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쿠라스 282화-신등장(神登將)의 제(祭)(19)
벤하르트의 몸이 나쁘던 좋던간에 어김없이 신등장의 제는 계속 된다. 전날 사우스에게 당한 상처는 꽤 큰 것이어서 몸 상태는 가히 최악이라고 할수 있었지만, 나가지 못하면 부전승으로 남게될 뿐이었다.
얼마나 상처가 심하던지. 그는 결투장에서 기절한 뒤로 다음날 아침까지 내리 자고 있었던 것이다.
"일어 났어?"
레니아는 차 한잔을 벤하르트에게 건네주었다.
"아 고마워."
차 같은것을 레니아가 타 주는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기 때문에 그는 굉장히 이질적인 느낌을 받았다.
"그나저나 이정도의 상처를 얻다니.. 사우스가 그정도로 강했을줄은 몰랐어."
"아니 나는 알고 있었지만,"
"어쨋든 수고 했어. 벤. 몸 상태는 어때?"
"좋지 않아. 오늘의 경기도 사실은 안나가는게 좋을만큼."
레니아는 말이 없었다. 하지 말라고 말하기도 더 나가달라고 말할수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레니아 너 어제 경기장에 나왔었어?"
"경기장. 물론. 어제 뿐만 아니라 매일 나갔었어. 당연한것 아냐? 그런데 그건 왜?"
"아니 어제 네 얼굴을 본것 같아서 말야."
"뭐 그렇지. 벤. 무리하지는 마. 무리는 안해도 되니까."
"걱정 마. 나는 이길테니까, 이건 네가 부탁했거나 협박했거나 명령했기 때문이 아니야. 내 의지지."
''의지' 라.'
새삼스레 레니아는 루크가 대단하다고 인정했다. 그의 강압적이고 분명 무모한 무리수를 섞었던 방법은 벤하르트를 조금씩 바꿔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전날밤의 대화.
"벤의 의지에 대해서는 자신이 인지하는것보다 인지하지 않는쪽이 녀석이 다루기에도 성장하기에도 좋지만, 그렇다고 의지에 대한 느낌을 못받는것과는 이야기가 다르지."
"무슨 소리야?"
"벤은 선천적으로 심성이 나약하다. 자기방어적으로 타인을 멀리하고 너라는 녀석을 만나 뒤바뀌었다고 해도, 그 사실이 약해지거나 하는 경우는 없다. 몇번인가는 본적이 있었을거다. 모순된 행동 논리. 그런것들은 녀석의 확고한 의지를 방해한다."
레니아는 루크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긍정하다가 곧 생각을 바꾸며 말했다.
"하지만 벤은 위험한 상황에서 몇번이나 그 '검'을 다루면서 위기를 극복해 왔어. 네가 생각하는것만큼 의지가 약하지는 않을텐데,"
"그래 하지만 그것은 나약한마음 때문에 나올수 있는 의지. 남을 통해서 자신의 의지를 내는 종류의 부류 였을것이다. 그런것은 언제고 낼수 있는게 아니고 언제나 위험할때에나 존재할수 있는 힘이다. 위험을 극복하면 사람은 성장한다. 하지만 위험은 위험하기에 위험이 되는것. 언제까지고 요행으로 살아갈수 있기에는 너희들의 여행은 그렇게 순탄하게 돌아가지는 않겠지."
"....."
"잊지 않고 느낄수 있게 하지만 인지하지는 못하게 '의지'에 대한 사용성을 일깨워 줄수 있는것은 너밖에 없다. 레니아."
루크는 말을 끝내고 방으로 돌아갔다.
"레니아라. 나도 루크라고 불러줘야 하는건가?"
고개를 설레 설레 저으면서 그녀도 자신의 방으로 귀가했다.
"레니아 괜찮아?"
"어 물론이지. 진짜 병자가 눈앞에 있는데 괜찮지 않더라도 괜찮다고 해야지. 하지만 정말 괜찮아 그저 생각할게 있었을 뿐이야."
"병자라니.. 그정도는 아니야."
"그나저나 내가 네게 협박이나 명령을 하진 않았잖아. 마치 악녀같은 인상을 주는 단어를 툭툭 내뱉다니,"
"알았어. 근데 생각할게 있다니 뭐를?"
순수하게 걱정이 되서 물어보는 것이었지만, 레니아의 입장에서는 그저 귀찮기만 할 뿐이었다.
"알고 싶어?"
"뭐. 요즘은 거진 대화도 못했으니까 말야. 그것보다 알고 싶은것은 맨날 자리를 비웠을때 무엇을 했느냐 하는것인데,,"
"꼬리물기로군."
"꼬리물기?"
"이곳의 사람들이 쓰는 말이야. 이쪽의 말이 저쪽의 말을 불러들여서 주제를 흐리는 것을 말한다고 하던데, 그런게 중요한건 아니니까, 내가 생각하고 있는것은.. 세."
한글자가 나오자 마자 벤하르트는 사색이 된 얼굴로 단발에 레니아에게서 멀어졌다.
"됐어. 미안 내가 잘못했다."
"왜 죄지은것 같은 태도야. 마치 내가 정말 악녀가 된것 같잖아. 아니면 너를 괴롭히는것 같다던가 하인으로 부리는것 같다던가. 전혀 아닌데 말이지."
"그럼."
처음에 레니아는 둘러대기 형식으로 세레니르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려고 했는데, 벤하르트가 너무도 과민 반응을 보이자 왠지 발끈 해서 꼬집고 들어갔다.
'위험,'
그녀는 그저 화났을 뿐이었지만, 그녀의 등뒤로 보이는 기운을 무시하기는 힘들었다.
"그러니까 힘내.."
레니아가 벤하르트의 등을 치려하자 벤하르트는 무의식적으로 그녀의 손을 피했다.
"어? 왜그래?"
"화.. 난거지?"
"아니 내가 왜 화를내."
마력이 집중 되어 있는 손이 벤하르트의 등짝을 향해 유유히 날아왔다. 이전이었다면 막는게 고작이었겠지만, 기가 돌아온 지금에야 피하는것도 여유로울 정도였다.
"이상하구나 벤. 어째서 피하는거야?"
"누구라도 피한다고 나는 아 그래. 병자란 말이다. 거기에 그런 위험한 흉기를 왜 만드는거야. 화도 나지 않았다면서."
"흉기라니..? 어.."
레니아도 자신의 손을 보고 조금 놀란 얼굴로 벤하르트와 시선을 교차시켰다.
"후우.."
레니아는 자신의 실책을 깨달아 얼굴을 아래로 내리 깔았다. 레니아와 지낸지도 1년이 넘는 시간이었기 때문에 더 있다가는 좋은 꼴을 보기 힘들것 같아 벤하르트는 둘러대듯 말하고 밖으로 나왔다.
"그 그럼 갔다올게."
'이거 참. 몸 요양을 잘하고 오는것도 아니고,'
사지중에 작게 한군데씩 절단된것 같은 느낌으로 벤하르트는 경기장을 향했다. 그날의 경기장은 자리를 잡을수도 없을정도로 만석이었고 계단 위라도 좋으니 들여 보내 달라고 부탁하는 사람들도 태반이었다. 전날의 루에인과 벤하르트의 파장이 너무도 컸기 때문이었다. 가끔 벤하르트의 얼굴을 알아보는 이들도 있어 수근 거리면서 좋아하는 것이 이미 그도 굉장히 유명해 있었다. 그런 주목을 받다 보니 그는 문득 세레니르가 달라붙을때를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벌써 2일째 세레니르가 안오고 있군. 이젠 포기한건가.'
수월한 듯한 기분과 약간 섭섭한듯한 기분이 공존하는 자신을 생각하다가 다리를 탁 하니 치면서 정신을 차렸다.
'안돼 이러다가는 정말 거절하지 못하게 될지도 몰라. 잘됐다고 생각해야지.'
"뭐하는 거냐. 거기서."
"사 사우스? 어째서 여기에?"
"뭐겠어 기다린거지."
사우스와 벤하르트의 만남에 경기장의 줄을 서고 있던 사람들의 대다수가 그들을 보면서 수근 거렸다. 보복이나 복수나 싸움 같은 단어가 유난히 벤하르트의 귀에 거슬렸지만 그는 애써 모른척 했다.
"나를?"
"그래. 그때는 서로 기절해버렸으니까, 영 찝찝해서 말이지. 보아하니 너는 내 생각은 전혀 안한것 같지만,"
전혀 사우스 답지 않은 씁쓸한 얼굴로 그는 벤하르트를 보았다.
"그렇지는 않아. 뭐 그럴 경황은 없었지만, 생각을 안한것은 아니다. 이상하게 사람을 몰지는 말라고,"
"그런가. 이거 지레짐작해서 미안하군. 나는 이 창법을 익힌 뒤로 져본적이 단 한번도 없었지만, 그때 만큼은 져도 상관 없다고 생각했다. 이상한 일이었지만, 그러니까 네 검격을 받아 낼때 말야. 꼴사납게 기절하기는 했지만, 기분이 좋았다고 생각한다."
"그건 고맙군."
사우스는 미소를 거두고 벤하르트에게 물었다.
"내 창은 어땠지? 네가 느낀 내 창법에 대해 듣고 싶어서 이렇게 온것이다."
자유의 창법. '창천'의 현 당주인 사우스 그보다 강한자와도 약한자와도 싸워왔지만 단 한번도 져본적이 없었던 그는 분명 져도 상관 없다고 기분좋은 패배라고 스스로도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생각보다' 라는 뜻일뿐 진다는것이 기분좋을리가 없었다.
"네 창은 뭐라 할 말이 없지만, 무서웠다고 생각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나는 단 한번도 우위를 점해보지 못했으니까, 어딜가도 당할수 밖에 없는 그런 느낌. 너는 졌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나는 분명 졌다고 생각했다. 나는 우연으로 포장된 필연으로 네게 이겼다고 생각한다."
"필연..?"
"너는 시작전에 말했었지. 나와 싸워 보고 싶기 때문에, 이 축제에 나섰다고, 나는 달라. 나는 네 말대로 너를 보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그건 너를 무시한게 아니야. '각오'가 달랐을뿐이지. 너도 포함해서 이겨야 한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네가 생각하는것보다도 더.."
"그런가. 필연이라고 말한것은 굉장히 걸려서 지금이라도 한판 붙어보고 싶지만, 분명 의미는 알아 들었다. 하지만 그 끝에 기다리고 있는건 누가 남는다고 해도 '괴물'뿐이다. 나와 싸울때처럼 어설프게 했다가는 절대로 이길수 없을거다."
툭 하고 그의 창이 어깨를 건드렸다. 분명 움직임을 보고 있었는데 마치 귀신에라도 홀린듯이 당해버린것이다.
"여튼 힘내라고 말해주고 싶군. 나도 나를 이긴 녀석이 지는것은 별로 보고 싶지 않으니까,"
"어 어어?"
구멍이 뚫렸던 오른쪽 어깨는 씻은듯이 나아 있었고 벤하르트가 그 변화를 확인하고 사우스쪽을 보았을때 이미 그곳에 그는 없었다.
"세레니르.."
나지막한 목소리로 벤하르트는 중얼거렸다. 미처 생각하지 못했지만, 세레니르가 싸워야 할 상대는 다름아닌 루에인이었던 것이다. 루에인의 검술은 이미 신등장의 제의 수준을 달리할정도로 굉장한 것이었다. 디레인에 오르면 간판에 최강을 겨누는 자리라고 붙을지도 모를정도로 패도적인 검술이었던 것이다. 그것에 세레니르는 정말이지 멋지다고 할 정도로 잘 대응하고 있었지만, 한계에 치닺고 있었다.
'뭐가 있다고 하는것이냐!'
검이 백옥같은 세레니르의 피부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 모습을 보고 벤하르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
세레니르의 팔이 흔들리고 천이 루에인의 발을 묶어 내팽기쳤지만, 루에인은 멋드러지게 착지한후 그녀의 천을 찢어버렸다.
'제가 이기고 또 이겨서 낭군님에게 디레인의 자리를 양보할테니까,'
이미 승패는 결정 난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남은 하나의 천으로 버티고 또 버티고 있었다. 신등장의 제에는 별로 관심조차 없다는 여인이 보일수 있는 행동이 아니었다. 이기기 위한 움직임이 아닌 한개라도 더 후에 싸울지도 모르는 벤하르트를 위해 충격을 줄 생각으로 싸움을 임하고 있었던 것이다.
"....."
하나 둘 상처가 그녀에게 추가로 터져나오는 핏방울.
"....."
옷도 성한 곳이 없어져 가고 있었다.
"그만해!!"
벤하르트의 목소리는 대기실을 넘어 경기장에까지 닿았다. 세레니르는 놀란눈으로 보이지 않는 2팀의 대기실쪽을 보더니 희미하게 웃으면서 쓰러져 내렸다.
'그런가.'
루에인은 자신이 싸우고 있는 여인이 벤하르트와 관계가 있다는것을 알고 검을 들어 휘둘렀다. 죽지는 않아도 맞으면 치명상이 될 공격. 지금까지 봐주던것과는 다른 벤하르트에게 보이기 위한 공격이었다.
[팅]
금속음이 들린다. 한사람의 루에인의 검을 막고 있었다. 루에인은 자신의 검이 너무도 쉽게 막히자 눈에 놀라움이 번졌다.
"자 잠깐. 이건 규칙 위반으로."
사회자가 나서자 루크는 한손으로 들고 있는 세레니르를 보여 주었다.
"이미 기절 했다."
"아.. 그래도.."
"문제가 된다면 디레인을 내려놓도록 하지."
사회자는 잠시 생각했으나 어차피 루에인의 승리에 루크의 말도 틀린것은 없었기 때문에 자신같은 말단이 디레인을 좌지우지 하는것에 휘둘리고 싶지 않아 말했다.
"원래는 안되는 것이지만, 상황상 확실하게 패배가 결정 되어 있는 것이기에 특별히 인정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관객들도 규칙 위반 같은것 보다는 우승 후보로 꼽히는 루크와 루에인의 대면에 더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수고했다. 이 후는.."
들리지 않는 그녀의 귀에 루크는 중얼거리고는 대기실로 들어갔다.
'루안샐던이라.. 저녀석이로군.'
루크의 뒷모습을 보면서 루에인은 일그러진 웃음을 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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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강 구도는 이전부터 만들어 놓았지만,,,
으음.. 8강 16강에 이은 것들은 만들기가 조금 미묘했지요. 재미도 있었지만, 아 이 매치는 버려야 되는구나 하는 아쉬운것도 있었습니다.
루에인vs사우스 라던가. 루크vs사우스라던가. 복면괴인vs사우스라던가.. 어? 사우스가 전부 들어가는군요..
개인적으로는 세번째를 가장 넣고 싶었는데, 아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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