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쿠라스 311화-라프티(5)
"아 아니 저는 벤하르트 할아버지가 아니라.."
변명을 하려고 머리가 깨질것만 같은 혼란함을 애써 진정시키면서 말을 이으려 하는데 옵니트가 그의 말을 가로 막았다.
"벤. 이라는 것이지요?"
"벤. 이미 글렀어. 의심하고 있는 여자에게 답안지를 준 꼴이나 다름 없으니까, 이제와서 발뺌한다고 해도 어쩔수 없어."
레니아의 말에 벤하르트는 포기하고 주변의 의자에 걸터 앉았다.
"그래. 벤.씨가 사실은 벤하르트씨 였다는 말씀이군요. 그쪽의 여인분은?"
"별로 말하고 싶지는 않지만, 이녀석의 보호자정도로 생각해주시면 되겠어요."
"그나저나 그 벤하르트씨가 이렇게 변하다니, 세상에는 신기한 일도 다 있네요."
그 말에 벤하르트는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욕망이 들끓었다. 겉모습만이 변했다면 모를까 이미 있는말 없는말 행동을 다 보여준 그의 정체를 예전 모습을 잘 알고 있는 옵니트가 알아냈으니 이루 말할수 없는 창피함이 몰려든 것이다.
"아. 저 저기. 도대체 어떻게 알아낸 겁니까?"
"글쎄요. 논리적으로 알아낸것은 아니에요. 단순한 감이죠."
"여자의 감은 무서운 것이니까,"
'동감이긴 하지만,'
"그나저나 벤하르트씨도 대단하시네요. 그럼 어제 있었던 이야기들은 다 즉흥적으로 지어내었다는 이야기니.."
'물을게 그런쪽의 일이라니..'
왜 젊어졌는가 어떻게 되었는가 지금까지 무엇을 했는가. 질문할것은 여러가지 있었을터인데도 옵니트는 그에 관해서는 묻지 않았다. 옵니트는 벤하르트에게 자신이 해줄수 있는 배려를 해주고 있었던 것이다. 과거에도 지금도 '곤란한' 일은 파고 들지 않았다. 다만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의 선에서는 거리낌 없이 하는 성격.
나이가 들어도 본질은 쉽사리 바뀌지 않은 것이다.
"그래도 반갑네요. 이제 이곳 라프티에서도 제 동년배는 거진 다 죽고 없어져 가고 있는데, 그나마도 저를 기억해주시는 사람이 한명쯤은 저보다 오래 살것이라는게 왠지 안도감이 드는데요?"
이미 그녀의 나이대로 살고 있는 사람은 거진 존재하지 않았다. 있다고 해도 접점이 없었던 사람들. 이제와서 무슨 말도 추억도 논할수 없는 자신의 일생에서 만나지 않을 사람들 뿐으로 그녀는 조금 쓸쓸해 하고 있었다. 1년반 정도 전. 벤하르트가 떠나고 난 뒤로 그런 기분은 더했었는데, 지금 이렇게 그녀는 벤하르트와 마주하고 있었던 것이다. 벤하르트의 과거를 알려고 들지 않았다. 자신의 눈으로 판단하고 함께 했던 추억이 존재하면 그녀는 그것으로 만족했다. 지금도 벤하르트가 어떤 일을 보내 왔는지는 별로 알고 싶지 않았다. 젊어진것도 굳이 따지려 들지 않았다. 다만 자신은 이런 독특한 추억을 공유할 사람이 한명은 남아있다는 사실에 그녀는 안도 하고 있었다.
"정말 벤하르트씨는 신비스러웠어요. 아니 이질적이라고 해야 좋을까."
이질적인것은 그녀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터무니 없을정도로 배려를 하고 남을 도와주려 들며 이런 이례적인 일에도 서스럼없이 벤하르트에 대해 말할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수 있을까.
"그래도 역시나 벤하르트씨는 벤하르트씨였네요. 라프티의 전설조차도 그정도로 무관심 했을줄은. 도시의 어린아이라도 알고 있는 전설인데 그걸 모르셨다니,"
"역시입니까."
"네. 역시 에요."
싱긋 웃으면서 옵니트가 말했다. 그 온화한 얼굴을 보고 벤하르트는 자신의 늙었던 모습을 떠올렸다. 어두운 기운을 풀풀 풍기면서 고약한 인상에 소리한번만 질러줘도 어린아이들을 쫓을수 있을것만 같은 노인네.
"틴프린이 상대해준게 희안할 정도로군."
벤하르트의 무심결의 혼잣말에 반응해 옵니트가 말했다.
"틴프린은.. 벤하르트씨를 그냥 놔둘수가 없었던 거에요. 어렸을때부터 그애는 항상 약한 사람을 내버려 둘수 없었으니까요."
평소와 같았다면 벤하르트는 무어라 변명을 했겠지만, 지금은 달랐다. 그는 분명 그때 사람으로써 더할나위 없이 약해져 있었으니까, 누구와도 접하지 않고 누구와도 상대하지 않음으로써 상처가 날 일을 없애려 하는 한없이 나약한 인간이었기 때문이었다.
"마음 약한 건 옵니트씨와 닮은것 아닙니까?"
"가족 특성이니까요. 곧 떠나실건가요?"
"네. 그것도 여자의 감이란 겁니까?"
"그렇지요."
"정말로 무섭군요."
"떠나기 전에 언제든 저희 집에 들렀다 가 주세요."
순수한 반가움과 호의를 담아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수곡의 섬은 '정말로' 위험한 곳이랍니다. 아무쪼록 가려고 한다면 잘 염두해두는게 좋을거에요."
자신의 집에 도착하자 마자 벤하르트는 툴툴 거리는 어투로 말했다.
"여자의 감이란건 정말 무섭구만,"
"글세 나는 겪어 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는데, 편리하다는건 알수 있겠지만,"
'뭐 레니아의 경우는 저정도는 아니겠지. 리스의 정체도 아직 모르고 있는것 같고,'
레니아는 눈을 번뜩였다.
"지금 무슨 불쾌한 생각을 하지 않았어?"
"아니 전혀. 왜 감의 놀이라도 하고 싶은 모양이지?"
"글세. 묘한 감각이.."
'정말로 무서워!!'
"그나저나 옵니트가 제대로 된 정보는 알려준것 같네."
"정보? 너 설마 그곳에 가보려고?"
"당연하지. 토박이 주제에 그런 전설도 모른다는게 말이 돼? 일이년 산것도 아니고 수십년간이나 살았다면서. 제 2의 고향은 무슨. 지나가던 개가 웃겠다."
"수곡의 섬이라면 나도 알고는 있어. 전설과 연관되어 있는것은 알수 없었지만, 이래 저래 지리에 대해서는 조사를 해야 했으니까, 그 섬은 진짜 위험하다고 평판이 자자한 섬이라고, 일단 말이지. 요 몇년간 간사람도 없지만, 과거 수십년전에는 그곳에 간 사람은 돌아오지 않는것으로 유명했지. 물론 나는 왜 그곳에 갔는지 조차 모르고 있었지만,"
어떻게 그런것을 모를수가 있어? 하는 뜻을 담은 질타의 눈으로 벤하르트를 보면서 레니아가 말했다.
"그런 곳일수록 더더욱 보물이 있을 확률이 높은거야. 거기에 아무도 돌아오지 않았다는건 '죽었다'라고 볼경우 아직 누구도 그 보물을 가져가지 않았다는게 되는것이지."
야심차게 레니아는 열변을 토해 말했지만 벤하르트는 전혀 반응조차 하지 않고 말했다.
"의기양양한건 좋지만, 레니아 왜이렇게 보물에 열을 내고 있는건데?"
"말했잖아. 교환할수 있을만한 무언가가 반드시 필요 하다고,"
"그렇긴 해도 말야. 그거야 겸사겸사의 경우지. 이렇게 불같이 달려들 필요는 없는것 아니겠어?"
"그렇진 않아. 벤. 너는 인간이라서 그렇게 여유롭게 생각하고 있는게 아닐까? 단순하게 황금 몇동으로 손에 넣을수 있는 그런 보물이 아니란 말야. 우리가 손에 넣으려고 하는 영석은 내 남은 존재를 전부 버려야 할 정도로 값어치 있는거야. 평범한 인간을 신으로 만들수 있는 무언가에 버금갈만한 가치를 가진 것이라고, 인간의 돈을 전부 끌어 모아 바꾸자고 권해도 바꾸지 않아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그런 물건이란 말이지. 아니면 그때는 힘으로라도 뺏어줄래?"
"후우. 알았다고, 하지만 일단은 지도나 봐줘. 여기가 라프티. 그리고 이곳을 쭉 따라.."
"끊기는데?"
"끊기지. 수곡의 섬은 라프티 아니 브렌모스의 영역이 아니니까, 그곳은 나라에 속하지 않은 땅이야. 나라의 비호도 나라의 간섭도 받지 않고 사람조차 사는지 안사는지 알수 없는 미지의 땅이자 공포의 땅으로 이곳 라프티의 사람들은 생각하고 있어."
"그거야 가보지 않은 사람들의 뜬소문인것이잖아?"
"그럴지도 모르지만, 문제는 이거야. 그곳을 '누가' 데리고 가줄 거냐는거야."
레니아는 의문의 얼굴을 하면서 말했다.
"누구라니 아무 배나 타고 가면 되는것 아냐?"
"수곡의 섬은 그 주변만 해도 이상한 해류때문에 근처에 가지 못하는 곳으로 유명하다고, 그래서 뱃사공도 그곳으로는 절대로 가지 않아. 그것만 따지면 몰라도, 일단 거리부터가,.. 지도를 보면 알잖아?"
수곡의 섬은 단순하게 걷는것으로만 생각해도 수일은 걸려야 할 거리에조차 섬이 찍혀 있지 않았다. 물론 배는 걷는것보다 훨씬 빠르지만 그렇다고 해도 단순하게 생각할수는 없었다.
"겸사겸사에서 엄청나게 벗어나는것이라고, 애초에 갈수 있는 방법도 지금으로서는 딱히 없어. 그래도 가야겠다면 가는 방법을 알아내야 겠지."
"확실히 그렇네. 하지만 '그정도'가 됨으로써 보물에는 더 신빙성이 생기게 되는것인데 어쩔수 없나."
"후우,"
"그런데 왜 그런 안심한 얼굴을 하는거야?"
"어? 아니 뭐. 나도 이곳에서 꽤 오래 살았으니까 한참 수곡의 섬의 소문이 돌때 도시에 들어오기도 했고, 하하."
"겁쟁이."
"아니 그렇지는 않아. 그냥 찜찜할 뿐으로.."
레니아는 고개를 돌려 가방에서 책을 꺼내 들었다. 벤하르트는 변명을 너무도 간단하게 무시해버리는 그녀의 처사에 뭐라 표현할수 없는 답답함을 느껴야 했다.
[쿵쿵쿵]
벤하르트는 집에 들어오고 난뒤에 바로 공방의 문을 잠궈 두었다. 검을 만들 생각도 없는 곳에서 공방을 열어두는것 자체가 오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누구야. 왜 문을 두드리는거지?"
[쿵쿵쿵]
"시끄러워 벤. 빨리 나가봐."
"왜.. 아니 됐다. 나갈게."
애초에 다른 곳이어도 결과는 마찬가지였겠지만, 이곳은 벤하르트의 집이었기 때문에 그런 말도 안되는 짜증이 레니아에게 먹힐리가 없었다.
"누구십니까?"
"얼마나 더 있어야 열리는 건가. 예나 지금이나 불친절하기 그지 없는 곳이로군."
한 중년의 삐딱한 얼굴의 귀족이 벤하르트의 공방으로 들어왔다. 그 얼굴은 벤하르트도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벤하르트는 그것을 내색할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기 때문에 다시 되물었다.
"저 누구신지."
"이 몸을 모르다니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모양이로군. 그래 이곳의 주인은 벤하르트 하르크라는 노인일터, 벌써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지 1년, 수많은 방비시설이 되어 있었던 이곳이 열렸다는 말을 듣고 왔더니 자네는 누구인가?"
'아니 그러니까 누군지부터 말해야!'
알고 있다고 해도 예의조차 모르는 눈앞의 귀족을 보고 그는 업무용 미소를 선보이면서 다시 물었다.
"죄송하지만, 누구시지요?"
"틸타트 가리모스다."
틸타트는 그만큼만 말해도 벤하르트가 알아 차릴것이라고 생각했다. 실제 벤하르트는 그를 알고 있었지만, 그 말만으로는 모르는 척을 할수도 있겠다 싶어 아리송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 촌놈이.'
틸타트는 과거 벤하르트에게 검을 만드는것을 부탁하러 온일이 있었던 귀족으로 그때에도 남을 무시하고 깔보는 태도와 언변에 벤하르트는 상당한 불쾌함을 느꼈었다. 결국은 그가 말하는데로 검을 만들어 주긴 했지만 꽤나 떨떠름 했었고 그렇게 엄청 오래된 일도 아니기에 아직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레니아와의 잡담에서 그가 원하는 사람에게만 검을 만들어 준것은 아니라는것에 딱 들어맞는 표본이라 할수 있었다.
"그래 무슨 일이십니까?"
"흐음."
벤하르트의 말은 무시한채 틸타트는 그의 공방을 한바퀴 둘러 보다가 검하나를 쥐어 들었다.
"무슨 짓을 하시는 겁니까?"
그는 자신의 검을 뽑아 벤하르트의 검으로 자신의 검을 내리쳤다. 당연히 버틸리가 없는 일반의 검은 보기좋에 양단되고 말았다.
"질은 확실히 보장되어 있는 모양이군. 하지만 무엇보다도 멋이 없어. 어이 촌놈. 벤하르트 하르크는 어디에 있나?"
"안계십니다. 아주 먼 곳에 계시지요."
"큭 죽어버린건가. 하긴 그쯤 되었으면 죽을때도 되었지."
"아직 안죽었습니다만,"
"아 촌놈. 너는 그 대장장이와 무슨 관계가 있지?"
"저는 할아버지의 손자입니다."
이제는 완전 입에 착 달라붙어서 자신이 거짓말을 하는지 진실을 고하는지 헷갈릴 지경으로 자연스럽게 그가 말했다.
"호오 네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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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화에서 옵니트와 벤하르트의 대화에서 전화때 레니아가 빠질까 말까를 고민했었는데, 빠지는게 더 낫지 않았을까 생각이 들더군요.(개인적으로..)
어찌 되었든 간에.. 아주 중요한 지옥의!!
연참대전을 마치며.... 후기를 써보겠습니다.
이번이 몇번째의 연참대전인지 잘 모르겠군요. 2008년 부터 쓴 이 소설을 제가 이정도까지 길게 쓸줄은 상상하지 못했다 라고 말하고 싶지만 사실 길어질것은 상상하긴 했습니다.
항상응원해주시는 많은 분들중에서도 역시 댓글이 빠지지 않는 앤드류님에게 직접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싶네요. (과거 추천도 한번 해주셨고 ^^:) 그 뒤를 잇는 퍼교수님에게도 이기회를 빌어 감사의 인사를 드리겠습니다. (__)
아니 다른 분들도 정말정말 감사드려요. 놀부님 님이나 서글픈인형!님이나 한자님이나 그밖의 여러 댓글을 남겨주신 모든 분들요!! 댓글이 많이 달린것을 볼때면 연참대전을 절대 탈락하지 말아야 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거든요. (반대의 경우는 힘이 빠져서..)
끝나고 나니 드는 생각은 일주 연중 모드가 들어가지 않아야 할텐데, 하는 잡생각.
연참대전도 딱 끝났고 하니!
제 성격과 맞지는 않아 거진 이런 말을 해본적은 없지만,, 단도직입적으로!!
댓글이 많이 달리는것을 한번 보고 싶습니다....(이래놓고 적게 달리면 X팔린데, 우욱.)
어쨋든 조회수 1이라도 응원해주신 많은 분들께 다시한번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댓글은 더 드리며! 이만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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