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쿠라스 406화-사연(死緣)(9)
벤하르트가 로코를 기절시키고 있을때 레니아는 밑에서 로코의 일행 다섯을 데리고 올라왔다.
"끝났어?"
레니아가 묻자 벤하르트는 기절한 로코를 보며 짧게 대답했다.
"그래."
그 순간 아라나는 로코에게 검을 들고 다가갔다.
"아아아!"
아라나는 검을 들어 로코에게 찌르려 했다. 벤하르트는 재빨리 움직여서 그녀의 움직임을 막았다.
"왜 말리시는 거죠?"
벤하르트를 보는 그녀의 시선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삭막함을 풍기고 있었다. 실로 그녀가 겉으로 보여내고 싶었던 마음을 구현화 시키기라도 한듯한 그 눈빛에 벤하르트는 슬픈 얼굴을 하고 말했다.
"이런 녀석은 죽일 필요도 없어. 아니 네가 이녀석을 죽이게는 못하겠다."
"왜죠?"
아라나가 물었다.
"너는 같은 동문을 죽이는걸 바라지 않으니까,"
"그건 문원이었던 사람에게나 한하는 이야기겠죠. 이녀석은 연철장을 멸망시킨 장본인이에요. 살리고 싶은 마음따위는.."
"나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사람을 한번도 죽여본적이 없다."
"네?"
벤하르트의 뜬금없는 말에 그녀는 살짝 놀랐다. 벤하르트의 실력이라면 그가 선하던 악하던간에 무력을 사용하지 않을수 없는것이다. 선하면 선한대로 악행을 눈감을수 없고 악하면 악한대로 그 힘을 사용하지 않을수 없는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을 죽이는게 두려워서 말야. 내게 그 사람의 일생을 끊을 자격이 있는지 없는지, 뭐 그딴 시덥잖은 것을 생각하게 되어선지 습관이 되어선지 몰라도 지금껏 사람을 죽여본적은 없다. 사람을 죽이는게 과연 옳은걸까 라고도 생각했었지,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표면적이게 보이는 이유로 그저 나는 내 손을 더럽히고 싶지 않았던것 뿐이었을지도 모른다. 두렵다 정의 공정성 이런 이유따위는 역시 아무래도 좋아. 결국 내가 죽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거기에 이유를 가져다 붙힌것 뿐이다. 하지만 너는 나보다 훨씬 낫구나."
"아하. 그래서. 저도 죽이지 말라고 말하고 있는건가요?"
아라나는 냉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아니. 그런건 아니야. 네가 정히 죽여야 겠다면, 내가 죽여줄까 생각하고 있다."
그의 얼굴은 편안함을 가장했지만, 실로 누가봐도 창백해서 위태위태해 보였다. 벤하르트는 오랫동안 자신을 속이고 타인을 속여왔다. 그 때문인지, 은연중에 타인의 마음을 헤아릴때가 많았다. 여행길에서 그러했듯이 이곳에서도 그는 아라나가 자신의 동문을 죽이는것을 원하지 않는다는것을 알았다. 그게 설사 로코라고 해도,,
그가 알아차린것은 아라나가 로코에게 칼을 들이밀었던 순간이었다. 그 급박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그녀는 살기를 내뿜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가 지금 검을 들고 갈등하고 있는것은 아라나를 위하는 마음으로 사람을 죽이는것과 스스로가 사람을 죽이지 않는것의 사이에 대한 갈등이었다.
"정말 지금까지 사람을 죽인적이 없다면, 어째서 지금은 죽이려고 하는거죠? 닐스가 사부님의 원수기 때문이겠죠?"
아라나의 말에 벤하르트는 쓸쓸한 미소만을 보여주었다.
"그건 아닐걸. 이미 저녀석에게 한번은 그 변명을 들었었으니까, 벤은.. 네가 이녀석을 죽이는걸 원치 않고 있기 때문이야. 그리고.."
레니아는 아라나에게 살짝 귀엣말로 속삭였다. 망설이던 벤하르트는 이윽고 마음을 굳혔다.
'이기주의라는건 참 편리한 자기최면이군.'
지금 죽여도 그것을 아라나를 위해 라고 스스로를 속일수 있는것은 참으로 우스운 일이었다. 실상 로코가 닐스를 죽이지 않았다는것을 알았을때 그의 독기는 조금 빠졌다고 할수 있었다. 연철장을 멸문 시킨것은 용서할수 없는 일이었지만, 역시 그 일은 벤하르트와는 직접적인 관계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지금 그가 검을 들어 로코를 죽이려 하는것은 거진 순수하게 아라나를 위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는것 자체가 스스로를 조소하기에 충분한 사안이었다.
"후우."
심호흡 한번과 함께 그의 검이 로코의 가슴에 이를 때였다.
"그만두세요. 저 때문에 사숙이 희생을 할 필요는 없습니다."
아라나의 말에 벤하르트는 가슴까지 들이밀었던 검을 멈추었다.
"뭐?"
"사숙의 말은 어디까지나 제가 로코를 죽이는것을 원치 않는다는 것이겠죠? 그렇다면 저는 로코를 죽이지 않겠습니다."
"아라나. 무슨 소릴 하는거야. 로코는 연철장을 멸문 시킨 녀석이란 말이다! 저녀석이 하지 않겠다면 내가 하겠어."
리핀의 말에 아라나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그럴 필요는 없어. 이제부터 로코는 죽는것보다 더한 삶을 살게 될테니까,"
"뭐? 그게 무슨 뜻이지?"
벤하르트는 그제서야 레니아가 손을 썼다는것을 알았다. 그가 로코를 죽이려 한것은 결코 연기가 아니었지만, 레니아에게 있어서 이런일로 벤하르트가 누군가를 죽이게 할 마음은 어디에도 없었던 것이다.
그가 마지막에 로코에게 공격한 곳은 양팔과 양다리 그리고 몸에 이은 다섯군데의 몸을 깍아내리는 기술이었다. 레니아에게도 어떤 기술인지 알려주었기에 그녀도 이 기술의 효과는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으으윽."
로코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일어나기도 전에 그는 자신의 몸에 이상이 생겼음을 느낄수 있었다.
"뭐.. 뭐냐. 어떻게 된거냐."
"....."
"힘이.. 들어가지 않아."
팔에도 다리에도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꼭두각시 인형처럼 비틀거리면서 일어났지만, 기를 사용하는것 조차도 할수 없었다. 병약한 사람이 되어 버린것 같이.. 그는 비틀거렸다.
"나에게 무슨짓을 한거냐!"
로코는 절규하듯 외쳤다.
"로코는 명성을 얻고 싶어했지. 다른 사람들 보다도 이곳을 벗어나기를 원했어. 그리고 연철장을 이용해서 힘을 얻었고, 희생해서 명성을 얻었고, 성격으로 원한을 얻었다고 한다면, 이제는 그렇게까지 해서 얻은것을 모두 잃어 버렸다고,,"
"벤 벤하르트! 하르크!"
로코는 벤하르트를 독기어린 눈으로 쳐다보면서 돌진했지만 벤하르트가 축을 삼아 도는것만으로 꼴사납게 넘어졌다.
"으 으으그."
입가에 침을 흘리면서 미친듯이 삐걱 거리면서 일어나는 로코를 보고 남은 다섯은 얼굴이 창백해 졌다. 그 뒤에 있을 자신들의 처벌이 저런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었다.
"너는 죽이는게 정답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너를 죽이지 않겠다고 말해준 아라나에게 고맙게 여겨라. 그리고 아라나 리핀 너희 둘은 나를 얼마든지 원망해도 탓해도 좋다."
벤하르트가 의도한 바가 아니었다고 해도 결과적으로 그것이 아라나나 리핀에게는 원치 않은 일일지도 모른다고 그는 생각했다.
"됐어요 사숙."
"죽이고 싶었지만 저런 모습이 된것을 본 뒤에야 그렇게까지 말할수는 없겠지."
리핀의 말에 로코는 절규했다.
"동정하지마! 나를.. 동정하지마."
"동정 따위는 하지 않아. 그저 있는 그대로를 본것 뿐이지."
로코의 뒤에서 레니아가 말했다. 로코는 레니아를 본적이 없었지만, 한눈에 드니드들이 귀신이라고 말했던 사람이라는것을 알았다.
"그래서 이번에는 너희들 차례다."
섬칫하고 다섯은 차례로 놀랐다.
"자 이제 로코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 각자 대답해보도록."
다섯은 로코의 눈치를 살폈지만 아무리봐도 이제 로코가 자신들을 위협할수 있을것 같은 느낌이 들지 않아 각자 로코의 험담을 하기 시작했다. 그중에서도 코렙트는 쌓인게 많았는지 여러가지 잔혹한 말을 일삼기도 했다.
하지만 그중에서 한명만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당신은?"
레니아가 묻자 이매그는 눈을 살짝 떠보이며 말했다.
"기회가 주어진다면 나는 로코를 데리고 가도록 할것이다."
나머지 넷은 일제히 생각했다.
'바보녀석 너도 이제 로코 꼴이 나겠구나.'
하지만 레니아의 말은 그들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말이었다.
"합격. 조금 된사람이네 너는."
"어어?"
"그리고 너희들은 살려뒀다가는 골수까지 빼먹을듯한 녀석들이고,"
"아 아닙니다. 저도 말은 그렇게 했지만,,"
이미 내뱉은 말이 거짓이라고 하기에 코렙트는 너무 심하게 떠들어 댔다.
"아쉽지만 너희들을 살려두면 제 2의 로코가 탄생해도 전혀 이상할게 없을것 같거든. 로코가 주동자였다고 했지만, 실제로 너희들도 로코와 별로 다른건 없어보여,"
"아닙니다!"
"좋아 믿어주지."
레니아의 말에 넷의 얼굴은 잠시 환해졌다가 금새 일그러지며 비명을 내질렀다. 각자의 다리를 하나씩 분질러 놓았기 때문이었다.
"평생 착하게만 살라고 하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이제부터 나쁜짓은 안하고 다니는걸 살짝 추천하도록 할게."
"으으으."
"아니면, 다른 선택권도 있어."
'이미 다리를 분질러 놓고는,'
아무리 좋게 봐도 레니아를 좋게 볼수가 없는 넷은 증오에 사무친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다리는 내가 고쳐줄수 있어."
"정말입니까?"
"물론이지 대신 다른 선택을 해주어야만 해 선택권은 세개가 있어."
"뭡니까?"
그들이 퉁명스럽고 기대에 찬 목소리로 묻자 레니아가 말했다.
"그럼 선택권을 너희들에게 주지. 첫째 다리를 분질러 놓은것. 둘째 로코처럼 만들어 주는것 셋째 깔끔하게 죽여주는것. 골라볼래?"
레니아는 그들을 차갑게 내려다 보면서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솔직히 레니아는 그들이 실제로도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눈빛을 지어보이는것은 연기도 아니었다. 네명은 레니아가 제시한 다른 보기를 보면서 상대적으로 다른 보기가 너무 악독했기 때문에 그들은 원한보다도 순간 마음의 안도 부터 느꼈다. 그 공포에 대한 안도는 조금씩 그들의 마음을 좀먹고 들어가서 나중에는 스스로가 로코꼴이 났어도 이상할게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될 정도였다. 물론 얼마 지나지 않아 삔 다리를 생각하면 레니아에 대한 원한이 복받쳐 오를것은 자명한 사실이었지만,
"이매그."
이매그는 로코를 부축했다. 아무리 악독한 로코라고 해도 자신을 버리지 않은 이매그에게 뭐라 할말은 없었다.
"동정하지는 않는다. 어차피 이번에 내가 이곳에 온것은 최악의 상황을 막기 위해 온것이니까, 다르게는 너와 적이 될수 있었을지도 모르지."
이매그의 말에 로코는 살짝 놀라 물었다.
"뭐.."
"나는 너희들이 혹여나 아라나와 리핀을 죽이지 않을까 해서 온것이다. 그 상황이었다면 나는 너희들을 배반했겠지. 차라리 누구도 배반하지 않고 이렇게 끝나서 다행이라고도 생각한다."
이매그가 다른 네명과는 다르게 체념한것 같은 모습을 보였었던 이유는 그것에 있었다. 이매그는 처음부터 이곳에 검을 얻고자 하는 마음은 없었다. 단지 감정이 격해진 로코나 다른 사람들이 아라나와 리핀을 죽이지 않을까 싶은 마음때문에 그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기 위해 온것이었다. 하지만 전부터 알고 지내던 다른 일행을 배신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실상 마음은 바늘방석 같았던 터라 이런 결말이 썩 좋게는 느끼지지 않더라도 나쁘게도 생각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자식.. 내가 이렇게 된게."
이매그는 싸늘한 눈빛을 하고 말했다.
"그건 자업자득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그는 벤하르트쪽으로 시선을 돌리고 말했다.
"어쨋든 사숙 저희는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앞으로 어디가 되었든 만나지 않기를 바랄수밖에 없겠군요. 그쪽의 마녀도."
"그래."
이매그는 아라나와 리핀을 돌아보고 말했다.
"여러모로 미안했다."
그 한마디만을 남긴채 꾸벅 인사하고 그는 로코를 어깨에 짊어지고 내려갔다. 남은 네명도 그 뒤를 따라 절뚝거리면서 내려가기 시작했다.
"아라나 리핀 미안하다."
"흥 미안할게 뭐요. 어차피 댁이 없었다면 이미 죽거나 강제로 아라나가 고생이나 했을텐데, 이렇게 끝내버린게 답답한건 사실이지만,"
리핀은 투덜거리고 성격이 급한건 사실이었지만,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 필요하다면 죽일수 있지만, 죽이는것을 즐기는것도 아니었다. 로코가 저렇게 된것을 보니 시원하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씁쓸하기도 했다. 벤하르트가 말한것이 무슨 뜻인지 알법도 싶었다.
"사숙이 미안하게 생각할것은 무엇 하나도 없습니다."
"그렇다는걸 벤."
벤하르트는 그 순간 만큼은 레니아를 만날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고맙다. 레니아."
- 작가의말
한주가 시작되었습니다. 여러분도 즐거운 한주 되세요.
아 그리고 연호량님 루켈은 아라나와 리핀의 과거에 등장했던 7인(요번에 검을 얻으러 온것은 6인) 중 한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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