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오이십일웅.
하오이십일웅.
다음날 아침, 제갈성곡은 무림맹으로 급히 돌아갔다.
제갈성혁 또한 아무 일도 없던 사람처럼 태연하게 하오문의 일과를 시작했다.
제갈송령이 그의 곁에 늘 붙어있었지만, 그는 귀찮은 내색은 하지 않았다.
휴가를 주었던 대원들이 하나 둘씩 돌아오기 시작하였고, 그들 대부분은 자신들의 가족들을 데리고 돌아왔다.
제갈성혁은 하림에게 들은바가 있어서 대원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모두 수용해주었다.
즉, 영파현에 장원을 짓겠다고 하면 사정을 보아 지원하였고, 하오문내에 기거하겠다면 문중 내 여유 있는 땅을 내주어 스스로 전각을 세우도록 하였다.
특이한 것은 바로 화봉 금서옥이었다.
그녀는 주로 상가경영을 주업으로 하는 금가장의 모든 식솔들을 데리고 영파로 들어오기로 한 것이다.
금가장은 영파현 내에 가장 목이 좋은 자리에 상가를 짓기 위해 관청에 수속을 밟았고, 그 결과 제법 큰 상가를 우선으로 지을 수 있게 되었다.
훗날 알게 되었지만 금가장주와 그 측근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평생 이룬 사업체를 버리고 영파로 이주하는 것을 처음에 극구 반대하였으나, 금서옥이 협박 반, 회유 반으로 그들이 고집을 꺾고 들어오게 됐다는 후문이 있었다.
그녀의 변은 한마디로 곧 천하에 대란이 일어날 것이다, 그러니 세상어디에도 안전한곳은 없지만, 그나마 조금이라도 살 희망이 있는 곳이라면, 역시 하오문의 지근거리밖에 없을 것 이다,라고 했다는 것이다.
제갈성혁 또한 그녀의 생각에 완전 공감하고 있었으니 전폭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밖에 다른 대원들도 대부분 아직 미혼인 사람들이 대부분이라, 가족을 데리고 들어오는 데는 아무 이견이 없었다 한다.
하림은 그들이 스스로 일가를 이루는데 쌍수를 들어 환영했다.
어차피 자신과 평생 함께 갈 사람들이다.
이제 남이 아닌 가족들이나 마찬가지인데, 무엇을 아끼겠는가?
더욱이 하오문은 한마디로 부자이다.
남아나는 재물을 그들에게 모두 퍼준다 한들, 하나도 아깝지 않고 표시도 나지 않을 것이다.
하림이 하오문에 들어선 후, 삼 일째 되는 날부터 운기조식에 들어갔다.
그는 마치 폐관을 하는 사람처럼 곡기를 끊고, 벽곡단만으로 연명하며 운기조식에 몰두하고 있다.
그는 이미 천뢰옥에서 공청석유를 마시고 내공은 대성한바 있다.
오기조원이 넘어선 상태에서 공청석유 덕분으로 손쉽게 삼화취정의 경지를 밟아버린 것이다.
그런데 해검양의 내단이 문제였다.
그동안 아무리 충격을 주어도 꼼짝하지 않던 해검양의 내단이 갑자기 꿈틀거렸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때 뿐 이였다.
다시 돌덩이처럼 굳어진 느낌으로 변한 해검양의 내단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움찔거렸던 흔적조차 지워버렸다.
하지만 하림은 실망하지 않고 끈기 있게 매달렸다.
그의 방문 앞에는 팽도림과 운령이 호법을 서고 있었고, 그 주위로 돌아온 대원들이 하나둘씩 에워싸고 있었다.
하림이 방문을 열고 나온 것은 무려 열흘이나 지난 후였다.
그는 담담한 신색으로 대원들과 식사를 하였고, 말미에 딱 한마디만 하였다.
“내일부터 무림맹으로 갈 준비를 하도록 해, 출발은 삼일 후야!”
***
-따각, 따각, 따각...!
이십여 기의 인마가 대하오문이라는 거대한 편액이 걸린 정문을 벗어나고 있었다.
그들은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영파현 관도를 지나고 있었다.
하나같이 범상치 않는 기운을 흘리며 전신을 흑의무복과 검붉은 피풍의로 감싼 인물들.....
바로 하오문을 떠나가는 하림과 대원들이었다.
백의무복을 입은 하림은 선두를 팽도림과 운령에게 내주고 그 뒤쪽에서 움직였고, 그의 주위로 세 명의 여인들이 호위하듯 에워싸며 나가고 있었다.
그녀들의 입가에는 시종일관 백합처럼 환한 미소가 끊이지 않았고 이따금 힐끔거리는, 하림을 향한 여인들의 시선에는 그녀들만의 연모의 감정들이 듬뿍 묻어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그쪽으로는 완전 목석과 다름없는 하림이, 그녀들의 마음을 전혀 알리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녀들은 개의치 않았다.
그의 옆에서 이렇게 어깨를 나란히 하고 바라만 볼 수 있는 것도 어디인가?
그녀들의 하림을 향한 연정은 어느새 서로 묵인하고 인정하는 분위기가 농후했다.
그동안에 서로의 본심을 꺼내놓고 그녀들만의 단합은 확실하게 이루어진 것 같았다.
그러나 역시 사랑이라는 감정에 전혀 틈을 내주지 않는 하림은, 꿈에도 이런 사실은 모르고, 그녀들은 은근 애간장을 태울 수밖에 없었다.
하림의 어깨위에 앉아있는 금아마저도 여인들의 눈빛을 알아챌 정도로, 노골적인 그녀들의 눈길에 꿈쩍도 하지 않는 하림을, 이따금 바라보며 금아가 쫑알거린다.
(멍충이 어린주인아...돌대가리 어린주인아....!)
영문도 모르고 금아에게 저런 소리를 듣는 하림은 순간, 이마에 힘줄이 튀어나왔지만 이내 쫑알거림을 멈추고, 딴청을 하고 있는 금아를 노려만 볼 수밖에 없었다.
하오문을 떠난 그들은 영파현을 벗어나고부터 무섭게 달리기 시작했다.
그들이 타고 있는 말들은 하루에 천리 길을 우습게 달리는 천리마들이다.
귓가를 스쳐지나가는 바람소리가 흡사 몰려드는 태풍 속으로 뛰어드는 것 같은 소리를 내었다.
그렇게 달려서 그들은 겨우 엿새 만에 무림맹이 있는 하남성 정주에 도착을 해서 무림맹으로 입성을 했다.
“우와.......! 저들이 누군가?”
“기세가 장난이 아니군...”
“우리 무림맹에 저런 기세를 흘릴만한 영웅들이 누가 있을까?”
“가...가만.....저기 중간에 백의무복을 입은 사람이 혹시 적혈마도 아니, 천룡대주님, 아닌가?”
“앗...! 그러고 보니 정말 장하림 대주가 맞는 것 같은데....?”
“그렇군, 삼년 전에 실종되었다던 천룡대주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고 하더니 정말로 그가 맞는 것 같군.”
“맞아...맞다고...! 천룡대주가 맞다고, 그러고 보니 하나도 변하지 않았군, 여전히 앳된 얼굴이지 않은가?”
무림맹의 길을 느린 속도로 걸어 들어가는 일단의 무리를 향해서, 많은 사람들이 저마다 웅성거렸다.
일신에 뿌옇게 내려앉은 먼지로 인해서 누가 누구인지 전혀 알 수가 없었지만, 유독 하림만은 은은한 광채까지 내뿜으며 뽀얗게 빛나고 있었던 것이다.
대원들은 그런 그의 모습에 혀를 내저을 수밖에 없었다.
오는 도중에 운령이 어떻게 자욱하게 덮치는 먼지까지 피할 수 있느냐 라고 묻자, 하림은 그저 눈에 보이는 먼지를 그대로 맞는다면, 그건 바보나 하는 짓이지 라는 한마디만 툭, 뱉었을 뿐이다.
***
“어서 오시게, 문주!”
“오느라 수고 많았소, 문주!”
대원들을 쉬라고 하고 맹주전으로 들어서는 하림을 향해, 문밖까지 나와 그를 기다리던 맹주와 총사가 반갑게 맞는다.
무림맹주 일선 도경진인 만면에 미소를 짓고, 하림의 포권을 받는다.
“그동안에 별래무양 하셨는지요, 맹주님.”
“구석방에 앉아서 밥만 축내는 늙은 도사가 무슨 할일이 많겠소, 그저 들려오는 장문주의 승전보에 한 다리 끼지도 못하면서 그저 부러울 뿐이지요.”
“맹주님도 참,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총사께서도 바쁘시지요?”
“하하....그래도 문주덕분에 한시름 놓아서 조금은 편하게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중이지요, 자, 들어갑시다.”
하림을 이끌고 맹주의 집무실로 들어서서 긴 탁자 앞에 삼인은 자리를 잡았다.
맹주는 삼년 만에 만난 하림의 신색을 살펴보며, 터져 나오는 탄성을 숨기지 않았다.
“오오.....! 정말 대공을 이루었군요. 축하하오, 문주.”
“하하.....맹주님, 아직 멀었습니다. 너무 추켜세우지 말아주세요.”
“허허....젊은 문주의 욕심이 과하다, 지금의 경지를 이루어놓고도 아직도 멀었다니.....무량수불....과연 무림의 홍복이오.”
“하하...과찬이십니다. 맹주님.”
“허허.....무량수불.....! 문주, 그것은 그렇지가 않소이다. 본도도 며칠 전에 하오문을 다녀온 총사께 말만 듣고, 문주의 경지가 높다는 것을 알 수 있었지만, 지금 이 정도일 줄은 정말 몰랐소. 어떻게 약관이 겨우 넘어간 나이에 이 같은 경지를 이룰 수 있는지, 눈으로 보고도 본도는 믿을 수가 없소이다.”
“맹주님, 자꾸 그렇게 말씀하시면 어린 제가 몸 둘 바를 모르겠어요. 이제 다른 말씀을 해주시죠.”
“허허....무림의 홍복이로다. 무량수불...!”
도경진인은 도호를 힘차게 발하면서 하림을 믿음직하게 바라본다.
그것은 총사인 제갈성곡도 다르지 않았는데, 그의 눈에서도 하림을 향한 무한한 신뢰가 흐르고 있었다.
도경진인이 자애로운 미소를 지우지 않으면서, 하림의 광휘가 서린 얼굴을 바라보며 말을 잇는다.
“그렇지 않아도 아까 무림맹으로 다가오는 거대한 기세에 깜짝 놀라서, 본도가 한달음에 맹주전 지붕으로 달려 나간 적이 있소. 그리고 문주가 거느리고 다가오는 인마를 보는 순간, 너무 놀라고 말았지. 어떻게 삼년 전에 겨우 일류 문턱을 기웃거리던 사람들을 초고수로 만들 수가 있소이까, 너무 놀란 나머지 벌린 입을 다물 수가 없었소.”
“맹주님, 실은 본문의 금지(禁地)에 다녀왔습니다.”
“하..하오문의 금지요?”
도경진인과 제갈성곡이 진한 호기심에 눈을 반짝인다.
“예, 무려 천년 만에 열리는 금지였지요, 그곳에서 대원들과 함께 지옥을 경험하고 내려 왔습니다.”
“그 말은 곧, 그들이 삼년동안 하오문의 무학을 익혔다는 말인 것 같소?”
“맞습니다. 그들은 이제 본격적인 하오문의 무공을 섭렵하고, 완전한 하오문의 제자가 된 것이지요.”
“아.....무려 천년 만에 열린 하오문의 금지에는 얼마나 귀한 것들이 들어 있었을까요, 이는 무림의 홍복이자, 하오문의 경사가 아니겠어요, 맹주님?”
제갈성곡의 말에 도경진인이 나직이 도호를 외운다.
“무량수불.....맞소이다. 총사...대단한 일이지요, 어쩐지 하나같이 일대종사의 기운을 뿜어내더니 역시 그런 사연이 있었구려.”
“이번에 무림첩이 발동되었으니 그곳에서 활약하는 일당백의 천룡대가 정말 기대가 됩니다. 문주.”
제갈성곡이 하림의 향해 진한 미소를 띠운다.
마치 앞으로는 너만 믿을게 하는 그런 표정이다.
하지만 하림은 결코 그의 바람처럼 이리저리 죽도록 뛰어다니며, 수하들을 힘들게 하지 않을 생각이다.
내심 코웃음 치는 하림의 입이 열리려는 순간에 도경진인이 먼저 선수를 쳤다.
“총사....!”
“예, 맹주님.”
“아무래도 이제는 말이오, 무림천룡대라는 것을 거두어 들여야 할 것 같소.”
“예엣? 무..무슨....말씀이신지?”
“경우가 그렇지 않소. 이제는 천룡대원이라는 사람들이, 모두 완벽하게 하오문 사람들이 되고 말았는데, 어떻게 무림맹의 천룡대원이라 부를 수 있단 말이오. 이미 장문주의 사람들이 되어버린 마당에 그렇지 않소?‘
“으음.......과연...일리가 있는 말씀이십니다. 그럼 말이 나온 김에 천룡대를 해체하고, 그 자리에 하오문의 영웅들을 집어넣는 것이 어떨까요. 어떻소. 문주?”
엎어 치나 매치나, 하림은 이 말이 얼른 튀어나오려 했지만, 은은한 미소를 먼저 띠웠다.
“두 분의 마음써주심이 진심으로 감격했어요. 이름이 바뀌어도 저희가 해야 될 임무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니 두 분께서 말씀하시는대로 따르겠어요.”
“하하...역시 화통하시오, 문주...! 자, 그럼 이왕 말이 나온 김에 총사, 그들을 어떻게 부르면 되겠소. 한번 말해보시구려.”
도경진인의 말에 한동안 탁자에 놓인 서류를 들썩이더니 드디어 입을 열었다.
“문주, 그들을 천룡대가 아닌 하오이십일웅이 어떻소?”
“하오이십일웅.....?”
“오....그것 괜찮은 것 같소.”
도경진인이 무릎을 치고, 하오이십일웅을 되 뇌이던 하림이 제갈성곡을 향해 포권을 한다.
“마음써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총사님. 그렇게 부르도록 하지요.”
하오이십일웅, 차후 무림에 큰 획을 긋게 되는 대하오문의 수호신들이자, 스물한명의 무왕들은 그렇게 하오이십일웅이라는 또 다른 이름을 얻게 되었다.
- 작가의말
메리추석입니다. ㅋ
반가운 사람들 많이 만나고 행복한 밤 되시고 계시겠지요?
그러나 저는 이밤에 아직도 하림의 옷자락을 놓지 못해 벗어나지 못하고 있네요. ㅎㅎ
모두 행복하십시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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