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성征東省
오·탈자 지적을 바랍니다.
한울루스는, 나는 필요에 의해 무순을 개발했고 무순과 장춘을 잇는 길을 만들었지만 마을이 커지는 것은 외려 무순 옆에 있는 심양이라는 곳이었다.
심양이 발전한 것은 아주 단순하다.
대륙에서 요하를 건너 한울루스로 오는 길목이기 때문이다.
심양 아래로도 물론 길은 있을 것이지만 심양 아래쪽은 요하가 수시로 범람하는 지역이라 자칫 길을 잘못 들면 늪에 빠져 목숨을 장담하지 못하는 경우가 발생하니 사람들은 좀 둘러 가더라도 심양을 통해 한울루스로 오는 길을 택했고 처음 볼 때는 아주 작은 마을이었던, 고작 몇 가구가 모여 농사나 짓고 있던, 심양이 점점 커지게 된 것이다.
그리고 한울루스도 그런 심양을 방치할 수는 없으니 그곳에 마적떼를 단속할 크지 않은 부대를 주둔시키고 있었다.
내가 심양에 도착했을 때 심양에는 나 외에 한무리의 외빈이 몽골을 향해 출발하려고 하고 있었는데 들어보니 고려에서 출발한 최항과 그의 수하들이다.
이미 고려에도 몽케가 연락을 한 것은 알고 있었지만 최항이 직접 몽골로 가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는데 그가 직접 몽골로 가는 모양이다.
‘하긴, 아무래도 나라의 국력이 소모되는 일이니 최항 입장에서도 관심이 가지 않을 수는 없겠지.
그래도 고려 제1의 군벌이라고 신경을 쓰고는 있긴 하군.’
비록 그가 나를 제거하려고 한 일은 알고 있지만 그거야 충분히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이다.
21C 정치인들도 정적을 제거하기 위해 갖은 수단을 동원하는데 지금 시대라고 다르지 않을 테니 말이다.
다만 지금은 전생과는 달리 그 수단에 폭력이 포함되어 있다는 차이만 있을 뿐.
그런 마음을 먹으니 최항도 나쁘게 보이지 않는다.
그 역시 제 나라를 위해 나름 최선을 다 하기 위해 몽골이라는 먼 길을 가고 있지 않은가.
나는 비록 내가 그와 신분에 차이가 있지만 즐거운 마음으로 그에게 대화를 신청했다.
다만 나눈 말 몇 마디 안에 자리잡은 그의 시기심을 느끼고 더 이상 대화를 이어가지를 못했지만.
‘역사에 최항이 시기심이 많아 사람들을 많이 죽였다고 하더니 그것은 바뀌지 않은 모양이구나.
뭐 시기심도 방향만 잘 잡으면 발전의 동력이 될 수는 있으니까.’
시기심도 욕망이고 그 방향만 잘 정하면 발전의 원동력이 될 수는 있다.
그래선지 근래 고려가 부지런히 한울루스를 따라오고 있는 중이다.
내가 듣기로 고려 삼남 지방에는 수도 없이 저수지가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그 저수지 사업을 최항이 진두지휘한 것으로 알고 있다.
한울루스 이상 가는 식량 확보를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말이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고 그 이유가 어떻든 고려에 전생의 역사보다 아주 빠르게 저수지가 느는 것은 고무적인 일이 아니겠는가.
그렇게 우리는 처음의 인사 외에 서로 얼굴 한번 마주치지 않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마침내 카라코롬에 도착할 수 있었다.
“대칸! 대신 후리 한울루스에서 모든 수송을 맡는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그 수송에 들어가는 군사의 수만 해도 근 5천 가량이옵니다.
비록 우리 군사의 수가 4천 정도라 해도 다 합치면 근 1만에 달한단 말입니다.
더 이상 군사를 늘릴 수는 없는 일입니다.
더구나 한울루스에서 군사의 수를 늘이면 당연 고려에서도 군사의 수를 늘일 수밖에 없는데 이는 장차에는 몽골에 부담으로 작용할 것이라는 것을 아셔야 하옵니다.”
“흠, 폐하! 저 역시 한울루스가 군사의 수를 늘이는 것은 반대이옵니다.
더구나 한울루스 뒤에는 대몽골이 있는데 한울루스가 고려보다 군사를 수를 늘인다는 것은 결코 좋은 일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이는 몽골과 고려의 우의를 해치는 일이 될 것이옵니다.”
“흠, 일단 내 휘하의 장수들과 상의를 한 후 다시 논의하기로 합시다.”
2국이든 3국이든 연합국이라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아무래도 가장 첨예한 문제는 내놓아야 하는 군사의 수고 한울루스나 고려나 보다 적은 군사를 내기 위해 암묵적인 협력이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최항도 마찬가지다.
군사를 내놓는다는 것은 아무래도 가장 큰 군벌인 자신의 군벌에서 보다 많은 군사들이 차출된다는 것이니 가급적 그 수를 줄이기 위한 경주를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좋소이다. 그럼 우리 몽골에서 2만5천의 군사를 내놓기로 하겠소.
다만 기마병은 1만이고 나머지는 보병으로 채울 테니 그리 아시오.
고려는 보병 1만이 어렵다고 하니 보병 8천을 채우도록 하시오.
내 이미 고려의 중앙군이 8천이라는 얘기는 들어 알고 있으니 더 이상 양보를 할 수는 없소이다.
다만 한님께서는 그 병사들의 반이 수송을 담당하는 선원들이니 병사의 수를 좀 더 늘려 기마병과 보병의 수를 합쳐 병사의 수를 5천으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한님 말대로 후방을 교란한다고 하더라도 그 정도의 숫자는 있어야 목적을 달성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전쟁을 준비하기 위해 별도의 기관을 고려에 설치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아무래도 일의 진척상황을 확인하고 독촉할 기관이 있어야 할 테니까요.
그래서 나는 정동성征東省이라는 기관을 설치했으면 합니다.
이 기관의 수장은 아무래도 이번 전쟁을 입안한 한님께서 맡아주셨으면 하는 바입니다.
그리고 한울루스나 고려 조정은 정동성의 지휘 아래 이번 전쟁을 수행했으면 합니다.
내가 이번 전쟁을 직접 지휘하고 싶은 마음도 있으나 아무래도 나는 이곳에서 송과의 전쟁을 살펴야 하고 또 훌라구가 원정하는 압바스왕조와의 전쟁도 살펴야 해서 일본과의 전쟁은 한님께서 살펴주십사 하는 것입니다.”
“알겠습니다. 졸본에 정동성을 설치해 한울루스나 고려가 보다 빠르게 전쟁준비를 하도록 독촉을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정동성의 문제는 한님에게 일임을 하고 한님 말씀대로 이번에는 고려와 한울루스의 사신과 더불어 한 번 더 일본에 사신을 파견해 과연 그들이 몽골에의 입조를 기어이 거부하는지를 보겠습니다.
그러나 이번에 사신을 보내는 것은 내 입장에서는 세 번째니 한님께서도 더 이상 이 문제로 왈가왈부하시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뭐 이미 전쟁은 기정사실이 되었지만요.
마지막으로 한님이 작성한 계획대로 내년 2월 말일까지 몽골과 고려의 군사 3만3천이 모두 고려의 합포에 모일 수 있도록 한울루스에서 배를 준비해주시기 바랍니다.
그곳에서 대마도를 건너뛰고 바로 일기도라는 섬으로 네 차례에 걸쳐 병력과 말을 이동시켜 일기도를 접수한 후 4월 초에 서해도西海道로 가기로 합시다.
다만 그 도착하는 지점은 일본의 상황을 보아가며 결정하기로 했고 또 이에 대한 결정은 한울루스에서 하기로 했으니 이는 한님께서 필히 책임을 지셔야 할 것입니다.”
“알겠습니다. 세작을 풀어 일본의 상황을 살필 것이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좋습니다. 다만 내가 개인적으로 한님께 부탁하고 싶은 바는 한님께서는 이미 그 능력이 출중하신 텝텡게르시니 그 합포라는 곳에 가셔서 일본으로 떠나는 우리 몽골의 병사들을 위무해 주시기 바란다는 겁니다.
비록 타국이라고 하나 고려는 이미 몽골의 우방이고 또 한울루스와도 지척간으로 사이가 좋으니 다녀오는데 큰 문제는 없을 줄로 압니다.
그리 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대칸, 전쟁중입니다. 나라의 수장이 전쟁 중에 도읍을 벗어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렇지만 이미 한님께서는 정동성의 수장을 맡기로 했고 또 몇 차례 도읍을 벗어나 유람하신 적이 있다고 들었는데 다시 한 번 그런 일을 한다고 해서 한울루스에 무슨 일이 생길 것 같지는 않습니다만.”
“휴, 정히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가급적 합포에 다녀오도록 하지요.”
“고맙습니다. 내, 한님께서 입으로 꺼낸 말씀은 반드시 지키신다는 것을 아니 더 이상 그 문제는 걱정하지 않겠습니다.
아마 바다를 건너야 할 병사들의 두려움이 한님으로 인해 모두 사라질 것입니다.”
그렇게 전쟁에 대한 계획이 수립되면서 나는 일본으로 떠날 몽골의 사신을 데리고 박작으로 돌아왔다.
다만 최항은 몸이 좋지 않다며 얼마간 카라코롬에 더 머물다 오기로 했는데 아마도 나와 같이 움직이는 게 싫어서 그런 것으로 보였다.
아니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박작의 번화함에 놀란 몽골의 사신은 그곳에 더 머물기를 바랐지만 이미 고려와 한울루스의 사신들이 준비하고 있어 배를 타고 고려 합포로 떠나야만 했다.
합포에서 한울루스의 커다란 배와는 비교가 안 되는 작은 구조선을 탄 사신 일행은 대마도와 일기도를 거쳐 하카타에 도착했는데 한울루스에서 이 사신 일행에 보낸 이는 고령固寧(현 평북 중화군 상원면) 출신의 조영趙瑩(?~?)이었다.
그리고 나는 사신일행이 출발하기 전에 그를 불러 일본의 동정을 살피는 것에 대해 의논을 한 것이다.
이 시대 사람들은 세작질을 하는 것을 아주 천시하기 때문에 사신이 세작질을 한다는 생각은 하지 못한다.
아마도 그 유교에서 말하는 대장부니 대인배니 하는 개념이 머릿속에 박힌 때문일 터다.
즉 남의 약점을 틈 타 이득을 취하는 것을 아주 졸렬한 소인배로 여기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또 사신으로 가서 제가 보고 듣고 온 것을 미주알고주알 떠들기도 한다.
마치 놀이공원에 다녀온 아이가 신나서 떠들 듯이 말이다.
그렇게 떠들 것 같으면 제대로 보는 법을 알려주자는 게 나의 생각이었다.
더구나 조영은 그 근본에 무인기질이 있어 소속감이 투철한데다 비록 어린 시절 유학을 배우기 위해 노력했다고는 하지만 한창 머리에 가치관이 생길 즈음에는 졸본에서 과학을 배워 그 사고방식까지 유학에서 말하는 체면이나 대인배 소인배하는 따위에 물들지는 않았으니 적당한 인물로 여긴 것이다.
물론 오뜨겅 휘하에 있는 전문적으로 세작 훈련을 받은 이를 사신으로 하면 좋겠지만 이 시대 동양의 사신이라면 기본적으로 한시를 읊고 또 한시를 지을 정도가 기본 교양이니 한울루스에 이 조영만한 인물을 찾는 게 쉽지가 않은 때문이다.
내가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 중에 유학은 전혀 없으니 자연스럽게 학생들이 유학을 멀리 해 한시 한 구절 외우는 이를 찾는 것도 쉽지 않은 게 한울루스의 현실인 실정이니 말이다.
물론 가정에서 사서삼경이니를 가르치는 집이 있기야 하겠지만 유학이라는 게 그저 어쩌다 한번씩 뒤져보는 것으로 성취를 이룰 정도로 만만한 것이 아니니 대부분의 학생들은 유학에 등한시하게 될 수밖에 없다.
더구나 유학은 외워야 할 게 너무 많지 않은가.
학생들은 매일 검은 글자를 외워야 하는 유학보다는 짐승의 살을 꿰매보거나 현미경이라는 걸로 야쓰(양파)의 껍질을 들여다보는 것을 더 좋아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학문에 재능이 없는 아이들은 구구단 하나를 외우지 못해 더 이상 학문을 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 아이들도 있지만.
아무튼 일본으로 떠나는 사신일행을 배웅하고 나는 졸본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몽케와 협의한 대로 정동성征東省이라는 기관을 설치할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휴, 정동성을 맡는 바람에 결국 고려에 다녀오기는 해야 하는구나.’
뭐 이미 최우도 죽었고 최항의 하는 행태를 보면 비록 나를 적대시하는 것은 여전하지만 그래도 고려를 위해 군사의 수를 줄이려고 열심히 노력하는 것을 보니 그리 큰 위험은 없을 것으로 보이기는 한다.
더구나 이제 내 지위가 정동성의 성사省使라는 대칸의 대리인이니 감히 최항이 나를 어쩌지는 못할 것이니 말이다.
대칸을 대리하는 이를 죽이거나 상하게 했다간 제 목숨도 사라질 것은 불을 보듯 뻔하고 최항이 그것을 모르지도 않을 테니 말이다.
더구나 나는 그 정동성 안에 자리를 만들어 최항 역시 정동성으로 불러들일 계획이니 졸본에 있을 최항이 나를 어쩌지는 못할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정동성이 만들어지고 최항 역시 졸본으로 불러들이는데 성공을 했다.
추천은 작가에게 힘이 됩니다.
- 작가의말
[조영趙瑩(?~?)]
평양 조씨의 시조는 조춘趙椿으로 그는 고려 추밀원부사를 역임한 인물로, 송나라에 가 금나라를 치는데 큰 공을 세워 송나라 상장군이 되었다고 한다.
지금 현재의 평북 중화中和군 상원祥原면에 정착했는데 그의 4세손이 소설에 등장하는 조영이고 5세손이 조인규趙仁規(1237~1308)고 8세손이 이성계, 정도전과 더불어 조선을 세운 조준趙浚(1346~1405)이다.
이 상원이라는 곳은 고구려 때는 식달息達이었고 통일신라 때는 토산土山인 곳으로 헌종 9년 1018년부터는 황주목에 속한 곳이다.
그러다 거란의 침입을 막지 못한 일로 고종4년 1217년에 황주목은 고령군固寧郡으로 강등되었고 소설상에서도 황주목이 아니라 고령군인 상태다.
조인규는 고려 문하시중까지 지낸 인물로 딸이 충숙왕의 비가 되어 국구에 오르기까지 한다.
조인규가 태중에 있을 때 그의 어머니인 토산군부인이 해를 몸 안에 품는 태몽을 꾸었는데 이 말을 들은 충렬왕이 조인규의 고향인 식달을 상원祥原(상서로운 너른 땅이라는 뜻이다.)이라 고쳐 부르도록 하면서 조인규의 본관은 식달에서 상원으로 바뀌게 된다.
그 후 조인규가 평양부원군에 봉해지면서 다시 상원에서 평양으로 바뀌게 되어 평양 조씨 문중이 만들어진다.
본래 이 평양 조씨들은 상당히 친원적인 색채를 띠고 있는데 아마도 조인규와 그의 후손인 조일신이 원에 유학을 한 이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조인규의 아비인 조영도 금오위별장을 지낼 정도이니 집안이 한미할 정도는 아니지만 소설에서는 서경이 이광수로 인해 한울루스의 영향을 받으면서 근처에 살던 조영의 아비가 조영과 더불어 졸본으로 이주한 것으로 했다.
이는 조준이 조선의 경제적 토대를 만들 정도로 경제와 이재에 밝은 인물인 점을 생각해 그를 공민왕에게 붙이기 위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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