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의 바람
오·탈자 지적을 바랍니다.
내가 변경을 다녀오니 이미 바다호와 대양호는 항해를 마치고 돌아와 다시 출항을 위해 나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이미 찬바람이 불기 시작한 것이다.
본래 압록의 하구에는 몇 개의 하중도들이 자리를 잡고 있다.
흔히 알고 있는 위화도도 그런 하중도고 그 외 21C 북한의 지명이었던 비단섬이나 황금평 등이 모두 그런 하중도인 것이다.
물론 21C처럼 퇴적물로 인해 그 섬들이 파속부로와 붙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지난번 파속부로에 부두공사와 연안 제방 공사를 하면서 나는 가까운 비단섬이나 황금평은 파속부로와 연결을 하도록 했다.
그 섬들과 파속부로의 거리가 먼 곳은 몇 리가 되지만 가까운 곳은 100여 m에 불과하니 가능했던 일이다.
물론 그 섬들에서 농사를 짓기 위해 한 조치다.
그렇게 연결을 하고 보니 자연스럽게 비단섬과 파속부로 사이의 공간이 천혜의 피항지가 되어 그곳에 부두가 자리를 잡았고 그에 따라 바다호와 대양호의 나루 역시 그곳으로 옮기게 된 것이다.
물론 그로 인해 호다다드가 파속부로의 시장으로 자리를 옮기에 된 것이고 말이다.
파속부로의 지명도 바꾸기로 했다.
전생에 쓰이던 단동丹東이라는 이름도 그 전에 쓰이던 안동安東도 또 고구려 때의 이름인 서안평도 모두 마음에 들지 않아 새로 이름을 짓기로 했다.
東이라는 말은 결국 중국 쪽에서 봤을 때 그렇다는 의미고 丹이라는 글에는 남쪽이라는 의미가 있으니 역시 그 글도 사용하기 싫다.
그나마 고구려가 쓴 서안평이라는 이름이 있지만 왠지 한울루스의 서쪽 경계를 이르는 의미로 들려 그 명칭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러다 근처에서 성터를 발견했는데 촌로의 말에 따르면 과거 고구려 때 박작성泊灼城이라 불리다가 고구려 멸망 후 봉황성이라고 불렸던 성터란다.
봉황이라는 이름을 쓰기는 그래서 결국 이곳의 지명을 박작이라 고치기로 결정을 지었다.
泊이란 배를 댄다는 의미니 지역과 어울리고 灼이란 불살라 기운이 성해짐을 뜻하니 이곳의 미래를 그리는 의미가 있어 무난하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오늘 나는 졸본을 떠나 이곳 박작시에 나와 있다.
부두 건너 비단섬에 넘실거리는 황금들녁을 보노라니 몇 년간 심혈을 기울여 모래와 물새들만 드나들던 압록의 하중도들을 개발하여 논으로 개간했던 기억이 스치고 지나간다.
이제 한울루스는, 아니 한울루스내 내 지배력이 미치는 곳은 어느 정도 식량의 걱정을 덜 정도로 생산력이 는 상태다.
더구나 볕이 잘 드는 곳은 모두 1년 2모작이 성공적으로 안착이 되었고 그렇지 못한 연길 등에서도 보리나 밀농사를 위해 대대적으로 농지개발을 했던 것이다.
그리고 작년 대양호가 시험항해를 마치고 마침내 대만으로의 첫 항해를 했는데 거기에는 고려인과 여진인 남성으로만 구성된 100 명의 남성과 1년 이상을 먹고 살 수 있는 식량 및 각종 농기구, 소를 비롯한 가축 등이 실려 있었다. 물론 선원들을 뺀 숫자다.
그리고 내가 변경에서 돌아왔을 때 대양호는 그들이 어느 정도 정착한 것을 보고 돌아왔다는 소식을 내게 전한 것이다.
그리고 다시 이번에 대양호는 작년에 떠났던 100 명의 남성들의 남아 있던 가족과 또 다른 100 가구의 사람들을 싣고 대만으로 떠날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새로 떠나는 그 100 가구의 가족은 모두 고려에서 내게 선물로 보낸 천민들, 그 중에서도 소所의 주민들로 대장장이를 비롯해 도공, 갖바치 등과 소의 주민은 아니지만 졸본에서 특별히 건설과 토목일에서 재주를 보였던 몇몇 사람들 그리고 마지막으로 최온의 가족이다.
최온은 특별히 내게 한 가지 지시를 받고 떠나는 것인데 그것은 최온 스스로가 원한 일이었다.
즉 그는 임시로 새졸본이라고 명명된 마을의 촌장으로 가는 것인데 그곳의 원주민들에게 한글과 한교를 가르치고 또 그들이 사용하는 말을 배우고 그것을 기록하라는 나의 지시를 받은 것이다.
일종의 선생이자 선교사이며 언어학자의 개념이랄까.
거기에 글과 한교를 가르치는 방법으로 나는 전생에 기독교가 동양에 와서 펼쳤던 선교방식을 알려주었다.
즉 학교든 교회든 건물을 짓고 그곳의 교육에 참여하는 이들에게 먹을 것을 나눠주는 방식 말이다.
더하여 나는 최온에게 원주민들의 아이들을 공략할 것을 주문했는데 아이들이 모두 고려말을 하고 한글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할 것과 그를 위한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약속을 해 주었다.
그래서 배에는 지난번과 달리 식량보다는 소금과 설탕을 상당량 실었는데 아마 이 소금과 설탕이 대만이 원주민들을 공략하는 상당한 무기가 될 것을 의심하지 않고 있다.
내가 바스라에서 올 때 보았던 대만의 원주민은 확실히 아직 문명의 초입에 있던 이들인 건 분명했다.
그들은 말은 있으나 글은 없고 청동제품은 어디선가 구했지만 아직 그것들을 만들 줄은 모르며 의복이라기에는 많이 부족한 가죽이나 갈대 등으로 만든 것을 두르며 살고 있고 집이라는 것도 아직은 움집의 형태였으니까.
그래서 대만으로 떠나는 이들에게 누누이 강조하고 주의를 준 것이 원주민들을 업신여기지 말 것과 싸우지 말 것을 당부한 것이었다.
물론 그런 일이 말 몇 마디로 사라질 것이라 보지는 않지만 지금은 다른 방도도 찾을 수 없으니 어쩔 수가 없다.
내가 졸본을 비우고 대만까지 가기에는 너무 먼 거리니 말이다.
그래서 나를 대리할 이로 최온을 정해 새졸본의 우두머리로 삼은 것이다.
최온은 그 성격이 진취적이기도 하고 또 나와의 대화를 통해 대만을 한울루스화한다는 것에 의견의 합치를 보았으니 말이다.
그리고 아마도 불과 몇 년 만 지나면 대만의 농업생산력은 폭발적으로 늘 거라 기대를 하고 있다.
아니 당장 이번의 대양호에도 식량을 싣지 않은 것으로 새졸본의 생산력을 짐작할 수 있다.
이곳에서 일단 천 가구만 새졸본으로 건너가도 그곳으로 이주하는 인구가 4~5천 명은 되는 인구일 것이고 그 정도면 제대로 된 하나의 마을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니 말이다.
그리고 여기 한울루스에서 철을 비롯한 여러 문명의 이기들을 꾸준히 공급해 준다면 그 인원으로 대만에서 하나의 새로운 부족으로 부상할 것이 분명하다.
그것도 대만 내에서 가장 강력한 부족으로 말이다.
그 뒤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렇게 고려부족 또는 한울루스 부족이라는 이름으로 부상한 이들이 대만의 원주민들을 노예화할는지 아니면 그들과 공생하며 고려나 한울루스에서 이탈해 별도의 국가를 건설할지 혹은 그도 저도 아니고 그저 대만 내의 소수민족으로 자리잡고 살는지 아직은 누구도 알 수 없는 일이니까.
그리고 나 역시 내가 한 일의 결과를 알 수 없을 테고 말이다.
‘아닌가? 내 육체가 죽더라도 내 영이 이 지구에서 어찌 될는지는 나 역시 모르니 알 수 없는 일이구나.
혹 내 영이 사라지지 않는다면 그래서 혹시라도 다른 이로 환생을 한다면 그때는 나는 내가 한 일을 알 수도 있는 일이긴 하지.’
대만으로 가는 대양호의 항해는 치기야가 맡아 하기로 했는데 치기야가 배를 타는 것은 아마도 이번이 마지막이 될 것이다.
나는 치기야에게 이번 항해를 끝으로 박작시에서 선박제조와 모든 배들의 관리를 맡도록 했는데, 이미 말타고 양치던 여진인 치기야는 사라지고 바람에 배를 맡기고 항해를 즐기는 뱃사람 치기야만이 남았는지 그는 내게 진한 아쉬움을 토로했다.
그렇지만 머나먼 인도에서 그를 따라온 쉬바니를 언제까지 1년의 7개월을 혼자 사는 여자로 둘 수는 없는 일이 아니겠는가.
그렇게 대양호를 떠나보내고 나는 졸본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에 열중이었다.
그리고 한울루스와 고려와의 관계가 원만하게 해결이 되면서 고려에서 졸본으로 유학을 오는 이들이 늘기 시작한 때가 바로 이 즈음이었다.
그것은 다르게 표현하면 고려의 귀족들, 특히 젊은 귀족들이 한울루스를 새롭게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즉 이제까지 고려가 북방의 나라들과 다툼이 생기면 그것은 반드시라고 할 정도로 힘으로 해결이 되는 것이 일반적인 수순이었다.
거란이 그랬고 여진이 그랬으며 최근의 몽골 역시 그 직전까지 갔었던 것이다.
아니 나라 축에도 끼지 못한다고 여기던 동하마저도 기마병을 끌고 와 고려에게서 식량 등을 얻어갔으니 고려에서 보는 북방의 사람들은 야만이고 오랑캐였던 것이다.
고려의 백성들이 북방의 사람들을 오랑캐라 업신여기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다.
그런데 처음으로 힘이 아닌 대화로 문제를 해결한 북방의 나라가 생겼으니 바로 고려와 천리장성을 두고 이웃하는 한울루스란다.
궁금하지 않다면 젊은이라고 할 수도 없을 것이다.
더구나 그 북방의 나라가 힘이 없는 것도 아닌 게 고려 중앙군인 2군 6위의 중추라고 할 중랑장이나 낭장들이 한때 한울루스와 전쟁을 한다면 군인전을 반납하고 한울루스로 가겠다고 한 말이 이미 개경의 귀족가에는 파다하게 소문이 난 상태였다.
그리고 사람이 입이라는 게 무서운 게 그 소문으로 인해 진양후와 그들 일파의 힘은 점점 궁지에 몰리기 시작한 것이다.
앞에서는 당장 진양후가 가진 병사들의 힘을 두려워하면서도 뒤로는 진양후를 일러 한울루스에게는 한마디도 못하고 겨우 칸의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사정사정해서 목숨을 연명하고는 고려의 황제에게나 버릇없이 구는 철면피라고 하는 소리를 하는데 아무리 본인만 모르는 게 소문이라고 하지만 그 소리를 진양후가 모를 리가 없는 것이다.
힘이라는 건 창·칼에서 나오지만 권위라는 다른 종류의 힘은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것이다.
개경의 귀족들이 뒤로는 진양후를 헐뜯으니 지방의 수령들 역시 진양후의 명을 제대로 따를 리가 없는 것이다.
그 단적인 예가 평양에서 의주로 이어지는 도로에 대한 일이다.
진양후는 서북면의 수령들에게 혹시라도 한울루스가 다른 북방의 나라들처럼 약속을 어기고 군사를 이끌고 내려올 수 있다며 주의를 주었지만 그 주의를 받은 서북면의 수령들은 서경의 상인들이 뭉쳐 찔러주는 뒷돈을 받고 백성들을 부역에 동원해 평양에서 의주까지 마차가 다니기에 충분한 길을 내는데 열심이었던 것이다.
이는 사실 최초 이광수의 수작질로 인한 것이었다.
이광수는 뻔질나게 졸본을 드나들면서 졸본에서 말 두 마리가 끄는 수레에 의해 많은 물건들이 이동되는 것을 수시로 목격했다.
저 요양쪽에서는 철광석이나 화탄이 수시로 졸본으로 이동했고 또 의주에서 한참 위에서는 석회석을 실은 마차들이 내려와 예의 그 고구려다리를 건너 졸본으로 가는 모습 또한 보았던 것이다.
그런데 반면 자신은 고려에서 물건을 사더라도 그것을 제 머슴이나 혹은 삯을 주고 산 사람을 통해 이고지고 서경까지 옮겨야 했으니 그 심정이 오죽하랴.
말을 사고 또 마차를 사는 것이야 큰돈이 드는 일이지만 단 한번만 돈을 쓰면 그 뒤로는 돈을 쓸 일이 없는 일이다.
그런데 자신은 매번 졸본에서 짐들을 이고지고 서경까지 와야 하니 거기에 들어가는 비용이 끊이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장사꾼인 이광수 입장에서 이것은 돈이 줄줄 새고 있다는 뜻인 것이다.
결국 이광수는 서경의 상인들을 모아 이 문제를 의논했는데 별 뾰족한 수단은 찾지 못했다.
상인들이 길을 낼 수는 없는 일이니 말이다.
그런 차에 이제는 서경에서도 그 화탄의 수요가 늘기 시작했다.
그것은 서경의 대장간에서 목탄이 아니라 화탄을 쓰면서 시작됐다.
처음에는 대장간에서만 화탄을 원했지만 내가 각 가정의 연료용으로 졸본에 선 보인 조개탄을 보고는 한 번 두 번 사용해 본 서경의 상인들이 차츰 조개탄에 길들여지기 시작한 것이다.
당연 수요가 늘기 시작했다.
당연히 수요가 생겼으니 공급이 따라야 하지만 한반도의 광산들은 노천광산이 아니니 광맥을 찾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지만 혹 찾았더라도 그것을 캐는 것은 또 다른 커다란 난관이었다.
그리고 돈 계산에서 따를 수 없는 상인들이 해 본 저울질로는 요양에 가서 화탄을 캐 서경까지 이동하는 게 광산을 개발해 캐는 것보다 싸게 먹힐 수 있겠다는 생각이었다.
다만 그것은 한울루스처럼 마차를 동원해 화탄을 운반할 때지 사람이 이고지고 날라서는 택도 없는 일이라는 점이다.
이 당시에는 아직 산에서 무언가를 캐 가지고 오는 것에 대한 죄의식이라는 건 없던 시절이다.
요양에 화탄 광산이 있어 네가 캐면 나도 캘 수 있다는 생각인 것이다.
캐는 노력에 대해서는 값이든 삯이든 치러야 하지만 하늘이 내려준 산에서 누구나 캘 수 있는 것은 네가 캐면 나도 캘 수 있다는 생각이니 상인들 입장에서 서경에서 요양까지 길만 난다면 그 마차를 동원해 옮기기만 하면 돈이 되는 일인 것이다.
이러니 상인들 입장에서 이미 길이 나있는 한울루스 영역을 제외한 서경에서 의주까지만 길을 내는 일을 못 본 척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 문제가 대두되자 이광수를 비롯한 서경의 상인들이 꾀를 내었다.
즉 각 고을의 수령들에게 뇌물을 건네고 백성을 동원해 길을 내도록 한 것이다.
아마도 진양후의 권위가 멀쩡했다면, 또 고려황제의 권위가 살아 있었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진양후의 권위가 개경에서부터 무너지기 시작했으니 지방의 수령들이 말을 들을 리가 없다.
더구나 고려황제의 권위는 이미 바닥이었고 말이다.
서경에서 의주까지의 길이 그렇게 고려의 도읍인 개경이 모르는 새에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심지어 상인들은 내가 캐던 석회석 광산에서 석회석까지 캐다가 도로공사에 사용했는데 세상에 가장 무서운 존재가 바로 상인인 것이다.
그리고 아직 개경에서도 등장하지 않은 이두마차가 서경에 등장해 그 길을 따라 졸본으로 요양으로 다니게 된 것이다.
추천은 작가에게 힘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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