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국사에서
오·탈자 지적을 바랍니다.
세자가 법왕사에서의 강론을 청하였지만 어찌 내가 법왕사에서의 강론을 즐거이 받을 수 있을까.
그것은 저 멀리 영암에서부터 또 남경에서 나의 말 한마디를 더 듣기 위해 나를 쫓아 예까지 따라온 이들에 대한 의리를 접는 일이 아니겠는가.
법왕사는 연경궁 안에 있는 사찰로 본래가 왕실의 사람들을 위한 사찰이니 말이다.
더구나 그곳에 모일 사람들의 면면은 왕실의 일원이거나 조정의 신료 그리고 사찰의 고승들일지니 그렇게 기득권에 찌든 이들만 모아놓고 내가 떠들어댄다손 어찌 그들에게 나의 말이 통하겠는가.
거기에 그 법왕사든 다른 사찰이든 나에 대한 결과가 다르지는 않겠지만 내가 굳이 최씨 부자가 원하는 방향으로 일을 진행해야 할 이유도 없다.
내가 법왕사에서의 강론을 거절하면서 다시 한 번 고려 조정에서 나에 대한 인식이 나빠진 모양이다.
그렇지만 내가 왕실을 위한 법왕사가 아니라 고려를 위한 국찰인 흥국사興國寺, 불은사佛恩寺, 국청사國淸寺 세 곳 중에 한 곳에서 강론하기를 청하며 더 많은 백성이 나의 강론을 듣기를 원한다는 뜻을 피력하니 고려왕실은 떨떠름해 했지만 조정의 신하들은 외려 더욱 좋아라 하여 결국 왕궁과 가까운 흥국사에서 강론을 하기로 결정이 되었다.
흥국사는 왕궁의 동문인 광화문 밖에 있는 사찰로 태조때 창건한 것이니 나라의 중요 행사가 벌어지는 곳이다.
광장 문화가 없는 고려에서 대중이 모일 수 있는 유일한 곳이 아마도 이런 사찰일 것이다.
연등회니 팔관회니 하는 주요 행사가 있을 때마다 구름처럼 사람들이 몰렸을 사찰의 마당에는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내 뒤로는 마치 자신들이 나의 말에 대해 보증을 한다는 듯이 여러 사찰의 고승들이 자리를 잡았고 또 내 바로 앞에는 고려의 세자부터 고위신료들이 자리했는데 그 무리들 사이에 최항과 최의도 끼어있었다.
특히 최항은 보기에도 몸이 상당히 불편해 보임에도 이 자리에 참석한 것을 보니 굳이 자리에 참석할 필요가 있는 듯이 보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바로 뒤에는 앞에 있는 세자와 고위신료들을 보호하기 위해 상당수의 군사들이 빙 둘러 진을 쳤는데 얼추 백 명은 되어 보일 정도였다.
그리고 그 군사들의 뒤로는 멀리는 영암에서부터 가까이는 남경에서 나를 따라온 이들을 포함한 개경의 대중들이 자리를 깔고 앉아 있었다.
물론 그런 이들 중간 중간에는 엿이니 하는 먹거리가 든 판을 어깨에 메고 장사를 하는 치들 역시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흥국사의 일주문을 둘러싸고 역시 군사들이 배치되어 있는데 그들은 더 이상 흥국사 안으로 사람들이 들어오는 것을 막고 있었다.
최의가 설명하길 너무 많은 이들이 모이면 자칫 사고가 날 것을 염려한 때문이란다.
그리고 그런 군사들의 배치를 보고서도 나야 그러려니 하고 말았지만 내 호위를 맡은 이는 군사들이 너무 많다며 불만과 걱정을 토로하기도 했다.
군사들을 제외하고 일반 대중들이 한 자리에 이리 많이 모인 것은 나 역시도 이 시대에 와 처음 보는 일이었다.
그리고 나는 이들 중 대부분이 나의 강론을 듣기 위해 모인 이들이 아니라 연등회나 팔관회가 아닌 또 다른 형식의 축제의 장에 참석한 것을 알고 있다.
아마도 마당에 자리를 깔고 앉은 이들 중 대다수는 소문이 퍼진 한울루스의 칸이라는 말에 그저 구경삼아 참석한 이가 대다수일 테니 말이다.
더구나 사람의 목소리의 한계로 인해 누군가 앞에서 아무리 떠들어도 진을 친 군사들을 넘어 소리가 전달되기는 어려울 것이 분명하다.
21C 고성능 음향시설을 갖춘 곳에서도 뒤에서 웅성거리는 대중들에게는 그 소리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으니 지금이야 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결국 나의 강론이라는 것은 내 뒤에 있는 고승들과 앞에 있는 조정 신료들을 대상으로 하는 강론이나 차이가 없다는 말이다.
물론 보통 사람이 했을 경우에 말이다.
그렇지만 오늘 이 자리에 앉아 있는 이가 누구인가.
바로 나인 것이다.
나는 내 목소리에 마나를 담았고 그래서 내 목소리는 내 바로 앞에 있는 세자나 대웅전 마당의 맨 뒤에서 엿을 팔기 위해 말을 걸고 있는 엿장수에게나 또 흥국사 담을 넘어 남대가에서 장사를 하는 장사꾼이나 그 장사꾼을 상대로 흥정을 하는 어느 집의 계집종에게나 똑 같은 정도의 크기로 전달이 되었는데 소리는 듣지 않으려고 해도 귀에 박히듯 들렸으니 사람들의 소란은 흥국사 넘어 남대가의 시전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남대가에서부터 웅성거리던 사람들은 이내 흥국사의 정문으로 몰려들었다.
일주문에서 사람들의 출입을 통제하던 군사들은 지나치게 몰리는 대중들로 인해 조금씩 뒤로 밀리더니 이내 대웅전 앞마당까지 밀렸고 그런 소란은 이내 세자를 비롯한 고려의 신료들 눈에 띄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바로 그 시점에 고려 사찰의 폐해에 대해 떠들기 시작했다.
승려들이 축재와 축첩을 하는 것의 부당함을 부르짖었고 사찰은 어느 개인이 것이 아니라 그 사찰을 출입하는 모든 대중의 것이 되어야 한다고도 말했다.
그리고 내 말에 대한 반응은 바로 내 뒤에 있던 고승들로부터 나오기 시작했다.
어느 고승은 그저 ‘끙’ 소리를 내며 자리의 불편함을 표했지만 다른 고승은 나를 제지하기 위해 큰 목소리로 나를 부르기도 했다.
그러나 나의 마나가 미치는 공간은 이미 나의 지배가 미치는 곳.
고승의 목소리는 그의 귀에나 들릴 뿐 누구의 귀에도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모습을 보면서 무언가 변고가 발생한 것을 느낀 세자와 조정의 신료들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고자 했다.
“모두 자리에 앉으세요. 아직 강론이 끝나지 않았습니다.”
강론 중에 뱉어진 나의 경고는 내가 강론을 하던 목소리와는 달리 일어나던 세자와 신료들을 다시 자리에 앉도록 하는 어떤 힘이 실려 있었는데 그 소리는 오직 자리를 털고 일어나고자 하던 이에게만 들려 군사들의 뒤에 있던 일반 대중들은 누구 하나 그 소리를 들은 이는 없었다.
그렇게 나의 강론은 계속 이어졌는데 엿장수는 엿을 파는 것을 포기하고 나의 말에 귀를 기울였고 남대가 시전의 상인들도 장사를 포기하고 나의 말에 귀를 기울였으니 내가 하는 말은 듣는 모든 이들에게 파문을 만드는데 성공한 것이다.
“부처는 어디 있는가?
도대체 누가 있어 절에 시주를 많이 하면 극락에 간다고 했단 말인가?
혹 그 말은 여기 뒤에 앉아 있는 중들이 한 말은 아닌가?
아니면 내 앞에 앉아 있는 고려의 신료들이 한 말은 아닌가?
또 극락은 어디에 있는가?
지금 내 뒤에 있는 중들은 삼처사첩을 거느리며 시줏돈으로 고리채를 놓아 그 곳간이 미어터진다고 하는데 하늘의 극락이 이 중이 사는 세상보다 낫다할 수 있겠는가.
있는지 확실하지도 않은 하늘의 극락을 얘기하는 중이 현실에서 극락에 몸을 담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보아라.
저 중이 현실에서 극락에 몸을 담고 있을지언정 그의 마음은 이미 지옥에 발을 들이고 있지 않느냐.
내 분명히 이르노니 삼처사첩을 거느린 자 중에서 극락에 갈 자는 없다.
백성들에게 고리채를 놓는 이 중에서 극락에 갈 자는 없다.
극락에 가는 자는 자신과 자신의 가족과 또 자신의 이웃을 사랑하는 이들 뿐이다.
배고픈 이웃에게 보리밥 한술을 건네는 이가 극락에 갈 것이요 목마른 이에게 물 한 모금을 건네는 이가 극락에 갈 것이다.
저기 내 뒤에서 살이 뒤룩뒤룩 찐 이른바 고승이라는 이가 극락에 발을 들이는 것은 돼지가 먹을 것을 사양하는 것보다 더 보기 드문 일인 것이다.
그러니 너희는 너희가 믿는 너희의 하느님을, 너희의 부처를 너희의 마음 안에 너희 스스로의 의지로 모셔야 한다.
결코 사찰에서 하느님이나 부처를 찾아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너희가 너희 스스로의 의지로 너희의 마음속에 너희의 하느님을 부처를 모실 때 그곳이 극락이고 또 그 마음이 너희를 극락으로 인도할 것이기 때문이다.”
내 강론이 대중들의 마음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듯이 내 뒤에 있는 그리고 앞에 있는 이들에게도 역시나 파문을 일으킨 것은 분명해 보인다.
내가 강론이 끝나면서 퍼져있던 마나를 거두어들이자마자 앞에서 뒤에서 연이어 일어난 이들이 나를 손가락질하며 욕을 하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아직 대중들이 흩어지지 않고 지켜보고 있는 중에 그런 짓을 할 정도로 흥분한 것이다.
그렇다고 그들이 대중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내게 어떤 위해를 가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강론은 끝이 나고 대중들은 각자의 길로 흩어졌음에도 나를 호위하는 호위대와 멀리에서부터 나를 따라온 이들은 나를 염려하며 흩어지지 않고 흥국사의 요사채를 철저히 지키고 있었다.
그리고 저녁이 되어 나를 따르던 무리들이 오늘밤만 사찰에 묵고 떠날 것을 내게 허락을 받은 후 공양을 위해 흩어지는 시점에 한 무리의 군사들이 흥국사로 아니 우리가 묵고 있는 요사채로 진입해 모두에게 몽둥이찜질을 한 것은 순식간이었다.
나를 호위하던 호위군은 모두 어디 한군데가 부러질 정도로 구타를 당했고 또 멀리서부터 나를 따라 예까지 온 이들 역시 온몸이 시퍼렇게 멍이 든 채로 상투가 잡혀 병사들에게 끌려갔다.
그리고 내 방으로 들어온 병사들에 의해 나 역시도 어디 성한 곳 하나 없이 온몸에 몽둥이찜질을 당한 후 어딘가의 옥으로 끌려가야 했다.
나는 옥에 앉아 과연 나의 죽음이 내가 불러온 화로 인한 것인지 아니면 본래 예정된 일인지를 가늠해 보았다.
아직까지 최항이나 최의가 내게 어떤 마수를 펼친 것으로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뭐 지금의 곤욕이야 오늘 내가 한 강론의 결과일지니 필연이지만 과연 그 강론이 없었다면 오늘의 곤욕을 피할 수 있었는지가 아직까진 애매모호한 것이다.
그리고 다음날 내 앞에 등장한 최항과 최의를 보고서야 나는 내 예감이 잘못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이것은 너희 둘의 생각이냐 아니면 고려의 왕실이 연관된 일이냐?”
“흐흐, 왜 고려의 왕실이 연관되었다면 대칸에게 고자질이라도 하게.
아마 너는 개경의 그 무지렁이들에게 크나큰 은혜를 입었다는 것을 모를 거야.
어제 그 무지렁이들이 사찰내로 진입만 하지 않았다면 너는 네 강론을 제대로 시작해 보지도 못하고 내 아들에게 질질 끌려 가 목이 댕강 떨어졌을 텐데 말이야.
나는 이미 예전부터 너를 아주 싫어했지.
아니 나뿐 아니라 나의 아버지 역시 너를 싫어했어.
그 언젠가 네가 고려로 왔을 때 서경에까지 만이라도 도착을 했다면 아마 그때 네 목숨을 내놔야 했을 거야.
아니 차라리 그때 목숨을 내놨다면 네 입장에서는 더 좋았을 지도 모르지.
그래도 구유크가 죽은 덕에 네 목숨이 늘어났으니 너는 죽어서 구유크에게 감사의 절을 해야 할 거야.“
“죽은 구유크와의 밀약을 말하는 것이냐?”
“오호! 그걸 알고 있었느냐?
그런데 이를 어쩐다.
너는 네 그 잘난 머리로 구유크와의 밀약은 알고 그 당시 몸을 피했을지 모르지만 몽케와 나와의 밀약은 알지 못해 오늘 이렇게 내게 사로잡히고 말았으니 말야.
아아, 걱정은 안 해도 된다.
나는 이미 몽골의 몽케와도 약조를 한 바가 있으니 말이다.
너를 죽인다고 해서 몽케가 우리 고려나 또 우리 우봉 최씨에 대해 어떤 제재를 가하지 않겠다고 나와 약조를 했으니 말이다.”
“그렇구나. 그래 언제 그런 밀약을 맺었느냐?”
“하하, 이제야 그걸 알아서 뭐하려고?
뭐 그렇지만 죽은 놈 소원도 들어준다는데, 내 말을 해 주지.
네가 뭐하느라 그랬는지 모르지만 네가 몽케의 대칸 취임식에 오지 않은 것이 아마도 너의 실책일 것이다.
그때 나는 이미 구유크와의 밀약에 대해 다시 몽케로부터 추인을 받았으니까.”
“호, 용케도 그 긴 시간을 기다렸구나. 내가 알고 있는 너는 그리 참을성이 있는 위인이 아닌데.”
“흐흐, 나도 그건 신기하게 생각해.
그렇지만 꼴보기 싫은 너를 반드시 내 손으로 제거하고 싶은 마음에 오늘을 기다렸지.
이렇게 몸이 불편한 데도 말이야.”
“흠, 그럼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겠구나.”
“하하하, 맞아.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어.
그래도 네가 죽는 것은 보고 죽어야 하겠지만.
어때? 내가 너를 어찌 죽일지 궁금하지 않나?”
“흠, 별로 궁금하지는 않지만 네가 말하고 싶은 모양이니 한번 들어나 보자.”
“허세는 여전하군. 속으로는 무서워 죽겠으면서.
나는 점심때쯤 흥국사의 주지를 찾아 다비식을 준비해 달라고 부탁할 것이다.
아주 대단한 이의 다비식이니 그 규모도 엄청나게 크게 준비를 해야 하겠지.
네가 영암의 산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었다는 소문이 내 귀에까지 들릴 정도니 대각을 이룬 이에 대한 다비식으로 말이야.
거기에 그런 위대한 이의 다비식에 순장하는 이가 없다면 얼마나 슬프겠나.
그래서 네 다비식에 맞춰 스스로 목숨을 바칠 이들 역시 꽤나 준비를 해 두었지.
물론 그런 이들에게 수고를 끼치게 하는 건 예의가 아니니 내가 직접 수고를 해야 하겠지만 위대한 이의 다비식이니 어쩌겠는가.
그리고 아마 흥국사의 주지 역시 네 다비식은 적극 찬성할 거야.
어제 네가 한 강론으로 인해 각 사찰의 노승들이 화가 많이 났거든.
아아, 이 말을 빼먹을 뻔 했네.
나는 위대한 이라면 당연 산 채로 다비식을 진행해야 한다고 믿고 있단 말이야.
그렇지 않나? 깨달음을 얻은 이라면 물이니 불이니 하는 것들이야 외물이니 당연 그것으로 인해 고통을 느낄 리가 없지 않겠어?
너 역시 깨달음을 얻어 위대한 이가 됐으니 당연히 몸에 불이 붙어도 아주 태연스럽지 않을까?
아! 네가 몸이 불타는 고통을 이길 수 없다면 어제 강론에서 한 말은 모두 네가 잘난 체를 하고 싶어 지껄인 말이라고 대중들 앞에서 자복한다면 뭐 단번에 목을 자르는 것으로 대체할 수는 있는데.
설마 그러지는 않겠지? 만약 그런다고 하면 나는 네게 무척이나 실망할 거야. 어때?“
“휴! 과연 나는 너를 실망시킬 수는 없겠구나. 기꺼이 나는 나의 다비식에 참석을 하마. 나는 이미 네가 본래부터 시기심이 강한 것을 알고 있었지만 네가 그 시기심으로 너 스스로를 파괴할 줄은 몰랐다. 그나저나 내 다비식을 볼 때까지 네가 살아있을지는 모르겠구나.”
“뭐, 이놈이 아직도 입은 살아가지고 망발을 거듭하는구나. 좀만 기다려라. 그렇게도 네가 원하니 최대한 시간을 앞당기도록 하마.”
추천은 작가에게 힘이 됩니다.
- 작가의말
내일 5월 19일에도 글을 올리겠습니다.
아마 내일로 고려제국사 1부가 완결이 될 듯 합니다.
그후 1주일 정도 쉬면서 자료를 찾은 후 5월 27일 월요일부터 2부를 시작하겠습니다.
2부의 제목은 고려제국사 2로 하겠습니다.
연재시간은 저녁 10시로 변경합니다.
착오없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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