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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기진 님의 서재입니다.

고려제국사

웹소설 > 일반연재 > 대체역사, 퓨전

완결

동기진
작품등록일 :
2019.01.19 10:52
최근연재일 :
2021.10.20 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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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
19.04.09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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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
글자
14쪽

류큐

오·탈자 지적을 바랍니다.




DUMMY

나는 우수리로부터 슌텐 왕국의 일에 대해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

또한 내가 만들어 준 지도를 따라 우수리가 항해한 지역을 살펴보니 우수리는 탐라에서 남남동으로 내려가다 몇 개의 작은 섬들을 만났다고 하는데 아마도 토가라 열도를 만난 것으로 보였다.


“그 처음 만난 몇몇 작은 섬들에는 사람은 있었지만 그 수는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고 또한 문자를 아는 이도 없어 필담조차 나누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은 밭에서 조나 피를 재배해 먹고 사는 듯했고 입고 있는 것은 풀잎을 엮어 만든 것이었으며 기거하는 곳은 움집에 불과했습니다.

그렇게 며칠을 가니 상당히 큰 섬이 나왔는데 그곳에는 사람도 많고 개중에 문자를 알고 있는 이도 있었지만 필담을 나눌 정도로 많은 글자를 알고 있는 이는 없었습니다.

그렇게 점점이 떨어져 있는 섬들을 따라가니 과연 큰 섬이 나왔는데 여기 탐라의 섬과 차이가 없는 듯 크고 긴 섬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 슌텐 왕국을 만날 수 있었고 문자를 아는 이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논에서 벼를 기르고 높은 곳에서는 조를 키웠는데 바다에 있는 배는 작아 먼 바다를 나서기에는 힘들 듯 보였습니다.

그리고 그 왕이라는 이는 천으로 된 옷을 입고 있었는데 나중에 그 천에 대해 물으니 파초잎으로 만든 천이라 하였습니다.

다만 그 옷에 붉은 색의 염색을 한 것으로 보아 그런 재주는 있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자네가 보기에 그 슌텐 왕국의 슌바준키 왕이 송과 교통을 하는 것으로 보였나?”

“소장이 보기에 그런 낌새는 없었습니다.

더구나 일국의 왕이라면 적어도 입성은 좋아야 하지만 그가 입고 있는 옷으로 보아 결코 입성이 좋다고 할 수 없었으니까요.

더구나 그 왕국의 백성들 역시 입고 있는 옷이라는 게 풀잎을 엮어 만든 것이었습니다.

다만 왕성으로 보이는 곳에 있는 왕의 신하들은 그 파초로 만든 옷을 입고 있었는데 왕과는 달리 옷에 염색은 없었으니 이곳 탐라의 백성들과 별반 차이가 없었습니다.”


“흠, 우리가 그들과 무역을 해봐야 별로 쓸모가 없다는 말이군.

그들이 가진 것 중에서 우리에게 소용이 되는 것이 있어 보이던가?”

“특별히 우리 한울루스에 필요해 보이는 것은 없었습니다.

날은 따듯하고 좋으나 새졸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물소도 없었고 그 파초로 만든 천이라면 굳이 수입할 필요는 느끼지 못했습니다.

다만 그 슌텐 왕국이 있는 곳은 아니고 그 위에 있는 큰 섬의 주위에는 유황이 난다고 하니 이는 우리 한울루스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렇군. 유황이라. 자네가 판단하기에 그 슌텐왕국이나 다른 섬들이 우리 한울루스에 도움이 된다고 보나?”

“저는 그리 보았습니다.

사실 지금까지 박작에서 새졸본까지 항해를 하는 중에 상당한 애로점이 있는 게 사실입니다.

비록 별을 따라 항해를 한다고는 하지만 어떤 날은 흐려 밤에도 별을 찾을 수 없는 날이 있고 또 바다는 잔잔하다가도 갑자기 성을 낼 때도 있는데 그럴 때마다 대양호의 피항처가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지만 이곳 탐라를 벗어나면 새졸본까지 배가 피항할 곳은 전혀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다만 치기야님이 잘 만들어 둔 항해지도가 있고 또 그 항로에 태풍이 부는 계절이 어느 정도 정해진지라 지금까지는 무사할 수 있었을 뿐입니다.

그렇지만 제가 겪어본 바다는 심술쟁이라서 언제 우리가 예측하지 못하는 태풍이 우리의 배를 집어 삼킬지 알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보건데 그 슌텐 왕국과 그 왕국으로 가는 곳에 점점이 흩어져 있는 섬들은 그런 문제를 모두 해결할 수 있는 아주 좋은 피항처가 될 거라 사료되옵니다.

칸께서 허락하신다면 그 각각의 섬마다 부두를 설치하고 우리 한울루스의 사람을 보내 관리하게 하면서 또 그들로 하여금 그곳에 사는 이들에게 한교를 전파하게 할 수도 있으니 이는 한 번의 번잡함으로 오래도록 안전한 항로를 확보하는 길이라 할 것입니다.

이를 살펴주시기 바랍니다.”


“그렇지만 그 슌텐 왕조의 맨 북쪽의 작은 섬에서 여기 탐라로 오기에는 너무 거리도 멀고 또 방향 역시 역풍이어서 가히 좋다고 할 수 없는 일이 아닌가.

더구나 자네는 아직 보지 못했겠지만 그 마지막 섬에서 북쪽으로 더 올라가면 자네가 왜라 부르는 그 일본국의 영토이니 자칫 그들과 분란이 발생할 수도 있는 일이고 말이야.”

“칸이시여.

어느 나라가 있어 우리 한울루스처럼 이렇게 큰 배를 만들 수 있겠습니까?

저 송은 이미 지는 해로 몽골과 다투느라 정신이 없고 몽골은 비록 그 기마병은 강력하다 해도 바다에서는 한 번도 싸워보지 못한, 아니 바다라는 것을 아직 구경도 해 보지 못한 족속들이 아닙니까?

또 고려가 있다고는 하지만 저는 고려에 우리 한울루스의 배와 같이 큰 배가 있다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물며 왜라니요.

어찌 왜가 고려도 몽골도 송도 하지 못한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저 이리 큰 배를 만들고 세상의 바다를 나라 안의 강처럼 쏘다닐 족속은 우리 한울루스뿐일 거라 사료되옵니다.

그런 고로 왜가 어찌 우리의 배를 보고 달려들겠습니까.

그들은 아마도 우리 배를 본다면 줄행랑치기 바쁠 것이고 우리가 그 바다를 우리 바다라 칭하면 다시는 그 바다에 발을 들이밀지 못할 것입니다.”


“우수리 장군, 너무 자만을 하고 있구만.

시간이 좀 지나면 고려 역시 우리와 같은 배를 만들 충분한 실력이 있음을 알아야 해.

또한 일본 역시 마찬가지야.

자네는 일본을 아주 작은 나라라 생각하겠지만 사실 일본은 고려보다 땅도 넓고 그 사람수도 많다는 것을 알아야 하네.

더구나 그들은 섬나라라서 배가 곧 말과 같으니 우리 배를 본다면 그것을 베껴 모방하기 위해 총력을 다 할 족속이라는 걸 명심해야 하네.

과거 고구려 때처럼 고작 백제의 유민들이 만든 작은 나라라고 생각한다면 크게 오판을 한다는 것을 명심하게나.

그래도 자네가 말한 피항처라는 것은 충분히 일리가 있는 말이긴 하군.

각지에 피항처를 만들어 놓는다면 지금처럼 1년에 딱 한번 박작과 새졸본을 오가는 일은 없을 테니 말이야.

내 졸본으로 돌아가면 그 문제를 검토해보도록 하겠네.

다음번에 그 항로를 따라 가게 된다면 그 유황이라는 것을 살 테니 있는 대로 캐놓으라 하게나.

쌀같은 곡식이나 그들이 필요한 것으로 바꿔준다고 하면 아마 얻을 수 있을 것이니.”

“예, 그리 하겠습니다.”


그리고 가을이 되면서 나는 목화를 수확하게 되었다.

그리고 다시 품꾼들을 고용해 목화에서 얻은 그 솜들의 길이를 측정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기존의 목화와는 달리 길이가 길고 당겼을 때 솜뭉치에서 실이 술술 잘 풀리면서 쉽게 끊어지지 않는 솜을 찾게 되었다.

물론 그 솜은 씨 역시도 분리가 어렵지 않았다.

그 솜들의 씨만을 골라 별도로 보관하고 그 솜 역시 탐라에 있는 물레를 사용해 실을 잣도록 했는데 그것을 한 탐라의 여인에게 물으니 전의 솜보다 확연하게 일이 쉽다는 얘기를 전한다.


탐라에서 겨울을 나면서 할 일이 없는 나는 내가 도착한 마을을 본래 역사대로 대정이라 칭하고 주위의 사람들을 모아 여태까지 해 오던 한글과 한교를 가르치는 일을 하면서 또한 특별히 고른 청년 수십을 모아 생태를 관찰하는 요령을 가르치느라 정신이 없다.

그리고 거기에 더해 어찌하면 대정을 발전시킬 수 있을까를 고민해 보았다.

아무래도 한울루스의 남방 거점으로 삼을 곳은 결국 새졸본이 되겠지만 엔진이라는 것이 만들어질 때까지 배의 동력은 바람이 전부니 우수리가 말한 대로 결국 앞으로 이름이 어찌 바뀔지는 모르지만 오키나와를 경유하는 것만큼 좋은 항로는 없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그 오키나와를 경유해 서해바다를 통해 박작으로 올라가는 중간 거점이 바로 여기 대정으로 적당해 보이기 때문이다.

물론 한반도 남해나 서해의 여러 섬을 경유하는 항로를 만들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것은 고려가 허락할 리가 없는 일이니 멀리 탐라의 밖을 돌아가는 항로를 택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다.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는 아직 고려 조정의 힘이 제대로 투사가 되지 않는 탐라를 구워삶아야 하고 또 그러려면 여기 대정이 탐라의 어느 지역보다 발전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결국 목화 재배가 답인가.’

사실 졸본에는 목화 외에도 다른 씨앗들도 상당수 있다.

가령 망고의 씨앗도 있고 그 외 열대나 아열대의 여러 식물의 씨앗을 모았으니 중동과 동남아사아에 있는 웬만한 씨앗은 모두 있다고 할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들은 결국 새졸본으로 가야 할 씨앗일 뿐이다.

내가 알기로 제주에서 그런 과일이 생산되었다는 얘기는 듣지 못했으니까.

‘참, 관광이라는 게 없으니 이곳 탐라가 먹고 살만한 게 없구만. 모든 이에게 목화를 재배하라고 할 수도 없는 일이고.’


하나의 작물만으로 특화된 섬의 말로는 이미 전생의 역사에서 류큐가 재배한 사탕수수를 보고 충분히 배웠으니 여기 탐라를 목화로 도배를 할 수는 없는 일이다.

‘결국 전생의 역사처럼 이곳에서는 말이나 길러야 하나.’

아직 한반도에는 아니 세계 어디나 목축을 산업으로 끌어올린 지역은 없을 것이다.

목축을 산업 수준으로 끌어올리려면 그 기르는 짐승의 숫자가 그저 100마리 정도 가지고는 턱도 없으니 말이다.

적어도 천 마리가 넘어갈 정도로 많은 수의 짐승을 길러야 운반비도 빠지고 또 새끼를 받아 꾸준히 순환시킬 수도 있을 테니 말이다.

몽골의 대부호도 그 정도의 가축은 가지지 못했고 아니 가질 생각을 하지 않았고 한울루스에 사는 여진인들은 한 종류의 가축을 100마리 정도라도 가진 이들은 찾을 수도 없다.


그렇게 이곳 탐라에 전생처럼 말을 한번 키워보자는 생각을 하다가 졸본에 있는 씨앗이 아니라 졸본 학교에서 기르는 식물에까지 생각이 미치게 되었다.

학교 건물에서 키우는 식물은 분명 아열대 식물이지만 아직도 죽지 않고 살아있는 식물이다.

바로 내가 고려로 오면서 들렀던 인도의 캘리컷에서 얻은 고무나무들 말이다.

처음에 그 고무나무를 가져올까 망설이다가 내게 구-갈이라는 이름까지 알려준 이의 수고를 생각해 십여 개의 화분을 배에 실어 졸본으로 가져왔는데 그 나무들이 크면서 한 종류의 고무나무가 아니라 그 종류가 여러 개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물론 실내에서 기르다 보니 나무가 그리 크지 않아 고무진액을 얻을 생각 따위는 하지 않았지만 이곳 탐라에서라면 분명 10년 정도면 고무진액을 얻을 정도로 크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물론 새졸본으로 옮긴다면 성과는 더욱 좋을 것이다.

그렇지만 새졸본은 아직 식량기지에서 나아가기는 환경이 좋지 않다.

자칫 그곳의 부족과 전쟁이라도 난다면 그곳에서 기르던 식물들까지 영향을 받을 수 있으니 말이다.

더구나 이런 새로운 식물은 자칫 기존 주민들과 분쟁을 일으키는 수도 있다.

누가 아프면 의원을 찾는 게 아니라 무당을 찾는 게 지금 시대다 보니 새롭게 등장하는 식물 따위는 무당의 말 한마디로 마을에 병을 옮기는 못된 물건으로 바뀔 수도 있으니 말이다.

그렇지만 어느 정도 말이 통하고 고려 조정을 통해 압박을 넣을 수 있는 탐라라면 문제는 다르다.

잘 기르고 잘 보관하라고 하면 이곳의 백성들은 그 말을 어길 이들은 아니니 말이다.

더구나 탐라의 성주는 새졸본이 있는 바부자 부족의 부족장처럼 무당의 말에 휘둘릴 정도로 무지하지는 않으니 말이다.

‘그래 여기 대정에서 고무나무를 기르자. 뭐 얼어 죽는다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여기 외에 고려에서 고무나무를 기를 정도의 날씨는 더 이상 없을 테니까.

이걸 이제야 기억해 내다니 나도 정신이 없긴 하군.’


해가 바뀌면서 봄이 왔고 나는 다시 한 번 목화의 수분을 돕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번에는 아예 기존에 심었던 면이 짧게 자라는 목화는 그 씨앗을 모아 보관한 후 여태까지 가르던 목화는 모두 탐라의 주민들에게 줘버리고 새로이 얻은 씨앗을 방안에서 키워 기존의 밭과 아예 멀리 떨어진 곳에 새롭게 밭을 만들어 심었다. 벌이나 나비의 영역권이 서로 다르게 말이다. 그래도 걱정이 되어 꽃이 피기만 하면 부리나케 달려가 붓으로 수분을 돕도록 사람을 여럿 고용했다.


그리고 우수리는 다시 슌텐 왕국을 찾아 떠났다.

나는 우수리에게 시간이 더 걸리더라도 작년에 갔던 항로를 따라 보이는 모든 섬을 방문해 사람이 사는지 여부와 각 섬들의 기본적인 정보를 얻어오도록 했다.

그러기 위해 지난 겨우내 내게서 생태에 대해 교육을 받은 수십의 건장한 청년들을 별도로 고용했는데 그들은 우수리가 다시 탐라로 돌아올 때까지 섬 하나에 최소 두 사람씩 남겨 섬에 대한 정보를 얻는 일을 하도록 한 것이다.

물론 섬의 크기에 따라 그 인원은 우수리가 결정하도록 하고 말이다.

그 대가로 1인당 쌀을 두 가마씩 주기로 했으니 적어도 그렇게 떠나는 이들의 가족은 굶주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

항해에 사고가 없기를 바란다.

또한 각 섬에 남겨진 이들 역시 무사하길 바란다.

섬이니 무슨 맹수가 있지는 않겠지만 병은 섬이라도 없는 것은 아니니 말이다.




추천은 작가에게 힘이 됩니다.


작가의말

[류큐琉球]

지금의 오키나와 일대에 언제부터 사람이 살았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12C 이전의 역사에 대한 기록은 7C에 이미 아마미나 액구掖玖(오키나와로 추측)에서 일본 조정에 조공을 했다는 기록이 일본서기에 있는 정도다.

그렇지만 일본서기는 워낙 오류가 많아 일본학자들도 걸러서 읽는 형편이다.

또 다른 기록은 일본이 견당사遣唐使를 파견보낼 때 아마미와 오키나와를 거치는 항로를 이용했다는 것이다.

이로 미루어 보아 일본과는 오래 전부터 작게나마 교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그 문명의 발전 정도는 아주 미약했는데 11C까지를 패총시대라 할 정도니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문명의 발전이 미약했던 이유는 아마도 규수와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그 이유일 것이다.

규수와 아마미 까지의 거리가 제주와 한반도까지 거리의 3배에 이르고 오키나와까지는 5배에 이르니 한국의 탐라가 발전한 정도를 보면 짐작할 수 있는 문제다.

 

유전학적인 관찰로 살피면 류큐의 인종은 남방계인 오스트로네시아 계통의 인간(아마도 대만의 원주민 추측)과 일본의 죠몬인들 사이의 혼혈로 보인다고 한다.

다만 마지막 빙하기 때 동물들이 남쪽에서 건너와 오키나와 등지로 퍼졌고 사람 역시 빙하기 때 건너온 것으로 보이지만 죠몬인들은 빙하기가 끝난 후 뗏목 따위를 이용해 오키나와 등지로 남하한 것으로 보인단다.

 

11, 12C 경 일본으로부터 철기를 받아들인 것으로 보이는데 아마도 이때쯤에 일본의 문자 체계(한자+가나)를 받아들였지 않았나 추측해 본다.

다만 현재의 오키나와어도 그렇지만 이 당시의 오키나와어 역시 일본어와는 상당히 다른 언어라는 것이 정설이다.

음운론적으로도 일본이나 한국에 없는 독특한 발음이 있는 것으로 보아 맞는 말이라고 여겨진다.

류큐어라는 구분이 있기는 하지만 그 안에도 같은 계통이지만 다른 언어라 볼 수 있는 많은 언어가 있다고 한다. 물론 좀 유별난 방언 수준이라고는 하지만.

류큐가 후에 아마미 군도 등 여러 섬을 정복했지만 각 섬마다 오랜 기간 독특한 언어를 발전시켰다는 말이다.

 

11, 12C 오키나와에 철기가 도입되면서 부족국가로 변하기 시작했는데 이때를 구스쿠 시대라고 한다.

그리고 그런 부족의 장은 아지按司라고 한다.

구스쿠는 성城이라는 뜻이라는데 부족장의 권력이나 제사장 따위의 신분을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배를 타고 돌아다니기도 힘든 그 시대에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성을 쌓았다고 보기는 좀 지나친 억측이라 생각되니까.

 

구스쿠시대가 지나고 처음으로 왕조를 연 이가 슌텐이라는 이라 하는데 그런 기록이 모두 16C 이후 적혀진 것이라니 감안해 들어야 할 거라 본다.

본래 역사는 후대로 갈수록 첨삭이 많아지기 마련이니 말이다.

다만 이 소설은 그런 오키나와의 기록을 사실로 받아들이고 쓰여졌다.

 

그 기록에 따르면 슌텐(재위:1187~1237)이 1187년에 왕조를 열고 아들 슌바준키(1237~1248), 손자 기혼(1248~1259)까지 3대에 이르다 에이소(재위:1259~1299)라는 부하에게 선위를 해 에이스 왕조가 열리는데 에이소가 남송에서 불교를 들여왔다고 하는 것을 보아 에이소 왕조 시기에는 이미 남송까지 무역을 위해 다닌 것으로 보인다.

에이소는 사후 오키나와에 있는 우라소에 구스쿠에 묻혔다고 하는데 조사결과 우라소에 구스쿠가 13C에 만들어졌으며 거기서 고려기와가 출토되었는데 계유년이라고 적혀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우라소에 구스쿠가 1273년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더구나 고려기와로 추측컨대 이미 고려와도 무역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아니 적어도 일본과는 무역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에이소 왕조 역시 불과 5대에 이르러 몰락의 길을 걸었다.

그렇지만 슌텐 왕조와 에이소 왕조가 주변부족들과 교류를 하면서 오키나와 일대의 여러 섬으로 이들 왕조의 문화가 전파됐고 그런 문화의 발전에 힘입어 중산, 남산, 북산이라는 이른바 삼산시대가 열리게 되는 것이다.

이 삼산시대가 쇼(尙)씨 주도로 통일이 되어 류큐국이라는 왕조를 다시 연 것은 1429년 무렵이다.

 

류큐에 논농사가 들어온 것은 11, 12C 철기를 받아들이면서 같이 들어온 것으로 보인다.

류큐 왕국은 이렇게 도입된 철기를 이용해 석회암지대에는 조와 밀 따위를 심고 저지대에서는 논농사를 지었다고 한다.

류큐하면 떠오르는 사탕이나 사탕수수는 앞서 23편 사탕 편 작가의 말 란에서 적었듯이 16, 17C가 되어 웨카타 신죠에 의해 중국에서 들어왔고 역시 그에 의해 일본에서 목화가 들어온 시기도 이때다.

웨카타 씨는 당시 류큐왕국의 재상 가문이었다.

 

임진왜란과 관련해 류큐왕국은 명나라에 일본이 조선을 침공할 거라는 사실을 알리기도 했지만 명이 대처를 하는 것보다 일본의 침공이 더 빨라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의 일을 겪게 되었다.

 

사스마는 조선과 전쟁을 치르면서 류큐에 군량미를 비롯한 무리한 요구를 하기 시작했다.

들어주기 힘든 요구니 무리라는 표현이 붙는 것이다.

결국 사스마는 임란이 끝난 후 도쿠가와 막부에 찍힌 미운털을 타개할 요량으로 류큐에 시비를 걸었고 그 시비에 말려든 류큐는 1609년 3월 3천의 사스마 병사들의 침입을 받게 된다.

아마미오오시마奄美大島가 떨어지고 우라소에구스쿠浦添城가 함락되었으며 도읍인 수리구스쿠首里城 앞에서 조총의 위협을 받게 되기까지 채 한 달이 걸리지 않았다.

결국 류큐는 사스마에 항복을 하고 국왕인 쇼네이尙寧(재위;1589~1620)가 가고시마로 끌려가 사스마에 충성 맹세를 하고 다시 도쿄로 끌려가 쇼군을 알현하고야 슈리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리고 사스마는 류큐의 농지를 사탕수수 밭으로 바꾸고 류큐의 백성을 끌어다 노예로 팔았으며 일본인들이 좋아하는 창씨개명을 시행했다.(일본인의 두 글자 성이 아닌 한 글자 성으로 바꾸도록 강요를 했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류큐를 병합하지는 않고 대외적으로 여전히 존속시켰는데 이는 류큐가 중국의 조공국으로 존재하면서 사스마가 얻는 이익이 있었기 때문이다.

즉 중국이 조공을 받은 후 하사품으로 내려주는 비단 등의 사치품에 눈독일 들인 사스마가 류큐를 병합하지 않고 존치시킨 것이다.

이 당시 일본은 명나라에 10년에 한번 조공을 할 수 있었고 류큐는 2년에 한번 조공을 할 수 있었으니 그 무역에서 나오는 명의 사치품에 사스마가 눈독을 들인 것이다.

참고로 조선은 1년에 4회, 베트남은 3년에 1회의 조공이 가능했다.

조공은 대외무역이니 이를 사대라는 관점으로만 보지 않기를 바란다.

또한 별로 팔 만한 것도 없는 류큐는 이 조공을 통해 조선과 일본 그리고 명 사이의 중계무역을 하였는데 이를 바라보고 있던 일본 입장에서는 상당히 배가 아팠을 것은 당연하다.

 

일본이 메이지유신으로 중앙집권화를 기할 때 류큐는 국에서 번으로 국왕은 번왕으로 강등되면서 처음으로 류큐가 일본의 속령임을 확인하게 된다.

즉 외국이라는 의미의 國고쿠こく에서 번이라는 의미의 國쿠니くに로 불리게 된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류큐는 청에 조공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대만섬에 상륙한 류큐인이 피살되는 사건이 발생하자 이를 빌미로 일본은 당시 청의 영토인 대만에 슬쩍 상륙을 하게 된다.

그러나 무지한 청은 일본이 대만섬에 상륙한 문제는 관여를 했지만 류큐의 일로 일본이 나서는 것은 상관하지 않았다.

이에 일본은 청이 류큐에 별 관심이 없다는 것을 알고 류큐에 대한 합병을 계획하게 되는 것이다.

마침내 1879년 일본은 군경을 파견해 류큐번을 없애고 가고시마 현에 편입했다가 곧 오키나와 현을 설치하게 된다.

이로써 류큐왕국은 역사에서 완전히 지워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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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 바투의 선물 +2 19.05.04 1,804 54 13쪽
87 2차 순례 +7 19.05.03 1,785 53 13쪽
86 성姓을 가지다 +1 19.05.02 1,883 54 13쪽
85 호패 +4 19.05.01 1,728 50 13쪽
84 각자의 생각 +3 19.04.30 1,728 55 13쪽
83 무위로 돌아간 암살 작전 +4 19.04.29 1,790 57 13쪽
82 정보조직 +3 19.04.26 1,778 51 13쪽
81 제안 +4 19.04.25 1,771 55 13쪽
80 모의 +4 19.04.24 1,774 62 14쪽
79 복귀 19.04.23 1,850 49 13쪽
78 접촉 II +3 19.04.22 1,872 65 15쪽
77 아이누 모시와 아페시르 열도 +1 19.04.20 1,959 60 14쪽
76 좌초 +1 19.04.19 1,889 61 13쪽
75 이안사 +5 19.04.18 1,999 56 14쪽
74 항로 개척 +3 19.04.17 2,039 62 13쪽
73 탐험 +8 19.04.16 2,058 69 14쪽
72 소문 +1 19.04.15 2,104 65 14쪽
71 새졸본 +5 19.04.13 2,102 62 13쪽
70 카라코롬 +2 19.04.12 2,140 66 13쪽
69 계획 +6 19.04.11 2,182 76 13쪽
68 하카타 상인 19.04.10 2,156 68 13쪽
» 류큐 +4 19.04.09 2,228 67 14쪽
66 탐라를 가다 19.04.08 2,229 67 13쪽
65 탐라 진출 19.04.06 2,333 75 13쪽
64 과학과 기술의 발전 +4 19.04.05 2,385 75 13쪽
63 1차 순례 +2 19.04.03 2,408 73 13쪽
62 목화와 경제가 +1 19.04.02 2,383 74 13쪽
61 길에서 +6 19.04.01 2,443 80 14쪽
60 변화의 바람 +3 19.03.30 2,698 74 14쪽
59 대륙을 논하다 +2 19.03.29 2,535 79 13쪽
58 여몽화약麗蒙和約 +3 19.03.28 2,612 73 14쪽
57 외무사外務司 +2 19.03.27 2,540 75 16쪽
56 화약 시현 +7 19.03.26 2,534 65 13쪽
55 접촉 +1 19.03.25 2,418 62 14쪽
54 이광수 +3 19.03.23 2,470 60 13쪽
53 유혹 +2 19.03.22 2,584 63 13쪽
52 대화 +2 19.03.21 2,528 74 15쪽
51 졸본의 일상Ⅰ 19.03.20 2,595 68 15쪽
50 소금 +1 19.03.19 2,635 73 16쪽
49 이장용 19.03.18 2,636 67 13쪽
48 주고 받다 +5 19.03.16 2,668 76 12쪽
47 테무친 죽다 +6 19.03.15 2,886 64 13쪽
46 군권 +1 19.03.14 2,700 72 13쪽
45 살리고 죽이다 +3 19.03.13 2,645 70 14쪽
44 동하점령 +1 19.03.12 2,738 66 13쪽
43 과학 +1 19.03.11 2,777 66 12쪽
42 화약 +4 19.03.09 2,857 68 14쪽
41 문제는 식량 +1 19.03.08 2,872 65 13쪽
40 나의 처지 +2 19.03.07 2,954 63 13쪽
39 밍캇 19.03.06 2,832 75 13쪽
38 졸본으로 19.03.05 2,940 77 13쪽
37 소르칵타니 +4 19.03.04 2,936 69 13쪽
36 쿠릴타이 +2 19.03.02 2,990 70 13쪽
35 한울루스 +2 19.03.01 2,998 71 13쪽
34 테무친 19.02.28 2,989 72 13쪽
33 이야기를 퍼뜨리다 +2 19.02.27 2,914 76 13쪽
32 텝텡게르 +1 19.02.26 2,876 71 13쪽
31 사기詐欺의 이유 +6 19.02.25 2,983 74 13쪽
30 기도를 하고 의례를 만들다 +7 19.02.23 3,072 78 14쪽
29 테무게 +2 19.02.22 3,073 74 13쪽
28 유덕용 +3 19.02.21 3,083 73 19쪽
27 졸본 +2 19.02.20 3,176 75 17쪽
26 터를 잡다 +2 19.02.19 3,192 71 16쪽
25 고향 19.02.18 3,156 71 15쪽
24 대만 +2 19.02.16 3,087 68 13쪽
23 사탕 19.02.15 2,993 68 13쪽
22 여정 +5 19.02.14 3,043 65 14쪽
21 선물 +3 19.02.13 3,090 73 14쪽
20 바스라를 떠나다 19.02.12 3,085 75 13쪽
19 탈출 +1 19.02.11 3,146 73 14쪽
18 중독 +2 19.02.09 3,156 64 13쪽
17 바부 +4 19.02.08 3,194 60 13쪽
16 고려 마을 +2 19.02.07 3,318 82 13쪽
15 바스라로 옮기다 +4 19.02.06 3,306 67 13쪽
14 아랍으로 가다 19.02.05 3,411 73 13쪽
13 신화를 만들다 +1 19.02.04 3,588 74 12쪽
12 베다 +2 19.02.02 3,759 74 13쪽
11 대고구려 +8 19.02.01 4,077 71 13쪽
10 사명을 가지다 +3 19.01.31 4,034 76 13쪽
9 번민 +3 19.01.30 4,319 71 12쪽
8 이적을 보이다 +2 19.01.29 4,539 78 12쪽
7 고려고약 +5 19.01.28 4,914 85 12쪽
6 영靈을 단련하다 +1 19.01.26 5,222 80 13쪽
5 파미르 탈출 +2 19.01.25 5,954 82 13쪽
4 몸을 차지하다 +1 19.01.24 6,967 93 13쪽
3 다른 차원의 지구 +2 19.01.23 7,933 86 13쪽
2 역사의 변곡점 +5 19.01.22 9,544 95 7쪽
1 프롤로그-전면 수정 +6 19.01.21 12,039 105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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