을 살려 주셔서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카카카.....! 네놈이 마음에 들어서 살려주는 것이라는 생각은 버려라. 적혈마도라는 놈에게 가진 원한을 높이 사서 살려주는 것일 뿐, 알았으면 어서 꺼져라!”
“헉...! 혈왕님, 어찌 뵈옵는 존안인데 내치시는 것입니까? 이 미천한 놈을 옆에만 있게 해주신다면 이 드넓은 중원 땅을 혈왕님의 것으로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쿵....쿵.....!
오체투지하면서 바위바닥에 이마를 찧는 육금황을 바라보는 혈마의 혈무가 일렁거린다.
이미 육금황의 이마는 선혈이 낭자하게 변하였고. 그래도 그는 고통을 참아내며 혈왕을 부르짖는다.
“혈왕이시여, 이 미천한 놈을 한번만 믿어주소서.....!”
“카카카....! 뱃속에 악귀를 품고 있는 놈이로구나.....카카카....!”
“혈왕이시여.....제발......!”
“카카카....좋다! 네놈의 계획을 들어 보도록 하지.”
“오...오....! 감사합니다. 혈왕이시여....!”
육금황이 더욱 세차게 이마를 내려찍는다.
“크흑.....혈왕이시여.....! 먼저.....중원을 장악하고 있는 무림맹을 쳐내고, 전 중원을 장악한다면 적혈마도는 홀로 남게 될 것입니다.”
“무림맹을 쳐낸다?”
“예예...! 혈왕이시여, 반드시 그것이 먼저 입니다.”
“카카......좋아! 더 들어 보도록 하지.....!”
육금황의 두 눈은 온통 자신의 이마에서 쏟아져 흐르는 선혈로 뒤덮여 있다.
그러나 그의 두 눈동자만큼은 이 순간, 희열에 번뜩이며 송곳 같은 안광을 쏘아낸다.
드디어 혈마의 마음이 동했다.
혈마만 등에 업을 수가 있다면 이제 아무도 자신을 업신여기지 못하리라.
“혈왕이시여.....중원에서 칼을 든 자들은 모두 혈왕님의 발아래 납작 엎드리게 될 것입니다. 반드시 소인이 그렇게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카카카...그놈, 간교한 혓바닥이 마치 뱀과 같구나! 좋아...좋아....! 아주 마음에 들어....그러나 만일 중원을 얻는 것도 힘들겠지만, 적혈마도를 잡는다는 보장 또한 없다. 그러면 넌 또 어찌할 것이냐?”
육금황의 어깨가 뜨끔해졌다.
혈마의 시선이 자신을 꽁꽁 옭아매고 있는 것을 느끼며 신음을 흘렸다.
그는 이마에 굵은 식은땀을 흘리면서 겨우 입을 열었다.
“혈왕이시여...! 그렇다면 저는 중원이 아닌 이 강산을 혈왕님께 안겨 드릴 것입니다.”
“...........”
순간, 혈마와의 간격에 있던 정적이 뚝 끊기는 것 같았다.
너무 쌨나?
자신이 너무 달린 것인가?
자신의 경솔함에 육금황은 이번에만큼은 진심으로 바위에 이마를 찧고 싶어졌다.
침묵으로 일관하는 혈마. 이것은 자신이 원했던 반응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왕, 어쩔 것인가?
-퍼억!
육금황은 가장 강하게 이마를 내려찍었다.
바위에서 서서히 굳어가던 선혈위로 또다시 흥건한 선혈이 튄다.
“크흑.....혈왕이시여! 믿어 주십시오. 반드시 자금성을 무너트리고 이 강산을 이놈의 손으로 떠서 안겨 드리겠나이다.”
“...........?”
“혈왕이시여!.........”
“카카카카카카카........!
침묵하는 혈왕을 향해 피를 토하듯 외치던 육금황이 다시 이마를 바위위로 내려찍을 때, 혈마의 앙천대소하는 소리가 천지를 진동시킨다.
“혈...혈왕.....!”
“카카카....그놈.....! 이번에는 정말로 마음에 드는 소리를 하는구나! 본좌가 이 강산의 주인인 황제가 된다 하였느냐?”
“예! 맞습니다. 혈왕이시여, 소인이 반드시 그렇게 만들어 드리겠사옵니다.”
“카카카카카......! 마음에 들어...! 아주 마음에 들어.... 저 나무토막 같은 것들만 데리고 다니느라 재미가 없었는데 아주 마음에 드는 놈을 만났구나.”
“혈왕이시여, 믿어주셔서 감사하옵니다.”
“카카카카......좋아! 네놈이 본좌의 손아귀에 이 강산을 쥐어 준다면, 본좌는 네놈에게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를 내어주마!”
“허억....! 감사하옵니다. 혈왕이시여.....!”
-퍼억.....!
육금황의 이마에서 또다시 피가 튄다.
“카카카........! 아주 마음에 들어.....네놈에게 선물을 안겨주마!”
-츠츠츳......츠츠츳.......
혈마의 혈구 안에서 피빛마기가 뻗쳐 나오면서, 육금황의 전신을 옭아매기 시작한다.
그것은 이루 말할 수없는 고통이었다.
육금황의 전신 모공으로 스며드는 마기는 그로 하여금 극심한 고통을 느끼게 만들었다.
“아아아아악.....!”
온몸을 뒤틀면서 처절한 비명을 지르는 육금황은 어느 순간에 온몸에 일렁이던 생명의 빛이 꺼져가고 있었다.
“카카카카카카카카.........!”
혈마의 소름끼치는 괴소가 온산을 헤집는다.
-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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