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쿠라스 294화-난(亂)(1)
"불쾌해."
레니아가 떠난 자리를 거들떠 보지도 않고 불만 스러운 얼굴로 중얼 거렸다. 그녀는 분명 레니아를 인정하고 있었지만 그 이상으로 자신보다 못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차라리 인정하지 않았다면 좋았을것을 어중간하게나마 레니아의 실력을 인정하기에 '그런상황'을 참을수 없는 것이다.
벤하르트를 만나기 전 레니아가 그랬듯이 나가샤에게도 인간은 그저 한낱 미물로 밖에 느껴지지 않는것으로, 언제든지 자신의 뜻대로 대할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다만 예외라는게 있을뿐. '모든'이라는 말로 표현이 가능한 일은 이 세상에 흔한것이 아닌 것이다.
그녀는 사랑의 신. 크게 바꾸어 말해보면 인간의 감정을 다루는 것이다. 세레니르의 태도는 이곳에 와서도 별반 다른것이 없었기 때문에 그녀는 세레니르의 마음을 충분히 짐작할수 있었고 그에 따라 그녀를 이용해 벤하르트를 꾀어낼 생각을 한 것이다.
세레니르에게도 벤하르트에게도 분명히 사용했던 자신의 '신력'을 견뎌낸것은 그야말로 자존심이 상하는 일인 것이다.
'그 레니아의 시종.. 인간 주제에,, 하지만 그렇다면 벤하르트라는 녀석은 레니아에게 이용을 당하고 있는게 아니란 말일까? 하지만 어느쪽이든 마음에 안들어.'
무서운얼굴을 하면서 나가샤는 생각했다. 거절당한 세레니르는 둘째 치더라도 벤하르트의 경우는 그녀에게 있어 쉽게 넘길수 없었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벤하르트는 자신의 힘보다 레니아쪽을 더 생각하고 있었고 레니아에게 지는 그것이야 말로 나가샤에게 있어 참을수 없는 일인 것이다.
레니아의 실력이나 힘 재주를 인정을 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신이 위일때의 경우라는 것이다. 지극히 자기 중심적인 생각이었지만, 그녀는 원래 그런 신이었고 그런 생각을 해도 무리가 없을정도로 실제 레니아와의 관계가 그러했다. 한껏 농락당한 기분으로 그녀는 차가운 눈을 하고 말했다.
"후야."
멀직이 어둠속에서 후야가 모습을 드러냈다.
"네 나가샤님."
나가샤는 후야에게 작은 말로 몇마디를 건넸다.
세레니르와의 일도 있고 해서 벤하르트는 쉽사리 방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세레니르의 얼굴을 볼 용기가 차마 나지 않기 때문이었다.
레니아가 자신의 일을 봤다고 생각하지 않았어도 그 말을 꺼냈다 라는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당황해 하고 있는 것이다. 한참을 뒤적이다 그는 결심을 하고 발걸음을 옮겼다.
"좋아."
마음을 굳게 먹고 방으로 돌아가려 하다 벤하르트는 레니아와 마주쳤다.
"어 레니아. 돌아왔어."
"으으.."
레니아는 얼굴을 붉히면서 뒷걸음질 쳤다. 그러던 중 벤하르트가 아직 자신이 그 장면을 보았다는것을 모른다는 사실을 기억해내었다.
"세 세레니르는?"
"어? 아. 벌써 들어간것 같아. 그런데, 왠지 안색이 안좋아 보이는데,"
"기분탓이겠지... 아니 역시 무리다."
그녀는 휑 하니 뒤를 돌아보고는 총총걸음으로 달려갔다.
"어이."
얼마나 빠르고 필사적인지 무리하게 따라가는게 미안해질 정도여서 벤하르트는 차마 쫓아가지는 않았다.
"무슨 일이야 저녀석.."
잠시 생각에 빠지는데 왠지 그의 머릿속에 불현듯 불길한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설마하니 나가샤라는 신과 아까의 그걸 봤다던가 하는건 아니겠지.'
하지만 그것이야 말로 자시 멋대로 생각한 기우였기 때문에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나중에 떠 봐야겠다. 그런데 정말 그렇다면,,"
고개를 푹 숙이고 혹시나 있을지 모르는 상황에 대처하면서 그는 방으로 들어갔다.
벤하르트는 방에서 머물렀는데 어찌 된 일인지 그날은 레니아나 루크 세레니르를 만날수가 없었다. 그런 일은 이곳에서는 꽤나 종종 있었던 일이었지만, 뒤숭숭하고 심란한 일을 겪고 난 뒤어선지 무언가 상담을 하고 싶어 루크를 찾고 있었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그들의 모습에 조금 의아해 하고 있었다.
"벤하르트님."
그의 뒤에서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아. 후야..라고 했었지요?"
시종 후야가 벤하르트에게 꾸벅 인사를 하면서 나타났다.
"나가샤님이 부르시고 계십니다."
"네."
벤하르트는 무슨 일인가 하며 나가샤가 머물고 있는 신전쪽으로 발을 돌렸다.
"그런데 이번에 만날곳은 그쪽이 아닙니다. 신전이 아닌 아랫쪽의 창고쪽에서 뵙기를 청하고 있습니다."
'창고? 설마?'
벤하르트는 레니아가 해냈구나 싶어 가볍게 몸을 떨고 미소지었다.
"창고라면 어디입니까?"
"제가 안내하도록 하겠습니다. 따라와 주세요."
후야는 길을 따라 산을 걸어갔다. 들어갈때마다 안개가 점점 짙어지고 산새도 험악해져 갔다. 그런 상황에서 꺼낼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벤하르트는 왠지 묵묵한 분위기가 멋쩍어서 후야에게 말했다.
"이런곳에 있으면 좋으시겠군요."
영석을 획득할것이라고만 생각하고 있던 벤하르트는 기분좋게 웃으면서 이야기했다.
"물론. 선택 받았다고 할수 있으니 나쁘지는 않습니다. 이곳을 못나간다면 반대의 생각을 가졌겠지만, 신관으로써 저희는 밖으로 나가서 생활하는것도 가능하니까요. 그것을 제하더라도 분명 히다브로는 멋진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표정하나 변하지 않고 후야가 답했다.
"그런데 이제 꽤 온것 같은데 얼마나 더 가야 도착하려는지.."
"거의 다 왔습니다."
무미건조한 어투가 끝나기가 무섭게 나무와 잎으로 뒤덮힌 숲을 빠져 나왔다. 여전히 주변은 짙은 안개였지만 무엇인가 달라졌다고 벤하르트는 생각했다.
[스릉]
"어."
차가운 검격에 상처를 입고 벤하르트는 무심결에 검을 휘둘렀다. 얇게 스치고 지나간곳에는 후야가 서 있었다.
"과연 굉장한 실력입니다. 요행으로 디레인을 얻어낸것은 아닌 모양이군요."
"무슨 짓을."
"싸울 맛은 날것 같구만, 오랜만에 제대로 여왕 흉내를 내고 있는것 같은데 나가샤님도."
"그런가. 정말 오랜만이기는 하지만, 이런 일은 역시 마음에 들지 않는군."
"너무 그러지 말라고 우리는 나가샤님의 충복 아니냐.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라고 해도 하는것이 부하된자의 도리가 아니겠냐는 것이지."
안개속에서 두명의 사내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그 너머에 기다리고 있는것은 어마어마한 투기였다.
'무슨 일이지?'
"벤하르트 하르크라고 했나? 운이 나빳구나."
"도대체 무엇을 하시려고 하는겁니까?"
"그러니까... 너를 죽이려고 온거다. 내 이름은 세네브 보시다시피 이름없는 잡신이다만, 잘 부탁한다."
쿵하고 마치 도끼처럼 생긴 투박한 검을 들고 세네브가 말했다. 세네브의 뒤를 이어 한명의 신이 앞으로 나서면서 말했다.
"일단 초면이니까 통성명은 해두어야 겠지. 아무리 곧 죽을 상이라고 해도,, 내 이름은 피엘드론. 네게 불만이나 원한은 없다만, 미안하군."
죽어줘야 겠다 하고 작고 확실하게 그가 말했다.
그런 와중에 벤하르트가 생각한것은 어째서 이렇게 되었는가 하는 것이었다. 적어도 벤하르트 자신은 일이 어째서 이렇게 되었는지는 알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평소처럼 지냈을 뿐인데 갑작스럽게 찾아온 비일상적인 일에 그는 잠시 반응을 할수 없었다. 그 짧은 틈새를 세네브의 검이 치고 들어와 그의 등을 후려 쳤다.
검이지만 베기위한 검이 아닌 타격을 위한 검으로 이름뿐이나마 확실하게 존재하는 '신'으로써 그 일격은 벤하르트가 생각했던 어떤것보다도 강렬했다. 차라리 베여졌으면 좋을정도의 일격에 그는 바닥을 기었다.
"잠깐 세네브. 선 후가 잘못 되었잖나."
"어? 무슨. 벤하르트. 네가 죽지 않을 방법은 하나뿐이다. 지금 여기서 우리들의 신인 나가샤님을 따르는것. 그렇게 하면 목숨을 살려줄 뿐 아니라 신으로 만들어준다는게 나가샤님의 의견이다."
"우욱."
"대답을 하게 되면 너는 거부할 틈도 없이 확실하게 나가샤님을 모실수 밖에 없게 된다. 그런 '계약'이다. 어쩔거지?"
"자 잠깐. 생각할 시간을.."
시간 벌이용으로 벤하르트는 간신히 힘을 짜내서 말했지만, 그에 피엘드론은 잔혹하게 말했다.
"10초 주지."
점점 떨어져 가는 피엘드론의 숫자 소리에 몽롱해진 상태로 벤하르트는 검을 쥐었다. 피엘드론이 계약을 입밖으로 내지 않았다면 속아줄 의향도 있었지만, 그의 말을 들은 다음에야 이미 결심은 1초도 안되는 사이에 결정되었다.
사실 세네브의 공격도 이미 계산된 것이어서 그 고통속에서 벤하르트가 어떤 선택을 취할지 조차 계획에 들어가 있었던 행위였지만, 지금에야 벤하르트에게 그런 진실의 유무 따위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일이었다.
남은 수초의 시간동안 생각한것은 어떻게 이자리를 벗어날까 하는 생각.
후야만 해도 벤하르트가 겨우 이길수 있을까 말까 할 정도의 실력자인 마당에 실제로 신들을 둘이나 앞에두고 이길수 있을리 없었다. 처음부터 확실하게 움직임을 보았다고 해도 승산이 없음은 뻔한 일인 것이다.
안개가 적은것도 산새가 험악한것도 이곳까지 오기 전까지만 해도 창고가 있기 때문일것이라고 맞춰서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럴리 없이, 벤하르트가 상대하기 어렵고 도망치기 어렵고 또 무엇보다도 레니아나 다른 일행에 닿지 않게 라는 이유를 달고 있었다. 이미 마음의 준비를 끝내놓고 그는 생각했다.
'3. 이다.'
적어도 숫자를 세는 동안에는 주의를 하지 않을것이라는 생각에 그는 검에 힘을 실었다.
"3."
"백뢰!"
백색의 번개가 피엘드론을 덮쳤다. 피엘드론은 약간 놀랐지만 그와중에도 그 공격을 겨우 피해낼수 있었다. 세네브라면 모를까 피엘드론은 선천적으로 신이었기 때문에 전성기때의 레니아에 버금갈만한 신력을 가지고 있었다. 벤하르트의 실력이 아무리 상승되었다고는 하나 피엘드론에는 도저히 미치지 못하는것이다.
거기에 피엘드론은 모종의 일로 인해 어떤 상대를 만나더라도 방심하는 일이 없었다. 하지만 예상하고 있었던 공격도 아니어서 분명 그 공격 자체는 피엘드론에게는 꽤나 위협적이게 느껴졌다.
'빠르다.'
인간 치고는 이라는 생각이 뒤에 붙었지만 그가 놀라고 있는 그 사이에 벤하르트는 두번째 공격을 선보였다.
"수.(守)"
"피엘드론만 있다고 생각한거냐?"
벤하르트는 바로 손을 짚고 반대로 날아 세네브의 공격을 피했다. 그리고 정비된 상태로 서로를 마주했다.
"그 공격은 거절의 의사로 보아도 충분하겠지."
"나는.."
피엘드론의 눈을 피하지 않고 벤하르트는 겨우 입을 떼었다.
"!?"
"레니아 쪽이 좋다. 그것은 변하지 않아. 너희들이야 말로 레니아를 따르라고 하면 따를수 있을까?"
"흥 그런 나약한 신을 따를거라고 생각하다니."
"헛소리. 이런 독선적인 신은 나도 따를수 없어!"
백색 섬광을 대충 휘날리면서 벤하르트는 도망칠 궁리를 했다.
'조금만 더 가서 신호를 보내면 루크 형님이라도,,,,'
거기까지 생각하고 그는 발이 멈추었다.
'안되지 안돼. 루크 형님이라도 이녀석들을 상대할수는 없어. 레니아라고 해도 마찬가지. 결국 마주하게 되면 정말 돌이킬수가 없게 된다.'
벤하르트가 행방불명이 된것과 죽음을 당하게 된다는 사실은 상당히 결과가 다른 것이다. 특히나 신앙심을 먹고 사는 나가샤에게 있어서는 더더욱이.. 루크나 레니아가 자신의 상황을 본다면 결국 자신에게 이르른 이 칼은 그들에게까지 머물수 있다는 생각에 벤하르트는 멈추어 자세를 잡았다.
"싸워볼 생각인가."
일섬의 자세에서 이어지는 공격은 피엘드론을 향해 날아갔다. 하지만 피엘드론이 막음으로써 한계 남은 하나의 세네브가 벤하르트의 뒤를 잡았다. 그야말로 뻔히 보이면서도 막을수 없는 상황에 벤하르트는 백광을 둘러내었다. 한방의 각오는 그에게 전해지지 않았다.
"나원참 바보같은 녀석. 그래서 자신이 죽을 거라고 생각했다는 거야?"
벤하르트의 뒷춤에서 나온 붉은 기운은 세네브의 도끼창을 막아내었다.
'이 목소리..... 는?'
"찌릿 찌릿하지만, 좋은 느낌은 아닌걸."
목소리가 나오는가 싶더니 원래부터 그자리에 있었다는듯 한 인영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뭐지? 이녀석은."
"이녀석? 버릇없는 꼬맹이가."
"물러서 세네브."
피엘드론이 멍하니 말했다.
한차례 붉은 색을 연상시키는 공격이 세네브를 휩쓸고 지나갔다.
"크윽."
피엘드론은 곧장 자세를 잡았지만 그런 그를 무시하고 금색의 머리칼을 날리면서 그녀가 말했다.
"오랜만이야 벤. 원래는 왠만하면 나오지 않으려고 무시무시하게 애를 썼는데 말이지, 죽을려고 그렇게 용을 써서야.."
"리스!?"
==================================================
잘 보니.. 6월달에 딱 세개를 썼네요. 제가 생각해도 너무했다 싶었습니다.
6월에는 여러가지 악재가 겹쳐서. 일도 그렇고 다리도 다치는 바람에 아직까지 운동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뒷사정이..
그래봐야 연참대전 앞에서는 모든게 무용지물이지만요,
앞으로 15화 가량 시작하겠습니다. 실패한적은 없지만 실패할수도 있다는 마음으로 열심히...
연참대전 스타트
Comment '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