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쿠라스 420화-혈문(血聞)(3)
사람들이 피먹이라고 불렀던 마수는 붉은 핏덩어리 같은 모습을 취하고 있었다. 붉은 구체로 부터 쏟아지는 피의 탄환은 마수를 꿰뚫기 시작했고 마수들은 혼란에 빠졌다. 조금 자신의 힘에 자신있는 마수들은 피먹이에게로 달려들었고, 상대적으로 열등한 마수들은 바로 그자리를 피했다. 수십갈래로 나뉜 피로 이루어진 무기는 마수들을 꿰찌르고 죽여나갔다.
벤하르트는 차마 그것과 싸울 생각을 하지 못했다. 만전인 상태라고 해도 붙어볼 생각을 할지 안할지 모르는 마당에 주변에는 몇백이 될지 모르는 마수들이 느글거리는데다 몸상태마저 좋지 않은 때에 평화주의자인 벤하르트가 싸우고 싶다는 생각을 할리 없었던 것이다.
'아직 우리는 보지 못한건가?'
마수들과 싸우는 피먹이는 그 많은 공격을 가하면서도 그들의 근방에는 공격을 가하지 않고 있었다.
"레니아. 이쪽이야."
나름 호전적인 성격인 레니아도 이런 상황에서는 싸우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기 때문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벤하르트를 따라 도주했다. 벤하르트가 도망친 길은 상대적으로 마수가 적은 방금전짜기 마수들이 머물렀던 길이었다. 이미 마수들은 도망을 치거나 피먹이에게로 달려들었기 때문에 숨어있는 몇을 제외하고는 마수들은 없었다.
둘은 생각도 하지 않고 정신없이 길을 따라 내달렸다. 꽤 먼 거리를 왔지만, 피먹이인지 마수인지 모를 비릿한 핏내음은 가실줄을 몰랐다.
"캬앙."
정신없이 도망치고 있던 때에 흡사 늑대같이 생긴 마수가 벤하르트의 팔을 노리고 들어왔다.
'빠르다.'
지금껏 계속해서 강해진 마수들에게 놀랐던 벤하르트였지만, 마수의 강맹한 공격에 다시한번 놀랄수밖에 없었다. 달려든것은 한마리였기 때문에 제압하는것에는 무리가 없었지만 같은 수준의 마수가 열 단위로 존재하게 되면 안전을 장담할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몸을 돌려 마수의 공격을 피하고 송곳니를 검으로 절단한뒤 발로 걷어차 떨어뜨렸다. 지극히 간단한 행동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늑대마수의 뼈는 상당히 으스러져서 더 움직이지 못했다.
'정말 이상한데, 아무리 위험하다고 했어도, 이 계절에 마수가 많다고 했어도, 이런 마수들이 돌아다니는 곳을 왕래 할수가 있다는건가?'
벤하르트는 스스로를 낮추려 하지만, 사실 그 자신도 객관적으로 자신이 어느정도 강하다는것을 인정하지 않을수는 없었다. 거기에 자신 못지 않은 레니아까지 있는 상태에서도 그는 목숨의 위협을 받고 있었다.
이쯤 되니 레니아가 이상하다고 한것은 애교로 느껴질 정도로 이상하다는 생각을 감출수가 없었다.
"저기 벤.."
"왜."
"아무래도 길을 잘못 든거 아냐?"
"잘못 들었다니.."
잠시 다른 생각을 하다가 주위를 돌아보니 먹먹한 어둠속에서 색색의 눈이 빛나고 있었다.
'.....'
벤하르트는 보통 자신의 주위에 감지하기 위한 기를 흩어 놓는다. 그렇기에 그는 대부분의 적의를 느낄수 있었다. 하지만 이곳은 그에게 익숙치 않은 산이었고, 몸은 지쳐있었던데다가, 잠시 다른 생각을 한것,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곳의 마수들은 살기를 숨기는것에 능숙한 그 여러가지 일들이 겹쳐서 그는 마수들의 소굴에 발을 들이밀면서도 위험을 감지하지 못했다.
"벤."
"조용히."
그는 레니아를 제지하고 천천히 이동하면서 눈치를 살폈다. 어둠속에서 샛노랗고 파랗고 빨간 형형색색의 눈은 그들이 이동하는것을 그대로 따라오고 있었다. 그 괴기스럽고 두려움에 벤하르트는 살짝 몸을 떨었다.
마수들은 그들이 있다는것을 확실하게 자각하고 있었다. 보이는 눈만 해도 수십여마리, 레니아의 훌륭한 보조가 있다고 해도 장담하긴 어려웠다.
"마법 유효하냐."
"아직은.."
벤하르트가 살짝 뒷걸음질을 치자 마수들은 틈을 놓치지 않고 으르렁 거렸다. 반대로 앞으로 가려 해도 곧장 달려들것 같은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그 조금의 실험이 마수들을 자극했는지 그들은 곧장이라도 달려들 태세를 취했다.
"어쩔수 없나."
마수들의 반응에 벤하르트는 검을 뽑아들려고 했다. 신경을 싸움에 곤두 세우고 있을때 그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무언가를 피했다. 피한 무언가는 붉은색의 선이었다.
"이건."
뒤에는 어느새 도착한 피먹이가 피의 창을 내지르면서 마수들을 공격하고 있었다. 벤하르트와 레니아만을 생각하고 있었던 마수들은 피먹이를 보자 움찔거리다가 피의 공격에 마수들이 당하고 나서야 자극에 마수들은 괴성을 지르면서 싸움을 촉구했다. 열망이 들끓는 사이 그 시간에도 피먹이는 몰려온 마수들과 싸우고 있었다. 벤하르트는 그 기회를 놓칠수 없어 검을 뽑아들었다.
"백뢰!"
마수들을 봐주고 말고 할 생각도 없이 그는 전력으로 백뢰를 사용했다. 백색의 번개는 마수들을 휘감아 직선으로 완연히 마수들을 시원하게 쓸어버렸다. 하지만 쓸어버린 그 시점에서도 사방에는 마수들이 느글거리고 있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벤하르트와 레니아는 시선을 한번 맞추고는 동시에 백뢰가 만들어낸 길을 내달렸다. 기와 마력으로 한껏 단련된 힘을 쏟아 부어서 그들은 오랜만에 전력을 다해 달렸다.
뒤에는 피먹이와 마수들의 괴성과 비명성이 어우러지고 있었다.
얼마간이나 달렸을까. 어느순간 소리는 일절 끊겼다. 그리고 그와 완전히 상반된것처럼 주변은 적막함이 감돌았다. 그 적막함에 고개를 들자 벤하르트는 낯익은 광경을 보게 되었다.
"뭐.."
"흑백공간이야."
레니아도 놀란듯 주변을 두리번 거렸다.
방금전까지만 해도 그들이 있었던 곳은 어둠속에서 괴성과 비명이 섞여 서로 죽이고 죽임당하는 흡사 지옥과도 같은 곳이었다. 하지만 지금 보이는 곳은 색이 없는 장소. 흑과 백만이 모든것을 존재케 하는 흑백공간이었다.
"마수.. 설마..?"
레니아는 그 배경을 눈여겨 보고는 곧 무언가를 확인한뒤 생각을 정리했다. 그리고는 몇초 지나지도 않고 벤하르트에게 말했다.
"벤. 이제부터 나는 공격할수 없어."
"그게 무슨 소리야?"
"마지막으로 도망치기 위한 마력만 남겨 둘 거거든."
영문 모를 레니아의 말에 벤하르트는 의아한 얼굴을 해보였다.
"그러니까 여차 할때는 네가 나를 지켜줘야만 해. 지금까지 해왔던것처럼 말야."
"무슨 소린지 이유부터 말해줘."
하지만 레니아는 벤하르트의 말에는 아랑곳 하지 않고 살짝 눈을 감았다. 그녀의 가슴 언저리가 살짝 빛나는가 싶더니 이내 빛은 사라져있었다.
"됐다."
"레니아."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잘 들려."
"마력을 어디에 사용한거야?"
벤하르트는 레니아의 마력이 거의 소진 했음을 알고 물었다.
"그러니까,,"
레니아가 설명하려는 찰나 지진같은 땅울림이 들려왔다. 그 소리는 무서운 속도로 벤하르트와 레니아에게로 다가왔다. 벤하르트는 나무를 타고 올라 다가오는 것이 무엇인지 확인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그들이 서있는 이곳이 어디인지를 파악할수 있었다.
다가오는것은 괴물. 마수라는 말이 실례가 될정도로 거대한 괴물이었다. 입의 크기만 벤하르트를 한입에 삼킬수 있을정도로 거대했고, 몸집은 작은 성을 연상케 할 정도였다. 그리고 그 모습은 흉악 스러워서 보는것만으로도 오금이 저려올 정도의 말 그대로 괴물이었다.
"그렇구나. 이곳은."
그는 이곳이 라질이 말했던 그 흑백공간이라는것을 깨달았다.
"레니아 피해!"
"말했잖아. 나는 거의 모든 마력을 다 사용해버렸어. 뛴다고 하면 일반적인 여자 정도의 속도 밖에 낼수 없어. 지켜달라고 했었지? 원래 목숨을 누구에게 맡기거나 하는 그런 무책임한 사상은 좋아하지 않지만, 너라면 상관 없어."
"알았어. 그럼 기다리고 있어."
그는 검을 뽑아 들어 괴물에게 내달렸다.
'라질이 젊었을때 이길수 있을 정도라면 나라도,'
가볍게 그는 검을 휘둘러 괴물의 몸을 강타했지만, 상처하나 나지 않았다.
"어?"
허리에 무언가 닿는가 싶더니 그는 땅에 곤두박질 쳐졌다. 극심한 충격에 그는 잔뜩 인상을 찡그리고 신음했다.
"크윽."
그의 허리에는 괴물의 꼬리가 칭칭 감겨 있었다. 벤하르트는 검으로 꼬리를 절단하고 괴물을 향해 검을 겨눴다.
"일섬. 백뢰."
검끝에서 쏟아지는 백뢰의 섬격이 괴물을 향해 쇄도했고 괴물은 고통스러워 했지만 빠른 움직임으로 벤하르트를 짓밟기 시작했다.
"안되겠는걸."
벤하르트는 괴물과 상대하는것을 포기하고 레니아에게로 돌아왔다. 백뢰의 희미한 잔광을 본 레니아가 물었다.
"해치웠어? 꺄악."
그는 레니아를 번쩍 들어 괴물을 피해 달리면서 말했다.
"공격이 전혀 먹히질 않아. 달아나자."
"....."
자세가 공주님 안기의 자세라 레니아는 얼굴을 붉히다가 문득 고개를 들자 삽시간에 얼굴을 시퍼렇게 질리며 말했다.
"벤! 따라잡히겠어."
"정말?"
"세발자국. 남았어."
제룽을 기준으로 레니아가 말했다.
"산넘어 산이군. 레니아 미안."
"아앗."
벤하르트는 레니아를 흡사 짐짝처럼 어깨에 걸치고는 한손으로는 백뢰를 몇번인가 날려 거리를 벌렸다. 그들은 괴물이 눈치채기 전에 수풀속으로 숨었다.
"겨우 따돌렸다."
"그래."
짐짝 취급을 당한 탓에 레니아는 퉁명스레 말했다.
"하여간 저런 라질도 이겼던 제룽인지 뭔지 하는 마수에 흔들리기나 하고, 엄청 실망스럽네."
"그렇게 말해도 저 괴물을 상대하기 위해 힘을 다 뺄수는 없는 노릇이잖아. 호위노릇은 확실하게 해줄테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벤하르트의 말에는 왠지 모를 자신감이 느껴졌다.
"흐 흥. 그렇게 말해봐야.."
"잠깐."
벤하르트는 레니아의 말을 막고 바로 그녀를 끌어 안아 뛰었다.
"뭐하는.."
그들이 숨어 있던 수풀은 완전히 납작하게 뭉게졌다. 레니아는 뒤를 보면서 놀라고 흐릿한 공중을 바라보았다. 아지랑이가 이는것처럼 무언가가 일렁이고 있었다.
"벤."
"알았어."
그는 안고있던 레니아를 놓아두고 검을 뽑아들었다.
"아무래도 도망으로는 해결될것 같지가 않군 그래."
"어찌 되었든 확실하게 지켜!"
"두말할것도 없어!"
벤하르트의 검은 더할나위 없이 빛이 일렁이고 있었다. 괴물이 거대한 손으로 벤하르트를 향해 휘둘렀다. 물론 그 공격은 벤하르트에게는 보이지 않는 투명한 손이었지만, 그는 보지도 않고 검을 들어 손을 베어넘겼다.
'뭐지? 왠지 질것 같지가 않은데,'
"수."
베어진 손은 투명이 풀려 형태를 이루고 있었다.
"장난이 아니군."
레니아는 그 손으로 한걸음씩 자리를 옮겨 손을 방패삼고는 이모저모를 보기 시작했다. 말이 손이지 손만해도 레니아보다 가볍게 커서 어찌보면 훌륭한 방패막이라 할수 있었다.
"그으으으."
괴물 제룽은 잘려진 손에 고통스러운지 한걸음 뒤로 물러섰지만, 이내 정비를 가다듬고 공격을 하려 했다. 그에 벤하르트는 일섬의 자세를 취하고 살짝 중얼였다.
"백뢰."
뭉텅이며 검에 잔뜩 맺힌 백뢰는 한줄기로 제룽에게 쇄도했다.
"제룽 녀석을 죽일수야 없지."
"!?"
벤하르트의 백뢰는 허공에서 산개해 흩어졌고, 제룽의 공격도 누군가에 의해 막혀졌다. 제룽의 공격을 막은 손은 산산조각이 나서 조각이 벤하르트의 코끝에 묻었지만 언제 그랬냐는듯 손은 다시 제모양으로 돌아갔다.
"귀찮구만,"
제룽과 벤하르트의 사이에는 게을러보이는 외모를 가진 남자가 하품을 하면서 서 있었다.
- 작가의말
짜증납니다. 기껏 완벽하게 써두었던 원문을 정전으로 인해서 날려버렸습니다. 다시 쓰기는 했지만, 마음에는 확 와닿지 않는군요. 이 글보다 두배정도는 만족스러운 글이었는데,
아마 이전에도 연참대전에 한번 이런적이 있었는데, 참 속이 미어 터지네요.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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